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4
1.
한바탕 전투가 끝났다.
화려하다는 말을 들을 정도는 못되어도 그럭저럭 구색을 갖추고 있던 연회장은 폭격에 휘말린 폐허처럼 변했다.
“후우….”
시우는 갑옷을 해제하고 방금의 전투를 되살폈다.
낌새를 눈치채자마자 초격으로 리타이어 시킨 두 명은 논외로 치더라도, 20 위계 대마녀와의 전투.
결과는 시우의 압도적인 KO승이었다.
대강 비유하자면 실골 때부터 챌린저와 매칭되던 고난의 나날을 이겨낸 성과이리라.
20 위계만 되어도 마녀 전체 인구를 통틀어 상위 1%.
그런 상대에게 붉은가지와 리본도 제대로 활용하지 않고 천사의 고리만으로 승리를 받아냈으니 말이다.
“스승님 말씀 틀린 거 하나 없다니까.”
엘로아가 항상 강조하던 말이 있다.
‘상대보다 항상 강할 필요는 없네. 승부를 결정지을 한 수에 상대를 능가할 수 있다면 충분하지.’
바로 이것.
그런 의미에서 이번에 도로시에게 받게 된 천사의 고리는 스승님께 사사한 전술교리를 가장 효율적으로 선보일 수 있는 좋은 마법이었다.
비록 한순간이지만 아득한 능력치 도핑을 하는 게 가능하다.
수은의 마녀도 이런 폭발적인 오버클럭을 예상하지 못했기에 저리 허무하게 당해버린 것 아니겠는가?
“…….”
물론 장점만 있다는 건 아니었다.
천사의 고리는 분명 훌륭한 도핑기였지만 그만큼 커다란 대가를 요구했다.
평상시 수 배에 달하는 격렬한 움직임과 막대한 마력을 사용한 까닭에 발생한 과부하는 지금도 착실히 시우의 몸에 피드백되고 있었다.
전신의 근육이 비명을 지른다.
마력 회로가 작열하는 통증이 심장이 뛸 때마다 몸을 들쑤신다.
천사의 고리를 사용한 시점부터 전투의 끝맺음까지 걸린 시간.
“고작 2초….”
그 짧은 시간 만에 상태가 이 지경이다.
이 추세로 보아 후유증을 걱정하지 않을 정도면 5초, 다소 자상을 고려해도 10초 정도가 한계로 보였다.
“그나저나 어쩌지.”
폐허의 가운데 이리저리 너부러진 세 마녀가 보인다.
창대에 허리를 얻어맞고 테니스공처럼 날아간 수은의 마녀.
눈을 하얗게 뒤집고 기절한 마녀 하나와 이상한 자세로 몸이 꼬인 채 누워있는 또 다른 마녀.
일단 추방자인 그들이 시우에게 위해를 가하려 했던 정황은 확실하다.
아마 시우가 전투에서 승리하지 않았다면 어떤 식으로든 제 욕망을 채웠을 것이다.
그러나 악감정이 남느냐 하면… 그저 그렇다.
생각보다 너무 손쉽게 이긴 탓일까? 아니면 지금까지 상대했던 공적에 비하면 악랄함이 덜한 탓일까.
일단 그림자를 뽑아내 세 마녀의 목에 목줄을 채웠다.
그림자를 자유자재로 다루는 건 특기이니 유사시 안쪽으로 가시를 생성한다면 폭탄 목걸이와 같은 역할을 해줄 것이다.
그때 부스스 일어나는 수은의 마녀.
처음의 고상한 모습은 간데없이 온몸에 분진을 덕지덕지 묻히고 있는 그녀는 ‘으으으으’하는 기묘한 소리를 내며 얻어맞았던 허리를 더듬다 시우와 눈이 마주쳤다.
“…….”
그리고 곧장 뱀을 마주한 개구리처럼 얼어붙는다.
“움직이지 마세요. 조금이라도 저항하는 기미가 보이면 그대로 죽일 테니까.”
의도적으로 차갑고 냉정하게 말했다.
정신을 차리자마자 반항하는 것도 곤란했다.
차라리 겁을 주는 편이 낫겠지.
“아….”
정신을 잃었던 앨리스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물었다.
“마, 마냐와 말리샤는…?”
아직 경황이 없어 보이는데도 소중한 물건을 흘렸다는 사실을 깨달은 양 상실의 공포에 젖은 모습.
턱짓으로 두 사람의 위치를 알려주자….
