#641
1.
“제법이군. 검의 마녀.”
반말은 괜히 했나?
이런 생각이 뒤늦게 뒤통수를 때렸다.
뻔하디뻔한 흑막 같은 대사는 좋았던 것 같은데 너무 분위기를 타버렸다.
변명을 하자면 이 연기는 쪽대본 하나 없는 풀 애드립.
마음과 설정의 준비가 모두 부족했던 탓이다.
하지만 엎질러진 물이라는 건 변함없다.
린네는 시우를 ‘시컴한 야망을 숨기고 강함을 추구하는 남자 마녀’정도로 인식하고 있다.
여기서 어물쩍거리며 존대로 변경했다간 캐릭터 성이 붕괴해버리고 만다.
“그래서 날 여기에 데려온 건가?”
자연스럽게만 하자,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새기며 은근한 질문을 던졌다.
그리곤 아주 사소한 단서도 놓치지 않기 위해 신경을 바짝 곤두세웠다.
그녀가 이곳에 시우를 데려온 목적을 밝혀내는 게 가장 우선되는 과제다.
중요한 정보를 얻을 기회이자, 대답 여하에 따라 앞으로의 계획을 설정해야 할 테니.
하지만.
“…….”
린네는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빤히.
무서울 정도의 무표정을 한 채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시우를 응시하고 있었다.
실패했나?
아니면 반말을 괜히 했나?
저도 모르게 침을 삼킬 뻔했다.
목울대가 움직이면 더욱 수상쩍어 보일까 필사적으로 참고 시선을 고정한다.
“이상하다.”
연홍빛 입술이 달싹인다.
“역시 이상하다.”
두 번이나 의혹이 반복된 시점에서 시우는 단정했다.
들켰다.
딱히 들켰다고 당장 좆되는 건 아닐 테지만 은근슬쩍 거리감을 좁히는 작전이 실패했다.
그냥 존댓말로 할걸.
역시 반말을 했던 것이 어색함의 단초가 된 듯하여 마음이 아프다.
“원래 그런 말투라니. 표정도 분위기도 아주 훌륭한 가면이다.”
라고 생각했을 때 일어난 반전.
믿을 수 없었다.
방금 저게 감탄하는 표정이었다고?
그래, 눈이 조금 덜 깜빡이긴 했다.
그러나 눈썹조차 미동하지 않았던 표정이 나름 놀라움의 표시라는 게 더 놀랍다.
“방, 방심을 유도하려면 제격이지.”
가슴을 쓸어내린 시우는 적당히 분위기를 탐색했다.
정보가 적은 상황에 먼저 입을 열어 좋을 건 없다.
한참동안 같은 표정으로 시우를 바라보던 그녀는 결국 ‘왜 여기로 데려왔는가?’에 대한 답을 주지 않았다.
“내일 묘시까지 연무장으로 와라. 향월루 밖으로는 나가지 말도록.”
다만 저렇게 말한 뒤 시선을 돌리고 재차 검을 뽑아들었을 뿐이다.
변변한 정보도 커뮤니케이션도 하지 못했지만, 지금은 호랑이굴에서 살아온 것에 만족하자.
오늘만 날이 아닐 테니 말이다.
2.
연무장 밖을 나서자 저만치 복도 끝에서 걱정스러운 눈빛을 한 예빈이 보였다.
빨리 오라는 듯 손짓을 하기에 근처로 다가가자 작은 목소리로 묻는 예빈.
“어때요? 무슨 일이에요? 별일 없었죠?”
“네, 아쉽게도 변변한 정보는 못 얻었네요.”
“하아….”
그녀는 가슴 앞에 손을 모으며 작게 한숨지었다.
한숨 고비를 넘겨서 그런지 그제야 그녀의 가슴에 눈이 간다.
종종 그녀와 보냈던 뜨밤이 떠오르곤 했는데 실물을 보니 ‘맞아, 원래 저렇게 커다랬었지’ 싶다.
또 그녀가 은근히 마조히스트라는 사실까지 떠올렸지만, 일단은 접어 두었다.
그렇게까지 마음이 느긋하진 않다.
“우선 제 공방으로 가요.”
예빈은 시우의 소매를 살짝 쥐고 안채 쪽으로 향했다.
“이렇게 막 돌아다녀도 괜찮은가요?”
“별다른 말이 있었어요?”
“아뇨, 향월루 밖으로 나가지 말라고만…. 향월루가 이 저택 맞죠?”
“네, 평소에도 담장 밖으로만 나서지 않으면 자유롭게 돌아다녀도 신경 쓰지 않으니까 괜찮을 거에요.”
마력의 사용에 제한을 두지 않는데다가 저택 내부에서 자유로운 이동을 보장 받는 다라….
