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0
1.
창과 커튼을 활짝 열어 산들산들 뺨을 간질이는 미풍을 느끼며 오후의 티타임을 보내는 알비레오.
최근 일주일.
알비레오의 얼굴은 봄을 맞아 움트는 정원의 꽃처럼 만개해 있었다.
“흐흐음~”
어찌나 기분이 좋은지 저도 모르게 싱글벙글한 콧노래가 나올 정도였다.
사각사각 기분 좋게 종이를 갉아내는 펜촉도 일필휘지.
이런 컨디션만 계속된다면 하루 20시간 이상도 사업 업무를 계속할 수 있을 성 싶었다.
알비레오의 라이프 퀄리티가 급상승한 원인은 크게 두 가지였다.
먼저 데네브는 쾌감이 연동된다는 사실을 깨닫자마자 자위행위를 그만두었다.
겉보기처럼 섬세한 감수성을 지니고 있는 데네브라면 당연한 일이었다.
여느 때 같았으면 여동생의 은밀한 즐거움을 빼앗을 일에 일말의 미안함이라도 느꼈을 것이다.
아니, 사실은 지금도 조금은 미안하다.
그러나 데네브 탓에 고통받았던 나날들, 거기에 사위와 연애를 태연히 저지르겠다고 선언한 여동생의 황당무계한 발언을 떠올리면 깃털만큼 가벼운 죄책감도 날아가 버리는 것이다.
디저트의 달콤함 같은 쾌락이 전혀 생각나지 않는다 하면, 그건 아니다.
확실히 그건 말초적으로 제법 대단한 쾌감이었다.
그러나 남길 수 없으니 어거지로 먹던 케이크를 굳이 입에 대지 않아도 되었는데 무엇이 아쉽겠는가?
“그나저나 아직도 안 오네.”
그리고 두 번째는 사위 신시우에게 묘약을 넘긴 이후 그가 한 번도 찾아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무려 일주일 동안이나 말이다!
이건 기록적인 일이었다.
제머나이 저택에는 시우 외에도 그의 연인인 샤론과 티페레트 공작이 머문다.
구태여 훔쳐보지 않아도 침대의 시트를 세탁하는 빈도를 눈여겨본다면 그가 얼마나 방탕한 밤 생활을 보내왔는지 어렵지 않게 알아챌 수 있었다.
누가 뭐래도 알비레오는 이 저택의 안주인이었으니 말이다.
거기에 한 달에 한번은 꼭 야밤에 쌍둥이가 홀연히 사라지니, 그 경우까지 생각하면 그의 1주일 평균 관계 횟수는 대략 4~5회.
그런 그가 한 번도 묘약을 요구하지 않다니!
“드디어 자제라는 걸 얻었네.”
라고 말하지 않을 수 있을까?
물론 그로선 안 그래도 넘쳐나는 연인과의 관계를 허락받기 위해 알비레오를 찾아야 한다는 점이 껄끄러웠을 수도 있고, 이런 절차를 하달한 의미를 자중의 권고로 해석했을 수도 있다.
어느 쪽이건 알비레오는 기분이 좋았다.
약간의 타산을 섞자면 이건 쌍둥이에게도 이득이다.
쌍둥이가 시우와 밤놀이를 하는 건 공공연한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몰래 해야 한다는 게 바뀌는 건 아니다.
그리고 알비레오의 솔직한 심정으로는 제대로 계승 받기 전까지는 하지 않았으면 한다.
그러나 남녀의 몸정이란 흉악하기로 악명 높다.
똑 부러지던 데네브조차 정신을 못 차리고 해롱거리고 있지 않은가?
만약 알비레오가 나서 관계를 전면적으로 금지해버린다면 가뜩이나 출발선이 뒤쳐진 쌍둥이에게 패널티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럴 바엔 다 같이 못 하게 하자’라는 게 알비레오의 계산이다.
“아, 속 쓰려.”
불현듯 치미는 화를 느끼는 알비레오.
