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녀의도시-624화 (624/917)

#624

1.

수은의 마녀와 얼추 대화를 끝낸 이후 지프로 돌아와 잠자리를 정비했다.

완전한 영체로 원할 땐 자고 자지 않을 수 있는 여타 마녀와 달리 그녀의 경우 짧게나마 필수적인 수면이 요구된다.

그것이 통상적인 영체 강화를 위한 ‘계약’의 대가이니 말이다.

변변한 숙소는커녕 허허벌판이나 다름없는 사막이다.

아무리 그래도 차에서 자는 건 너무 불편할 것 같아 걱정되었는데, 공연한 걱정이었다.

다행스럽게도 오프로드 지프는 정말 컸다.

뒷좌석을 뒤로 젖히면 거의 침대처럼 사용할 수 있을 만큼 말이다.

의자 뒤 트렁크에 쌓인 물건을 임시로 빼놓고 한계까지 접은 뒤 매트리스를 깔았다.

그러자 두 사람이 자기엔 조금 좁지만 한 사람이 자기엔 안성맞춤인 간이침대가 완성되었다.

그렇게 잠자리 정비를 하던 중.

시우가 말했다.

“스승님.”

“음?”

“감사해요.”

“내가 감사받을만한 일을 했던가?”

갑작스러운 감사 인사에 겸연쩍은 듯 뺨을 가리는 엘로아.

하지만 시우는 확실히 기억하고 있었다.

지극히 마녀답게 시우에게 시비 아닌 시비를 걸어온 앨리스.

자신을 향한 무례에는 별 반응 없던 엘로아가 차갑게 화를 내던 때를 말이다.

“정말이지, 멋있으셨습니다.”

감사의 의미를 재차 설명해주자 더더욱 쑥스러운지 몸을 비비꼬는 스승님이다.

“당연한 일을 했을 뿐이네. 그대도 바보처럼 듣고만 있지 말고 한소리 해주게나.”

타인에게는 지엄한 공작님이 이렇게 단둘이 있을 때면 어찌 이리도 부끄럼쟁이가 되는지….

그 갭이 정말 사랑스럽다.

아마 그녀의 이런 모습을 독점할 수 있는 특권은 시우에게만 있을 테니 말이다.

“자리가 좁으니 저는 조수석에 있을게요.”

엘로아와 달리 선택적 수면이 가능한 시우인만큼 편한 자리를 내주고 앞좌석에 올랐다.

그때.

언제 움직인 것인지 어느새 운전석에 타 있는 스승님.

“함께 별을 보러 가지 않겠는가?”

“주무셔야 하는 거 아닌가요?”

“비행기에서 조금 눈을 붙였으니 아직은 괜찮다네. 시간도 넉넉하지 않은가?”

예언이 아주 정확한 출몰 시간을 예정해 준 것은 아니다.

타카쇼가 건네준 파일에 따르자면 아마 내일 저녁이나 밤쯤.

그녀의 말마따나 여유가 있는 셈이다.

거기에 태어나 처음 와 보는 사막.

보이는 건 모래와 하늘뿐이라도 대자연의 정경은 그 자체로 감상할 거리가 넘쳐난다.

느긋이 별을 올려보며 기울이는 술 한 잔.

낭만 넘치지 않는가?

“그럴까요?”

“그럼 움직이겠네.”

“여기서 보는 게 아니라요?”

“이곳도 좋지만 아무래도 모닥불이니 뭐니 많으니 말일세.”

“네네.”

기껏해야 모닥불이나 캠프 등지에서 어스름하게 흐르는 빛이 전부지만 그것도 빛 공해라면 빛 공해다.

운전대를 잡은 엘로아가 차에 시동을 걸고 두 사람은 밤 사막을 달렸다.

사막의 밤은 제법 선선했다.

40도 중반대를 가뿐히 넘기던 낮 시간대와 비교하면 온도계에 찍히는 외부 온도는 11도 남짓.

낮에 뙤약볕과 모래바람을 막아주던 바람막이 덕에 적당히 선선함을 즐길 수 있었다.

-부우우우웅!

그보다.

생각보다 이동거리가 훨씬 길다.

“어디 좋은 스팟이라도 있나요?”

“무, 무슨 말인가?”

“조금 멀리 나오시는 것 같은데요.”

그녀가 운전대를 잡은 지 벌써 5분 남짓.

지프는 아직도 정처 없이 나아가고 있었다.

“가능한 멀리 떨어져야 별이 더 잘 보이지 않겠는가?”

스승님이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설명을 듣고 대충 고개를 끄덕이던 시우.

마침 느긋하게 대화할 시간이 남았기에 아까부터 궁금하던 것을 물었다.

