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녀의도시-630화 (630/917)

#630

1.

우선 잠이 든 스승님이 깨지 않게 조심조심 차를 몰아 숙영지로 되돌아왔다.

지프에서 내리자마자 많은 시선이 끌렸기에 굉장히 부담스러웠다.

다행히도 적극 말을 걸어오는 일 없이 다들 제 할 일에 열중했지만.

마녀 중에서도 수면을 취하는 부류는 적지 않다.

하지만 이곳은 현세, 그것도 100M 앞에 추방자들이 진을 치고 있는 사막 한가운데다.

그 안에서 태연하게 잠을 자고 있을 배짱은 없는지 모닥불을 괜히 나뭇가지로 들쑤시거나 책 따위를 읽으며 한적한 시간을 보내는 것이다.

미궁의 악마가 출현하면 스승님은 예정대로 심판 역할.

나머지는 여기 보이는 마녀들과 경쟁을 해야 하게 되는 셈이다.

“뭐, 되겠지.”

자신있다고 큰소리치기엔 뭐하지만, 아예 경쟁이 되지 않을 것이란 비관은 없다.

이래 봬도 나름 열심히 성장해 왔다.

스승님에게도 20위계 대마녀급은 거뜬하다는 인정을 받았으니 이쪽의 델라와 저쪽의 ‘수은의 마녀’정도가 진지한 경쟁 상대가 아닐까 생각 중이었다.

물론 미궁의 악마의 능력 자체가 이름 그대로 미궁을 만드는 것이니, 미로찾기를 얼마나 잘하느냐에 따른 운적인 요소도 있겠지만 말이다.

아무튼 적당한 긴장감만 유지한 채 ‘문제없다’라고 마인드 컨트롤 중이었는데.

정작 문제는 영 생뚱맞은 곳에서 튀어나왔다.

동이 트고, 날이 밝고, 뜨거운 햇볕을 피해 다들 그늘로 피신하고, 다시 저녁이 와도.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이쯤되자 저마다 긴장 상태로 전투를 준비하던 마녀들 사이에서도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시간 지나지 않았나?”

“조금 더 기다려 봐. 예언 시간은 상당히 두루뭉술했으니까.”

“아직 밤도 아니잖아요. 조금 기다리면 나올 거에요.”

예언에 따르면 금일 저녁에서 밤사이 미궁의 악마가 출현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밤이 되고 자정을 넘겨도 미궁의 악마는 나타나지 않았다.

“수비학파년 들이 잘못 해석한 것은 아닐까요?”

“하…. 되는 일이 없네.”

“예언의 원본을 다시 한 번 확인해 봐.”

원래 기약 없는 기다림보다 애매하게 기약된 기다림이 더욱 신경을 갉아 먹는 법이다.

가뜩이나 혼자 꿀빨 생각으로 신이 나서 달려왔던 마녀들은 별안간 맞닥뜨린 경쟁자와 예언이 빗나갔을지도 모른다는 불안 속에서 슬슬 짜증을 내었다.

워낙에 오지인 까닭에 여기까지 오는 데만 해도 적잖은 기회비용이 소모되었다.

그 상황에서 이것저것 일이 꼬이자 자연스레 분통이 터지는 것이다.

게헨나 측에서도 추방자 측에서도 술렁술렁 소요가 일었다.

“난 갈래.”

“내가 다시는 예언 믿나 봐라.”

결국 예언된 기일이 사흘을 훌쩍 지났을 무렵엔 3분의 1가량이 짐을 챙겨 떠나버렸다.

그 중엔 델라도 있었다.

애초에 그녀는 꽤 빡빡하고 하드한 스케줄로 전세계 위치포인트 지부를 옮겨 다니며 호문쿨루스 토벌 의뢰를 처리 중이었다.

그녀까지 이곳에 묶여 있는 게 과잉전력임을 알면서도 눌러 앉아있던 건 어디까지나 무게 추 역할을 위했던 것으로, 그 역할을 티페레트 공작이 대신하게 되었으니 다음 일정 소화를 위해 떠나게 된 것이다.