설마하니 귀염둥이 둘을 동시에 한 남자가 데려가는 것도 속이 쓰려 죽겠는데, 정실 쟁탈전이니 뭐니 하는 싸움에 휘말리게 됐다니.
믿어지는가?
그 위대한 제머나이가 말이다.
사위의 얼빵한 낯짝이 떠오르며 위가 시큰거렸다.
-똑똑똑
이를 갈던 알비레오는 노크 소리에 자세를 바로 하고 온화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날 것의 감정을 안으로 숨기는 것 역시 귀부인의 덕목이다.
“들어오세요.”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의 굉장히 뜻밖의 사람이었다.
“어머, 메리골드 님. 같이 차라도 드실래요? 갓 구운 스콘과 케이크도 있답니다.”
“고마워요, 백작.”
자리에서 일어나 손수 자리를 권하는 알비레오의 얼굴엔 사근사근한 미소가 가득했다.
아멜리아가 감사의 의미로 주었던 향수가 마음에 들었던 것도 있지만 그 이상으로 그녀의 향수에서 잠재력을 느꼈기 때문이다.
이미 눈이 튀어나올 정도의 가격이지만 천문학적인 금액이 매겨졌음에도 불티나게 팔려나가는 향수.
잘만 구슬려 협업 관계를 맺는다면 또 쏠쏠한 수익창출을 기대함 직했다.
“그런데 이 시간에 어쩐 일이신가요?”
그녀는 최근 배상금 마련을 위해 불철주야 조향 작업에 몰두 중이었다.
가뜩이나 실종되었던 시우를 찾느라 한 달 가량을 허비했기에 예약이 잔뜩 밀려있었기 때문이다.
저택에서 얼굴을 보는 것도 힘들었던 그녀가 이렇게 찾아왔다는 건….
“혹시 제가 말씀드렸던 향수 사업 이야기로 오셨나요?”
“아니요.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그렇게까지는 필요 없어요.”
“마녀가 마법을 연구하는 건 매우 바람직한 자세지만 현세의 사업 또한 나름 쏠쏠한 재미가 있답니다. 덕분에 연구비도 전혀 걱정 없고요.”
“괜찮아요. 조금 더 생각해 볼게요.”
“네, 저도 달리 재촉하려는 건 아니니까요. 그렇다면 어떤 용무로…?”
아쉽지만 오늘만 날이 아니다.
알비레오는 깔끔하게 단념하고 그녀의 목적을 물었다.
“…….”
그러나 물음에도 답 없이 제 금발을 하염없이 쓰다듬던 아멜리아.
알비레오가 의아해할 무렵 두어 번 헛기침한 아멜리아가 입을 열었다.
“염려하는 바는 이해하지만 아무래도 심한 처사에요.”
“네?”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요? 사랑을 나누는 건 연인 간의 재량이에요. 제삼자가 관여할 순 없다고 생각해요.”
“예…?”
“홍차는 잘 마셨어요. 업무로 분주해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아….”
비록 내용이 내용인지라 노골적으로 입에 담지는 않았지만 아멜리아의 목적은 짧고 간결했다.
그녀 역시 시우의 연인으로 트리니티 아카데미 부교수이던 시절부터 긴 짝사랑을 성공한 케이스.
연인으로서 알비레오의 제재가 과했다며 불만을 제기한 것이었다.
“…내가 방금 뭘 본거지?”
그리고 이는 알비레오가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부분이기도 했다.
우아하고 귀족적이며, 말수와 감정 표현이 적고, 은근히 성격이 매서운 마녀.
그것이 아멜리아에 대한 알비레오의 이미지였다.
특히 선대의 교육 덕인지 체면과 몸가짐에 관해서는 고지식할 정도로 예법에 충실했다.
만약 비인간적인 처우가 문제였더라도 서면으로 정중하게 항의할 줄 알았던 그녀가 ‘사랑’이라는 단어를 직접 입에 올리며 성관계 자체에 대해 불만을 표할 줄이야.
