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녀의도시-638화 (638/917)

#638

1.

“언제 오는 거야?”

침묵의 마녀는 망토 속 은사슬에 매달린 회중시계를 힐끗이며 포탈을 바라보았다.

이 사막에서 탈출하는 수단이자 새로운 보금자리가 되어준 ‘헥센나흐트’로 향하는 포탈이었다.

이마에서 초조함의 땀이 흘렀다.

약속된 시간은 5분이었지만 정말 5분을 빠듯하게 채워오리라고는 생각도 않았다.

그도 그럴게, 검의 마녀가 누구인가?

클리포트가 한창 위명을 떨칠 때.

그러니까 케테르만 아니었더라면 게헨나와의 전쟁에서 승리했을지도 모르던 당시에도 열 손가락 안에 들었던 강자이다.

그런 린네가 고작해야 1대 남자 마녀를 가지고 시간을 끈다는 건 말이 되지 않는다.

검의 마녀와는 꽤 예전부터 동업했기에 전투 장면을 몇 번 보았다.

상대의 마법의 색깔을 빼앗으며 억누르고, 그녀 자신은 그 공간 속에서 도리어 강해진다니.

몇 번을 생각해도 대응책이 생각나지 않는 최강의 원패턴이다.

현시점 케테르를 제외하고 최고위 마녀로 알려진 에렐림 공작이 아니라면 누가 린네를 상대할까 싶었던 침묵의 마녀지만….

보고 말았다.

시체의 마녀와 침묵의 마녀의 협공이 더해진 린네의 매서운 참격을 태연하게 받아넘기던 티페레트 공작을.

물론 그 시점의 린네도 여력을 남겼다지만, 무수히 많은 공적을 사장해 온 공작의 강함이 결코 거짓이 아님을 확인할 수 있었다.

만약 전력을 다한 티페레트 공작과 전력을 다한 린네가 맞부딪치게 되었다면 싸움이 이렇게 길어질 가능성도 있는 것이다.

“뭘 볼 수가 있어야지.”

현재 미궁을 유지하는 아티펙트를 보유한 건 침묵의 마녀다.

그러나 아직 사용법이 익지 않은 탓에 그 안을 들여다볼 수 없는 것은 매한가지다.

남은 시간은 불과 30초.

먼저 포탈로 몸을 뺄까 말까를 고민하던 무렵.

“신속히 이탈한다.”

미궁으로 단절된 공간을 찢으며 린네가 걸어나왔다.

그 어깨에는 축 늘어진 피투성이의 남자가 대롱대롱 매달려있다.

예상대로 확실하게 제압해 데려온 모양이다.

“왜 이렇게 늦었어? 먼저 갈 뻔했네.”

“상정 외의 일이 있었다.”

“상정 외의 일? 뭐, 됐어. 왔으면 됐지.”

조금 전에 손쉽게 주운 세 마녀를 담은 포대를 염동으로 띄우던 침묵의 마녀.

그녀는 뒤늦게 무엇인가 발견했다.

“어?”

그것은 미동도 없이 축 늘어져 있는 린네의 오른팔.

그 끝에는 핏방울이 뚝뚝 떨어지고 있다.

검은 무복이라 눈치채지 못했었다.

부상은 손끝을 살짝 베인 정도가 아니라 무복의 팔을 피로 흠뻑 적실 정도로 커다랬다.

남자를 들춰 맨 쪽과 완전히 반대 방향인데다가 안쪽부터 배어 나온 듯하니 적어도 피가 튀긴 것은 아닐 터.

“어떻게 된 거야? 다른 마녀가 있었나?”

“…….”

“설마…. 천하의 네가 이런 꼴이라니. 어지간히 방심했구나?”

“…말이 많다.”

방심이라니.

터무니없는 말이다.

린네는 조금 전의 접전을 떠올렸다.

어떠한 잔재주도 부리지 않고 겁 없이도 정면 승부로 도발해오던 남자.

상식적으로 만반의 준비를 갖춘 채 카운터를 준비하는 상대에게 정면으로 맞부딪치는 건 어리석은 선택이다.

그럼에도 린네는 기꺼이 도발을 받아들여 전력으로 임했다.

그것이 그녀가 싸워왔던 방식이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가 이것이다.

직격 당한 것은 아니지만 베어내는 과정에서 동시에 어깨를 당했다.

아주 조금만 늦었다면….

가령 그의 왼팔이 다른 부분보다 묘하게 둔하지 않았다면 조금 더 치명적인 곳을 찔렸을지도 모른다.

만약 그랬다면 어떻게 됐을까.

그때도 린네의 검이 단단한 갑주를 부수고 경동맥을 베어낼 수 있었을까?

가슴이 뛴다.

오래토록 느끼지 못했던 감각.

찰나의 교차 속 온몸의 잔털이 일제히 곤두설 만큼이나 아찔한 경합의 순간.

