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1
1.
데네브의 연구는 재빨랐다.
감각 연동에 대해 알아차렸으니 그걸 차단하기만 하면 되는 것 아닌가?
지금까지 알아차리지 못했기에 대비를 하지 않았을 뿐이지 막상 연구에 들어서자 반나절 만에 연동을 끊는 요령을 체득했을 정도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일사천리로 일이 진행되는 건 아니다.
오히려 본격적인 문제는 지금부터.
언니에게 알리지 않고 그와 밀회를 할 여건은 만들어냈다지만, 결국 두 사람의 사이엔 넘을 수 없는 높은 벽이 있다.
대놓고 관계를 요구한다 한들 시우가 관계를 받아들일 리 없지 않은가?
예소드 백작과 협업해 거울을 사용한다해도 이제는 안의 감각이 다르니 곧장 들켜버릴 것이 분명했다
“하아….”
어쩌다 이렇게 되어버린 것인지….
이따금 쌍둥이와 정답게 놀고 있는 그를 볼 때마다 양심통이 쿡쿡 가슴을 쑤신다.
자기혐오와 자책감.
입술을 질끈 깨문 채 창밖을 내다보는 데네브의 시선엔 짐을 잔뜩 꾸리고 현세로 떠날 채비를 한 신시우가 걸려 있었다.
2.
약탕 치료를 병행한 르뤼에는 예정보다 일찍 마력회로를 회복했다.
23 위계의 힘을 오롯이 되찾은 그녀는 한시의 지체도 없이 시련에 도전하길 원했다.
말로는 심해의 여왕으로서 진정한 힘을 되찾고 건방진 금발과 분홍머리에게 본때를 보여주겠다고 하지만….
아무리 르뤼에라도 두 사람의 상대가 될까? 싶다.
스승님을 말할 것도 없고 아멜리아도 현세를 돌아다니며 온갖 전투를 경험했으니 말이다.
그렇지만 르뤼에가 옆에서 말린다고 들을 위인도 아니고, 모티베이션이 된다면 좀 더 열심히 시련에 도전하지 않을까 싶어서 내버려두었다.
아무튼 배웅을 나온 쌍둥이와 르뤼에가 정답게 인사를 나누는 게 보고 들렸다.
“다시 돌아올 때는 꼭 다시 말을 타도록 하겠노라. 그때는 반드시 그대들을 이길 것이니라.”
“도전은 언제든지 환영이야.”
“잘 다녀와. 올 때 선물 듬뿍 가져오고.”
“융숭한 대접을 받았으니 여왕된 자로서 갚아주어야겠지. 걱정 말도록 하거라.”
오딜 오데트와 르뤼에는 예상 이상으로 죽이 잘 맞았다.
어렸을 때부터 함께한 친구처럼 거의 항상 붙어 다니며 같이 놀 만큼이나 말이다.
흐뭇하게 서로 한 번씩 안아주는 세 사람을 보고 있자니 인사를 끝낸 쌍둥이가 시우에게도 다가왔다.
“조수님, 이번에는 이상한 사건 휘말리지 말고 건강해야 해.”
“맞아요! 위험한 일이다 싶으면 도망치셔야 해요?”
말 잘 듣는 강아지처럼 쪼르륵 달려오더니 폭 안기는 오딜과 오데트.
“네, 걱정 마세요. 오딜 님도 오데트 님도 얌전히 기다리고 계세요. 선물도 꼭 사올게요.”
못마땅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큰 장모님의 시선을 슬쩍 피하고 둘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이윽고 샤론과도 가벼운 입맞춤으로 인사.
“시우야, 다치지 않게 조심해? 난 선물은 됐으니까 무사히만 돌아와 주면 돼.”
“그렇게 걱정 안 해도 된다니까. 스승님도 함께 가는 거고….”
“그래도, 난 현세는 불안하단 말야.”
요새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아멜리아와는 어젯밤 미리 인사를 나누었으니 이제 떠나기만 하면 되는 셈이다.
더더욱 못마땅해진 표정의 알비레오는 쌍둥이의 등을 떠밀었다.
“자자, 귀염둥이들. 수업으로 돌아가자. 샤론 양 부탁할게요.”
“으으, 오늘처럼 슬픈 날에는 쉬면 안 되나요?”
“공부…. 싫어….”
마지막까지 손을 흔들며 떠나는 쌍둥이의 뒷모습을 흐뭇한 미소로 지켜보고 있자니 알비레오가 툴툴거렸다.
“아주 호화로운 배웅이네요. 좋아 죽겠어요.”
“그러게 말입니다.”
