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0
1.
“하아~ 매일 매일이 오늘만 같았으면….”
골칫덩어리인 사위를 현세로 내보낸 뒤 알비레오는 유독 밥맛이 좋았다.
그동안 말썽꾸러기 사위 탓에 어찌나 내외로 시달려왔던가?
머리로 이해하는 것과 마음으로 이해하는 건 전혀 다른 문제다.
쌍둥이가 몰래 저택을 빠져나가는 것만 해도 속이 부글부글 끓었는데 이제는 철없는 데네브까지 얽혀 있는 상황.
그것도 모자라 아멜리아며 샤론이며 심지어 티페레트 공작까지 오순도순 러브라인을 구축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면 저도 모르게 열불이 치솟았던 것이다.
물론 그가 현세에 나가 있다 해서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되는 건 아니다.
하지만 온갖 고뇌와 상념을 안겨주던 사위가 눈앞에 알짱거리지 않는 것만으로 달달한 휴가와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시녀장 갈리나가 들어와 편지를 건네주었다.
“급보요?”
“예, 큰 주인님. 위치포인트로부터의 편지입니다.”
“네, 수고 많았어요. 돌아가 보세요.”
모처럼 한가로운 오후의 티타임이었는데 이렇게 방해를 받는다니.
알비레오는 못마땅해 하면서도 대수롭지 않게 봉투의 봉인을 뜯고 편지를 펼쳐 들었다.
“하여간 왜 다들 날 못살게 굴어서 난리인지.”
최근 현세는 혼란스럽기 짝이 없고 가지각색의 문건이 분별없이 급보라는 딱지를 붙이고 제머나이 백작가로 날아들곤 했다.
그걸 하나하나 확인하는 것도 일이었기에 조만간 편지를 선별할 마녀를 구할 셈이었다.
그렇게 심드렁하게 편지를 훑던 알비레오.
-쨍그랑!
찻잔이 깨졌다.
알비레오가 놓친 찻잔이 그녀의 치마를 흥건히 적시고 바닥에 나동그라졌지만, 그런 사소한 문제를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급보는 티페레트 공작에게 온 것이었다.
첫 줄부터 적혀있는 문장은 ‘신시우가 공적에게 납치되었다’는 사실.
“또?!”
나머지 내용을 간추리자면 다음과 같다.
해당 사건에 관여한 것으로 추정되는 공적은 침묵의 마녀, 검의 마녀, 시체의 마녀.
그중 시체의 마녀는 티페레트 공작이 손수 토벌한 것으로 되어 있었다.
그녀 자신은 곧장 추적에 돌입했으며, 면목이 없다는 사과와 함께 협조를 부탁한다는 짧은 내용.
“…아.”
알비레오는 눈앞이 캄캄해짐을 느꼈다.
당최 어떤 경위를 거쳤기에 공작과 함께 있었음에도 재주 좋게 홀라당 잡혀갔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시우가 현세에 나간 이유는 명확했다.
사실 누켈라비는 그 기부금을 자력으로 헌납할 수 있을 만큼 충분한 재력을 갖추고 있었다.
그럼에도 알비레오가 기부금을 준비하라는 명목으로 그를 내쫓았다.
이미 행복한 하렘생활을 만끽하고 있는 것도 모자라 심해의 마녀를 데려온 사위가 시민권을 요구하는 것에 열불이 뻗쳤으니 말이다.
명목은 사위로 들이는 시험의 일종이지만 어디까지나 화풀이에 불과한 것.
알비레오의 공연한 화풀이는 신시우의 납치라는 끔찍한 결론으로 되돌아왔다.
손끝이 떨렸다.
불과 몇 달 전 그는 데네브와 함께 실종되었던 적이 있다.
그때도 나름 마음고생을 했던 알비레오지만 지금은 상황이 한결 더 심각하다.
그를 잡아간 검의 마녀는 클리포트의 공적.
알고보니 조금 덜떨어진 어린 마녀였던 심해의 마녀와 달리 그녀는 의심할 필요 없는 위험분자이다.
그 새파란 검날 아래 사라져간 목숨만 몇이던가?
게다가 이 모든 원인을 제공한 것이 실은 알비레오라는 이 상황.
“자칫 잘못되기라도 한다면….”
여러 사람에게 얼굴을 들 면목이 없다.
알비레오는 즉시 몸을 일으켰다.
2.
“시간은 별로 없을 거에요. 곧장 가야 하니까요. 그러니까 잘 들어주세요.”
“네? 네.”
솔직히 아직 경황이 없었다.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건 수묵화처럼 흐리게 흩어지던 풍경 속에서 가차 없이 목을 향해 날아오던 검이었으니.
어째서 아직도 살아있으며, 이 고급 료칸 같은 방은 또 무엇이며, 행방이 묘연했던 예빈이 눈앞에 있는지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는 의미다.