“마냐! 말리샤!”
벌떡 일어나 두 사람에게 달려가는 앨리스.
시우에겐 완전히 등을 보인 채 그들의 상태를 살핀다.
시우는 마법의 흐름을 읽을 수 있는 눈이 있기에 알고 있었다.
앨리스가 제 한 몸만을 빼낼 목적으로 마법을 사용했다면 높은 확률로 도주가 가능했을 것이다.
적잖은 수준 차이가 있더라도 전력으로 도망가는 마녀를 추적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의 마법은 애초에 혼자 도망간다는 선택지를 배제한 채 펼쳐졌다.
그리고 그 이유는 아마 저 두 사람을 위해서겠지.
이런 거 보면 또 마냥 나쁘기만 한 사람은 없다는 생각도 든다.
시우가 세 마녀에게 딱히 엄청난 분노를 느끼지 않는 이유기도 했다.
도로시 때 처럼 사정을 들어보면 이해할 수도 있으니 말이다.
“후우….”
두 사람이 크게 이상이 없다는 걸 깨달았는지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앨리스.
혹시 모를 수작을 방지하기 위해 가까이 다가서자 몸을 휙 돌린 앨리스는 아기 새를 감싸는 어미처럼 팔을 활짝 펼쳐 보이며 시우의 접근을 제지했다.
“오, 오지마…!”
갈라진 목소리나 이미 패배 근성에 젖은 눈동자나 처음의 건방진 위세는 없다.
“우릴 어떻게 할 셈이야….”
간신히 쥐어짜 낸 용기.
앨리스는 이를 꽉 문 채 시우를 쏘아보았다.
다만 살인마 앞에서 벌벌 떠는 예비 피해자의 모습이라 꼭 이쪽이 나쁜 놈이 된 기분이었다.
“그건 지금부터 이야기해봐야죠.”
은근한 협박을 하려는 게 아니라 진심이었다.
솔직히 세 사람을 어떻게 할지는 아직도 고민된다.
스승님께 인계하는 게 기본 방침이긴한데….
그렇게 된다면 호문쿨루스를 잡아야 하는 와중에 달랑달랑 꼬리를 달고 다녀야 한다는 게 성가시다.
그렇다고 놔주기엔 일단 범죄를 저질렀으니 처벌을 받게 해야 할 것 같다.
이 경우 어떤 처벌이 주어지는지는 잘 모르지만 말이다.
“흐음….”
돈으로 합의를 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마녀들은 죄다 부자니까 80억 정도는 충분히 내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굳이 호문쿨루스를 잡지 않아도 르뤼에의 기부금을 마련할 수 있고, 범죄를 저지른 추방자를 때려잡고 얻어낸 돈이라면 큰 장모님께서도 인정해 줄 것이다.
“그럼….”
“자, 잠깐만 내 말 좀 들어봐.”
그때 별안간 큰 목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아직도 저렇게 기운차게 말할 기력이 남아있다는 게 신기할 따름이다.
“네, 뭐. 하세요.”
“…습격해서 미안해.”
“당연히 그래야죠. 어쩌자고 이랬어요?”
“…파, 팔려고….”
“누구한테요?”
“돈 많이 주는 사람한테….”
십분 예상했던 바라 놀라울 것도 없다.
“맨입으로 사과하려는 건 아니야.”
“저도 공짜로 봐 드릴 생각은 없습니다.”
당연히 해야 할 보상을 거창하게 말하는 앨리스와 퉁명스럽게 답하는 시우.
이제 돈이나 좋은 마법 아이템 같은 걸 내준다고 약속하면 감사히 받을 예정이었는데….
“웃….”
입술을 질끈 물던 엘리스는 청결의 마법을 사용했다.
패배한 그녀에게 그럴듯한 마법을 사용할 마력은 남아있지 않았기에 그냥 내버려 두었다.
잔뜩 뒤집어썼던 먼지가 사라지자 드러나는 고고한 모습.
다만 잔뜩 주눅이 들고 겁을 집어먹은 표정이 애처롭기까지 하다.
“엥?”
앨리스는 눈을 감더니 단추가 튕겨져나갈 기세로 블라우스를 펼쳐 보였다.
하얀 블라우스 너머로 비쳐 보이던 검은 속옷이 그 아래 모습을 드러낸다.
손가락 하나만 살짝 걸쳐 내려도 젖꼭지가 ‘안녕!’ 할 것 같은 야릇한 란제리다.
