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녀의도시-637화 (637/917)

#637

1.

지금껏 22 위계 마녀와 2번을 겨루었다.

도로시 사하퀴엘과 비앙카 벨릴리.

결과는 1승 1무.

무지렁이 같던 옛 시절에 비하면 괄목한 성과이리라.

그러나 그 결과물은 오롯이 시우의 것이라 말하기 어려웠다.

비앙카의 경우 시우가 도망치지 못하도록 쳐놓은 수작이 도리어 그녀의 발목을 잡았다.

무엇보다 그녀를 핀치까지 몰아넣었던 것은 시우 본인이 아니라 심장이 멎으며 각성한 무의식이다.

도로시의 경우 ‘상처 없이 사로잡을 것’을 목표로 삼고 있었기에 유리한 고지에 서 있음에도 시간을 질질 끌어주었다.

만약 그녀가 느긋하게 마법진을 그리고 있을 시간을 주지 않고 몰아붙였더라면 회심의 일발 역전도 불가능했을 확률이 높았다.

물론 여기서 치명상을 입게 되어 무의식 속 괴물이 나와준다면 비앙카 때처럼 그럭저럭 대등한 전투를 펼치는 게 가능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시련’ 속에서 육체를 둘러싼 협상이 결렬되었던 것이 마음에 걸린다.

다시 한번 몸을 차지한 무의식이 위기를 해결하고 스윗하게 몸을 돌려줄 것 같진 않다.

아니, 아예 나오지 않고 수수방관할지도, 어쩌면 이미 사라져 있을지도 모른다.

즉, 22 위계와 완전히 대등한 조건으로 승부를 보는 건 처음 있는 일.

“…….”

한마디 말도 없이 차가운 눈동자로 이곳을 바라보는 그녀에겐 겉으로 보이는 화려함이 없었다.

가령 각종 아티펙트를 현란하게 구사한다든가, 보기만 해도 위압되는 압도적인 힘을 구사하려는 기색도 없다.

그저 뿌옇게 안개를 퍼뜨려놓고 냉철한 눈으로 이쪽을 바라볼 뿐.

기세만으로 위계를 논할 순 없지만, 겉보기에는 겨우 대마녀에 걸친 정도의 마력만이 느껴진다.

그러나 나락같이 검은 눈을 깊게 들여다본다면, 그 너머의 것이 보인다.

일절 낭비 없이 응축된 힘이.

어둠 속에 도사린 칼날처럼 소리 없이 쏘아나갈 준비를 한 마력이.

어느 곳을 베어낼지 끝없이 탐색하는 도살자의 눈빛이.

-위이이잉!

냉정하게 생각할 때 시우의 전투 능력은 21 위계 수준.

허나 고리를 통해 반 폭주 상태에 돌입한다면 그 경지는 잠깐이나마 22 위계에 닿는다.

천사의 고리가 가속을 시작했다.

나선을 그리며 회전하는 마력의 응집은 전신 곳곳에 위험할 정도의 힘을 가져다준다.

먼저 움직인 쪽은 린네였다.

검을 겨누고 서 있던 그녀의 신형이 마치 흘러내리듯 흐트러진다.

저리도 폭발적인 도약임에도 소리 하나 없다.

필경 분산될 모든 힘을 낭비 없이 쏘아져 가는 데 사용한다는 증거.

“스으읍!”

흐릿하게만 보이는 검은 궤적을 쫓아 맞대응을 준비한다.

시우의 동체시력으로도 제대로 쫓을 수 없을 정도로 빠르지만 그 속도만큼이나 움직임이 정직하다.

검을 쥔 자세를 보아 하나 각도를 보아하나 스쳐 지나가며 허리를 벨 셈이다.

방향은 왼쪽.

벨까? 찌를까? 후려쳐낼까?

그도 아니면 우선은 병기를 맞대며 소드파이팅을 걸어볼까?

삽시간에 떠오른 선택지 중 하나를 고른 시우.

-우직!

갑주의 왼발이 단단한 지면을 무른 진흙처럼 파고들며 무지막지한 돌진을 감행하는 상대를 쳐내려는 순간.

“……!”

시우는 등골을 스쳐 지나가는 오싹함을 느꼈다.

뭔가 위험하다.

이대로 ‘왼쪽’에서 올 것을 단정하고 행동한다면 그대로 패착이 결정될 것 같다는 예감.

-파칭!

격돌 질전.

시우는 풍차처럼 창대를 회전시켜 쥠 새를 바꾸었다.

동시에 ‘오른쪽’ 허리를 가로막은 창대에 묵직하게 감겨든 검격이 불똥을 튕겨낸다.

“…….”

