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5
1.
새하얀 검날이 서늘하게 울었다.
이미 몇 차례고 적의 급소를 향해 휘둘러진 계약검은 번번이 제 역할을 다하지 못하고 공중에 불똥을 튀었다.
-쾅! 콰앙! 콰아앙!
“후읍!”
엘로아가 호흡을 들이마시자 작은 체구가 더욱 움츠러들어 극속으로 회전한다.
회전이 임계점에 달하였을 때 원심의 가속을 이용해 떨쳐진 검이 태도와 재차 격돌했다.
많은 마녀들이 이 광경을 본다면 경악을 금치 못할 것이다.
마녀이면서 모든 마법을 근접 전투를 위해 개조시킨 티페레트 공작.
23 위계인 그녀가 전력을 다한 검격을 다름 아닌 ‘검’으로 맞받아치는 상대가 있다니 말이다.
허나 상대가 누구인지를 깨닫게 된다면 고개를 주억거리리라.
‘검의 마녀’, 린네 사마키엘.
티레레트와 마찬가지로 상당히 이단적인 전투 방식을 채택한 22위계의 공적이자,
외날의 직도를 예장 삼아 숱한 강자를 베어온 마녀.
마녀 사회의 안정을 위해 헌신한 티페레트의 검이 경외의 대상이라면,
아집을 위해 휘둘러진 린네 사마키엘의 검은 공포의 대상이다.
때로는 공적을, 때로는 게헨나의 귀족을, 때로는 호문쿨루스를 대상으로 무차별적으로 휘둘러지는 검의 목적은 오직 ‘강함’의 추구.
그 목적을 위해 얼마나 많은 마녀의 목이 그녀의 발치에서 나뒹굴었을지는 본인만이 알 일이다.
다만 확실한 게 있다면 시체의 산을 쌓아가며 완성된 그 검술은 엘로아에게도 위협적이다.
———!
이미 무위로 돌아간 엘로아의 검로를 타고 뱀처럼 찔러 들어오는 검.
흉흉한 기색에도 아무 소리 없이 스며든 검격은 목과 심장을 두 갈래로 노리고 있다.
만일 한 쪽을 섣부르게 막으려 든다면 고스란히 방향을 틀어 빈틈을 노리겠지.
예리하고 합리적인 검로와 달리 진흙처럼 달라붙어 오는 끈적끈적한 검술이다.
엘로아는 몸을 뒤로 빼며 이지 선다 자체를 무위로 돌리길 시도했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방향을 완전히 바꿔 더욱 깊게 찔러오는 태도.
인체 구조상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역동작임에도 불구하고 감속도, 몸에 무리가 가는 기색도 전혀 없다.
물리법칙을 위배하는 관성 제어.
린네의 자성마법이자, 그녀의 검이 까다로운 이유다.
적용의 범위는 그리 넓지 않아 제 몸에서 일어나는 관성작용을 자유자재로 컨트롤하는 수준에 그친다.
하지만 언뜻 보기에 별것 아닌 능력이 달인 급의 검술과 융합하면, 그 결과물은 실로 흉악해진다.
현실에서는 존재할 수 없는 검술이 탄생하는 것이다.
왼쪽으로 사라졌던 검이 곧장 아래에서 위로 솟구치거나, 분명 튕겨냈던 검이 아무런 감속 없이 목덜미를 향해 날아온다.
린네는 빈틈을 내보여도 공격을 회수하면 그만이니 리스크 없이 검을 휘두를 수 있다.
반대로 엘로아는 조금의 빈틈만 보인다면 치명적인 카운터가 돌아오니 행동에 제약이 생긴다.
자연스럽게 불쾌한 싸움을 할 수밖에 없다.
-챙!
엘로아와 린네의 신형이 교차했다.
“…….”
뒤늦게 찾아오는 화끈한 통증과 엘로아의 뺨에 가늘게 그어지는 실선.
반면 엘로아는 빗겨 지나가며 린네의 허리를 베었다.
만약 이 전투가 둘만의 것이었다면 린네는 내장을 바닥에 쏟으며 쓰러졌을 것이다.
못해도 전투에 지장이 갈 치명상을 입혔겠지.
하지만 손에 전달된 것은 살을 베는 감촉이 아니었다.
단단한 무언가가 부서지는 감촉이었다.
이미 몇 차례나 승리를 거두었던 검의 마녀를 상대로 엘로아가 15분 넘게 고전을 면치 못하는 이유.