“스승님, 그나저나 예언기관이라는 건 뭔가요?”

옛마녀 중 일인인 ‘묵시의 마녀’가 관리하며 자식을 가질 수 없는 마녀가 대를 잇게끔 견습마녀를 점지해주는 중립기관.

우선 여기까지는 알고 있다.

엘로아도 시우가 그런 피상적인 질문을 하는 게 아님은 알아차렸다.

그녀 역시 라피를 견습마녀로서 점지받은 적 있는바, 그때의 기억을 회상하며 말을 시작했다.

“예언기관은…. 말하자면 암호화된 정보가 일렁이는 호수라네. 현세에 속해있으면서 현세에 속하지 않은 독특한 중립지대이지.”

“게헨나처럼요?”

“음…. 이게, 말로 설명하기는 어렵군.”

하지만 금방 말문이 막힌다.

의념과 관념, 운명의 실낱이 실체화된 호수라는 정보로서의 사실은 전달할 수 있지만 사실 예언기관의 모습은 마주하는 사람마다 다르게 묘사했으니 말이다.

유일한 공통점은 커다란 호수가 존재하고 그 가운데 다가갈 수 없는 거대한 탑이 우뚝 서 있다는 것뿐이다.

“이 일이 끝나면 한번 둘러보는 건 어떻겠는가?”

“그럴 수 있나요?”

“물론이네. 예언기관은 어떤 마녀도 가리지 않으니. 추방자는 물론 설령 공적이라 할지라도 아무런 제지 없이 호수에 발을 들일 수 있다네.”

“거기서 미래를 볼 수 있고요?”

엘로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홀로 남아 호수에 몸을 담그는 순간 수많은 미래가 펼쳐지지. 하지만 그 정보의 대부분은 해석할 수 없다네. 오직 허락된 예언만 이해할 수 있을 뿐.”

“그럼, 신탁이란 건 뭔가요?”

사실 이 질문의 결정적인 궁금증이었다.

도대체 신탁이 뭐길래 저토록 많은 마녀가 그 정보를 접해 찾아올 수 있다는 말인가?

“신탁은 암호화 된 미래 중 드물게 해석이 가능한 것이라네. 예언기관 근처에 상주하는 수비학파의 마녀들이 값비싼 돈을 받고 팔곤 하지. 아무리 내가 설명해주는 것보다 직접 가보는 것이 피부에 와 닿을 걸세. 그대는 아직 계승이 멀었으니 아무런 예언도 받지 못할 테지만 말이야.”

호기심 많은 제자가 귀엽다는 듯 웃음을 지은 엘로아는 다시 운전대를 잡고 정면을 바라본다.

시우는 눈치채지 못했지만, 그 표정은 사뭇 비장하기까지 했다.

이 정도면 충분히 온 게 아닐까?

기감을 넓게 퍼뜨려 주위의 기척을 살피는 엘로아.

다행스럽게도 야밤의 드라이브를 쫓아 올만큼 부지런한 마녀는 없는 듯하다.

“이 정도면 괜찮겠군.”

그럼에도 신중을 기대 모래 언덕 가까이 바짝 차를 붙인 엘로아는 가방에서 그녀가 사랑해 마지않는 브랜디를 꺼내 들었다.

“와, 여기라면 정말 잘 보이겠네요.”

“천천히 감상하게나. 술은 어떤가?”

“좋죠. 불초 제자가 술 올리겠습니다.”

두 사람의 대화 소리 외엔 숨 막힐 정도로 내려앉은 정적.

휘영하게 비치는 월광 속의 사막은 은의 세례를 받은 양 반짝였다.

엘로아에게 이런 풍광은 아름다움을 느끼기 이전에 너무도 익숙한 것이다.

1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호문쿨루스와 공적을 추적했고 그 중 30%가량은 이런 사막에서 보냈으니 말이다.

그녀 혼자였더라면 판에 박힌 풍경을 본답시고 차를 몰고 나올 일도 없었을 것이다.

즉, 약 10km나 마녀들의 숙영지에서 떨어진 이유는 오직 하나, 시우와의 뜨거운 밤을 보내기 위해서다.

그에게 별을 보여주는 건 겸사겸사의 일이라는 것이다.

엘로아와 시우가 사제의 벽을 넘고 공식적인 연인 관계가 되긴 했지만, 그녀가 시우와 관계를 맺는 빈도는 다른 연인에 비해 현저히 낮았다.

제머나이 백작의 눈치를 보며 몰래 전초기지로 향하는 쌍둥이에 버금갈 만큼이다.

물론 그의 품에 안기는 순간은 행복하기 짝이 없다.

