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녀의도시-633화 (633/917)

#633

1.

“스으읍….”

호흡음.

언뜻 증기 소리 같기도 하고, 바람 빠지는 소리 같기도 하다.

앨리스는 상황에 맞춰 얼추 비슷한 추측을 도출했다.

쿵푸 뽕을 과하게 맞은 무도가들이 내기 축적이니 발경이니 헛소리를 하며 시연할 때 내는 소리.

딱 그 소리와 닮았다.

아무리봐도 웃어넘길 상황이었다.

겉멋 든 꼬맹이의 발악이라고 여긴 마냐와 말리샤도 폭소를 터뜨리려 하고 있지 않은가?

하지만 앨리스의 직감이 경고한다.

특유의 호흡음을 듣는 짧은 순간 삐쭉 서는 잔털.

심장을 짓누르는 중압감.

척수를 얼려버릴 것처럼 등골을 타고 흐르는 한기.

신체 말단의 저릿거림.

“마냐! 말리샤! 물러서!”

-쩌엉! 쾅!

언제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처럼 가중되던 긴장감이 폭음 속에 격발한다.

세계 최고의 피겨스케이터처럼 공중에서 몇 차례나 회전하는 마냐와 ‘데샤아아앗!’ 비명을 지르며 날아 떨어진 말리샤.

전투의 냄새를 맡고 각성한 시야에 느릿하게 흐르는 장면을 엘리스는 똑똑히 보았다.

놈이 숨을 삼킨 즉시, 금빛의 마력이 불타오르듯 번졌다.

굳게 지면을 내려친 진각이 돌 바닥을 박차는 순간 빛살같이 회전한 손등이 마냐의 복부를 강타.

이어 반대편으론 팔꿈치가 철판을 때리는 굉음과 함께 말리샤의 가슴팍에 작렬했다.

일련의 동작은 앨리스가 ‘물’이라는 음절을 끝맺음하고 ‘러’라는 음절을 시작하려는 사이에 이루어졌다.

즉, 고작 반 음절을 발음하는 찰나에.

“후우…. 피어라.”

숨을 정리하듯, 호흡을 내뱉으며 영창을 읊는 남자.

그의 몸을 휘감은 먹빛의 그림자가 갑주로 변모한다.

앨리스를 향해 치켜든 좌안에는 금빛의 마력 반사광이 불똥처럼 떨어지고 있었다.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지?

비명과 절규를 삼키면서도 앨리스의 판단은 재빨랐다.

그녀의 손은 이미 품속을 파고들어 ‘수은의 씨앗’이 든 병을 바닥에 던지고 있었으며, 그와 최대한 거리를 벌리며 좀 전의 상황을 곱씹고 있었다.

마냐와 말리샤가 각각 한 방에 손쓸 새도 없이 당했다.

마냐는 17위계 말리샤는 18위계.

각자 은폐와 봉인에 특화된 마녀로 전투에 최적화된 자성마법을 지녔다고 보기엔 어렵다.

그러나 자율방어가 활성화되기엔 충분한 경지이며, 실제로 그의 공격이 적중하는 순간 자율방어는 오차 없이 발동했다.

그러나 그는 자율방어를 맨손으로 찍어 누르며 순식간에 둘을 제압했다.

잡념을 길지 않았다.

왜냐하면 바로 앞에 무시무시한 기세로 들쳐 맺던 창을 휘두르는 놈의 모습이 보였기 때문이다.

“무궁한 변화여!”

앨리스는 빠르게 냉정함을 되찾고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순식간에 판별했다.

그렇게 내려진 판단은, 근접전은 피해야 한다는 것.

고작 1세대 마녀에 불과한 놈이 어떻게 저런 무위를 선보일 수 있는지는 뒤에 생각할 일이다.

비앙카를 상대로 호각의 전투를 선보였다는 둥, 이미 대마녀의 경지에 이르렀다는 둥 헛소문으로 치부했던 소문이 진실일지 모른다는 충격도 나중에 감당할 일이다.

앨리스의 본능이 고함치고 있었다.

일단 저놈이 달라붙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꿀렁!

‘수은의 마녀’답게 수은을 무장으로 사용하는 앨리스.

그녀가 미리 지면에 뿌려두었던 연금시약은 수천 리터에 달하는 수은으로 화해 꿈틀거렸다.

앨리스의 마력에 화답한 수은 웅덩이가 크게 출렁이더니 거대한 장벽처럼 변해 양자의 간격을 가로지른다.

급박한 상황인 터라 제대로 된 방패의 형태를 갖추진 못했다.

덩어리처럼 쌓아놓은 것에 불과하다.

하지만 원체 수은이란 상온에서 흐르는 금속.

자체의 무거운 비중과 유체조작에 통달한 앨리스의 자성마법이 더해지면 그것만으로 어지간한 공격은 상쇄할 수 있는 최고의 장벽이 되는 것이다.

-콰아앙!

그 위로 가해진 무지막지한 일격이 앨리스의 안일함에 일갈한다.

창격을 받아낸 장벽이 비스듬하게 찢어져 버린 것이다.

