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녀의도시-611화 (611/917)

#611

1.

평화로운 나날이 흘렀다.

움트는 새싹을 내리쬐는 봄볕의 햇살처럼 단란한 나날이었다.

새벽 시간에는 아멜리아의 향수 공정을 도우며 개인 공부를 한다.

처음과 달리 체계가 잡혀가고 있었기에 예전처럼 많은 시간이 걸리진 않았다.

정오 쯤에는 스승님과의 대련.

도로시에게서 얻어낸 천사의 고리를 활용하기 위함이었다.

소모값은 크지만 모든 기술에 버프를 넣어 확실한 한방을 이끌어 낼 수 있다는 건 그야말로 기연을 얻은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원래 시우의 최대 단점이란 조각조각 모은 자성마법 탓에 필살기가 다소 부족하다는 것이었으니 말이다.

대련이 끝날 저녁에는 다 같이 식사하고 이후에는 샤론, 쌍둥이, 르뤼에와 노닥거리는 나날들.

르뤼에의 치유도 본궤도에 올라 이제 사흘 정도만 지나면 재차 시련에 돌입할 준비가 되어있다.

“슬슬 돈도 벌어볼까?”

이제 남은 건 영체 이상 문제와 80억에 달하는 빚.

이게 꽤 골치였다.

처음엔 페리윙클에게 자문하려 했으나 오랜 기간 부재중인 관계로 상담을 위해 타카쇼를 찾았다.

“여전히 잘나가네.”

그렇게 저녁무렵 도착한  게헨나 유일의 호스트바, 말쿠트 갤러리의 로즈 글래스.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축음기에서 흘러나오는 고상한 클래식, 마녀들의 웃음소리, 분내음이 달짝지근하게 머리를 어지럽힌다.

칸막이 사이사이마다 흘러나오는 대화와 웃음소리는 로즈 글래스가 여전히 성업 중임을 보여주었다.

마녀들의 시선이 집중되면 곤란하다.

미리 연락해두었던 타카쇼의 사무실로 향했다.

“요, 형제 생각보다 일찍 왔네.”

하얀 건치 미소를 발사하며 손을 들어 보이는 타카쇼.

오랜만에 와보는 마담의 사무실인데 뭔가 분위기가 훨씬 세련되게 바뀌었다.

타카쇼의 옷도 한층 더 퀄리티 업 된 느낌이었고 말이다.

“요새 잘나가나 보다?”

“그럼그럼, 이 몸이 누구인가? 그 이름도 위대한 미마야 타카쇼. 신시우보단 못하지만, 역사상 가장 출세한 노예다 이거야.”

가볍게 포옹하며 인사를 나눈 두 사람은 소파에 앉았다.

자연스럽게 다리를 꼬며 거들먹거리는 품새가 이젠 완연한 사장님이다.

“뭔일이냐? 네가 날 다 보자고 하고.”

“상담할 게 있어서.”

“상담? 이 자식, 여자 문제면 죽여버린다?”

성난 원숭이처럼 이를 드러내는 타카쇼지만 저러면서도 상담은 잘 해주었기에 문제에 대해 털어놓았다.

연초가 아닌 굵직한 시가를 물고 겉멋을 부리던 타카쇼는 상황을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흠, 요컨대 돈이 필요하다 이거구먼? 금화로 1만 파운드나? 빌려주랴?”

“그렇게 턱턱 빌려줘도 돼?”

“당연하지, 넌 피를 나누지 않았지만 내 형제라고.”

“말만으로 고맙다. 근데 말했다시피 이건 일종의 시험이라서 보란 듯이 증명해 보이고 싶은 마음도 있거든.”

지금까지 장모님께 빌붙은 것만 셀 수 없다.

금액은 아마 더더욱 셀 수 없을 것이다.

가뜩이나 많은 연인으로 눈치 보이는 와중에 능력 없이 빌붙는 사위로 보이고 싶진 않다.

계속 빌붙어갈 면목도 없었고 말이다.

“그것도 중요하지. 원래 남자가 능력이 있어야 결혼하고도 꽉 붙잡고 사는 거거든. 신시우 이 새끼 그나저나 진짜 대단해졌네.”

“뭐가.”

한숨을 푹 쉰 타카쇼가 조심스레 묻는다.

“그, 혹시…. 심해의 마녀분 사진 한 번 볼 수 없냐? 당연히 야한 거 보여달라는 건 아니고.”

“못할 건 없지.”

생긴 건 금태양인데 이래 봬도 선을 매우 잘 지키는 타카쇼다.

아멜리아와 사귀기 전까지만 해도 ‘아멜리아 부교수 보지 팡팡하면 썰 좀 풀어줘라!’ ‘금발 뷰지털 채집해줘라!’를 농담으로 던지던 그가 막상 연인 관계가 되자 한마디도 말을 하지 않는 것도 그렇고, 전에 샤론이 놀러 왔을 때 선을 철저하게 지키는 것도 그랬다.

“여기.”

