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1
1.
-두웅!
이변의 시작은 떨림이었다.
중후하고 육중한 마력의 진동.
세계 위에 또 다른 세계가 덧그려지는 익숙한 위화감.
“준비! 준비!”
“꺄호! 드디어 왔다!”
불평 속에 한가로이 시간을 때우던 마녀들이 각기 완드, 지팡이, 예장 따위를 챙겨 들고 전투의 채비를 갖춘다.
다들 100M 달리기의 신호음을 기다리는 것처럼 희번들한 안광.
어떻게든 호문쿨루스를 먼저 토벌해 유산을 챙기겠다는 의지가 엿보인다.
시우 역시 붉은가지를 챙겨 들었으며 엘로아는 계약검을 공간에서 꺼내 들었다.
일단 심판 역할을 도맡게 된 엘로아지만 만에 하나 무력 충돌이 일어날 경우 제지하기 위함이었다.
그와 동시에 텁텁한 사막의 열사 위를 뒤덮는 미궁.
사실 미궁의 악마는 전투력 자체는 뛰어난 편이 아닌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럼에도 이름을 지닐 때까지 살아있을 수 있던 까닭은 미궁의 구조가 유달리 난해한 까닭이다.
토벌에 시도했던 마녀들이 길을 잃고 헤매던 중 토벌을 포기하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시우, 너무 조급해하지 말고 천천히 하게.”
흐릿한 형상을 그리며 완성되는 미궁 속 시우에게 조언을 건네려던 엘로아는 방금까지 옆에 있던 그가 신기루처럼 사라졌음을 깨달았다.
“시우?”
미궁의 악마는 미로를 만들었을 뿐만이 아니라 그 내부에 삼켜진 인원을 랜덤한 위치로 흩어버린 것이다.
이는 본디 미궁의 악마가 사용하던 수법이 아니었다.
명백히 그보다 두어 단계 발전해 있었다.
물론 미궁의 악마는 수백 년 만에 출현하는 호문쿨루스.
그간 능력에 약간의 진전이 생겼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쑥 치솟는 불안함에 엘로아는 모든 허위와 거짓을 꿰뚫는 관측형 마법, 진실의 눈을 개방했다.
“그럴 리가….”
그러나 수십 킬로미터 밖에 있는 책도 읽어낼 수 있는 능력이, 이면결계의 내외를 꿰뚫어보는 그 마법이 거짓말처럼 벽에 가로막힌다.
상하 좌우 어디를 둘러보아도 마찬가지였다.
설마 이 정도로 완벽하게 격리된 공간을 창조해 낼 줄은 엘로아도 예상치 못했다.
“뭐...?”
당황하던 엘로아는 연이은 불길함의 증조를 느꼈다.
그녀는 시우에게 12개의 계약 중 하나를 할애해 수호자의 계약을 걸어주었다.
사용자의 위치를 특정할 수 있으며 경우에 따라선 허가 없이 시각과 청각을 공유하는 게 가능한 계약.
일전 페리윙클과 거친 성교를 의도치 않게 엿보게 되었던 계약이었다.
하지만 만에 하나를 위해 걸어두었던 보험마저 덧없이 끊겨나갔다.
그토록 단시간 내에 시우가 당했을 리는 없다.
또한 엘로아의 계약이 그토록 허무하게 끊어질 리도 없다.
이 시점에서 엘로아는 망연히 떠올리던 제삼자의 개입을 확신했다.
23 위계 마녀의 마법을 파훼하려면 개입한 마녀 역시 그 수준에 걸맞은 능력을 보유하고 있다는 것.
“티페레트, 결착의 때가 왔다.”
그런 예상을 뒷받침하듯 어둠 속에 한 마녀가 걸어나온다.
검은 머리카락과 석유 방울처럼 끈적한 살기가 맴도는 눈동자.
비스듬히 기울여 쥐었음에도 발끝까지 닿는 대태도의 검날이 낭창거린다.
어깨너머로 넘실거리는 마력의 일렁임은 22 위계라는 드높은 경지에 어울리게 농밀하다.
“사마키엘.”
일이 단단히 잘못되었음을 깨달은 엘로아가 검을 고쳐 잡으며 나지막이 그 이름을 불렀다.
검의 마녀, 린네 사마키엘.
이명에서 짐작할 수 있듯 드물게 검을 주무장으로 사용하는 클리포트 출신의 공적이자, 마녀답지 않은 사고방식의 소유자였다.
갈구하는 건 오직 압도적인 강함.