최근 일로 시우를 더더욱 못마땅하게 보는 큰 장모님이지만, 그래도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제 발로 뛰는 모습은 가산점이 된 것 같다.
“쌍둥이 걱정시키는 엄한 짓 하지 말고 조심히 다녀와요.”
이 정도의 격려는 받을 수 있었으니 말이다.
몸을 기울인 알비레오가 작게 속삭인다.
“이번에도 새 여자 데려오면 그땐 정말 초상 치를 줄 알아요.”
“며, 명심하겠습니다.”
뭐, 신뢰는 여전히 받지 못하는 듯하였지만….
저만치 캐리어를 돌돌 끌고 오는 스승님의 모습이 보였으니 간만에 현세행 준비는 모두 마쳤다고 볼 수 있겠다.
3.
르뤼에의 시민권 취득을 위한 기부금 금화 1만 파운드.
사실 그녀가 시련을 극복할 것도 없이 아쿨라의 보물창고를 일부 비워낸다면 충분히 마련할 수 있는 금액이다.
그러나 큰 장모님의 테스트를 통과하기 위해 시우가 직접 마련하게 되었다.
부자들 사이에서 머물다 보니 금전감각이 마비된 감이 있지만 그럼에도 한화 80억에 달하는 큰돈이다.
어떤 방법이 좋을지 수소문하던 무렵 기똥찬 희소식을 들고 온 타카쇼였다.
‘브라더, 내가 좋은 돈벌이를 물어왔어.’
뜻밖이었다.
급한 대로 부탁을 해두었다지만 이렇게 빨리 도움을 받을 줄은 예상하지 못했으니까.
온갖 부유한 마녀가 모여드는 로즈 글래스의 마담답게 타카쇼는 고급 정보를 다수 보유하고 있었고, 또한 인맥을 통해 신빙성 있는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고 한다.
‘내가 잘 아는 마녀님이 전달해 준 건데, 예언기관에서 내려진 신탁을 비밀리에 해독해 낸 거라네? 너라면 잘 써먹을 수 있지 않을까?’
타카쇼가 구해준 정보는 네임드 호문쿨루스가 잠들어있는 장소에 관한 예언이었다.
항간에 떠도는 헛소문으로 치부하기엔 건네준 자료가 제법 상세했다.
그 이름은 ‘미궁의 악마’.
이름에서 연상할 수 있듯 그리스 신화의 이족보행 소 미노타우로스를 닮았으며, 약 200년 전 마지막 출현을 끝으로 한동안 종적을 감추었던 13쌍의 눈이 박힌 호문쿨루스라고 한다.
사용하는 자성마법은 미로에 가까운 이면결계를 전개하는 ‘미궁’.
과거 시우라면 마주하는 것만으로 꽁지가 빠지게 달아나야 했을 테지만 지금 와서는 충분히 사냥해볼 만하다는 판단을 내렸다.
거기에 스승님의 조력까지 있다면 안전은 확실하게 확보되겠지.
마땅한 돈벌이 수단이 없는 이상 호문쿨루스 레이드보다 좋은 돈벌이는 없는 것이다.
큰 장모님께 인정받을만한 정당한 수단이었고 말이다.
따라서 시련을 치를 르뤼에를 먼저 아쿨라로 복귀시킨 뒤 스승님과 단둘이 예언지로 향했다.
목적지는 중앙아시아 투르크메니스탄 전체 면적의 70%를 차지하는 카라쿰 사막.
외부로 노출된 천연가스전이 1년 내내 활활 불타는 ‘지옥의 문’으로 유명한 모래사막이다.
시우와 엘로아가 향한 곳은 그나마 여행객이 발길을 들이는 지옥의 문과도 동떨어진 완벽한 무인지대였지만 말이다.
출현 예정일까지 시간이 촉박했기 때문에 숨 돌릴 틈 없는 여행 경로였다.
게헨나의 ‘문’이라 한들 전 세계 곳곳으로 곧장 텔레포트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적어도 강이라고 불릴 만한 깨끗하고 넓은 물이 필요하다.
따라서 카스피 해의 인접한 아티라우 공항에서 경비행기를 타고 인근 지역으로 이동.
지금은 미리 준비해 두었던 스승님의 애마에 탑승해 반나절을 꼬박 운전해 사막을 횡단 중이다.
하루만에 생전 와본 적 없는 중앙아시아를 오고, 한 번도 타본 적 없던 경비행기를 타고, 배드애스 느낌 풀풀 나는 지프까지 타며 사막을 횡단하다니 파란만장한 여정이 아닐 수 없었다.
바깥 온도는 4월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섭씨 43도.
에어컨이 빵빵한 차내임에도 짙게 선팅된 창문이 아니었더라면 햇볕에 땀이 뚝뚝 떨어졌을 것이다.