“오.”

최근 르뤼에에겐 새로운 취미가 생겼다.

시우의 스마트폰을 가져가 열심히 사진을 찍는 것이다.

한평생을 잠수함에만 있던 르뤼에에겐 세상 만물이 신비로워 보이나 보다.

초점만 겨우 맞출 뿐 각도니 구도니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보이는 대로 찍은 하늘, 달, 꽃, 클로버, 음식 사진이 사진첩을 빼곡하게 채우고 있었다.

그 중에 쌍둥이의 드레스룸 거울 앞에서 찍은 사진을 보여주었다.

다양한 옷을 갈아입으며 찍어본 사진 같았다.

스마트폰을 처음 다뤄보는 사람이 찍은 양 필터도 뭣도 없는 서툰 사진 그 자체.

가슴 앞에 가지런히 손을 모으고 찍은 것이 테크닉의 전부였다.

하지만 서툰 솜씨로 감추기에 피사체의 미모는 너무 탁월했다.

아무렇게 찍은 것이 분명한데 그 흔한 굴욕 사진 없이 화보처럼 보인다.

“와…. 이, 이, 조센징새끼. 발기부전이나 걸려라.”

타카쇼는 연신 감탄과 저주의 말을 내뱉으며 홀린 듯이 르뤼에의 사진을 감상했다.

그래도 이미 여러 번 기만 아닌 기만을 했던 전적이 있기 때문인지 타카쇼는 길길이 화내지 않았다.

“이거면 80억 대납 씹가능이지. 나라도 장기 빼서 판다. 부럽다…. 신시우…. 키사마아….”

대신 분하다는 듯 눈물을 줄줄 흘리는 타카쇼.

“그나저나, 이분도 성격 장난 아니실 것 같네.”

“뭐가?”

“딱 봐도 여왕님 아우라가 흐르는데?”

“여왕님?”

“사진 보면 알 거 아니냐. 분위기가 완전 아멜리아 부교수님 같잖냐.”

타카쇼의 말을 듣고 다시 사진을 보았다.

사진 찍는 데 집중하느라 가운데로 모인 미간과 자연스레 살짝 찡그려진 눈썹.

긴장한 듯 웃지 않고 딱딱하게 경직된 표정.

거기에 원체 위엄이 있어 보이는 짙은 군청색 머리칼에 짙푸른 눈동자까지.

사진으로만 본다면 ‘북부대공이 TS 된다면?’ 같은 느낌이긴 하다.

물론 지금 와서는 챙겨줄 게 많은 여동생 포지션이지만 르뤼에를 처음 봤을 땐 적잖이 위축되었으니.

“너가 잘됐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이 정도로 잘되길 원하진 않았어.”

“너도 마녀들이랑 시원시원하게 떡 친다며.”

“아, 맞아 그거 때문 말인데. 이젠 못할 것 같다.”

“왜? 불알 때문에?”

“나 곧 결혼한다.”

“그러냐? 축하해.”

당연히 구라일 것 같았기에 대충 흘려보냈지만 타카쇼의 분위기가 사뭇 진지하다.

“야, 잠깐. 진짜?”

“어, 아도나이 백작이랑 올해 5월에.”

“와….”

결혼은 인생의 무덤이라고 울부짖던 그 타카쇼가 결혼이라니.

그것도 노예로 시작해서 게헨나의 백작과 결혼한다니 당최 믿기지가 않는다.

하지만 선뜻 축하의 말을 입에 올릴 순 없었다.

타카쇼는 시우와 사정이 다르다.

게다가 아도나이 백작이 누구인가?

타카쇼에게 신체 포기각서를 조건으로 사업자금을 융통해주었던 슈퍼 갑이다.

이 결혼이 설령 타카쇼가 원하는 게 아니라도 강행될 수 있다는 것이다.

“뭘 그렇게 심각하냐.”

“아니, 축하한다. 근데 괜찮은 거 맞지?”

“어, 사실 사업 관련해서 이것저것 대화 나누면서 가까워졌거든. 지금은 서로 없으면 죽는 끈적한 사이랄까.”

“새끼! 진짜 축하한다!”

최근 들었던 소식 중 가장 희보였기에 제 일처럼 기쁘다.

“매일 기만만 당하다 보니 나도 자랑하고 싶은데. 사진 보여줄까?”

“당연하지 인마! 왜 그걸 미리 말 안 했어!”

쑥쓰럽다는 듯 코 밑을 문지르는 타카쇼는 드디어 자랑할 게 생겼다는 듯 싱글벙글 웃었다.

자연스럽게 서랍 안 봉투에서 사진을 꺼내는 타카쇼.

거기엔 개 목줄을 차고 팬티차림으로 다리를 한 짝 들어 올린 타카쇼가 있었다.

“뭐야 시발.”

“이게 아니네. 이거구나.”

“야, 너 시발. 내 눈.”

아무렇지 않게 사진은 집어넣은 타카쇼는 다른 사진을 꺼내주었다.

