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녀의도시-639화 (639/917)

#639

1.

신시우.

마녀 역사상 최초로 자성마법을 만들어 낸 남자 마녀.

노예의 신분으로 제머나이 백작가의 견습마녀를 공적으로부터 구해냈음.

메리골드 남작의 짝사랑 상대.

마녀가 된 이후 예빈의 첫 환자이자 첫 경험 대상.

더불어 얼마 뒤엔 뜨거운 원나잇을 보냈던 남자.

기구함으로 따지자면 예빈보다 훨씬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사람이다.

더불어 치료소에서 바쁜 나날을 보내면서도 종종 만나고 싶던 사람이었다.

연애감정 같은 건 아무래도 잘 모르겠지만 그와 침대에서 온종일 머물던 날은 굉장히 기분이 좋았으니 말이다.

그런 그가 어째서 공적의 도시에 있는지.

그동안은 어떻게 지냈을지, 이런 건 조금도 궁금하지 않았다.

살려내지 못하면 죽인다는 집주인의 협박도 금방 훌훌 털어버렸다.

그녀는 더 이상 치료를 목적으로 시작한 관계에서 멋대로 즐겨버리던 미숙한 여자가 아니었다.

그때의 기억을 인생 최대의 반면교사 삼아 구명의 길을 걸어가는 어엿한 의료인인 것이다.

“어쩌다 이런 거죠?”

예빈은 진지한 얼굴로 마력을 끌어 올리며 그의 상태를 살폈다.

최첨단 의료기기를 사용해도 알아낼 수 없는 방대한 양의 정보가 예빈의 뇌리에 스며들듯 주입된다.

우선 굉장히 놀랐다.

그 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지금의 그는 거의 21 위계 대마녀에 필적하는 자성마법을 지니고 있었으니까.

왼손이 자기 의수인 걸 보면 역시 이 사람도 그 뒤로 순탄한 인생을 살아온 것 같지는 않다.

그리고 영체 전반의 조율에서 살짝 비틀림까지 감지했지만….

당장 급한 문제는 아니다.

약식 마법 구사로 검진할 만큼 단순한 문제도 아닌 듯했고 말이다.

“검으로 벴다. 지혈은 해 두었다.”

예빈은 고개를 슬며시 돌려 환부를 확인했다.

린네의 말로 확실히 확인했지만 단순한 과다출혈이다.

목을 측면으로 비스듬하게 가로지르는 검상.

출혈은 멎었고 동맥도 엉성하게나마 이어져 있다.

검진 결과를 보나 영체의 튼튼함을 고려하나 당장 상황이 더 악화할 일은 없어 보였다.

곧장 지혈했는지 비가역적인 후유증이 남을 것 같지도 않았고 말이다.

그제야 휴우 한숨을 쉬었다.

“생명에 지장은 없어요. 하지만 준비해 주실 게 있어요.”

“말해라.”

“피요. 사람의 피건 짐승의 피건 상관없어요. 빠져나간 부분만큼 충당해야 하니 대략 100mL 정도… 아니! 지금 뭐하세요?”

그전까지 냉철하게 대응책을 브리핑하던 예빈의 목소리가 뒤집어졌다.

언제나 허리춤에 차고 다니던 검집에서 칼을 뽑아든 그녀가 아무런 망설임 없이 소매를 걷고 제 팔뚝을 베어냈기 때문이다.

“써라.”

어찌나 예리한지 스윽 움직인 것만으로 입을 벌린 상처에서 샘솟는 혈액.

저 정도면 아플 법도 한데 집주인은 눈 한번 찌푸리지 않는다.

나름 전쟁터를 돌며 평생 보기 싫었던 그로테스크한 시체도 봐왔다.

이 정도 광경에 꺄악거릴 예빈은 아니다.

“닭 피면 되는데….”

터무니 없는 행동에 당황하면서도 침착하게 혈액을 받아낸 뒤 600mL로 불려 수혈했다.

혈액형 검사나 혈구 분리도 없는 무식한 전혈수혈이지만 문제는 없었다.

예빈에겐 기본기나 다름없는 시술이었으니 말이다.

피가 돌기 시작하자 시우의 안색도 눈에 띄게 좋아졌다.

예빈은 그의 상처에 가볍게 붕대를 감는 것으로 조치를 끝냈다.