여태 감금 환경 중 가장 자유롭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당장 이곳을 탈출할 뾰족한 수가 생기는 건 아니었지만 말이다.
“여기에요.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그녀는 양해를 구한 뒤 먼저 방 안에 들어갔다.
한참이나 투닥투닥 거리는 소리 이후에야 스르륵 문이 다시 열렸다.
변명하듯 눈을 피하며 말하는 예빈.
“청소를 안 해놔서요….”
“아마 제 방이 더 더러울 겁니다.”
적당히 너스레를 떨어주고 공방에 들어섰다.
이거 꽤 기묘한 광경이다.
격벽을 위로 올려 방 3개쯤을 하나로 틔운 넓은 방.
그 안에는 한약 냄새를 풀풀 풍기는 주머니들이 주렁주렁 천장에 매달려 있었으며, 동시에 연구실에서나 볼 법한 투명한 플라스크와 비커 따위가 탁상 위에 줄을 짓고 있었다.
동서양 문화의 기묘한 콜라보라고 해야 할까.
청소를 하지 않았다는 게 거짓말은 아니었는지 급하게 구석으로 쑤셔 넣은 티가 역력한 잡동사니가 보인다.
이부자리도 일어난 그대로 내버려둔 상태라 난잡한 느낌이다.
“원래는 이것보다 깨끗하게 살거든요.”
“하하….”
쑥스럽다는 듯 뺨을 긁는 예빈.
전에도 느꼈던 익숙한 편안함이 온갖 사건으로 긴장했던 몸과 마음을 풀어주었다.
이것이 동향 사람의 힘인가 보다.
“그러고보니, 검의 마녀는 저희가 구면인 걸 알고 있나요?”
“아니요, 딱히 말하진 않았지만…. 아마 금방 알아차리지 않을까요?”
여유롭게 대화를 나누고 싶은 마음도 있다.
하지만 집주인의 눈을 피해 한가로이 대화를 나눌 시간이 얼마나 있을지 모르는 상황.
최대한 많은 정보를 공유해야 하는 때이다.
예빈도 그 점에 대해서는 선뜻 동의해 주었다.
“저야…. 현세에 약을 구하러 나갔다가 잡혀 와서요. 몇 개월 동안 여기 구류된 상태에요.”
먼저 오랜 시간 머물렀던 만큼 정보량이 많은 예빈이 입을 열었다.
시우가 깨어나자마자 설명들었던 대로 헥센나흐트는 공적의 도시.
추방자와 공적의 수가 도합 네자릿수에 달하며 그중 1%가량은 대마녀라고 한다.
또한 현재진행형으로 입주자가 불어나는 중이며 대다수가 공방을 아예 옮기기보다는 당장 안전을 찾아 임시 공방을 도시 안에 개설했다고.
잡혀 오는 동안 한번 밖에 보지 못했지만 오직 ‘문’을 통해서만 출입이 가능하다고 한다.
“문이요? 그건 케테르 공작의 마법 아닌가요?”
“네, 하지만 흉내를 낸 정도일 거에요. 이 도시가 완벽하지 않은 주머니 공간인 건 확실해요.”
예빈은 잠깐 말을 멈추더니 창밖으로 보이는 하늘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 도시에는 밤만 있거든요. 그리고 언제나 초겨울쯤의 계절이에요.”
“어쩐지 춥더라니….”
그 한마디면 충분했다.
작은 장모님의 가르침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대단한 마녀들이 모였다고 해도 게헨나처럼 사계와 밤낮, 날씨까지 완벽히 구현된 주머니 공간을 만드는 것은 어려웠을 터.
그러니 어항처럼 ‘겨울’과 ‘밤’이라는 제한된 시간대를 설정해 제작 난이도를 낮춘 것이리라.
아마 날씨에도 변화가 없겠지.
이 짧은 문답으로 벌써 탈출에 관한 중요한 정보를 얻었다.
시우는 일찍이 게헨나 탈출을 위해 차원마법을 연구했던 적이 있다.
시민권이 생기고 난 뒤엔 괜히 연구해 사용해봐야 불법 입출국으로 벌금 물게 될 상황이니 잠시 동결했었지만, 얼마 전 붉은가지를 아쿨라로 불러들이며 부분적으로 성공했다.
그때의 감각도 기억하고 있다.
게헨나보다 조악한 결계를 지니고 있는 주머니 공간이라면 차원이동식을 통해 탈출 방법을 마련할 수 있지 않을까?
“그나마 다행이네요.”
“네?”
“아닙니다, 계속해주세요. 검의 마녀에 대해서도 말씀해 주시겠어요?”
“검의 마녀는….”
이어 연결된 설명은 린네에 대한 것.
정말 여태까지 보이는 그대로의 마녀였다.