마법도, 사업체의 운용도 일신의 힘을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소년 만화의 주인공으로 나왔다면 참 적당한 성정이자 목표이겠지만, 현실에서는 다르다.
그녀가 강함을 추구하는 방식은 자신보다 강한 상대를 베는 것.
세계 곳곳에서 칼부림하며 피의 길을 걸어가는 연쇄살인마에 불과했다.
실제로 저 태도에 스러져간 이들은 공식적으로 확인된 것만 두 자릿수.
그만큼 일신의 강함은 위협적이다.
엘로아가 과거 몇 번이나 토벌을 시도했음에도 결착을 내지 못한 채 보내주어야 했으니 말이다.
“처음부터 날 노리고 있던 겐가?”
역설적으로 엘로아는 일말의 안도를 느꼈다.
검의 마녀는 어딘가 비틀린 광인이지만 어떤 의미로는 지극히 정직한 상대다.
신용하고 추구하는 건 강함 뿐.
다른 공적들처럼 이것저것 잔재주를 부리거나 수작을 부리는 일 없이 정면에서 부딪쳐온다.
즉, 다른 공적이 앞에 있더라면 느꼈을 ‘그렇다면 시우는?’ 따위의 걱정은 잠시 접어두어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침묵을 지키는 린네 옆으로 나타난 두 마녀를 보기 전까진.
“와, 눈빛 봐. 정말 무섭다니까.”
“빠지려면 지금이라도 빠져.”
“싫어, 이런 좋은 기회가 또 어디 있다고.”
그들은 조금 전까지 추방자 측 숙영지에 잠자코 머물러 있던 마녀였다.
모습을 드러낸 두 마녀의 얼굴이 전혀 다른 자의 것으로 변모한다.
애초에 위장을 한 채 무리에 섞여 들어있던 것이다.
주요 공적의 이름과 얼굴을 모두 외우고 다니는 엘로아기에 한눈에 그들의 정체를 파악했다.
‘시체의 마녀’와 ‘침묵의 마녀’.
각기 20 위계, 과거 게헨나 습격에 동참했던 클리포트 출신의 대마녀다.
동시에 수십 년간 잠적 생활을 해온 까닭에 최근 행방이 모호했던 공적이기도 했다.
그들이 새삼, 그것도 검의 마녀와 함께 모습을 드러낸 이유는 자명해 보였다.
합공을 통한 엘로아의 배제.
케테르가 움직일 수 없게 된 이래, 엘로아가 그 역할을 대체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솔선수범하여 난리를 일으킨 공적을 토벌하고 혼동을 잠재워왔다.
그러나 항거할 수 없던 절대자인 케테르와 달리 엘로아에겐 한계가 존재했으며 공적으로 하여금 ‘저년만 없으면….’이라는 욕심을 안겨주기에 충분했던 것이다.
“답잖게 구는군.”
“…….”
언젠가는 부닥칠 것이라 예상했던 문제였다.
하지만 다른 누구도 아닌 검의 마녀가 이런 계획에 동참할 줄이야. 그것만이 의외다.
실로 오랜만에 위기감을 느꼈다.
단순히 20 위계 마녀가 둘이 모인 것이라면 엘로아에겐 그다지 위협이 되지 못할 것이다.
그만큼 23 위계와 20 위계 사이엔 까마득한 벽이 있다.
그러나 엘로아의 폭위를 저지할 수 있는 검의 마녀가 전위로 서고 나머지 둘이 후방지원을 하는 합공이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아무리 그녀라도 쉽사리 승산을 점칠 수 없었다.
눈에 보이는 셋만으로도 어지간한 위치포인트는 가뿐히 정리할 수 있는 전력인 것이다.
하지만 온갖 전장에서 살아남았던 엘로아다.
동요하지 않고 냉정하게 상황을 정리했다.
수호자의 계약이 끊겼다고 한들 시우가 위험에 빠질 가능성은 매우 낮았다.
현시점에 이르러 클리포트는 예전처럼 공고한 집단이 아니다.
수장을 잃고, 서로 불화를 일으키고 와해한 까닭에 유명무실해진 실정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셋은 나름 쥐어짜 낸 전력이라 판단하는 게 옳았다.
그런 요소를 고려하면, 시우를 위협할 여분의 전력이 있다 쳐도 엘로아를 치는데 합류하는 게 정상이겠지.
또한 엘로아는 시우의 실력을 믿었다.
만약 이 계획을 짠 자들이 어정쩡한 마녀를 그에게 보냈다면 도리어 먹잇감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남은 일은 이 세 명을 토벌한 뒤 시우에게 무사히 돌아가는 것.