이처럼 외진 사막에 포장도로가 있을 리 없으니 덜컹거리는 노면 위로 뿌연 모래 폭풍을 흩뿌리며 달려야 했다.
좌우로는 건기를 맞아 말라죽어 가는 풀과 사납게 내리쬐는 태양 볕, 지평선 저 끝까지 뻗어 아지랑이를 이글대는 사구만이 가득했다.
“지도 좀 건네주겠나? 이 근방이 맞는지 확실치 않군.”
“여기 있습니다. 물도 드릴까요?”
“괜찮네.”
시우가 하겠다는 말에도 기어이 운전석에 앉은 스승님에게선 그야말로 황야를 떠도는 무법자의 포스가 가득했다.
모래바람으로부터 몸을 보호하려는 바람막이와 스카프, 살짝 커다랗게 보이는 선글라스까지 낀 그녀는 능숙하게 기어를 바꿔가며 높은 차체를 안정적으로 유지했다.
“오랜만에 단둘이로군.”
“그러게요.”
시우의 사정을 전해 듣고 기꺼이 동행하기로 한 엘로아.
그녀는 경박하게 올라가는 입꼬리를 만류하려 안간힘이었다.
겉으로는 홀로 현세에 나서려는 시우를 보호하기 위한 조치였다.
그나마 엘로아를 비롯한 위치포인트의 지부장이 소매를 걷고 나선 결과 어느 정도 안정되긴 했지만 현세는 여전히 온갖 위험이 도사린 화약고였고, 특히나 중동 및 중앙아시아 부근은 위치포인트의 감시가 거의 닿지 않는 무법 지대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런 불안도 엘로아가 함께한다면 크게 줄어든다.
게다가 엘로아가 전달받은 문서를 위치포인트 DB에 대조해 본 결과 해당 정보는 정말 비밀리에 풀렸던 것.
아마 타카쇼라는 친구가 시우에게 도움이 되기 위해 귀한 정보를 사들였을 가능성이 높았다.
이렇다면 대뜸 사막 한가운데 다른 마녀가 몰릴 일도, 다른 마녀와 토벌 경쟁을 해야 할 일도 현저히 줄어든다.
애초에 미궁의 악마 자체가 본신의 강함보다는 회피와 은둔에 특출난 자성마법으로 긴 세월을 살아남아 온 호문쿨루스다.
그의 마안이 있는 이상 그런 수작에 현혹될 리 없으니 냉정하게 평가하길 시우라면 손쉽게 퇴치할 것이다.
그렇다면 남은 건 조금 느슨한 마음가짐으로 그와의 여행을 만끽하면 되는 일.
그의 연인들과 이런저런 실랑이를 벌이며 옆자리를 다투는 것도 흐뭇한 일이긴 하다만 단둘이 데이트가 꺼려질 리 없었다.
과거 현세를 떠돌 적, 일신의 힘을 이용해 대부분 도보로 이동하며 노숙하던 엘로아가 오랫동안 창고에 처박혀 있던 지프를 꺼내온 이유기도 했다.
서두른 결과 예정된 출현시각까지는 하루 이틀 정도의 시간이 남았으니 멋진 사막의 밤하늘을 보며 꽁냥거리다 그의 품에 안겨 잠이 들거나 하면 되는 것.
그걸 위해 수확제 날 입었던 바니걸 차림까지 캐리어 깊은 곳에 숨겨놓고 온 엘로아였던 것이다.
하지만 그런 엘로아의 기대는 생각보다 일찍 좌절되고 말았다.
“음?”
40도 경사의 모래 언덕을 거뜬히 넘어간 지프의 앞창으로 모래언덕 한가운데 분지처럼 움푹 파인 오아시스가 보였다
땅거미를 길게 드리우며 저물어가는 태양 속 밤을 맞이하는 사막.
거의 말라버린 오아시스 주변은 각종 텐트와 픽업트럭과 연결된 캠핑카에서 야영을 준비하는 사람들로 분주하다.
그것도 한두 명이 아니라 수십 명.
그 미모로 보나 이곳이 유목민도 돌아다니지 않는 죽음의 땅임을 고려해보나 죄다 마녀임이 분명했다.
만약 타카쇼의 말대로 예언기관의 신탁을 해석했다는 기밀 정보였다면 이토록 많은 인원이 몰릴 일은 없었을 터.
시우도 엘로아도 당황했다.
“이게 어떻게 된 걸까요.”
“여기서 기다리고 있게. 상황을 살피고 오겠네.”
엘로아가 먼저 상황을 살피기 위해 지프 밖으로 뛰어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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