여타 공적이 마법을 위해 뭐든지 한다면 그녀는 ‘마법’자리에 ‘강함’을 넣으면 되는 마녀였다.
그렇다면 그녀가 시우를 데려온 이유도 어느 정도 설명이 된다.
시우를 ‘동류’라 칭하던 자신과 같은 이상을 추구하는 인물로 생각했겠지.
더불어 내일 새벽 일찍 약속 장소가 연무장으로 되어있는 것을 보면 아마도 대련 상대일 것이다.
마녀 중에 근접전을 사용하는 마녀는 드물며 무예를 갈고 닦은 마녀는 더더욱 드물다.
가장 효과적으로 검술을 향상하는 방법이 같은 무도가와의 대련이라는 걸 미루어 볼 때 이 가설에 확신이 더해진다.
“그리고, 굉장히 무뚝뚝한 사람이에요. 대화도 거의 해본 적 없고, 솔직히 좀 무서워요.”
“주로 어떻게 시간을 보내나요?”
“대부분 시간은 연무장에서, 나머지는 다실에서 있는데 뭘 하는지는 직접 본 적은 없어서 잘 모르겠어요.”
“외출 빈도나 시간은요?”
“상당히 불규칙해요. 2~3일씩 집을 비우는 일도 있고 2시간 만에 들어오는 때도 있어요.”
요약하자면 예빈조차도 사적인 접촉은 거의 없다는 말이다.
추가로 말은 무섭게 해도 당장 해를 끼치지는 않는다는 것.
수면이나 식사를 하지 않는다는 것까지 알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는 고급 중식집 이름 같은 이 ‘향월루(向月楼 )’에 관한 것.
“사용인이 한 명도 없다고요?”
“네, 헥센나흐트는 아직 게헨나처럼 체계가 잡힌 도시가 아니잖아요. 선착장 노역과 마법 실험용을 제외하고는 아직 인간을 들이지 않은 것 같아요.”
“상당히 시간이 비네요.”
“네, 같은 마녀가 저택을 방문하는 것도 이제 겨우 두 번 정도였어요.”
자유롭게 보장되는 개인 시간, 탈출 마법, 헐거운 감시의 삼박자.
최악을 상정했던 때에 비하면 상황이 한결 좋다.
오히려 탈출한다는 목적 이외의 다른 수확을 얻어갈지도 모른다는, 자칫 자만에 가까운 발상이 떠오를 정도다.
앞으로 이 도시가 트러블의 묘판이 되리란 것은 불보듯 뻔하다.
게헨나보다도 입출국 심사가 까다롭다는 이 헥센나흐트의 내부 정보 같은 건 직접 잠입하지 않고서야 손에 넣을 수 없니.
어찌보면 스승님께 큰 도움이 될 수 있는 소중한 기회였다.
아무튼 예빈에게 들은 정보와 직접 알게 된 몇 안 되는 정보를 버무려 ‘현재 캐릭터 설정’ 그리고 주의사항을 말해주었다.
검의 마녀가 이곳에 시우를 데려온 이유.
그에 맞춰 시우가 어떤 식으로 행동할 예정인지.
그리고 가장 중요한 사항.
“성교 시 마력 증폭만큼은 들켜서는 안 됩니다.”
예빈의 눈이 잠깐 동그레졌다가 다람쥐처럼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시우가 남자 마녀라는 자체로 연구 가치가 있다면, 마력 증폭 및 충전 기능은 따로 연구가 필요 없는 직관적인 능력이다.
가뜩이나 위험한 입지를 자칫 최악으로 만들 수도 있는 만큼 그것만큼은 감출 예정이었다.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자니 빤히 옆얼굴을 바라보는 예빈.
“뭔가요?”
“아니, 뭐랄까…. 조금 대단해서요.”
“네?”
“사실 전 처음 잡혀 왔을 때 완전 패닉이라…. 거의 일주일 동안은 울기만 하고 아무것도 못 했거든요. 그런데 시우 씨는, 뭔가 의지가 되네요.”
“그런 건 딱히 아닙니다.”
아니나 다를까 듣는 쪽이 더 머쓱해지는 칭찬이었다.
예빈의 말처럼 대단한 건 아니다.
언제나 발버둥치다 보니 얻게 된 ‘여기서 더 좆되기야 하겠어’ 마인드일 뿐.
처음엔 쫓기듯 진행된 대화였지만 막상 내일 묘시까지는 시간이 넉넉히 남았다.
예빈과 시우는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간단한 담소를 나누며 안개처럼 깔린 불안함을 달랬다.
그렇게 희망이 움트던 시우의 헥센나흐트 입성기는 다음 날 비정한 현실 앞에 산산이 조각났다.
검의 마녀는 미친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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