수은 특유의 반짝임 너머로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는 놈의 모습이 보인다.

“말이 돼?!”

연이어 뒷걸음질치며 저도 모르게 소리치고 말았다.

믿어지지 않는다.

순수한 완력만으로 이딴 짓이 가능하다니.

수은의 비중은 물의 13.6배.

이 장벽의 무게만 해도 100t에 가깝다.

이만한 유체에 전력으로 부딪쳤으면 그 기세가 조금 죽을 법도 한데 놈은 불도저처럼 밀어내며 접근하는 것이다.

그래도 가장 위협적일 일차 공격을 저지한 건 고무적이다.

앨리스는 양옆에 시약을 연달아 깨뜨리며 추가적인 수은을 생성해냈다.

이어 그저 덩어리에 불과했던 수은이 일정한 형태를 갖추며 그녀의 주위를 배회하기 시작한다.

어떤 것은 방울 그대로의 형태로.

어떤 것은 방패의 형태로.

어떤 것은 기창의 형태로.

어떤 것은 둥근 고리의 형태로.

행성 주위를 공전하는 위성처럼 앨리스의 주위를 휘감는 이 조화는 ‘수은 연금’.

초고주파로 수은을 조작해 일정한 형태를 갖추게 하는, 앨리스가 지닌 전투 방식의 알파이자 오메가다.

-쾅! 쾅! 쾅!

연이어 터져 나오는 굉음은 놈의 손과 발, 날카롭게 휘둘러진 창이 각종 수은 연금에 부딪히며 생겨나는 것.

일격 일격이 등골이 섬뜩해지는 공격이었다.

그러나 앨리스의 진면목은 방어전에 있다.

자유자재로 변화하는 수은은 360도 빈틈없이 물리적 공격을 차단하며 되려 육중한 중량으로 밀어붙인다.

수은과 수은 사이에 흐르는 초고주파는 그 자체로 재밍 성능을 보유하고 있다.

그가 내보인 폭발력은 앨리스에게 위기감을 안겨주었지만, 가장 위협적이었을 초격을 제지한 시점에서 일단은 안심이다.

-꿀렁 꿀렁 꿀렁

가장 먼저 뽑아내 그의 움직임을 저지하던 수은까지 완전히 통제한 앨리스.

시야를 가로막는 수은 덩어리가 사라지자 우두커니 서서 창을 겨누는 놈이 보였다.

“설마 이 정도일 줄은 몰랐어. 소문이 어느 정도는 사실이었다는 거네.”

남자 마녀에 대해 많은 관심이 쏠려 있는 만큼 많은 소문이 돌았다.

하지만 그것을 진지하게 믿는 마녀는 그다지 없었다.

그다지 신빙성 있는 내용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일신의 능력이 대마녀에 필적한다느니.

붕괴할 뻔한 게헨나를 막았다느니.

욕망의 마녀와 호각의 전투를 벌였다느니.

이걸 누가 믿을 수 있겠는가?

차라리 체스를 배운 지 일주일 된 침팬지가 그랜드마스터를 떡발랐다는 소문 쪽이 신빙성이 있다.

하지만 이렇게 눈으로 보아서야 인정할 수밖에 없다.

모든 전투 채비를 갖췄음에도 잦아들지 않는 불안감.

상대의 바닥을 알 수 없는 느낌은 실로 오랜만이다.

도망쳐야 한다.

훗날 그가 티페레트에게 돌아가 이 모든 사실을 일러바쳐 곤란해지는 일이 있더라도 일단 이 자리를 피해야 한다.

문제는 그 과정에서 마냐와 말리샤를 회수할 수 있는가인데….

앨리스는 목 뒤로 흐르는 땀을 느끼며 침을 꿀꺽 삼켰다.

잠깐의 소강상태가 끝났다.

앨리스는 지휘하듯 손을 휘적였다.

허공을 떠돌던 랜스가 놈을 겨냥해 쇄도한다.

머큐리 스피어.

그저 랜스 형태로 연금한 수은을 음속으로 쏘아내는, 앨리스에게는 평타 같은 마법이다.

“스읍!”

놈이 숨을 들이마시는 소리와 함께 일견 육중해 보이는 검은 갑주가 바람처럼 실내를 달린다.

-쾅! 쾅! 콰과광!

수십 자루의 창이 폭격처럼 실내를 휩쓴다.

대기를 떨게 하는 폭음과 일파만파 퍼져 나가는 분진.

그는 어렵지 않게 랜스를 회피하고 앨리스 주위를 떠돌며 빈틈을 엿보았다.

하지만 이 공격이 그저 일회성에 그친다고 판단했다면, 그것은 오판이다.

머큐리 스피어는 앨리스의 평타임과 동시에 콤보의 시동기였다.

본디 연금술의 강점이란 변화무쌍하게 형태를 바뀌는 마법으로 쉴 새 없이 적을 몰아세울 수 있다는 점.

-꿀럭!!!

지면을 박살내며 처박힌 랜스가 형태를 잃고 수은의 덩어리로 되돌아간다.

