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녀의도시-619화 (619/917)

#619

1.

풀벌레도 잠이 든 깊은 밤.

시우는 홀로 막대한 혼란을 감내하고 있었다.

“이게 뭔 일이여.”

일련의 사건은 시우의 의사와 전혀 관계없이 벌어진 것으로, 알비레오의 판단대로 여난(女難)에 휘말린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대체 작은 장모님이 왜…?”

거기까지 알았다고 하여 당혹감마저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정황상 그 바꿔치기가 데네브와 예소드 백작의 합작인 것은 분명한 상황.

단순하게 생각한다면 뜻밖에 결론은 쉽게 나온다.

데네브가 시우와 관계하길 원했다.

그 앞에 어떤 이유가 있다 한들 그녀는 시우의 모든 행위를 수용했다.

심지어 예소드 백작과 흔히 나누는 거친 관계도 그녀는 일말의 거부도 표하지 않고 받아들였다.

예소드 백작의 무리한 요구를 마지못해 들어줬다기엔 너무나도 열띤 반응을 보이며 말이다.

하지만 다시 원점으로 돌아와 ‘작은 장모님이 그럴 사람인가?’라고 되물어보면 다시 아리송하게 된다.

뭔가 눈치채지 못한 점이 있는 것은 아닐까?

“후…. 개쫄리네.”

여러 복잡한 심경 속, 숙소 내에서 근신하고 있는 시우의 입이 바짝바짝 말라갔다.

해당 사건에서 시우에게 직접적인 과실은 없다.

그러나 어찌 됐건 작은 장모님과 관계를 나누는 모습을 큰 장모님께 들켰고, 근본부터 따지고 들어가자면 복잡하기 짝이 없는 여성편력을 보유한 시우에게 불똥이 튈 여지가 컸다.

그런 장면을 본 사람 중 이성을 제대로 챙길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덜컥

그때 문이 열리며 한 사람이 들어왔다.

초긴장 상태로 천천히 뒤를 돌아본 시우의 눈에 비친 건 뜻밖에도 데네브였다.

당장 알비레오가 뛰쳐 들어와 머리채를 쥐어뜯을 줄 알았는데 말이다.

“…….”

어느새 옷을 갈아입은 채 어깨에 얇은 케이프를 두른 모습.

살결을 함부로 보여주지 않겠다는 묘한 고집이 느껴지는 귀부인의 자태였다.

사람 마음이란 게 청개구리라고 오히려 저렇게 꽁꽁 싸매고 있자 조금 전 섹스의 막바지에 보았던 그녀의 새하얀 알몸이 떠오른다.

알비레오가 들어온 것도 눈치채지 못한 채 아래 깔려 헐떡이던, 어떤 행위를 해도 거부하지 못하고 받아들였던 데네브가 말이다.

고작 한 번의 사정으로 만족하지 못했던 물건이 부풀려는 걸 필사적으로 인내했다.

하지만 그런 한가로운 생각을 할 시간이 아니었다.

헝클어진 머리카락 한 올 없이 정갈하게 정돈된 시뇽 스타일이며, 표독스럽다 느껴질 정도로 굳게 다물린 입술이며.

지금 데네브에게 그때의 흔적은 한 터럭도 남아있지 않았다.

“…….”

오히려 굉장히 화가 나 있는 걸로 보인다.

그제야 지나쳤던 생각이 다시금 떠오른다.

왜 데네브의 분노는 고려하지 못했을까?

왜 그때 괜찮았으니 데네브가 제정신을 차린 지금도 괜찮다고 여겼던 걸까?

그녀에게 벌였던 행동은 맨정신으로 말하라기엔 낯뜨거워지는 일투성이다.

당시에는 분위기를 타 어찌저찌 넘어갔다 해도 그 일을 돌이킨 데네브가 역정을 내더라도 할 말이 없는 것이다.

“시우 군, 똑바로 서요.”

“넵.”

어항에 함께 잡혀가기 전처럼 뾰족한 목소리를 내며 성큼성큼 다가오는 데네브.

지난 경험에 비춰봤을 때 저 걸음의 템포와 박자는 조인트를 까기 위한 사전 준비동작이다.

아무리 영체라도 아픈 건 아픈 거다.

정강이의 충격을 대비해 바로 섰다.

그리고 예상대로 휘둘러지는 데네브의 구두 끝이 휘둘러졌다.

-톡

그 일격은 이전까지 감당해야 했던 일격과는 너무나도 달랐다.

거의 닿았다가 떨어지는 수준의 미묘한 어택.

놀라 앞을 보자 데네브는 무슨 일 있었느냐는 듯 팔짱을 끼고 뾰로통하게 입술을 내밀고 있었다.

“다 잊어요. 아무튼 간에. 오늘 있던 일은 다 잊어요.”

회상하는 것 자체가 수치라는 듯 슬며시 시선을 떨구는 데네브.

귀엽다!