순식간에 교차한 두 사람의 위치.

어떻게 된 거지?

그저 당혹스럽다.

시우나 눈앞에 검의 마녀나 이미 초인의 반열에 든 자들이다.

모든 공격을 육안으로 확인한 뒤 반응하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그럼에도 전투가 일합에 끝나지 않고 이어지는 건 예비 동작을 보며 다음 공격을 예측하기 때문이다.

가령 발의 위치, 어깨에 힘이 들어간 정도.

시우의 경우 유달리 마력 강화가 집중된 곳 따위를 보며 다음 공격에 대비한다.

그런 의미에서 그녀가 보인 공격은 존재할 수 없는 일검이었다.

모든 준비동작이 왼쪽을 노린다고 말하고 있었음에도 격돌 직전, 정반대 옆구리에 칼이 들어왔다.

직감을 따르지 않고 눈에 보이는 대로 대처했다면 그대로 한 움큼의 살덩이가 떨어져 나갔을 것이다.

마치 관성을 자유자재로 통제하는 것 같은 그런 움직임.

검의 마녀를 보았다.

그녀는 얼떨결에 공격을 막아낸 시우보다 놀라고 있었다.

물리법칙의 근간을 뒤집는 린네의 검은 특성상 첫수의 위력이 가장 강력하다.

설령 능력을 알고 있다 해도 상관없다.

일상생활 속에서 숱하게 보아오며 익숙해졌던 법칙이 완전히 뒤바뀐다면 대응이 늦어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는 보란 듯이 최초의 일격을 막아냈다.

머릿속 깊이 박혀있을 통념을 뒤집었고, 눈 앞에 보이는 현상이 아닌 직감을 믿었다.

그뿐 아니라 이렇게 반격해온다.

-부우웅!

“합!”

린네의 허리가 뒤로 젖혀지자 그녀의 상체가 있던 부분을 기다란 장대가 훑고 지나갔다.

이것이 적기사가 사용하던 붉은가지인가?

잘려나가는 머리카락 몇 올 사이로는 나선 형태로 응축된 기이한 일렁임이 뒤따르고 있다.

아까 검으로 스쳐 지나갈 때도 느꼈지만, 굉장히 강력한 역장이다.

하지만 근접전투에 이골이 난 린네라도 느긋이  감상할 여유는 없었다.

-콰지지지직! 콰지직!

공간을 찢어발기는 듯한 흉맹한 창격이 린네를 쫓고 쫓고 또 쫓는다.

전력을 다해 미친 듯이 휘두르는 듯한 공격임에도 제힘에 휘둘리지 않는다.

어디까지나 완벽한 자세로 찬사가 절로 나올만한 창격을 이어가고 있다.

검을 맞대어 방어해 낼 때마다 왜곡장이 내장으로 스며들어 끔찍한 통증을 자아냈다.

기묘한 각도와 자세로 움직이는 린네를 몰아붙이는 창의 폭풍.

마침내 도저히 회피만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찌르기가 심장을 향해 날아왔다.

-콰아앙!

공중에서 검을 들어 막아낸 린네의 몸이 외벽을 향해 포탄처럼 날았다.

유효타는 아니었다.

그녀의 몸이 날아가던 도중, 공중에서 정지했으니.

“빌어먹을….”

시우는 입술을 씹었다.

정말 듣도 보도 못한 움직임이다.

정석적인 검도 자세만 취할 것 같은 옷차림과 무기를 들고 있는 주제에 바닥에 닿을 정도로 상체를 기울이는가면, 왼쪽으로 회피하는 모션을 내보이고 태연하게 오른쪽으로 걸어나온다.

같은 인간이 아니라 허깨비와 싸우는 듯한 느낌이다.

움직임이 도무지 적응되지 않았다.

역시 물리법칙 쪽인가?

공중에서 몸을 멈춰 세운 것도 그렇고 도로시의 절대력처럼 물리현상을 특수하게  제어할 수단이 있다고 봐야겠지.

그녀의 움직임으로 미루어 봤을 때 그 종류는 아마도 관성 쪽일 것이다.

숨을 고르기 위해 잠시 고리의 출력을 낮추며 태세를 가다듬었다.

몇 초나 움직였다고 벌써 마력이 바닥이다.

거듭 증폭으로 부족한 마력을 채우자 근육과 뼈가 비명을 질렀다.

순간적인 힘을 뽑아내는 대신 방대한 마력 양을 지닌 시우조차 감당하기 힘든 코스트.

몸이 뜻대로 움직여주는 건 앞으로 5초까지다.

“…….”

그리고 린네는 그것을 정확히 꿰뚫어보고 있었다.