“계약한다.”
엘로아의 영창과 함께 그녀의 눈에서 분홍빛 마력 반사광이 뻗어 나갔다.
2.
미궁이 펼쳐지고 수호자의 계약이 끊긴 지도 벌써 10분가량이 지났지만, 시우에겐 특별한 위기감이 없었다.
사실 시우는 엘로아만큼 ‘계약’에 대해 알지 못했다.
그것이 얼마나 공고한 연결인지.
그걸 끊어내려면 얼마나 높은 경지에 이른 마녀의 간섭이 필요한 것인지도 충분히 숙지하지 못했다.
따라서 미궁 속에서 따로 내던져져 계약이 끊어졌음에도 별다른 위기감 없이 ‘원래 미궁이 이런 마법인가보다’라는 감상 정도를 품고 있던 것이다.
미궁의 악마가 소환해 낸 미궁은 실로 경이로웠다.
‘어항’과 같이 독자적인 규칙을 보유한 이면결계는 흔히 ‘미궁’이라는 단어로 연상되는 장면과는 퍽 다르다.
그러니까 메마른 회반죽 벽이 꼬불꼬불하게 늘어선, 팩맨의 미로를 연상시키는 풍광이 아니라는 것.
대신 거대한 성 안에 초대된 것 같다.
방과 복도, 계단이 이리저리 얽혀 만들어진 공간은 미로로서 충분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다.
“이건 좀 신기하네.”
충분히 주위를 거닐다 보니 또다시 수직으로 서 있는 계단을 발견했다.
언뜻 잘못 설계된 것 같은 이 계단에 올라서면 거짓말처럼 중력의 방향이 바뀌며 그대로 걸어 올라갈 수 있게 된다.
또한 수직 계단과 연결된 천장에는 거꾸로 매달린 성의 풍경이 있었는데, 실시간으로 방과 복도의 구조를 재배치하며 변모해가는 게 보였다.
즉, 평면 구조가 아니라 입체적인 구조의 미로라는 것이다.
어째서 그토록 많은 마녀가 여태껏 미궁의 악마를 토벌하지 못했는지 알 것 같았다.
그야 이런 공간 속에 작정하고 숨는다면 어지간한 마법으로도 수색이 불가능할 테니 말이다.
“더럽게 크네.”
시우도 뾰족한 방법은 없었기에 어슬렁거리며 돌아다니는 게 전부였다.
전투력만이라면 딱히 꿀리지 않았지만 단순히 보물찾기가 된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어느 정도 운적인 요소가 개입하게 된다.
“채무상환의 꿈이 이대로 사라지는가….”
수색을 서두르며 마지 무도회장처럼 넓은 공간에 도달했을 때.
불온한 기색을 느낀 시우가 발걸음을 멈췄다.
딱히 감지되는 건 없었다.
하지만 사지를 넘나들며 생긴 직감은 찜찜함을 호소했다.
“거기 숨어있는 거 아니까, 나와.”
혹시나 하는 심정에 혼자 빈집에 들어갈 때처럼 큰 목소리로 외쳐보았다.
“…….”
들려오는 대답은 없다.
하긴 설령 숨어 있는 사람이 있다고 해도 이처럼 허술한 유도에 나올 리가 있….
“어떻게 눈치챘지? 분명 꼼꼼히 숨었는데.”
“마녀 네 마법이 형편없던 탓이겠지.”
“넌 입 닥쳐 말리샤. 앨리스 언니, 진짜 그런 거 아니에요.”
정말 나왔다.
어안이 벙벙한 와중 빠르게 면면을 확인한다.
“꼴에 마녀라더니 제법 재주는 있나 보네?”
총 세명.
추방자 측에서 대표로 나서 스승님과 말을 나눴던 ‘수은의 마녀’ 앨리스 외 쫄따구 둘.
그들은 계단을 내려와 스스럼없이 시우에게 다가왔다.
밖과는 달리 이곳은 완벽하게 격리된 미궁이다.
외부의 시선 따위는 신경 쓸 필요가 없다.
그러니 그들의 발걸음이 마치 사냥감을 발견한 사냥꾼처럼 느껴지는 건 착각이 아니리라.
“귀엽게 생겼다. 언니, 나중에 저도 가지고 놀아도 되나요?”
“눈 안 깔아? 확, 이게 스승 믿고 깝쭉거리네.”
1층에 도달하자마자 시우를 둘러싸는 쫄따구 둘.
이대로 삥이나 뜯으려고 온 것은 아니겠지.
“어휴.”
시우는 한숨을 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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