체온과 맥박도 회복세로 돌아섰으니 하루 이틀만 요양한다면 괜찮아질 것이다.

“끝났어요.”

“깨어나면 불러라. 연무장에 있겠다.”

“잠시만요.”

용건만 툭 던져놓고 돌아가려는 린네를 붙잡는 예빈.

비록 지금은 포로인 듯 포로 아닌 포로 같은 애매한 대접을 받고 있지만 이 무뚝뚝한 주인장에게 밉보인다면 언제 바닥까지 몰락할지 모르는 입장이다.

그걸 잘 자각하고 있던 예빈인만큼 언제나 행동에 신중을 기해왔다.

가만히 있으면 반은 간다는 말은 선조의 지혜가 응축된 진리의 속담인 것이다.

“마녀님 상처도 보여주세요.”

그래도 어찌 의료인이 환자의 상처를 모르는 척할 수 있겠는가?

린네가 걷는 뒷모습만 보아도 묘하게 신체 균형이 뒤틀려 있음을 파악할 수 있었다.

언제나 꼿꼿하게 허리를 펴고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걷던 그녀였기에 더욱 체감이 컸다.

아마도 오른쪽 팔을 다친 거겠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검은 눈으로 예빈을 살피던 린네는 묵묵히 연무복 한쪽을 젖혔다.

예빈의 눈동자가 좁아졌다.

오른쪽 삼두에 그어진 긴 자상.

언뜻 보기엔 시우와 그리 차이가 나지 않은 부상이다.

더불어 어깨가 목보다 급소에서 굉장히 멀다는 걸 고려하면 그다지 심각하지 않은 부상이라 볼 수 있다.

“이걸 왜 아무 말도 않고….”

그러나 단순히 보이는 게 다가 아니다.

비교적 멀쩡한 겉보기에 비해 영체의 구성이 흐트러진 오른쪽 어깨는 충격이 가해진다면 안쪽부터 쿠키처럼 바스러질 정도로 망가져 있었다.

이런 형태의 부상이 가능하다는 걸 예빈은 처음 보았다.

린네가 보유한 회복형 자성마법에 일종인지 저절로 회복되고는 있었으나 마치 대량의 방사능에 피폭당한 모양새랄까.

그래도 수복할 수 없어 보이지는 않았다.

이미 린네의 자체 치유력이 회복 중이긴 했기에 대강 조율점만 잡아 놓고 고정해 두었다.

“다 됐어요. 앨릭서가 있다면 한결 회복이 수월해지실 거에요.”

“만들어와라. 아까 말했던 건 기억하겠지. 연무장이다.”

“당분간 수련 같은 격렬한 활동이나 마력을 사용하는 행위는 피하시는 게 좋아요.”

“알아서 하겠다.”

예빈의 만류에 대꾸도 않은 린네는 흐트러졌던 옷매무시를 가다듬고 그대로 연무장 쪽으로 발길을 옮겼다.

“하아….”

고맙다는 말 따위는 없었다.

납치된 이후로 경매장에 넘겨지지 않고 저택에 머물게 된 이유가 역시 비상용 포션 역할을 맡고 있었기 때문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예빈은 참았던 숨을 길게 쉬며 파리한 안색으로 색색 숨을 쉬는 시우를 바라보았다.

“그래도 어떻게 동지가 생겼네.”

이걸 뭐라 하기엔 모호하다.

그가 어떤 경위로 여기에 잡혀 왔는지 주인장의 목적이 무엇인지 아무도 모르니까.

어쩌면 기껏 아슬아슬한 밸런스를 잡고 있던 일상이 예측 불가한 방향으로 튀어 나갈지 모르는 노릇이다.

그래도 린네와 예빈을 제외하면 사람 하나 없는 고택.

서로 의지할 사람이 생겼다는 것만으로 예빈은 약간의 안도를 느꼈다.

“그럼…. 마저 검사라도 해볼까?”

예빈은 잠시 자리를 옮겨 자신의 가방을 가져왔다.

안에는 돌돌 말려있는 하얀 천과 제머나이 마도구 상점의 마력 초크가 들어있다.

천을 재단하기 전에 밑그림을 그리듯 상황에 맞는 마법진을 그려 정밀검진을 하는 것이다.

