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녀의도시-623화 (623/917)

#623

1.

여기 한 대마녀가 있다.

사막의 열기도 차갑게 식혀 버릴 것 같은 하얀 피부와 그에 대비되는 칠흑의 눈동자.

조막만 한 머리통에서 뻗어나온 은발은 놀랍게도 금속을 녹여 만든 것처럼 부자연스럽게 반짝인다.

앨리스 이븐 하이얀, 마녀로서의 이명은 ‘수은의 마녀’.

비록 오염수 불법 방류를 여러 차례 저지르는 바람에 게헨나에서 추방당하였으나, 상승을 목전에 둔 20 위계의 연금술사로 어느 나라를 가도 국빈 대접을 받는 정통파 마녀다.

대대로 페르시아 제국과 연이 깊었기에 20년 전 이란의 해결사로 초빙된 상태.

이렇듯 서구 선진문화권이 아닌 국가에선 추방자라도 스카우트해 호문쿨루스에 대비하는 게 대부분이다.

이따금 이란 국토 내에서 발생하는 호문쿨루스를 처리하는 것으로 막대한 권익을 보장받는 앨리스가 국경을 넘어 새삼 투르크메니스탄의 북쪽 사막까지 온 이유는 지령 때문이 아니었다.

이란과 투르크메니스탄은 종파와 사상이 달랐고 카스피 해역 이권에 대한 문제로 심심찮은 갈등을 빚어왔으니, 이번 일은 어디까지나 앨리스 독단의 용돈벌이였다.

물론 이란 정부로부터 받는 사례금은 적잖은 금액으로 제 한몸 부귀와 영화를 누리는데 지장이 없으리라.

그러나 연금술은 태생부터 많은 연구비를 요구하는 분야다.

거기에 앨리스의 낭비벽은 추방자 사이에서도 유명했다.

최초 이란 정부의 스카우트에 응한 이유 역시 돌려막다 천문학적으로 불어난 빚을 메꾸기 위함이었으니 말이다.

호텔에서 하룻밤 묵을 일이 생겨도 가장 비싼 최상층을 전부 예약하고, 짧은 거리를 이동할 때도 헬기 혹은 전용기를 이용, 거리가 짧아도 반드시 기사를 대동한 리무진에 탑승한다.

마음에 든 여자에게 온갖 선물을 뿌리고, 하루 대여료만 수억에 달하는 호화요트에서 며칠씩이고 광란의 선상파티를 벌이는 둥.

현세에 안정적인 사업처가 없는 와중에도 분에 넘치는 사치를 부리는 것이다.

하지만 앨리스는 괘념치 않았다.

대마녀란 마땅히 이런 낭비를 마음껏 누릴 만큼 고귀한 존재기 때문이다.

번잡스럽게 투 잡을 뛰어야 할 만큼 충분한 돈을 주지 않은 종교쟁이들을 욕하며 툴툴 대던 와중, 앨리스는 현재 상황이 몹시 못마땅했다.

본래라면 예언기관의 신탁을 해석한 정보를 바탕으로 비밀리에 한탕 땡겼어야 했다.

덤으로 그녀의 애인인 말리샤 그리고 마냐와 함께 한적한 사막에서 밤하늘을 보며 오붓하게 데이트나 했을 터인데….

일이 어떻게 돌아간 것인지 벌써 수십 명의 마녀가 모여들어 있었다.

그것만이라면 앨리스 혼자 힘으로 해결했을 것이다.

게헨나 출신이건 추방자 출신이건 으름장을 놔 쫓아내고 홀로 유산을 독식할 수 있었겠지.

그러나 눈엣가시인 델라 레드클리프가 존재하는 한 그런 패악질은 부릴 수 없다.

게헨나 측 마녀를 쫓아냈다간 괜히 성깔 더러운 델라와 한바탕 붙게 될 수도 있고, 반대로 추방자를 쫓아내자니 게헨나 진영과의 무게 중심을 스스로 무너뜨리게 될 터.

그 와중에 티페레트 공작까지 합류했으니 결국 이 많은 마녀와 공명정대한 막타대결을 하는 게 결정이 난 셈이다.

“앨리스 언니, 델라 저년 옆에 보세요.”

“남자 마녀래요. 저 분홍머리가 티페레트 공작 맞죠?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이에요. 생각보다 쪼끄마하네. 싸우면 이길 것 같은데요?”

말리샤와 마냐는 캠핑 트레일러 창문에 달라붙은 채 궁둥짝을 흔들며 밖을 힐끗거렸다.

앨리스도 밖으로 시선을 기울여 델라와 식사 중인 두 사람을 지켜보았다.

마력으로 강화된 시력은 먼 거리에서도 그들의 모습을 자세히 담아내었다.

“흐음, 잘생겼네.”

앨리스의 이목을 단숨에 사로잡은 건 티페레트 공작 측이 아닌 최근 소문이 무성한 남자 마녀다.

영체인 남성은 처음 봐서 그런지 깜짝 놀랄 만큼 수려한 외모였다.