“티페레트 공작님 성가신 역할을 떠넘기게 되어 죄송합니다.”

“사과할 것 없네. 어차피 이쪽도 볼일이 있던 것이니. 이 뒤의 일은 내게 맡기게나.”

“모쪼록 무운을.”

꾸벅 고개를 숙인 델라는 시우에겐 대강 인사만 건넨 채 떠났다.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이 있다기보다는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모르는 게 역력한 기색이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전후 사정을 알고 있는 시우의 관점이고 스승님은 그 모습이 퍽 이상해 보였나 보다.

“무슨 일이라도 있었는가?”

“예전에 다퉜던 적이 있습니다.”

“그런가? 하지만 엊그제는 그리 서먹해 보이지 않았거늘.”

“하하….”

스승님의 명예를 위해 대답을 얼버무린 시우.

그녀는 살짝 고개를 갸우뚱하긴 했지만 이내 수긍한 채 물었다.

“그대는 어쩔 셈인가?”

호문쿨루스가 등장할지 하지 않을 지부터 확실치 않은 상황.

채무 상환을 위해 이 자리에 머물게 된 시우로선 계속 있을 이유가 없었다.

“스승님이 계시면 여기 있어야죠.”

하지만 엘로아는 마녀들의 안전을 위해서라도 이 자리를 벗어나기 힘든 상황이고 시우도 별다른 선택지는 없었다.

“하루 이틀 정도 이 상황이 계속되면 다른 마녀도 해산하지 않을까요?”

“그도 그렇네만…. 공연히 시간을 뺏는 것이 미안해서 그렇네.”

“시간을 뺏다뇨. 스승님과 함께 있는 시간인데요.”

도착 당일과는 달리 엘로아와 시우가 관계를 맺을 짬은 나지 않았다.

이러다 불쑥 호문쿨루스가 등장할 가능성도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변변한 휴식도 취하지 못한 채 촉각을 곤두세운 것만 3일이다.

그럼에도 그렇게 말해주는 제자에게 고마움을 느끼며 엘로아는 그의 손을 꼭 붙잡았다.

“시우, 지금 키스해도 되겠는가?”

“스승님? 다른 사람들이 보면….”

“괜찮네. 여기라면 안 보일 걸세.”

“정 그러시다면 우웁…!”

지프의 그림자에 몸을 숨긴 두 사람은 소리 없이 조용한 키스타임을 가졌다.

2.

그 무렵 숙영지가 내려 보이는 한 사구에 세 공적이 있다.

도로시, 비앙카, 클레흐와 더불어 회의를 하던 클리포트 출신의 공적, ‘검의 마녀’ 린네.

비앙카를 죽이고 알코리자 패밀리를 연꽃에 바쳐 힘을 되찾은 ‘물병자리의 마녀’ 에아 사달멜리크.

그리고 이 모든 자리를 마련한 ‘속삭임의 마녀’ 릴리스.

에아는 서늘한 눈빛으로 담배를 피우며 무언가를 골똘히 계획을 가다듬는 중이었다.

어깨 위에서 똑 떨어지는 검은 단발.

맹금류를 연상케 하는 날카로운 눈동자와 저주받은 듯 빛나는 붉은 눈동자.

검은 드레스를 입고 나른한 몸짓으로 재를 터는 그녀에게 마녀로서 제구실할 수 없을 정도로 추락했던 패배자의 모습은 남아있지 않았다.

“흐음…. 이제 이건 글렀나?”

그녀의 손에는 유리를 조각하여 만든 듯 투명한 연꽃 한 송이가 처절한 붉은빛을 내뿜으며 빛나고 있다.

본래 프리즘처럼 아름다운 무지갯빛으로 빛나던 연꽃이었는데, 이것저것 제물을 바치다 보니 포화상태라는 양 불길한 핏빛만을 줄기줄기 내뿜게 되었다.