그러나 따끔따끔한 죄의식과 제자와 정을 통한다는 자책감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따라서 자칫 다른 사람에게 들킬 수 있는 게헨나에서는 은근히 관계를 피해왔으며, 관계를 맺을 땐 항상 얼큰하게 취할 때까지 술을 들이켰다.

“잠시만 기다리고 있겠나?”

하지만 이곳은 다른 시우와 둘 뿐인 사막 한가운데 아니겠는가?

그와 은밀히 사랑을 나누기 이만한 여건이 없다.

“어디 가세요?”

“조금 선선해서 말일세. 옷만 더 걸치고 오겠네.”

태연한 연기로 시우를 따돌린 엘로아는 지프 뒤에 실려있던 캐리어를 마구마구 뒤적였다.

그가 바니걸 의상에 환장했던 기억이 있기에 미리 챙겨 두었던 것.

이 의상으로 갈아입은 뒤 커다란 타올로 몸을 두르고 그의 앞에 뿅 나타날 예정이었는데….

“으…. 으….”

마음이 너무 급한 탓일까?

언제 시우가 불쑥 찾아올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자 좀처럼 의상이 입어지질 않는다.

애초에 전에 입었을 때도 한참이나 시간이 걸린데다가 샤론의 도움을 받았었지.

움직임이 제한된 공간에서 옷을 입자니 그때보다도 더욱 힘든 것이다.

“이러면 안 될 터인데….”

엘로아가 레오타드를 붙잡고 혼자서 끙끙거릴 무렵.

혼자 남게 된 시우는 예상보다 늦어지는 시간에 지프로 걸어왔다.

혹시 옷가지를 찾는데 곤란해하고 계신다면 도와드릴 생각이었다…만.

엘로아의 허리를 가뿐히 넘길 정도로 타이어의 직경이 큰 만큼 높은 자체.

눈높이와 딱 맞는 창 너머로 희끄무레한 물체가 살랑살랑 움직이는 게 보인다.

“…….”

그건 토끼 귀였다.

항상 뾰족하게 솟아있는 토끼귀 헤어밴드.

과거 수확제 때 그녀가 입었던 바니걸 의상에 딸린 소품이다.

뜬금 없이 별을 보러 먼 곳까지 나오기에 설마 설마 하기는 했지만 이내 지나친 확대 해석이라고 털어 넘겼던 시우다.

스승님은 언제나 소극적이었기 때문이다.

대부분 시우가 그녀의 방을 찾았을 때, 혹은 술을 마시다가 키스로 넘어가며 자연스럽게 살을 겹치게 되는 경우가 많았고 샤론이나 아멜리아처럼 직접 판을 까는 일은 없다시피 했다.

그런 스승님이 별의별 핑계를 대며 지프를 밖으로 몰고 나와 단둘인 상황을 만든 것도 모자라 의상까지 준비하고 있었을 줄이야.

귀여우면서도 사랑스러운 모습.

아직 눈치 못 채신 것 같으니 모른 체할 수도 있지만 자연스럽게 장난기가 돌았다.

-벌컥!

“……!”

시우가 차 문을 열자 한참 꽃단장 중이던 스승님이 놀란 토끼 눈이 되어 시우를 바라본다.

제대로 쓴 것은 토끼귀 해어밴드, 양 손목의 커프와 나비넥타이가 달린 셔츠 칼라 뿐.

스타킹도 하이힐도 제대로 걸치지 못한 채 알몸이 되어있는 그녀.

다 벗겼을 때보다 꼴림도가 월등히 높은 스승님의 알몸이 거기에 있다.

“시우! 내가 기, 기다리라고 했지 않는가!”

순식간의 머리카락색처럼 분홍 분홍 하게 변한 얼굴로 황급하게 몸을 가리는 스승님이지만, 풍만한 가슴과 전반적으로 탄력 넘치는 알몸을 겨우 두 팔로 가리기엔 역부족이었다.

군데군데 노출된 뽀얀 살결이 눈을 어지럽힌다.

“오호, 이벤트인가요?”

“이건, 그런 게 아니라네! 그냥 오랜만에 입어보고 싶어서 입었을 뿐이네. 어서 나가게나!”

저런 게 제대로 된 변명이 될 수 없음은 그녀도 알고 있을 것이다.

호랑이처럼 엄한 스승님이 수줍음에 역정을 내어도 겁에 질린 토끼가 삐익 거리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아마 실제로 시우를 말릴 생각 따위는 없을 것이다.

“들어갈게요.”

간이 침대처럼 변한 뒷좌석에 올라타도 밀쳐내지 않으니 말이다.

-탁!

차문이 닫히는 소리.

이윽고 탁월한 서스펜션 기능을 자랑하는 오프로드 지프가 거칠게 덜컹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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