물론 하찮은 남자 따위에게 다리를 벌릴 생각 따위는 없었지만 말이다.

“언니, 저 남자가 욕망의 마녀를 쓰러뜨렸다는데. 정말일까요?”

“당연히 거짓말이지.”

마냐의 천진난만한 질문에 앨리스는 코웃음을 쳤다.

마냐는 얼굴도 반반하고 밤시중도 잘 들지만, 현실감각이 없어서 문제다.

“비앙카 벨릴리가 뉘집 개이름이야? 22 위계라고. 나도 고생했던 상대인데 고작 남자 마녀 따위가 어떻게 이기겠어.”

“앨리스 언니. 욕망의 마녀와도 싸운 적 있어요?”

“20년 전? 멕시코 놀러 갔을 때였나?”

“우와, 역시 언니.”

거짓말이다.

앨리스도 적잖은 싸움으로 전투에 익숙한 마녀긴 했다.

그러나 공적 사이에서도 쌈닭으로 악명이 자자했던, 22 위계의 마녀를 상대로 살아남을 실력은 아니었다.

두 단계 이상의 위계 차이가 나면 전투가 성립하지 않는 것이 통념이었으니.

하지만 알게 뭔가?

이 허언을 듣고 코웃음 칠 비앙카 본인은 뒈져 버린 모양이고 마냐나 말리샤는 앨리스의 말이라면 찰떡같이 믿는다.

“하지만 이기는 건 무리더라도, 싸우고 살아남았다는 소문은요?”

“옆에 티페레트 공작이 처리했겠지. 신분 공증인이라며.”

“아하, 그도 그렇네요.”

그건 그렇다 쳐도 남자 마녀라는 존재에 구미가 돋는 건 사실이다.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존재.

한정판 명품 가방과도 비교할 수 없는 희소성이다.

마법 연구로 영 쓸모가 없다 해도 그런 존재를 손에 넣는다면 얼마나 많은 마녀가 자신을 우러러보겠는가?

“언니? 뭔가 이쪽으로 오는데요?”

“뭐?”

앨리스가 그런 상상의 나래를 펼칠 무렵 티페레트 공작과 남자 마녀가 캠핑 트레일러를 향해 걸어오는 게 보였다.

2.

추방자 측 진영은 확실히 분위기가 달랐다.

뭐랄까 더 빡빡한 경계심이 느껴진다고 해야 할까?

이쪽은 위치포인트에도 소속되어 있지 않은 떠돌이니 티페레트 공작의 존재만으로 거부감을 표하는 마녀가 여럿 있는 것이다.

자연 걸음걸이에도 힘이 들어간다.

“너무 걱정하지 말게나. 별일 없을 걸세.”

그런 시우를 안심시키는 엘로아.

이윽고 근방에서 가장 호화로워 보이는 캠핑 트레일러에서 세 여자가 나왔다.

초대면이지만 시우는 세 사람의 관계를 쉽사리 눈치챌 수 있었다.

여왕님 하나와 시종 둘 같은 느낌이다.

아마 가운데 앞장서는 여자가 수은의 마녀겠지.

번쩍번쩍 빛을 반사하며 후광을 만들어내는 머리칼도 그렇고, 무엇보다 느껴지는 기세가 듣던 대로 대마녀의 것이다.

“마침 나누고 싶었던 얘기가 있었는데 잘됐군.”

“난 수은의 마녀, 앨리스 이븐 하이얀. 대단하신 티페레트 공작께서 무슨 일이지?”

엘로아가 악수를 위해 손을 뻗었지만 앨리스는 팔짱을 낀 채 오만불손한 표정으로 그 손을 내려볼 뿐이었다.

누가 봐도 예의 밥 말아 먹은 모습에 시우와 다른 두 마녀가 흠칫했다.

그러나 엘로아는 권위를 중시하는 사람이 아닌 바 머쓱하게 손을 거둘 뿐이었다.

“불쾌히 여기지 말아주게.”

“미안한데 이미 불쾌해. 여기까지 먼 걸음 했는데 대뜸 당신이 튀어나와서 허탕치게 생겼으니까.”

또다시 강도 높은 투정.

허세가 실렸을지언정 메시지 자체를 꾸며낸 건 아니다.

아마 이 자리의 많은 마녀가 그녀와 같은 불만을 공유하고 있으리라.

모처럼의 먼 걸음을 옮겼는데 사냥감은 하나, 사냥꾼은 여럿이다.

더군다나 사냥꾼 중에서도 특출나기로 유명한 티페레트 공작까지 왔으니 다들 헛걸음이 될 거라는 불만에 차 있는 것이다.

엘로아도 그것을 이해하고 있었다.

아마 이 사막까지 모여든 대다수는 생계유지나 연구비 마련을 위해 온 ‘급한 사정’의 마녀들 일 테니.

“걱정 말게. 직접 사냥에 나서기 위해 온 것은 아니니.”

“그러면?”