음, 대충 D컵.
“나, 나는 어떻게 해도 좋아…! 모두 내가 계획한 거야.”
앨리스가 가늘게 떨리는 목소리로 말할 때마다 벌겋게 익어가는 목덜미.
이게 뭐하자는 건지….
“뭐에요. 이게?”
“어차피 날 강간할 셈이었지?”
“네? 아닌데요.”
“거짓말 하지 마! 나처럼 예쁜 마녀가 무력한 상태로 있는데 손가락도 대지 않는다고? 믿을 수 없어!”
시우는 어안이 벙벙했다.
물론 앨리스와 관계를 나눈다면 쓸만한 마법을 건질 수도 있다.
20위계나 되니 꽤 확률이 높은 가챠 보지인 셈이다.
하지만 강간이나 다름없는 행위를 자행하며까지 강해질 생각은 없다.
하물며 몸으로 값을 치르게 할 생각도 없었다.
이미 복잡한 여성 편력에도 시우만을 바라봐주는 나머지 연인에게 무슨 변명을 할 수 있겠는가?
무엇보다 시우는 연구를 거듭하며 마법 복사가 만능이 아니라는 점이 차차 밝혀지고 있었다.
천사의 고리처럼 기존 마법과 상성이 잘 맞는 경우에는 시너지를 내며 레벨 업이 가능하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 경우도, 가령 작은 장모님의 마법 같은 경우는 딱히 전투에 활용 못 하고 있지 않은가?
이처럼 앨리스의 마법은 연금술을 기반으로 한 것.
시우의 스타일과는 제법 떨어진 마법이다.
그런 마법을 빼앗을 경우 블록을 옆으로 줄줄이 나열해 스펙트럼을 넓힐 수는 있어도, 상승을 위한 자원으로는 부족하다는 의미다.
“당신이 시키는 건 뭐든지 할게…. 그러니까…. 이 아이들은 건드리지 말고 보내줘….”
그런 사정은 아랑곳 않은 채 치욕을 삼키며 간절히 부탁하는 앨리스.
어이가 없어 입을 다물고 있던 시우가 입을 열려던 찰나.
“남자 마녀님, 차라리 절 마음대로 해줘요! 제가 앨리스 언니보다 더 가슴도 크고 골반도 넓어요….”
정신을 잃은 줄로만 알고 있던 마냐가 벌떡 일어나며 앨리스의 팔을 붙잡았다.
“맞아! 우리가 더 맛있어.”
마찬가지로 죽은 체하고 있던 말리샤가 벌떡 일어나 시우에게 외쳤다.
당황하던 앨리스가 답답하다는 듯 둘을 향해 소리쳤다.
“뭐하는 짓이야! 그냥 계속 쓰러진 척하고 있었어야지!”
“그렇지만! 앨리스 언니가 더럽혀지는 걸 두고 볼 수는 없었어요….”
“저희한테 맡겨주세요. 매일 저희를 위해서 열심히 일하셨잖아요.”
“저희는 양성애자니까…. 언니보다 거부감이 덜할 거에요. 제 한 몸바쳐서 언니를 구할 수 있다면…. 저는 백번이라도 할 거에요.”
“마냐…. 말리샤….”
평소 표독스럽기 그지없는 앨리스의 표정이 왈칵 치밀은 눈물과 함께 헝클어진다.
철없기만 하던 바보들이 언제 이렇게까지 생각할 줄이야.
감동이 아닐 수 없었다.
이 세 여자의 머릿속에 이미 시우가 세 사람을 일렬로 세워놓고 한 번씩 박는 게 기정사실로 되었던 모양이다.
“이 고집불통 머저리들….”
세 사람은 떨떠름한 표정을 짓고 있는 시우를 뒤로하고 뜨거운 포옹을 하며 서로의 사랑을 확인했다.
마냐와 말리샤가 날카로운 눈빛을 하고 일어섰다.
“거기 남자 마녀! 이 누님이랑 한 번 하면 다른 마녀에겐 눈길도 가지 않을걸?”
“우리 두 사람이라면 앨리스 언니를 대체하기 충분하겠지?”
“마녀는 위계가 전부지만, 여자는 속살이 얼마나 야들야들하냐라고.”
“…….”
그만 이 신파를 끝낼 때가 되었다.
“아뇨, 몸 말고 위자료 넉넉하게 내놓으세요.”
시우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손바닥을 내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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