웅덩이처럼 펼쳐진 수은은 자연스럽게 마법진을 그리며 제2차, 3차의 연격을 자연스레 이어나간다.

흡사 수면으로 떨어진 물방울 하나가 연이어 파동을 그려내는 모습.

-휘익! 휘익! 휘이익!

유체 조작 연금의 정점에 선 앨리스답게 마법진에서 뽑아져 나오는 건 천변만화한 공격이었다.

은빛의 촉수 다발이 채찍처럼 매섭게 휘둘러진다.

산탄총처럼 사방을 향해 쏟아지는 수은 방울.

예상치 못한 곳에서 불쑥 튀어나오는 가시.

일반적인 수은보다 훨씬 치명적인 유기수은화합 증기가 놈을 향해 쏟아진다.

더불어 앨리스 주변에는 만전의 방어태세를 갖춘 수십 개의 방어 수단이 요격태세를 갖추고 있다.

이 연회장은 이미 앨리스의 수중에 들어 온 것이나 다름 없었다.

공간을 장악하는 자가 싸움에 승리한다.

앨리스의 전투 철칙에 따라 순탄히 흘러가는 싸움.

그럼에도 어쩐지 불안감이 가시질 않는다.

그만큼 그의 맹위는 놀라웠다.

사방에서 밀려드는 공격을 창으로 쳐내고, 기민한 몸놀림으로 흘려낸다.

보이지 않는 사각에서 이루어진 공격에도 당황하지 않고 대처한다.

10년도 되지 않은 어린 마녀, 그것도 초대 마녀인 주제에 실전을 수십 번은 겪었다고 말하는 듯한 원숙한 움직임.

그 뿐이 아니다.

종횡무진으로 휘둘러지는 저 붉은 창은 뭔가 위험하다.

그가 아직 제대로 활용하지 않음에도 불길한 기운을 풀풀 풍기는 붉은 창은 앨리스의 능력으로도 잠재력을 재단할 수 없는 예장이었다.

아마 저것까지 싸움에 개입한다면 그때는 승산이 없을 것이다.

같은 양상의 전투를 반복해 봐야 앨리스의 패배일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승부수를 던져야겠지.

“무궁한 변화여!!!”

사방팔방으로 흩어졌던 수은이 앨리스의 손으로 빨려 들어갔다.

중성자별에 이끌리는 운석처럼 빨려들어 응축되는 수은.

공간을 가득 메울 정도로 충만했던 수은이 앨리스의 손아귀에 담기자 고작 몇 리터 수준으로 줄어들었다.

에센셜 머큐리.

창이 되어 쏘아진다면 삼라만상의 만물을 꿰뚫고, 방패의 형상을 갖춘다면 주인을 위협하는 모든 공격을 방어해낼, 유체역학을 무시하고 집약된 수은의 정수.

생각해야 한다.

저 무지막지한 돌진을 저지하고, 앨리스의 몸을 지키며, 동시에 마냐와 말리샤가 휘말려 들지 않게 할 한 수를.

앨리스의 직감은 말했다.

셋을 전부 충족하는 건 불가능하다.

포기해야 하는 게 있다면….

그것은 방어.

“하아아압!”

에센셜 머큐리가 앨리스의 오른팔을 따라 거대한 랜스의 형상을 취한다.

정면을 겨눈 창끝은 흡사 거인이 휘두른 것처럼 강렬한 기세를 품고 놈을 향했다.

만약 놈이 이제껏 했던 것처럼 맞받아치려 든다면 산산이 부서진 랜스가 나무뿌리의 형태로 변모해 그를 붙잡아 줄 것이다.

물론 저 무지막지한 일격을 받아내야 하는 오른팔은 충격의 여파로 아작나겠지만 마냐와 말리샤까지 챙겨 도주하려면 이 방법 외엔 없었다.

통증을 각오하고 앙다문 입과 굳은 의지로 다져졌던 앨리스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우우우우웅!

그의 머리 위에 검은 고리가 떠올랐다.

정체불명의 고리가 기이한 가속음을 내는 순간 그의 신형이 사라졌다.

남아있는 건 앨리스가 전력을 다해도 발할 수 없는 압도적인 마력의 잔흔.

“공간마법…?”

아니다.

저건 단순히 빠르게 움직인 것에 불과하다.

그런 판단이 섰을 때, 등 뒤에서 번져오는 살기를 느꼈다.

모든 계획이 수포로 돌아갔음을 깨닫고 뒤를 돌아본 순간 앨리스는 보았다.

-쩌저저정!

한계를 가늠할 수 없이 강화된 육신.

이제 놈은 그저 이동만으로 공간을 찢고 부순다.

앨리스의 허리로 창대를 휘두르는 검은 기사를 저지하기 위해 배후에 펼쳐진 방어 수단들이 달라붙었지만,

단 한 번의 창격에 무위로 돌아갔다.

“빌어….”

-콰아아앙!

욕설을 내뱉을 시간도 없이 앨리스의 몸이 종이 인형처럼 휘날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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