그는 명백히 허용된 힘 이상을 끌어쓰고 있다.

티페레트와 대등하게 검을 나누는 린네조차 받아내기 버거운 파괴력을 내보이고 있으니까.

시우는 고리를 재가속한다.

-키이이이잉!

밑 빠진 독에 물 붓듯 빨려 들어가는 마력.

그에 상응하여 전신에 차오르는 힘과 큰 힘이 손아귀에 담길수록 비명을 지르는 영체.

정면으로 왜곡장을 최대치로 활성화한다.

한계까지 뽑아낸 왜곡의 파동을 비틀고 비틀자,

피어나기 직전의 나팔꽃 봉우리처럼 창의 극점에 집약된다.

평상시는 엄두도 내지 못할 난폭한 활용.

미쳐 날뛰며 주인을 거스르려는 붉은가지의 반항을 과증폭된 마력으로 찍어 누르고나면,

이 한 번의 찌르기는 전력을 다한 투창에 필적한다.

중요한 건 창을 어떻게 내지르느냐.

섣부르게 선수를 취했다가 회피당한다면 그대로 뒤가 없어진다.

따라서 시우는 창을 작살처럼 움켜쥐고 들어 올렸다.

대놓고 기다리는 카운터 셋업.

그녀가 공격을 위해 시우의 간격 안으로 침범하는 순간 붉은가지는 침입자를 단죄할 것이다.

어떻게 나올 거지?

준비를 끝낸 시우는 린네를 보았다.

시종일관 변함없던 린네의 얼굴에 변화가 생긴다.

“건방지다.”

그것은 투쟁을 피하지 않는 야차의 낯짝을 그대로 떼어 박아 낸 섬짓한 광소.

그렇다.

시우가 원하던, 도발에 걸려든 자의 헛웃음이다.

사실 발을 멈춘 채 보란듯이 카운터를 잡겠다 선언한 시우의 행동은 어쩌면 자충수 그 자체다.

만약 린네에게 아주 간단한 원거리 견제 수단이 있다면,

혹은 적당히 시간을 끌며 시우가 제풀에 나가떨어지길 기다린다면 아주 쉽게 파훼가 가능한 전법.

현명한 마녀라면 굳이 입을 벌리고 있는 독사 아가리로 뛰어들지 않는다.

다른 방법을 통해 효율적으로 제압을 하겠지.

그러나 마녀에게라면 몰라도 검사에게 이것은 전혀 다른 함의가 있다.

어떤 방식으로 공격할지, 어떤 경로로 공격할 지가 훤히 드러나는 자세에서 적을 기다리는 건.

이건 ‘자신 있으면 들어와 봐’라는 뜻과 동시에 ‘니가 뭘 해도 이걸로 때려눕혀 줄게’라는 도발 커맨드나 다름없다.

그리고 린네는 그 도발에 기꺼이 응할 만큼 투쟁심으로 가득한 마녀였으며, 투사였다.

항상 상대보다 강할 필요는 없다.

그저 승패를 결정지을 한순간 상대의 머리에 위에 있으면 될 뿐.

7대 3인 싸움을 찰나라도 5.1대 4.9로 만들 수 있다면 충분하다.

“베어라.”

시동어와 함께 한껏 자세를 낮춘 린네의 등 뒤로 마력이 번져갔다.

먹물을 풀어낸 것처럼 흐드러지는 검은 아지랑이.

그 아지랑이는 맞닿은 세상을 검고 희게 덧칠했다.

밝은 색조는 백색으로.

어두운 색조는 흑색으로.

백과 흑의 풍경이 번져감에 따라 격렬한 마력의 떨림이 잦아들고.

지독한 침묵이 빈자리를 대체했다.

어떤 작용이 일어나는지는 시우의 눈으로도 제대로 파악할 수 없었다.

다만 확인할 수 있는 건….

시나브로 번지던 흑색과 백색이 일대의 풍경을 수묵화처럼 변모시켰다는 것.

희미하게 빛을 발하는 붉은가지를 제외한 나머지는 본연의 색을 빼앗겼다는 것.

그리고.

“黑白世界.”

소음와 색채를 잃은 세상 속 입술을 비집고 새어나오는 목소리.

수천의 삶과 수천의 죽음을 베었다.

죽고 죽이는 나선에서 헤지지 않은 단 하나의 철학은.

강함을 향한 집념.

검은 태도가 소리 없이 울었다.

색이 돌아왔다.

창을 놓치고 무릎을 꿇으며 쓰러지는 시우의 목덜미.

부서진 갑옷 틈새로 분수처럼 치솟는 핏줄기도 새빨간 붉음을 되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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