“맙소사…. 그게 그렇게 좋나?”
도대체 성관계가 뭐길래 그 아멜리아가 품위도 제쳐놓고 직접 호소를 한다는 말인가?
데네브로부터 간접 경험을 해보았던 알비레오지만 전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이게 사랑을 하는 사람과 그러지 않는 사람의 차이인 걸까?
알비레오가 조금 식은 찻잔을 들어 올릴 무렵.
-똑똑
두 번째 손님이 찾아왔다.
“안녕하세요, 백작님.”
“어서 오세요 샤론 양, 그런데 지금 수업시간 아니던가요?”
“아, 자습 중이라서요. 들어가도 괜찮을까요?”
“물론이죠.”
쌍둥이의 원소 강의를 도맡고 있는 샤론이었다.
처음 현세에서 부상 입은 걸 데려왔을 땐 ‘시우가 이런 서민적인 여자가 취향인가?’ 싶을 정도로 어쩐지 궁상맞은 부분이 있던 그녀다.
하지만 좋은 직장을 얻고 좋은 옷을 걸치기 시작하자 타고난 미모에 부스터가 붙었달까?
원체 좋은 성격과 더불어 육감적인 몸매로 쌍둥이를 위협하는 다크호스가 되었다.
“그러면 어떤 일로 오셨나요?”
“아, 다름이 아니라…. 그….”
샤론이 말을 끌기 시작하는 걸 보자마자 직감한 알비레오.
이어진 말은 직감에 꼭 들어맞았다.
“해독제… 받아갈 수 있을까요? 아니, 묘약이요.”
“후우…. 시우가 시키던가요?”
살짝 빈정상한 알비레오.
신시우 그 사위 놈이 자기가 오기 멋쩍다고 연인들을 부추겼나 싶었던 것이다.
“아뇨! 절대요! 사실 요즘 계속 관계를 피하길래 집요하게 캐물었더니…. 좀 알게 됐어요.”
“흐음….”
얼굴이 빨개졌으면서도 열심히 손을 휘저으며 부정하는 샤론.
하긴 그럴 인물이 아니긴하다.
“그는 뭐라던가요?”
“아무래도 신경이 좀 쓰인다고…. 자중하라는 의미 같으니 당분간은 참자고 하는데 제가 조금…. 힘들어서….”
샤론은 저택의 손님이긴 하지만 아멜리아보다는 여러모로 편한 손님이다.
일단 고용주이기도 하니 말이다.
따라서 알비레오는 방금 아멜리아를 보고 들었던 의문의 답을 그녀에게 찾기로 했다.
“샤론 양, 하나 물어도 되나요?”
“네? 뭐가요?”
“그게 그렇게나 중요한 건가요?”
직설적인 질문에 멋쩍은 듯 옆머리를 빙빙 꼬던 샤론이 배시시 웃는다.
“네, 사랑을 확인하는 과정 같거든요. 그, 이혼사유도 된다잖아요.”
“흐음. 일단 알겠어요. 그래도 곧장 줄 수는 없겠네요. 본인이 직접 와서 받아가라고 하세요.”
“네? 그래도….”
“쌍둥이를 위한 일이기도 하니까요. 미안해요. 이해해 주세요.”
그렇다고 예정을 바꿀 계획은 없다.
단호한 알비레오의 어조에서 그게 느껴졌는지 샤론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고 물러났다.
“하아….”
모처럼의 티타임에 두 명이나 손님을 받았다.
그 자체보다는 손님의 목적에 적잖은 스트레스가 생긴다.
어쩌면 모처럼 생각한 묘수가 별로 좋은 방법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쾅!
이번엔 노크도 없이 벌컥 문.
거기엔 가장 최근 시우의 하렘에 입성한 르뤼에가 잔뜩 화난 눈썹으로 서 있었다.
“여봐라! 큰 주인장!”