반가움이 가득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수심이 짙은 표정을 지으며 시우의 첫 경험을 받아갔던 예빈은 빠르게 말을 이었다.
그녀의 말을 간추리자면 다음과 같았다.
여기는 헥센나흐트, 새롭게 만들어진 공적의 도시.
그리고 시우는 예빈이 그렇듯 검의 마녀에게 납치되어 붙잡혀 오게 되었다는 것.
심지어 이번엔 어항이나 잠수함처럼 고만고만한 장소로 납치된 것도 아니다.
무려 공적의 도시.
심지어 위험하기로 악명 높은 클리포트 최정예들까지 똘똘 뭉쳐있는 마의 도시다.
가뜩이나 전설의 포켓몬으로 언제 무슨 취급을 당할지 모르는 처지에서 이것보다 불안한 게 없다.
“예빈 씨는 그렇다쳐도…. 저는 왜 납치한 거죠?”
적어도 시우가 살아있다면, 그것도 알뜰한 응급처치와 살뜰한 치료까지 받게 두었다면 목숨을 빼앗아 가는 게 목적은 아닐 터다.
“그걸 모르겠어요.”
고개를 가로저은 예빈은 한 가지를 덧붙였다.
“하지만 이건 꼭 기억해주세요. 검의 마녀는 굉장히 위험한 마녀에요. 들어보셨나요?”
“아뇨.”
“강해진다는 이유로 온갖 마녀에게 검을 휘둘러온 마녀에요. 일단 그녀의 말을 거스르지 마세요. 협조적으로 나온다면 해코지를 하려 들지는 않을 테니까요.”
“명심하겠습니다.”
“더 말씀드리고 싶은 건 많지만, 곧장 연무장으로 안내할게요. 깨어나자마자 데려오라 했으니까요.”
대화는 짧았다.
애초에 어떤 감시가 취해지고 있을지 모르는 상황에서 그에게 이만한 설명을 해준 것도 예빈에겐 위험을 감수한 일이었다.
시우는 그녀의 뒤를 따라 복도로 나섰다.
교토 느낌 물씬 나는 풍경을 보고 상황에 어울리지 않게 감탄했다.
누워있던 방에 깔린 다다미를 보며 대충 예상은 했지만, 정말 일본식 고택이었다.
한 쪽으로는 나무 살에 종이를 발라 벽과 창을 겸하는 쇼지(障子)가 주르륵 나열된 한편, 맞은 편으로는 자갈이 깔린 정원이 조용히 타오르는 석등 아래 빛난다.
그러고보니 검을 맞댔던 검의 마녀는 동양계 마녀였지.
이런 취향의 인테리어가 선뜻 이해되었다.
중정을 거치자 보이는 건 굳게 닫힌 나무문과 그 위에 음각된 삿갓 모양의 문양.
복도를 나선 뒤로는 혹시 몰라 입을 다물고 있던 예빈이 나지막이 충고했다.
“조심해요.”
시우는 고개를 끄덕이고 연무장의 문을 열었다.
양식 자체는 옛것이지만 정작 만들어진 지는 얼마 되지 않은 건물이다.
그 덕에 목제 문은 소리 없이 부드럽게 열리며 그 뒤의 풍경을 비추었다.
검의 마녀.
그녀는 검을 쥔 채 하품이 나올 만큼 느린 속도로 내리긋고 있었다.
일전 시우가 기본기를 다질 때 한창 따라 했던 명료한 검로를 갈고닦는 수련법이기도 했다.
정확히 같은 타이밍 같은 속도로 같은 움직임을 보이는 겉보기엔 단순한 수련이지만, 그 난이도는 생각보다 높다.
정확히 같은 동작을 반복 수행하는 건 신체 말단까지 완벽한 통제가 가능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녀의 동작을 눈으로 좇았다.
스승님과는 또 다른 느낌의 검로이다.
작은 체구에서 뱀처럼 길게 뻗는 참격.
사방에서 휘감겨 드는 찐득한 검로.
그런 와중에 사각을 파고드는 날렵한 움직임.
시우도 나름 무술의 대가였기에 제법 자신했던 근접전에서의 완패가 이해갔다.
저 검무만 보아도 알 수 있다.
린네는 기술 자체만 놓고 보자면 스승님에게도 전혀 뒤처지지 않는 무예의 대가였던 것이다.
한차례 느릿한 검무를 끝내고 납도한 린네는 그제야 서늘한 시선을 던져왔다.
“나가라.”
시우가 아닌 예빈에게 올곧게 향하는 시선.
흡사 칼에 찔리는 듯한 그 눈길에 예빈은 움찔 몸을 떨었다.
어지간하면 곁에 있을 생각이었다.
그가 어떤 일을 당할지도 모르고 여차하면 도와줄 수 있으니 조금은 고집 부려볼 예정이었다.
그러나 함께 지내며 보았던 무심한 눈동자는 이미 없다.