그것은 조력자로 붙어있는 두 마녀 탓이다.
먼저 이 감각의 정체는 아마도 ‘시체의 마녀’가 사용하는 ‘뼈 방패’.
소위 네크로맨서라는 단어를 들으면 떠올릴 법한 ‘시체의 마녀’답게 한 구의 시체를 대가로 단단한 방패를 소환해주는 마법이다.
여기서 엘로아가 ‘아마도’라고 추측을 하는 이유는 거리가 벌어진 린네의 모습을 육안으로 확인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다시 어둠 속에 덩그러니 남겨진 엘로아는 호흡을 가다듬으며 사방 어디선가 쏟아질 공격을 차분히 기다렸다.
무덤덤한 살의를 품은 분홍빛 눈동자 속에 불꽃이 피어난다.
“빨리 어떻게 좀 해봐!”
“왜 아직도 못 죽이는 건데?”
엘로아도 나름의 고생을 하고 있었지만, 그걸 지켜보는 시체의 마녀와 침묵의 마녀가 느끼는 감정 또한 평온하진 않았다.
저게 정녕 같은 마녀란 말인가?
벌써 시체 3구를 썼다.
다른 모든 기능을 배제하고 방어에만 집중한 뼈 방패가 3번이나 박살 났다는 의미다.
심지어 전투에 개입하고 있는 건 시체의 마녀뿐만이 아니다.
“저주 제대로 걸고 있는 건 맞아?”
“맞다니까? 반쯤 장님이나 다름없어. 너야말로 더 쓸만한 마법은 없는 거야?”
“입 닥쳐! 지금 준비 중인 거 알잖아.”
엘로아에겐 이미 저주와 사슬이 특기인 ‘침묵의 마녀’의 ‘가라앉는 나비’가 걸려있었다.
피저주자의 오감을 완전히 차단하는 저주 계열의 마법.
원체 위계가 높은 데다가 ‘진실의 눈’까지 보유한 엘로아지만 이미 다른 싸움에 임하는 중으로 해주에 집중하기 어려웠다.
따라서 가라앉은 나비는 엘로아의 시청각 및 마력 탐지의 범위를 1M이내로 착실히 좁혔다.
지금 그녀는 검을 맞댈 정도로 가까운 간격이 아니면 상대의 위치를 파악하기조차 어려울 것이다.
그런데도 당하기는커녕 변함없는 기백을 흩뿌리고 있다.
그 시점에서 같은 의문이 생길 수밖에 없다.
“이거 정말 이길 수 있는 건 맞아…?”
“사마키엘! 뭘 꾸물거려! 빨리 가서 싸워! 이러다가 저주 풀리잖아!”
묵묵히 태세를 가다듬던 린네가 뒤로 살벌한 시선을 뒤로 던진다.
과묵하고 감정 기복이 거의 없는 그녀지만 이 상황 속에 느끼는 감정은 격정 그 자체다.
시기, 질투, 분노.
이토록 유리한 고지에서 싸우고 있는데도 티페레트의 장벽을 허물지 못하고 있다니.
“…또 앞서 나가는군.”
아니.
그게 아니다.
린네가 알고 있던 티페레트라면 지금쯤 분명 수세에 몰렸을 터다.
아무리 수비 일변도로 응하고 있다 한들 깊은 자상 정도는 남겼겠지.
그러나 20년 전 이미 완성된 줄로만 알았던 티페레트는 더욱 강해져 있었다.
마치 기술적으로 비슷한 수준의 검사와 끊임없이 겨뤄왔던 것처럼 말이다.
또 이렇게 멀어져 간다.
저열한 질투와 분노와 달리 린네는 냉정하게 판단을 끝냈다.
준비했던 플랜 B를 시행해야 한다.
“시체, 준비해라.”
“그냥 빨리 좀 하지! 제물만 버렸잖아!”
어둠 속에 남겨져 있던 엘로아는 공격이 이어지지 않는 틈을 타 해주에 집중했다.
어두웠던 시야가 천천히 밝아지며 성둥 잘려나갔던 인지 능력이 되돌아왔다.
“좋아, 지금이야!”
그 앞엔 티페레트를 상대하기 위해 비장의 마법을 준비한 시체의 마녀가 의기양양한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가장 먼저 엘로아의 눈에 들어온 것은 너무도 익숙한 누군가의 모습이었다.
연습용 검을 든 마녀.
찰랑거리는 머리카락과 엘로아의 것처럼 분홍빛으로 빛나는 눈동자.