심해의 마녀라는 공포스러운 마녀명에 어울리지 않게 꽤나 가볍고 경박한 성격으로 알비레오가 살면서 봤던 마녀 중 손에 꼽게 특이한 마녀였다.
본인의 세계관에서는 본인이 최고이기에 실로 방약무인에 경거망동.
그 태도는 알비레오에게도 여전하다.
하지만 쌍둥이와 굉장히 잘 놀아주는 데다가, 세계 곳곳에 석유 시추권을 다수 보유하고 있다고 한다.
거기에 일단 위계도 23위계니 알비레오도 최대한 그녀의 장단에 맞춰주려 노력 중이다.
요새 들어선 슬슬 인내심에 금이 가고 있었지만 말이다.
“하아, 어서오세요. 차라도 드릴까요?”
“됐다. 짐은 풀떼기 우린 물에는 관심 없도다.”
“그럼 무슨 일로 오셨어요?”
“당장 시우에게 걸린 사악한 저주를 풀도록 해라. 그렇지 않으면 짐의 파도가 이 저택을 물에 동동 띄우는 참사를 보게 될 터이니! 기한은 오늘 밤까지다!”
“그건 조금….”
-쾅!
알비레오가 대꾸할 새도 없이 닫혀버린 문.
주먹을 불끈 쥔 알비레오는 눈을 감고 분노로 떨리는 속눈썹을 느꼈다.
“후우…. 저 새파랗게 어린 걸 그냥…!”
딱 봐도 어린 티 풀풀 나는 마녀의 철없는 짓에 어울려주는 것도 한두 번이지.
날 잡아서 따끔하게 한마디 해 줘야겠다고 결심한다.
그나저나 그녀조차 묘약을 받으러 왔다는 건가?
고작 일주일만에 이 사달이 난다고?
실수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이건 날이 갈수록 스트레스를 가중할 뿐이다.
-뚜방뚜방
밖에서 들려오는 특유의 발걸음 소리와 연이어 들려오는 노크소리에 알비레오는 한숨을 쉬었다.
그나마 쌍둥이가 대놓고 떼쓰러 오지 않았음을 다행으로 여겨야 하나.
“들어오세요. 티페레트 공작님.”
“기별도 없이 미안하네.”
평소 보이는 무인의 기백은 어디에 두고 왔는지 쭈뼛쭈뼛 들어서는 티페레트 공작.
이젠 말하기도 전에 대화가 보인다.
그 시점에서 알비레오는 깔끔하게 제 실수를 인정했다.
“그대가 제공해주는 여러 편의에는 번번이 고마운 마음일세. 허나….”
“공작님, 가져가세요.”
“뭘 말인가?”
“묘약이요.”
“정말인가? 아, 아니네. 그거 때문에 온 게 아니네.”
단숨에 공작의 얼굴이 화색이 된다.
뒤늦게 횡설수설 부인하지만 말해 무엇하랴.
“이거 드릴 테니까. 시우 군에게 다시 묘약 받으러 오지 않아도 된다고 말 좀 전해주시겠어요?”
“물론이네.”
완고하기 짝이 없는 그 티페레트 공작마저 살살 녹여냈을 줄이야.
알비레오는 충격에 머리를 절레절레 내저으며 서랍 안에 있던 묘약을 꺼냈다.
“응?”
그리고 곧장 알아차렸다.
묘약의 양이 조금 줄어있다는 것을.
미묘하지만 1회분 가량의 차이였다.
여기는 알비레오의 집무실이며 그녀의 서랍엔 보안 장치가 걸려있다.
맘껏 뒤적일 수는 없다는 의미다.
아마 데네브였다면 한두 방울을 가져가 어렵지 않게 복제해냈을 것이니 이렇게 허술하게 이런 짓을 할 사람은 딱 한 쌍밖에 없다.
바로 쌍둥이가 빼돌린 것.
“진짜….”
“왜, 왜 갑자기 우는 겐가?”
알비레오의 눈가에 글썽글썽 눈물이 맺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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