조금 전 간단하게 그의 상태를 검진할 때 예빈은 ‘비틀림’을 느꼈다.

뭐랄까.

말로 설명할 수는 없는 괴리감? 왜곡감?

치료소를 운영하며 일반 시민 뿐 아니라 마녀의 영체도 조율해준 적이 왕왕 있었는데 그 어떤 마녀에게서도 느껴본 적 없던 독특한 이질감이었다.

하지만 예빈은 직감했다.

이 이질감의 원인은 경동맥이 다쳐 일어난 과다출혈보다 큰 위험을 잠재하고 있음을 말이다.

아직 19 위계에 불과한 예빈이지만 마법에서도 선택과 집중은 중요하다.

치유 마법에만 몰빵된 예빈의 스테이터스 중 치유계통의 마법만큼은 가뿐히 대마녀와 견줄 수 있을 만큼이 뛰어났다.

펼쳐 놓은 천에 순식간에 마법진을 그린 뒤 그의 몸을 염동으로 띄워 위에 올려놓고 이마에 손을 얹었다.

예전에는 물리적으로 파괴된 뇌의 재건이라는 전무후무한 대수술을 위해 성관계가 불가피했지만, 정밀 검진 정도야 이 정도 선에서 충분했다.

순식간에 펼쳐지는 정보의 파도.

그의 신체 전반에 관한 농밀한 정보가 속속들이 예빈의 인지 영역에 빨려들어 오기 시작한다.

데이터가 로딩되듯 하나씩 들어오는 정보는 기상천외하기 짝이 없었다.

신시우는 예상대로 가뿐히 대마녀의 격에 걸맞은 마법을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더욱 놀라운 건 그가 서로 다른 계통과 성질의 자성마법을 몇 개나 지니고 있다는 점이다.

과거 고기능 자폐 상태였던 그가 새로운 마법을 마구마구 주무를 정도로 대단한 상태였던 건 알고 있다.

하지만 케테르 공작의 조치 이후 무의식은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

예빈이 다시 만났을 때 그는 끽해야 15 위계에 미칠까 말까 하던 수준이었던 것.

즉, 이것은 그 이후로 그가 새로이 쌓아올린 마법이라는 의미다.

2년 남짓한 시간 만에 대마녀에 버금가는 자성마법을 구축했다니.

이미 천재니 뭐니 운운할 수준이 아니었다.

규격 외의 괴물이라는 케테르 공작도 이 정도 속도는 아니었으리라 장담한다.

하지만 이건 공짜로 주어진 힘이 아님이 분명했다.

“딱해라….”

그가 입어왔던 부상과 상처의 기록이 보였기 때문이다.

그 기록의 종합을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만신창이’.

어느 곳 하나 치명적으로 다치지 않았던 장기가 없다.

평범한 인간이라면 몇 번은 사경을 헤맸을 부상이 겹겹이 쌓인 낙엽처럼 덮여 있었다.

하긴 무려 최초의 남자 마녀니 가지각색의 마녀에게 노려지며 온갖 고초를 겪었겠지.

모성마저 솟았다.

“끄응….”

예빈은 충분히 주의를 기울이며 그의 정밀 검진을 끝냈다.

다행히 저번처럼 무의식이 불쑥 튀어나오는 일도, 락에 걸려 튕겨져나가는 일도 없었다.

그러나 검진 결과를 논하자면 실패였다.

“도대체 뭐지…?”

예빈이 보기에 분명 그의 상태는 정상이 아니었다.

가령 그의 의수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원인도 이 문제와 밀접한 연관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정작 뭐가 잘못됐는지는 알 수 없다는 그런 모순이 발생했다.

더 알아보려면 아주 정밀한 장비가 필요할 텐데 잡혀 들어온 고택에 그딴 게 있을 리가.

“으으….”

그때 야트막한 신음이 들리며 시우가 눈을 떴다.

순간 저번처럼 덮쳐지는 것은 아닌지 걱정했던 예빈.

그건 아닌 모양이다.

눈빛도 훨씬 순하고 예빈의 얼굴을 보자마자 눈이 휘둥그레졌으니.

“예빈 씨...?”

“오랜만이네요. 시우 씨.”

맘편히 웃으며 인사할 수 없는 2년 만의 재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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