아니, 빛난다기에 그 눈동자는 너무도 생기가 없다.
마치 시체를 되살려내기라도 한 것처럼.
단 한 순간도 잊어본 적 없던.
한때 실수로 잃고 말았던.
라피 티페레트.
“어때? 옛 제자를 상대로도 검을 휘두를 수 있겠어?”
이것이 플랜 B.
티페레트의 동요를 이끌어 내어 빈틈을 벌리는 방법.
에아 사달멜리크의 기억에서 추출해 낸 형상을 ‘죽음의 기사’ 위에 재현하는 것이다.
조사에 따르면 티페레트는 심리적으로 유약하며 제자의 죽음에 대한 극심한 트라우마를 겪고 있다.
그런 그녀가 되살아난 제자가 자신을 향해 검을 휘두르는 걸 보면 어떤 혼란을 겪을까?
아마 검을 맞대려고도 하지 않을 것이다.
비록 사역마라지만 죽음의 기사는 시체의 마녀가 자랑하는 최고의 사역마.
팽팽한 균형을 이루고 있는 싸움에서 이만한 심리적 동요와 걸림돌이 생겨난다면 아무리 티페레트라고 해도 더욱 어려운 싸움이 될 터.
그러한 생각을 지니고 있던 시체의 마녀는 자신의 판단이 명백히 잘못되었음을 깨달았다.
“————!!!”
새끼를 잃은 짐승처럼 포효하기 시작한 티페레트.
본디 구슬픔으로 시작했던 울부짖음에 미소 짓던 시체의 마녀는, 이내 등골을 긁어내는 듯한 오싹함에 표정이 굳었다.
눈이 뒤집힌다.
관용구로나 쓰이는 저 표현을 실제로 볼 수 있게 될 줄은 몰랐다.
시뻘건 핏발이 선 눈으로 끔찍한 만행의 원흉을 단번에 지목한 티페레트.
빽빽한 살의로 가득한 시선과 마주하자 맨몸으로 맹수 앞에 선 것처럼 다리에 힘이 풀린다.
“이, 이 시발….”
쫄 것 없다.
코앞만 보게 되는 분노도 분명한 동요다.
이 틈을 노려 침묵의 마녀가 검의 마녀가 한 건 해준다면….
“니들은 뭐하고 있어!”
구명줄을 찾듯 뒤늦게 두리번거리던 시체의 마녀는 자신이 처한 상황을 다시금 확인해야 했다.
두 사람이 없다.
혼자 남았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명백했다.
그 둘은 시체의 마녀가 마법을 행사하느라 정신없는 틈을 타 도망쳤다.
애초에 플랜 B라는 건, 그녀를 미끼로 사용하고 나머지 인원이 도주하는 계획이었던 것이다.
-까드드득
엘로아의 손이 부서지라 검병을 움켜쥐었다.
도망친 다른 인원에 대한 생각은 말끔하게 증발한 뒤였다.
눈에 비치는 것이라고는 사랑하는 제자의 사후마저 희롱하는 악독한 공적을 쳐죽이는 일뿐.
검신에 새겨진 12개의 문자가 단번에 빛난다.
“마, 막아!”
어떻게든 티페레트를 저지하려던 시체의 마녀.
유감스럽게도 죽음의 기사는 티페레트의 옷깃에조차 스치지 못했다.
본인조차 제대로 인지할 수 없는 속도로 도약한 엘로아가 검을 휘둘렀다.
“아….”
멍한 눈으로 잘려나간 팔을 보는 시체의 마녀.
너무도 예리한 검격은 통증을 느낄 기회조차 주지 않는다.
삐져나온 장미 가지를 손질하듯 너무나도 손쉬운 절단은 도무지 신체 일부가 결손되는 과정이라고는 믿어지지 않는다.
물리적으로 감지할 수 있을 법한 흉흉한 살기 속, 티페레트 공작을 보며 시체의 마녀는 깨달았다.
세 사람을 상대할 때조차 그녀는 전력을 다한 게 아니었다.
확실한 승기를 잡기 위해 힘을 비축하고 있었을 뿐.
트라우마를 자극하여 도발하고 주의를 돌리라니 가당치도 않다.
애초에 건드리면 안 되는 상대였다.
무슨 방법을 써도 이런 괴물에 대적할 수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언제나 후회는 아무리 빨라도 늦은 법이다.
시체의 마녀가 마지막으로 본 장면은 수 백 개의 새하얀 검격이 시야를 한가득 채우는 장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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