신시우를 보는 순간 뜨거운 격정에 휘몰아치는 소용돌이가 살벌한 위압감을 뿜으며 텅 비었던 자리를 대체하고 있었다.
“괜찮아요. 가세요. 이따 뵐게요.”
시우는 슬쩍 그 시선을 가려주며 예빈의 앞에 섰다.
“…….”
“…….”
몇 시간 만에 다시 마주한 두 사람.
비록 붉은가지는 없다지만 지금 시우에겐 아무런 제약이 걸려있지 않았다.
싸움을 재개할 충분한 여력이 있는 것이다.
텅 빈 마력도 거듭 증폭으로 충전한다면 가능할 터.
여기서 그녀를 쓰러뜨리는 게 가능할까?
시우는 내심 고개를 가로저었다.
붉은가지는 큰 전력의 일부분이다.
더군다나 최후의 격돌을 떠올려보면 이 상태로 그녀를 이기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설령 천운이 따라 그녀를 죽인다고 해도 당장 이곳은 ‘헥센나흐트’, 적지의 한복판이다.
그녀의 반응과 목적을 살피고 후일을 기약해도 늦지 않다는 것이다.
하지만 무슨 말로 대화를 시작해야 할지….
“강해지기 위해서라면 무엇도 주저하지 않는다.”
린네는 별안간 혼잣말을 시작했다.
한 치의 빈틈도 없는 시선은 여전히 시우를 향하고 있었다.
“힘을 얻기 위해 싸우고 투쟁한다. 그 외의 것은 무의미한 침전물이며, 더 높은 경지를 밟기 위해 무의미한 곁가지를 쳐낸다.”
누구에게 하는 말인가 싶은 뜬구름 잡는 소리로 대화는 시작되었다.
“내면의 비정함, 드높은 향상심, 자신보다 강한 자를 보면 굴복시키고자 하는 투쟁심. 그 이외에는 아무런 가치를 두지 않는 다라…. 그래, 너는 나와 닮았다.”
“……?”
본인 소개를 멋들어지게도 하는구나 싶어 지켜보고 있었는데 끝맺음이 이상하다.
네? 제가요?
라고 말하고 싶은 걸 참았다.
시우는 싸우는 것보다 침대에 누워있는 게 좋았고, 마법을 연구하는 것도 일신의 안전 확보와 연구자 특유의 학습 욕구 때문이지 강함 그 자체에 깊은 관심을 두는 건 아니었다.
그런데 ‘너는 나와 닮았다?’라….
전혀 공감할 수 없는 말이었다.
“좋은 자세다. 되려 허술한 의태라면 얕잡아보는 상대에게 불의의 일격을 선사할 수 있을 것이다.”
점점 알 수 없는 말을 지껄이는 린네.
“허나 내겐 감출 필요 없다.”
그녀의 주위로 마력이 흐른다.
사물의 윤곽선이 흐려지며 그 틈새로 색이 흘러나온다.
최후의 일격을 가할 때 그녀가 선보였던 자성 마법.
흑백세계다.
전투인가 싶어 자세를 바로 한 시우였으나 전과 달리 힘의 범위가 린네의 주변부에 그쳤다.
그 안에 빛나는 건 모든 것을 꿰뚫어보는 듯한 린네의 눈.
가슴이 푹 찔리기라도 한 것처럼 옴짝달싹할 수 없다.
“이 심안엔 가면으로 가려진 너의 본성이 보인다. 강함을 향한, 두려울 만큼 순수한 집착이.”
그녀가 마력을 걷자마자 색을 잃었던 주위 풍경이 본래 모습을 되찾았다.
“아….”
시우의 머리가 팽팽 회전했다.
처음엔 헛소리를 하는구나 싶었던 시우도 마침내 그녀가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알아차렸다.
린네는 심안인지 뭔지 하는 특유의 능력으로 시우의 본성을 보고 있는 것이다.
단, 너무도 깊게 들여다본 나머지 시우가 아닌 영 이상한 놈의 본성을 보고 있다.
그 마법을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것 같은, 무의식에 갇힌 뒤에도 마법만을 갈고 닦던 흑기사의 본성을 보고 있다면 저렇게 말하는 것도 이해가 간다.
번갯불 같은 영감이 스쳤다.
그녀는 지금 착각을 하고 있다.
시우가 자신과 동류라고, 혹은 이해관계가 일치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여기선 '엥? 그거 저 아닌데요'라고 말하는 건 하책이다.
이 착각을 유리하게 이용할 수만 있다면 사면초가인 현 상황에 활로를 놓을 수도 있을 터.
여기서 중요한 건.
오직 연기 실력뿐.
“하하하.”
상황에 전혀 맞지 않는 메마른 웃음이 터져 나왔다.
공적 느낌을 살리려다 보니 컨셉을 좀 과하게 잘못 잡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제법이군. 검의 마녀.”
어느덧 시우의 입꼬리에는 싸구려 악역 같은 미소가 담겨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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