티페레트 말고 그 누가 린네에게 그런 경험을 안겨줄 수 있겠는가?

“…….”

기껏해야 티페레트를 꾀어낼 미끼라고 생각했는데.

티페레트에게 직접 단련 받은 남자.

마녀가 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주제에 이만한 강함.

생각보다 훨씬 쓸모가 있을지도 모른다.

“돌아가지.”

“뭐래 한참 늦고는….. 준비는 벌써 끝났거든?”

침묵의 마녀와 린네는 각기 전리품을 챙겨 들고 포탈 안으로 발을 들였다.

2.

마녀 사회의 질서를 책임지던 케테르 공작의 부재로 시류는 바뀌고 있다.

사방에서 날뛰는 공적, 혼란을 틈타 사고를 벌이며 공적으로 거듭나는 추방자, 습격당하는 위치포인트, 단합한 마녀에 의해 토벌당하는 마녀.

그 덕에 딱히 사고 칠 생각이 없는 추방자는 위치포인트를 기점으로 모여들고, 현세로 나와 있던 마녀는 게헨나로 돌아갔다.

하지만 이 혼란에 대비해 움직이는 건 게헨나와 위치포인트 소속의 마녀만이 아니었다.

그 외 성향의 추방자와 공적도 새로운 시국에 대비한 움직임을 준비하고 있던 것이다.

아무리 와류(渦流)라 해도 그 나름의 패턴이 존재하듯 이제껏 마녀 사회는 혼란 속의 질서처럼 유지되어 왔다.

그 질서의 가장 큰 축이던 케테르가 더는 움직일 수 없다면 지금까지의 혼란은 전초에 불가할 것임을.

머지않아 지금까지 있던 일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커다란 변화가 들이닥칠 것임을.

더 이상 이전처럼 약육강식의 법칙만이 답이 아니라는 걸 모두가 직감하고 있는 까닭이다.

‘헥센나흐트’ 역시 그러한 준비의 일부분이다.

어중이떠중이들은 솎아내지고 최정예만 남은 클리포트의 일원들이 변화에 대비한다는 목적 아래 다시 뭉쳤다.

역사의 변곡점을 쫓아가지 못해 나가떨어지지 않기 위해서.

도리어 그 변화의 격류를 타고 새로운 ‘규칙’으로 거듭나기 위해서.

이전까지의 반목을 접고 게헨나처럼 거대한 주머니 공간을 만들어 그들만의 사회를 구축했다.

이러한 구조는 어느 정도 안전이 보장된다.

각개격파 당하기 일쑤이던 공적 세력이 한 장소에 뭉치며 토벌을 방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제아무리 티페레트 공작이라도 남미지방에서는 그럴듯한 전공을 올리지 못했던 것도 같은 이유다.

이런 당연한 발상을 왜 아직까지 구현하지 못했는가? 라고 묻는다면 간단했다.

발상은 간단하되 실현은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존재해 온 게헨나조차 연례행사처럼 커다란 트러블이나 사고가 생겨나는 마당이다.

마법을 위해서면 ‘정말 뭐든지’하는 공적이 한가득 모여든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는 자명한 노릇.

또한 그런 마녀들을 한가운데 모아놓고 ‘앞으로는 사이좋게 지내요’라고 해도 들어 먹을 리 없다.

이런 트러블을 조율하기 위해 클리포트는 두 가지 방면으로 헥센나흐트를 통제했다.

‘밖’에서는 무슨 짓을 벌여도 상관하지 않는다.

하지만 도시 내는 완벽한 중립지역으로 보며 혼란을 일으킬 시 클리포트가 움직여 처분한다.

알기 쉬운 힘의 논리로 통제되는 안전지대가 존재한다는 것.

이것만으로 시민권이 없는 마녀의 구미를 당기기 충분했다.

그 결과 불과 몇 개월 만에 예전부터 악명 높던 공적과, 이번 혼란을 계기로 완전히 공적의 길에 들어선 추방자, 혹은 공적이 되는 것에 거리낌이 없는 추방자까지 사이 좋게 옹기종기 모여있는 이 헥센나흐트는.

밤의 도시 혹은 죽음의 도시 혹은 마경이라는 표현이 실로 어울리는 것이다.

“근데 내가 왜 여기에….”

예빈 스미르나는 훌쩍훌쩍 눈물을 훔쳤다.

다다미가 깔린 일본 고택 풍의 방.

반쯤 열어둔 창틀로는 영원히 밝지 않는 어두컴컴한 밤하늘만이 보일 뿐.

탁 트인 정원엔 집주인의 취향에 맞게 사시사철 지지 않는 벚나무가 하늘하늘 꽃잎을 떨어뜨렸지만, 눈길도 가지 않았다.

자신의 미래도 저 밤하늘같이 영원히 밝지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당연하지만 제 발로 걸어 들어온 것은 아니다.

납치되어 벌써 몇 개월째 구류된 상태다.

생각해보면 어찌 이리도 기구한 팔자일까 싶다.