작은 장모님!

궁금증을 참지 못한 시우가 먼저 물었다.

“이게 어떻게 된 건가요?”

“…….”

동시에 백 마디 정도를 말하고픈 복잡한 표정이지만 정작 입 밖으로 나오는 말은 없다.

그도 그럴 것이 데네브 역시 번뇌에 휩싸이고 있었던 까닭이다.

언니에게는 그를 포기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뚜렷이 표명한 데네브였기에 오늘 밤 곧장 시우를 만나 보란 듯이 입술 박치기를 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막상 예소드 저택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동안 자신이 그에게 어떤 추태를 부렸는지 똑똑히 상기하게 되었다.

천박한 자위쇼를 하거나, ‘데네브가 이런 짓 할 것 같아요?’ 같은 대사를 치며 그에게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었던 일.

가슴을 맞거나 꼭지를 잡며 당겨지며 느꼈던 일 등등.

차마 말 못할 천박한 일을 당하면서도 기쁨에 젖어 헐떡였던 일들이 생생히 뇌리에 박혀든 것이다.

그것이 방지턱으로 작용해 급발진에 제동이 걸리자 아롱아롱 떠오르는 건 ‘만약 시우가 모든 진실을 소상히 전한다면 어찌 반응할 것인가?’였다.

호화로운 하렘 생활을 만끽하는 시우지만 의외로 도덕관념은 제법 뚜렷하다.

일전 목숨이 걸려있을지도 모르는 상황에서도 데네브와 성교를 한사코 거절하지 않았던가?

이는 필경 데네브가 시우의 작은 장모 되는 사람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그가 과연 쌍둥이를 배반할 만한 짓을 할까?

아닐 것이다.

오히려 데네브의 진심이 그와 거리가 멀어지게 할 실마리를 제공할지도 모른다.

즉, 지금의 관계가 완전히 어그러질 수도 있다는 말.

그런 건 싫었다.

“먼저, 언니는 오지 않을 거에요. 제가 잘 설득했으니까요.”

말이 끝나자마자 안도하는 시우.

퍽 근심이 깊었던 모습이었다.

최대한 예전 쌀쌀맞았던 태도를 연기하며 데네브는 천연덕스럽게 거짓말을 읊었다.

“루시가 간곡하게 부탁해왔어요. 새로운 샘플을 얻으려면 꼭 저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하면서요.”

그 중간에 있던 상호 합의의 내용은 쏙 빼냈다.

이번 공모로 가장 큰 타격을 입은 사람이 데네브인만큼 이 정도의 거짓말을 용서해 줄 것이다.

“역시 그렇군요.”

“그리고 제가 보였던 건 모두 연기였어요. 왜냐하면 시우 군에게 들키면 안 되니까요.”

“아하.”

“이번 관계를 대가로 루시 백작에겐 적잖은 대가를 받았어요. 언니도 이해하고 넘어갔으니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더불어 너무 늦은 뒷수습을 시도하는 데네브.

이 교묘한 거짓말은 시우에 시우는 쉽사리 수긍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도저히 이해하지 못할 데네브의 돌발 행동보다는 차라리 어설픈 거짓말 쪽이 훨씬 신뢰가 간다는 듯이.

그것에 다행임을 느끼면서도 한편으로는 애달픈 야속함이 느껴진다.

“…….”

만약 그가 ‘거짓말하지 마세요. 알고 있어요. 데네브 님의 마음’이라고 말해줬다면, 세상 끝까지라도 함께 도망쳤을 텐데.

그것이 바랄 수 없는 배반이며, 이뤄지지 않을 꿈이라는 건 알고 있다.

“별문제가 아니라니 다행입니다. 정말 깜짝 놀랐어요.”

생각보다 별일 아니라는 듯 명쾌한 표정을 짓는 그의 앞에서 데네브의 마음을 새까맣게 타들어 갔다.

2.

그로부터 3일 후.

알비레오는 시우를 방으로 불러들였다.

아무리 데네브가 괜찮으니 걱정 말라고 당부를 해두었다 한들 제 발 저린 심정까지 어떻게 해 줄 수 있는 건 아니었다.

느닷없는 호출에 뻣뻣이 긴장한 시우.

“안녕하세요. 부르셨다고 들었습니다.”

“네, 어서 앉아요. 시우군.”

알비레오는 당장 ‘내 여동생 돌려내!’라고 외치고 싶은 심정을 감추며 점잖게 다리를 꼬았다.

아니나 다를까.

그날 이후 데네브와 알비레오의 사이는 서먹함을 넘어 냉랭한 지경이 된 것이다.

식사도 함께하지 않고, 술자리도 피한다.

어찌저찌 말을 붙여보려 하면 입술을 삐죽 물고 도망가버린다.

한 몸 같던 여동생의 뒤늦은 반항기는 극단적인 조치를 강행하는 추진력이 되어주었다.

“받으세요.”