“사냥에는 내 제자만 참여할 예정이네. 이를 전제로 추방자들이 엉뚱한 생각을 하지 않도록 중재해 줄 수 있겠나?”

제자라는 말에 힐끗 시우를 향하는 앨리스의 눈빛.

도대체 어떻게 남자 마녀 따위가 티페레트 공작과 사제 관계를 맺었는지는 모르지만 쉽게 말해 실전 경험을 시켜주고 싶은 모양이다.

“나라고 쟤들을 다 통솔하는 건 아니야.”

“그럴 필요는 없네. 다만 불필요한 충돌이 일어나지 않게끔 전리품 분배에 공정을 기해주게나. 행여 소란이 일어난다면 협력을 약속해 주었으면 좋겠군.”

한마디로 말해 티페레트 공작 본인은 빠질 테니 먼저 잡은 사람이 있으면 깽판 치지 말고 소유권을 인정해 주자는 말이다.

“음….”

앨리스는 생각했다.

경쟁자가 있을 때 여차하면 뒤통수를 갈길 예정도 없진 않았다.

하지만 이 정도로 마녀가 많이 모여있다면, 그리고 동위계인 델라도 모자라 티페레트 공작이 있다면 그런 뒷공작은 힘들어진다.

어차피 유효한 경쟁자는 델라 정도인 상황에서 티페레트 공작의 중재 아래 완벽한 취득권을 보장받는다?

나쁘지 않은 제안인 것이다.

마냐와 말리샤를 시켜 추방자들에게 알린다면 다들 큰 불만 없이 수용할 것이다.

안 그래도 티페레트 공작이 도착한 이후 반수는 짐을 싸고 있었으니.

“좋아. 협력할게. 먼저 먹는 놈이 임자. 불복하는 녀석을 혼내주면 되는 거지?”

“말이 잘 통해서 좋군.”

서로 한 걸음씩 양보한 상황에 대화가 길어질 일은 없었다.

앨리스는 티페레트 공작의 어깨너머로 남자 마녀를 보았다.

“그보다 공작. 저 녀석 남자 마녀라지? 한번 살펴볼 수 있을까?”

시우 본인이 아니라 티페레트 공작에게 의사를 묻는 앨리스.

경매장에서 물건을 고르듯 손가락을 까딱인다.

다분히 차별의식이 가득한 언행이었다.

“아니면 빌려주던가.”

역시 현세다.

기분이 나쁘다기보다는 오랜만에 겪어보는 취급에 감회가 새로운 시우.

“너무 무례하군.”

이걸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고민할 무렵 서늘한 목소리가 울려 퍼진다.

앨리스는 손끝을 자를 듯이 스치고 지나가는 예리한 시선을 알아차렸다.

만약 공작이 검을 뽑았더라면 그 궤적 그대로 반응할 여지도 없이 손가락이 잘려나갔으리라는 것도.

“웃…!”

방금까지만 해도 뭔가 분홍 분홍 한 것이 만만하게 보였던 티페레트 공작이다.

역시 소문은 과장되기 마련이구나 싶었다.

애인들이 보고 있으니 은근히 간을 보며 강짜를 놓았음에도 마땅한 반응이 없기에 살짝 의기양양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제자를 건드리는 듯하자 줄기줄기 뻗는 기백.

심장을 짓누르는 위압감이 분홍빛 안광 사이에서 무심히도 흘렀다.

“스승님. 괜찮아요.”

남자의 손이 공작의 어깨를 붙잡고 나서야 앨리스는 숨을 쉴 수 있었다.

마른 입술을 적시며 침을 꿀꺽 삼켰다.

이어 그녀의 반듯했던 자세가 흐트러지자 번지르르한 허세를 마저 내뱉을 수 있었다.

“뭘 화를 내고 그래. 농담이야 공작.”

“…….”

다행히 힐끗 시선을 던진 공작은 별일 없다는 듯 ‘그럼 그리 알겠네’라고 말하며 남자와 함께 떠났다.

같이 숨을 멈추고 있다가 그제야 호들갑을 떠는 말리샤와 마냐.

“와, 앨리스 언니. 역시 대단해요.”

“그 티페레트 공작인데 안 무서워요?”

“수틀리면 한번 붙으면 되잖아? 사실 예전부터 싸워보고 싶었어.”

앨리스가 잔뜩 허세를 부릴 수 있던 건 티페레트 공작이 올곧은 인물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오직 호문쿨루스와 공적만을 사냥했을 뿐 단 한 번도 제힘을 이용해 약자를 핍박한 적 없다 들었다.

그걸 알고 있으면서도 잠깐 쫄았지만….

결과만 좋으면 그만 아닌가?

“언니 진짜 멋있어요.”

“어쩜 좋아…! 나 또 반할 것 같애….”

“하여간 호들갑들은….”

좌우로 팔짱을 끼는 마냐와 말리사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아니, 사실 다리에 힘이 풀려서 좀 기대려는 것이다.

영체가 아니었으면 지릴 뻔했네.

앨리스는 조금 전 티페레트의 눈동자를 떠올리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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