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6
1.
그 시각.
시우는 미궁에서 갑작스레 습격해 온 추방자 트리오를 제압한 뒤 협상을 이어가고 있었다.
일전 죽을 똥을 싸며 싸워왔던 전투에 비하면 소모가 크지 않았지만, 아무것도 받지 않고 돌려보낼 생각은 없다.
그리고 언제 나쁜 생각을 품을지 모르는 추방자를 아무 조치 없이 풀어줄 생각도 없다.
시우가 떠올린 좋은 방법은 하나.
앨리스를 위치포인트에 넘기는 것이었다.
스승님의 말씀으로는 케테르 공작의 유고가 공식으로 인정된 이후 현세는 혼란의 도가니라 한다.
더는 눈치 볼 필요가 없는 공적이 날뛰는 와중에 본디 악성향에 가까웠던 추방자도 우후죽순으로 공적화 중.
그 과정에서 각국 정·재계와 협약되었던 마녀들이 게헨나로 피신하는 통에 호문쿨루스 토벌 인프라까지 망가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앨리스가 향후 5년간 위치포인트에서 무상봉사를 하게 하는 묘수를 떠올렸다.
20 위계인 대마녀가 전선에 합류한다면 어느 지역이건 제법 숨통이 트일 테니 말이다.
더하여 위자료를 받는 조건으로 이번 습격 사건을 없던 일로 할 예정이었다.
“돈이 없어요? 50억도 없다고요?”
무상봉사까지만 해도 울며 겨자 먹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던 앨리스다.
하지만 모든 일이 순조로울 수는 없는 법.
합의금을 조율하던 와중에 문제가 생겼다.
당혹스러움에 머리를 긁적였다.
“정말이야…! 우리가 거짓말하겠어?”
“맞아요, 저희 거지에요.”
“오죽하면 호문쿨루스를 잡으러 왔겠어요.”
나름 좋은 옷과 보석 장신구 같은 걸 걸치고 있길래 페리윙클 누님이나 델라처럼 재산 좀 있는 마녀인 줄로 알았다.
“그럼 얼마 줄 수 있는데요?”
“다 쥐어짜 봐야… 10억?”
“남자 마녀님, 애초에 현금을 바리바리 싸들고 다니는 마녀가 얼마나 있다고요….”
10억이라….
결코 적은 금액은 아니었지만 시우의 목표치에 한참 미치지 못하는 금액이다.
80억이라는 금액을 들은 순간 공중제비를 돌며 입에 거품을 무는 꼴을 보니 단순히 돈을 아끼려고 그러는 건 아닌 모양이지만, 조금 더 캐 볼 가치는 있었다.
“연구비는 어떻게 하시는데요?”
“이란 정부 쪽에서 일정 금액 대주는 게 조건이야.”
“국가에 스카우트 되신 거면 연봉 나오잖아요.”
“앨리스 언니는 5년마다 재계약하면서 돈이 나오는데 그건 작년에 다 써버려서….”
“가불 안되나요?”
“안된다니까….”
“사업하는 거 있으세요?”
“아니….”
이것도 안 된다, 저것도 안 된다.
가뜩이나 이 혹덩이들을 때문에 호문쿨루스를 사냥하러 갈 수도 없는데 위자료를 못주겠다고 징징대다니.
참다못한 시우가 건들건들한 목소리로 말했다.
“돈 없으면 물건도 받습니다. 환금성 좋은 물건 없어요? 부동산, 금괴 이런 거? 자꾸 이런 식으로 나오시면 저도 깡패가 되는 겁니다.”
환금성 좋은 물건이라는 말을 듣자마자 말리샤를 향해 쏠리는 마냐와 앨리스의 시선.
둘의 오묘한 시선을 깨닫고 뒤늦게 눈이 확 커지는 말리샤.
“절대 안 돼…! 어떻게 빚 때문에 자식을 팔겠어!”
그녀의 콜렉션 대부분은 부자들이 돈뭉치를 들고 기다려도 재고가 없어 못산다는 H사의 물건이다.
중고로 팔아도 도리어 값이 올라가는 만큼 전부 팔아 치운다면 50억은 족히 나오리란 걸 앨리스도 마냐도 알았다..
“기껏 가방 가지고 뭔 자식이야. 남자 마녀님, 얘 명품백 많아요.”
“입 닥쳐! 이봐요! 저년도 비싼 스포츠카 많아요!”
“미안한데 나는 차를 좀 험하게 타서 팔아봐야 원가 받기는 힘들거든. 네 가방을 파는 게 맞지.”
아까까지 서로를 감싸던 모습은 어디 갔는지 내부고발을 난사하는 마냐와 말리샤.
“개소리하고 자빠졌네! 내가 그걸 얼마나 아득바득 모았는지 알기나 해? 차라리 날 죽여! 이 새끼야! 죽이라고!”