“이게 뭔가요?”

그는 테이블 앞에 곱게 포장된 병을 바라보며 물었다.

30mL쯤 될까 말까 한 연둣빛 액체의 정체는 알비레오가 기존에 존재하던 묘약에 변주를 가한 수제품이었다.

“앞으로 발생할 사고를 미연에 방지하는 묘약이에요. 우선 앉아요. 길어질 것 같으니.”

“넵.”

알비레오는 머리를 쓸어 정리하며 입을 열었다.

“최근 있던 데네브와의 불미스러운 사건, 그리고 지금까지 시우 군을 보며 한가지 결론을 내리게 됐어요.”

그날의 사건을 언급하자 긴장하는 시우.

분명 작은 장모님 입으로는 별 문제 없이 넘어갈 거니 걱정 말라는 얘기를 들었는데.

사흘이나 지난 지금 갑자기 호출되니 더 불안했다.

“시우 군이 스스로 충동을 제어할 자신이 없다면 제가 나서서 도와줘야 한다는 걸요.”

“네?”

“사나운 개에게는 목줄을 채워야 한다는 말이죠. 그리고 이게 그 ‘목줄’이에요. 마셔요.”

“먼저 설명해 주시면 안 될까요? 배탈 날 것 같은 색인데요.”

“특별히 민트향도 첨가했어요. 그냥 마셔요.”

강압에 못 이겨 눈 딱 감고 벌컥벌컥 묘약을 들이킨 시우는 구토감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민트고 나발이고 일부러 고약한 맛을 냈다 해도 믿을 만큼이나 역겨운 맛이었기 때문이다.

병 밑의 한 방울까지 묘약을 털어먹는 것을 본 알비레오는 그제야 설명을 시작했다.

“시우 군이 마신 것은 ‘고개 숙인 남성의 묘약’이에요. 성욕 관련 기능에는 제한 없이 발기를 제한하는 묘약이죠. 즉, 그걸 마시면 성교할 수 없어요.”

“...네?”

“걱정 말아요. 여기에 길항작용을 하는 ‘밤의 황제’도 준비되어 있으니까요.”

“거 이름 참….”

기이한 작명센스는 둘째치고, 사색이 된 시우 앞에 분홍빛 묘약을 꺼내 흔드는 알비레오.

“앞으로 ‘밤의 황제’가 필요해지면 누구와 관계를 나눌 건지 보고하고 받아가세요. 쌍둥이도 예외는 아니에요. 한 달의 한 번 정도라면 눈감아 줄 테니 눈치 보지 말고 받아가세요. 그리고 관계 후에는 제가 보는 앞에서 다시 이 묘약을 먹으면 되는 거에요.”

“이건 조금 그렇지 않나요?”

시우는 곧장 난색을 보였다.

본인도 켕기는 게 많은지 대놓고 반발하진 않았지만, 알비레오도 이것이 과감한 인권침해라는 건 알고 있었다.

그에게 정조대를 채우는 것도 진배 없다.

연인 간의 펨돔 플레이라면 몰라도 장모님이 정조대의 열쇠를 쥐고 있다면 머리가 어지러워지는 촌극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미 라디오쇼에서도 듣고 싶지 않은 근친 에피소드를 직관한 알비레오다.

그 정도 촌극엔 거뜬히 어울릴 수 있었다.

“시우 군의 연인 군단이 불어나는 것도 더는 좌시할 수 없어요. 그리고 이거라면 시우 군이 불합리한 성관계를 요구받았을 때도 회피할 수 있고요.”

물론 이 대책은 행해지는 인권침해의 정도에 비해 너무도 일차원적이다.

알비레오가 내세우는 명분부터 허술하기 짝이 없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애초에 알비레오가 성교하는 침대 옆을 지키지 않는 이상 마음만 먹는다면 얼마든 옆길로 샐 수 있지 않은가?

하지만 알비레오는 다른 점은 몰라도 거짓말 못하는 시우의 허술함은 믿었다.

만약 그가 뭔가 수상쩍은 짓을 하게 되었을 때가 되면 알비레오 앞에 묘약을 받아가는 순간 즉각 감지해내리라.

더불어 ‘쌍둥이의 안전을 위해’라는 데네브의 변명을 원초적으로 차단할 방법이자,

만약 데네브가 몰래 시우를 찾아가 줏대 없는 그를 쥐고 흔드려할 경우 분위기에 어물쩍 넘어가는 걸 방지하는 방법이었다.

이렇게 보니 시우보다는 데네브에 초점이 맞춰진 제재인 셈이다.

“어려운 일도 아니잖아요?”

물론 괘씸한 사위에게 눈칫밥 줄 좋은 기회기도 하고.

“후우, 체증이 훅 내려가네.”

결국 찍소리 못하고 나가는 시우를 보며 매일 당하기만 하던 알비레오는 드디어 한 방 먹여주었다는 후련함을 느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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