아쉬운 일이었다.

조금 더 열심히 일해주었더라면 에릴림 공작과 같은 경지에 서는 것도 꿈은 아니었을 텐데 말이다.

에아는 힘을 되찾았을 뿐만이 아니었다.

비앙카의 낙인과 1만 명의 조직원을 제물로 바치며 기존 21 위계로 회복, 거기서 그치지 않고 22 위계까지 경지를 개척했다.

사실 환생의 고치의 대가로 위계가 하락하기 전 에아가 22 위계를 목전에 두고 있던 것을 생각해보면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 연꽃은 예사 물건이 아니었다.

망집과 한 맺힌 집념이 쌓아올린 기적이랄까.

일반적인 아티펙트는 물론 예장의 영역도 아득히 뛰어넘은 물건으로 지금의 에아조차 그 잠재력을 제대로 파악할 수 없을 정도다.

고작 수 백 명의 잔챙이 마녀와 5명의 대마녀를 제물로 바치는 것으로, 일평생 넘을 수 없으리라 생각했던 23 위계의 벽을 우스울 정도로 쉽게 넘어버리게 해주었으니.

물론 단순히 연꽃의 존재만으로 이뤄낸 성과는 아니었다.

현세의 혼란, 케테르의 부재, 속삭임의 마녀의 협력이 더해진 황금과도 같은 기회였다.

어느 정도 힘을 되찾았던 에아에게 손을 뻗어온 건 속삭임의 마녀였다.

릴리스는 분명 믿지 못할 자이지만 천 년이 넘게 많은 이들의 원한을 사면서도 목숨을 부지할 만큼 은폐와 기만의 달인이다.

그녀의 도움을 받은 에아는 5개의 위치포인트 지부를 박살 내고, 현세 곳곳에 숨어 사는 마녀를 찾아내어 죽이면서도 단 한 번도 본격적인 추격망에 들지 않았다.

또한 일전이라면 이런 무리한 인신공양에 처단하러 나섰을 케테르 역시 부재중인 상황 속 마음껏 활개를 펼칠 수 있던 것이다.

“어떻게 생각해? 아직도 기다릴 셈이야?”

그늘 막 아래 느긋이 앉아있는 에아와 옆에서 치근덕거리는 릴리스.

그녀는 재수 없게도 비앙카의 외형을 그대로 본 따고 있었다.

심지어 사소한 습관이나 말투마저 완벽하게 표방해내는 까닭에 종종 속이 뒤틀린다.

“그렇게 열심히 분탕치고 살면 자다가 떡이라도 생겨?”

“무슨 말이야? 널 위해서 이렇게 밥상까지 차려줬는데. 아직도 숟가락 얹을 준비가 안됐느냐는 거지. 이대로라면 먹잇감이 점점 달아나 버린다고.”

릴리스의 말에 재차 숙영지를 눈으로 훑는 에아.

이건 전적으로 릴리스가 만들어낸 그림이다.

예언을 누구보다 먼저 해석하여 미궁의 악마를 토벌.

미궁의 악마가 지닌 자성마법 ‘미궁’, 미로처럼 복잡한 이면결계를 자유로이 배치할 수 있게 해주는 마법을 선점한다.

거짓된 예언을 뿌려 마녀를 한자리에 모은다.

이후엔 떡밥을 물고 몰려든 마녀를 미궁 속에 고립시키고 하나씩 먹어치운다는 아주 그럴싸한 계획이었다.

최근 에아의 가장 큰 고민은 사냥감이 줄어버렸다는 것이다.

에아를 비롯 다른 수많은 공적 및 추방자가 활개를 치며 시민권이 없는 마녀는 더욱 꼭꼭 숨어버렸고, 시민권이 있는 마녀는 죄다 게헨나에 틀어박혔으니.

그러나 이 방법이라면 수십 명의 마녀를 한자리에 모으는 것도, 시간을 들여 그들을 각개 격파하는 것도 가능하다.