가방에 낙인이라도 숨겨놓은 게 아닐까? 싶을 만큼 광적인 반발.
멱살을 잡는 말리샤의 손길에 시우는 떨떠름함을 감추지 못했다.
“이봐요. 지금 이게 장난 같아요?”
아무래도 너무 호구로 보인 모양이다.
성격에 맞진 않지만 슬쩍 붉은가지를 들이밀었다.
정신을 차렸는지 헛바람을 들이켜며 손을 놓는 말리샤.
“으…우….”
대신 비틀비틀 구석진 곳으로 가더니 훌쩍훌쩍 눈물을 흘리기 시작한다.
앨리스는 골치가 아프다는 듯 머리를 감싸며 말했다.
“말리샤 가방 팔면 네 차도 팔 거야.”
“네? 언니? 뭐라고요?”
“가격 맞춰서 네 차도 팔 거라고. 그래야 공평하지.”
“아, 아니…. 팔아도 3분의 2나 간신히 건질 텐데….”
“어차피 내가 산 거잖아. 입안 다물어? 가서 말리샤나 달래줘.”
패닉에 잠겨 말리샤 쪽으로 비틀비틀 걸어가 함께 훌쩍이는 마냐.
앨리스는 면목이 없다는 듯 눈치를 보며 슬쩍 옆에 붙어섰다.
“미안해, 제대로 보상하지 않으려는 게 아니야. 나도 티페레트 공작의 미움을 사고 싶지는 않으니까. 하지만 보다시피 상황이 여의치 않아. 조금만 미뤄줄 수 있을까?”
“저도 급전이 필요한 거라 곤란합니다. 도대체 돈을 어떻게 쓰시길래….”
“내가 좀…. 펑펑 쓰긴 해.”
그냥 날 잡고 가정방문해서 돈 되는 것을 탈탈 털어와야 하나 고민하던 때였다.
“…피어라.”
“뭐야뭐야뭐야! 말로 해!”
삽시간에 검은 먹물처럼 번진 그림자가 갑옷을 조형한다.
일이 풀리지 않자 무력행사를 하려는 줄 착각하고 비명을 지르는 앨리스와.
-콰아앙!
시우의 등 뒤에 작렬하는 호쾌한 일검.
허리가 꺾이는 것 같은 묵직함을 억지로 떨쳐내며 몸을 반 회전했다.
갑자기 마법을 사용한 건 무력행사해 추징하려던 게 아니다.
살을 따끔따끔하게 만드는 짙은 살기가 등 뒤에서 느꼈기 때문이다.
“…….”
어느샌가 나타난 것은 방금 일격을 휘두른 듯 보이는 검은 마녀와.
“이야, 이걸 막네?”
히죽히죽 웃으며 등장한 귀에 피어싱이 잔뜩 박힌 마녀.
입 안이 순식간에 바짝 마른다.
두 마녀 모두 대마녀 이상이라는 걸 한눈에 알아챌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방금 태도로 펼쳐졌던 일격.
충격을 받은 붉은가지가 아직도 울고 있다.
도로시처럼 절대력을 행사하는 듯 꼼수를 부린 일격이 아님에도 그 안에 담긴 힘은 스승님에 필적했다.
“시간이 없다. 떨거지는 네가 챙겨라. 난 이쪽을 맡겠다.”
“맛있는 것만 쏙 빼먹기야? 나도 남자 마녀 쪽에 관심이 있다고.”
딱딱하게 굳은 시우도 시우지만 앨리스의 안색은 아예 하얗게 굳어 있었다.
심약한 사람이 시한부 선고를 받는다면 저런 표정이 되겠지.
“누구죠?”
“거, 검의 마녀와…. 침묵의 마녀….”
오랫동안 현세에서 머물던 앨리스인 만큼 한눈에 그들을 알아보았다.
침묵의 마녀는 그렇다 치자.
어쩌면 이 무지막지한 남자 마녀가 능히 감당해낼 상대일지도 모르니까.
하지만 저 흑발흑안, 연무복, 일본도는 피에 미친 살인귀로 유명한 검의 마녀의 상징이다.
우연히라도 마주친다면 젖먹던 힘을 내어 도망쳐야 하는 요주 공적인 것이다.
“자자, 마침 마력도 없으시네. 모두 잠들 시간이에요.”
하지만 앨리스를 비롯 마냐와 말리샤의 절망은 길지 않았다.
마냐와 말리샤는 애초에 20 위계의 저주에 저항할 힘이 없으며, 앨리스는 시우와의 격전으로 거의 모든 마력을 소진한 이후다.
“도망….”
“언니…!”
세 사람은 침묵의 마녀가 발하는 수면 마법에 저항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꼬꾸라졌고,
그 결과 이미 한차례 부서진 연회장에 두 발로 서 있는 인원은 시우와 두 명의 공적 뿐.