“이거다.”

거기엔 소문으로만 들었던 아도나이 백작이 있었다.

타카쇼는 르뤼에를 보고 기가 셀 것 같다고 했는데 아도나이 백작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전대물의 섹시 담당 여간부 같은 느낌이랄까.

찰싹 달라붙는 가죽 바지만을 입고 있는 상당히 숭한 사진이었다.

뒷구멍까지 훤히 열리는 지퍼를 열어둔 채 다리를 쩍 벌리고 더블 피스 자세를 취하고 있는 아도나이 백작님.

“예쁘지?”

“얌마, 이런 거 보여줘도 돼?”

“응, 우리 누님은 워낙 털털해서 신경 안 써.”

누가 S 담당이고 누가 M 담당인지 구분할 재간이 없다.

“취향도 잘 맞고 말도 잘 통하고 해서 말이지. 또 내 능수능란한 사업 재능에 감탄하셨다나?”

하여간 감동을 깨는데 한 재주 있는 녀석이다.

아무튼 간에 경사는 경사.

다시 한번 뜨겁게 끌어안으며 등을 두들겨 주었다.

“아, 그리고 NTR플레이 해보고 싶다고 부탁했더니 괜찮으면 너도 데려오라신다.”

“그건 사양한다. 너 진짜 잡식성이구나.”

“당연하지. 난 응아 먹는 거 빼고 다 할 수 있어.”

“그, 그러냐….”

“잘 생각해보니 응아도 먹을 수 있을 것 같아!”

마지막까지 상쾌한 미소를 짓는 타카쇼.

결국 원래 목적은 잊고 타카쇼의 질펀한 연애담이나 듣고 말았다.

2.

오늘 밤은 예소드 마망과 연구 시간.

말이 연구지 허리만 흔들면 그만인 입장에선 질펀한 SM 플레이의 시간이라고 봐도 무방하긴 하다.

깨끗하게 목욕한 이후 꽃다발을 들고 예소드 백작이 기다리고 있을 그녀의 방으로 향했다.

“어머, 시우 씨 어서 와요.”

“안녕하세요, 백작님.”

언제나 처럼 눈웃음을 지으며 반겨주는 루시 백작.

하지만 오늘 그녀의 옷차림은 뭔가 평소랑 달랐다.

항상 시우가 오는 시간에 목욕을 끝내고 야한 속옷이나 가운을 입고 기다리고 있었는데.

오늘은 조금 수비력이 높은 복장이다.

“이제 슬슬 날이 더워지네요? 밤은 아직 서늘한데 낮만 되면 어찌나 햇볕이 따사로운지.”

거기에 곧장 목에 매달려 키스하기는커녕 소파에 먼저 앉아 자리를 권하며 잡담으로 시작하는 예소드 백작.

“무슨 일 있으신가요?”

“어머머, 무슨 말씀이세요. 저희 항상 교양 있는 대화 이후에 시우 씨 취향에 맞춰 관계를 갖곤 했잖아요.”

의아하게 그녀를 바라보고 있자 삐질삐질 이마에서 흐르는 땀이 보인다.

뭔가 수상한데….

즉각 어설픔을 감지한 시우지만 일단 잠자코 자리에 앉았다.

“큼큼, 시우 씨.”

“네, 백작님.”

“제가 전에 말씀드렸던 샘플 이야기 기억하시나요?”

“아, 네. 그거라면 샤론 양이 협력해주기로 했습니다.”

낙인 계승에서 오류가 있어선 안 되니 다른 여성과 관계의 샘플을 수집하고 싶다는 얘기다.

제대로 기억하고 있었기에 샤론에게 협력을 요청했다.

처음엔 조금 곤란한 기색을 보였지만 조만간 약속을 잡기로 했고 말이다.

“어머…. 이걸 어쩌죠?”

“네?”

“사실 연구가 중대한 문제에 가로막혔어요.”

“네?”

“저는 이미 견습마녀가 있는 즉, 그릇을 분리한 마녀이잖아요. 샘플을 수집하려면 일반적인 마녀로는 불가능해요.”

그녀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애초에 시우와 루시의 공동 연구는 낙인의 계승을 위한 것.

일반 마녀만으로는 얻을 수 있는 정보가 부족한 것이다.

“꼭 견습마녀가 있는 마녀 여야만 하는 건가요?”

“네. 꼭꼭꼭꼭이요.”

“연구하신 자료를 살펴볼 수 있을까요?”

“그, 그건…. 제가 놓고 와 버려서….”

곤란했다.

샤론의 동의도 어렵사리 받아냈는데 새삼 견습마녀가 있는 마녀의 조력을 받아야 한다니….

생각에 잠긴 시우.

떠오르는 사람이 전혀 없는 건 아니지만….

“하지만 너무 걱정 말아요 시우 씨.”

“예?”

“제가 다 준비해뒀거든요.”

“네?”

예소드 백작이 자리에서 일어나 침실 쪽 문을 열었다.

“따라와 주시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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