토벌을 위해 이런 황무지 사막까지 오는 마녀의 수준은 뻔하니 제법 안정성까지 갖춰다 볼 수 있겠다.

따라서 에아도, 옆에서 살벌한 표정으로 검을 어루만지는 린네도 기꺼이 따라나선 것이 아니겠는가?

“밥상이라….”

하지만 이건 빛 좋은 개살구다.

적어도 티페레트 공작이 합류한 시점에선 분명했다.

“저기에 널 못살게 굴던 티페레트가 있잖아? 모처럼 힘을 얻었는데 복수극이라도 한 편 어때? 아니면 그 옆에 제자라도 말이야. 최초의 남자 마녀라니 쏠쏠한 수확이겠는걸?”

분명 티페레트는 견습마녀의 복수를 위해 에아를 죽일 듯이 쫓아오던, 실로 증오스러운 상대다.

또한 게헨나 최초의 남자 마녀 신시우는 그녀를 강간하고 베틀을 뜯어갔던 호로 자식이다.

그리고 에아 사달멜리크는 그 어느 때보다 강한 힘을 휘두를 수 있게 되었다.

몇 번을 씹어 먹어도 모자랄 연놈을 앞에 두고 이글이글 타오르는 욕망을 느끼고 있었다.

복수의 달콤한 과실이 눈앞에서 꿀을 뚝뚝 떨어뜨리는데 어찌 구미가 당기지 않을까?

“티페레트는 어차피 린네 쪽이 상대해주기로 했으니까. 너는 제자만 맡으면 돼. 미궁만 조작하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잖아? 린네 그렇지?”

“…….”

하지만 이런 방식은 ‘사냥꾼’ 에아 사달멜리크와 어울리지 않는다.

에아는 피식 웃으며 잡념을 털었다.

의자에서 태연하게 일어나 여행 가방을 어깨에 걸친 채 릴리스에게 등을 보인다.

“난 가볼게. 파티는 너희끼리 재밌게 즐겨.”

“뭐하자는 거야?”

“응? 분명 제대로 말한 것 같은데. 너희끼리 즐기라고, 난 가볼 테니까.”

“ 이건 약속과 다르잖아. 네가 지금까지 이렇게 활동할 수 있었던 게 누구 덕인 줄은 알고?”

“그러니까, 지금 널 죽이려 들지 않는 거잖아.”

뒤를 돌아보자 비앙카 썅년의 모습을 꼭 닮은 릴리스가 딱딱하게 얼굴을 굳히고 서 있다.

“속삭임의 마녀. 내가 옛날이야기는 지루해서 싫어하는데, 댁에 관련된 고리타분한 이야기는 많이 듣고 직접 봤거든. 댁이랑 얽힌 마녀는 끝에는 항상 좆되더라고.

예전엔 그게 이해가 안 갔는데, 너랑 직접 일해보니까 이해가 가네.”

릴리스는 소름이 돋을 만큼의 수완가였다.

조력이 붙는 것만으로 모든 작업에서 발로 걷는 것과 기차에 매달려가는 것 정도의 격차가 생겼다.

수작에 놀아난 마녀들이 멍청한 것이 아니었다.

단지 속삭임의 달콤함에 이끌려 기차에서 뛰어내려야 할 타이밍을 놓쳤을 뿐이겠지.

허나 그 끝엔 필경 선로가 끊긴 낭떠러지가 존재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넌 아주 고약한 농간을 부려. 난 그게 지금이라고 생각했을 뿐이야.”

에아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빙긋 웃는 표정을 띄우는 릴리스.

“우리는 좋은 파트너라고 생각했는데…. 이런 부분에서 의견차이가 있네.”

당황하던 기색이 모두 연기였던 것처럼 생글생글한 미소에선, 역설적으로 아무런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다.

“언젠가 너도 내 손으로 죽여줄게. 비밀 많은 릴리스 양.”

에아의 이런 반응조차 계획대로라는 듯 실소하는 릴리스에게 중지를 올려 보이고 등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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