플랜 B는 시체의 마녀가 알고 있던 대로의 작전이 아니었다.
동시에 단순한 후퇴전략 또한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분노의 눈이 먼 티페레트 공작을 따돌리는 술수였을 뿐이다.
이 미궁에 있는 보물은 티페레트 공작만이 아니었다.
본래 사달멜리크가 맡기로 했던 남자 마녀 쪽이 길을 잃고 헤매고 있다.
티페레트 공작을 당장 처단하진 못했지만, 제자 쪽을 확보한다면 얼마든지 2차 3차 계획으로의 연결이 가능하다.
“자, 내 일은 끝났어. 도와줄까?”
“필요 없다. 먼저 떠나라.”
“그래도 돼?”
“5분 뒤까지 합류지점으로 가겠다.”
“늦으면 먼저 갈 거야?”
시우가 어찌해 볼 사이도 없이 세 명을 챙겨 사라지는 침묵의 마녀.
차마 그 셋을 데려가는 마녀를 만류할 수 없었다.
어차피 이러한 강적들을 상대로 셋을 챙겨 탈출하는 건 무리다.
저기에 누워있는 게 샤론과 쌍둥이었다면 목숨을 걸어서라도 방법을 만들었겠지만, 제 한 몸 건사하기 힘들어 보이는 상태에서 그런 만용을 부릴 생각은 없다.
“…….”
“…….”
검의 린네는 묵묵하게 검을 앞으로 겨누었다.
본디 그녀에게 이것은 전투도 무엇도 아니었다.
티페레트를 다시 끌어내기 위한 미끼를 줍는 정도의 감상에 불과했다.
최초의 남자 마녀고 뭐고 관심 없다.
그만큼 형편 없이 약할 것이라 생각했으니까.
뻔한 강함을 지니고 있을 상대는 린네의 주의를 조금도 끌지 못했다.
그러나 기습적인 공격을 받아내는 남자 마녀를 보며 생각이 바뀌었다.
분명 사각에서 소리 없이 가한 일격이었다.
어지간한 마녀라면 깔끔하게 제압당했을 기습을 놈은 깔끔하게 대처했다.
더군다나 갑옷을 만들어낸 뒤 창을 들어 올린 모습이 예사롭지 않다.
위계의 고저를 논하고자 함이 아니라, 무인으로서의 단련된 경지를 논하는 것이다.
그저 자세를 취하는데 그치지 않고 전반적으로 고르게 펼쳐져 있는 기감.
어느 곳에서 공격이 오더라도 대처 가능한 안정적인 디딤발.
흔들리지 않고 곧게 뻗은 창끝까지.
과연 티페레트의 제자라더니 감탄이 절로 나오는 절제된 동작이다.
린네는 이름을 물었다.
그녀가 상대할만한 자라고 판별했을 때만 오가는 문답은, 일종의 의식이다.
“이름은?”
“…신시우.”
“나는 린네 사마키엘이다.”
아직까진 미궁이 제 역할을 해주고 있는 듯하지만 언제 티페레트가 튀어나와 훼방을 놓을지 모르는 상황.
전투를 길게 끌고 갈 생각은 없었다.
린네는 곧장 자세를 낮추고 발도세를 취했다.
일격으로 결판을 낼 예정이다.
유연하게 뻗은 그녀의 몸 주위로 스산한 안개가 퍼졌다.
그녀의 검술을 지탱하는 핵심 마법은 ‘관성 제어’ 뿐이라지만, 22 위계의 마녀에게 재주가 그것밖에 있을 리 없다.
서서히 번지는 끈끈한 안개에 가라앉는 사위.
이 ‘홑안개’는 마법 운용을 강력하게 제한하는 입자 마법이다.
비유하자면 새하얀 도화지 위에 그림을 그려야 하는데 그 위에 한껏 먹물을 흩뿌리는 셈.
피아를 가리지 않고 특정 종류의 마법에 제한을 건다.
홑안개 안에서 지장 없이 사용할 수 있는 마법은 신체 강화처럼 영체와 일체되어야 하는 마법 뿐.
즉, 근접전의 스페셜리스트인 린네에게 아주 유리한 무대가 완성되는 것이다.
티페레트 공작에겐 아무 의미가 없는 술식이지만 일반적인 마녀에겐 아주 유효한 마법이었다.
시우는 그 모든 것을 한 눈에 간파했다.
상대는 단숨에 결판을 지으려 한다.
이 안개는 처녀의 베틀, 차원이동식 등 체외에서 마력을 운용해야 하는 마법에 막대한 지장을 준다.
그렇다면 조금 전 했던 것처럼 천사의 고리를 사용한 뒤 신체를 강화한다.
남은 건 오롯이 누구의 근접 전투 능력이 더 뛰어나느냐가 관건.
전력으로 맞받아치지 않는다면.
죽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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