평범하게 의대를 다니다가 추방자에게 낙인을 물려받고 마녀가 되었다.

과학으로 해결할 수 없는 질병을 치료할 수 있다는 말에 혹해 스승을 따라 온갖 분쟁지역을 돌며 강제 자원봉사를 해야겠다.

그러나 이상은 현실에 한참 미치지 못했다.

선대 스미르나는 겉보기엔 멀쩡했지만 그 속은 매드 닥터였으니까.

인간을 실험 도구쯤으로 보는 선대에게 반감이 생겨 마녀의 능력을 활용해 많은 사람의 도움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만.

정작 낙인을 물려 받은 뒤에도 위계에 비해 그럴 듯한 전투 능력이 없는 예빈은 극지에 숨어 사는 은둔형 마녀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제대로 된 연구도 불가, 그렇다고 사회에 공헌하는 것도 불가.

어찌할 도리 없던 허송세월도 잠시.

극적인 기회가 찾아왔다.

무려 제머나이 백작가에서 추방자 면책권을 조건으로 한 인간 남자의 치료를 요청해 온 것이다.

이름은 신시우.

남자의 몸으로 마법을 익힌데다가 견습마녀를 위해 사악한 공적을 막아낸 대단한 남자였다.

“여러모로 대단… 대단하긴 했지….”

음, 뭐, 아무튼.

우여곡절의 치료 이후 시청의 지원을 받아 타로 타운에 진료소를 세웠다.

“아아… 그리운 찬란한 나날이여.”

그 이후로는 하루하루가 보람찬 자아실현의 순간이었다.

시민들을 상대로 무상으로 약과 치료를 공급하며 성녀님으로 추앙받기까지 했으니.

눈밭에서 넷플릭스나 보며 맥주를 마셔야 했던 그 시절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의 자아 효능감을 느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마법만으로 모든 증상을 해결하기엔 시 지원 예산이 너무도 부족했다.

이는 지원 예산이 적어서라기 보다는 마법이란 학문 자체가 돈을 빨아먹는 괴물인 탓이었다.

가령 천식의 대증 치료 및 증상 완화를 위해 현세의 양약을 사용하면 많아야 금화 한 장 선에서 처리할 수 있다.

그러나 그걸 마법으로 대응하려면 못해도 한 자루의 금화 정도는 준비해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약을 구하기 위해 직접 현세로 나왔던 예빈은 몹시 불행히도 상상도 못했던 괴물과 마주했다.

검의 마녀.

현세에 숨어 살던 때부터 살아남기 위해 공적명부를 달달 외웠던 예빈은 알고 있었다.

실력에 자신 있는 공적들도 적을 돌리기 싫어한다는 전투광.

몇 명을 죽였는지 셀 수도 없다는 살인귀.

마주쳤을 땐 이대로 죽었구나 싶었지만 불행일지 다행일지 죽임을 당하지는 않았다.

다만 이 헥센나흐트로 데려와 동양 고옥 느낌 물씬 나는 고풍스러운 저택에 갇혔을 뿐이다.

그 뒤로 공방도 제공해주고 먹거리 입을 거리도 부족하지 않게 내어주긴 했다.

딱히 자유를 억압하지도 않았고 말이다.

뒤이어 곰곰이 생각해보니 아마도 예비 포션 쯤으로 취급받는 듯했다.

하지만 아무리 대우가 좋아도 공적과 공적 꿈나무가 가득한 도시에 갇히게 된 예빈에겐 비극 그 자체.

언젠가 빈틈을 봐 도시를 탈출하는 날만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요원하다, 요원해….”

그러나 19 위계라고는 해도 정말로 ‘치료’ 밖에 못하는 ‘치유의 마녀’ 예빈 스미르나다.

이 고택 밖을 나서기만 해도 진땀 나는 판국에 날고기는 마녀가 한가득 모인 도시에서 첩보 스릴러를 찍으라고?

애초에 무리다.

“어디 왕자님이 구하러 안 와주나….”

그렇게 하소연하던 무렵.

-쾅!

“꺅!”

부서지듯 열린 문과 함께, 몇 개월을 같이 있었는데도 변변한 대화 한 번 나누지 못한 무뚝뚝한 마녀.

집주인 린네 사마키엘이 등장했다.

“의사, 따라와라.”

“네?”

제대로 놀랄 틈도 없었다.

용건만 휙 던진 채 돌아섰으니 말이다.

한참 얼이 빠져있던 예빈은 뒤늦게 그녀의 뒤를 쫓았다.

묘하게 서두르는 듯한 발걸음을 따라 미닫이문이 가득한 복도를 걸었다.

-드르륵

린네가 문을 열고 예빈이 들어선다.

다다미 바닥에 깔린 푹신한 요에 누워있는 한 남자는.

“치료해라. 실패하면 너도 죽는다.”

당장에라도 죽을 것처럼 창백한 안색을 한 신시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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