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9
1.
예소드와 제머나이 백작 간의 교류는 꽤 유서깊다.
선대의 선대의 선대, 게헨나가 처음 만들어졌던 때부터 칠 백작의 일익을 차지하며 주기적인 교류와 상생 관계를 이룩했기 때문이다.
물론 천방지축이었던 알비레오 데네브 듀오와 오만한 마녀의 표본이었던 루시가 언제나 원만한 관계를 이룩했던 건 아니었다.
아직 어린 마녀이던 무렵에는 각양각색의 이유로 충돌하곤 했었다.
가령 루시가 눈여겨 보았던 사업체를 제머나이가 홀라당 발라먹거나, 반대로 제머나이가 눈독을 들이던 사냥감을 예소드가 가로채거나 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젊은 날의 혈기가 평생 가기는 것은 어려운 일인 법.
비슷한 시기에 마녀명을 물려 받고 100년이 훌쩍 넘는 세월과 티격태격 다투는 와중에 쌓인 미운 정 고운 정은 우정이라는 이름으로 변모했다.
그만큼 루시 예소드는 데네브 제머나이에 대해 잘 알았다.
언니 쪽보다는 조금 더 인간적인 면모가 돋보이는 편.
견습마녀에게는 언니보다 엄격한 편.
알비레오가 사업의 확장과 공격적인 투자에 일가견이 있다면, 데네브는 내실을 빈틈없이 다지며 허점을 메우는 편.
또한 농담을 잘 하지 않는 편이라는 것까지 말이다.
그렇다면 이 상황은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협박받고 계신 거라면 지금 왼쪽 귀밑머리를 자연스럽게 넘겨주세요]
루시는 눈을 몇 차례고 끔뻑였다.
고상한 필기체는 제머나이 마도구 상점에서 취급하는 특수 잉크로 휘갈겨 있다.
육안이 아닌 카메라나 감시 마법 등으로 보면 내용을 식별할 수 없기에 무단 복제와 외부로의 유출을 방지한다.
따라서 중요한 계약서나 서약문을 쓸 때나 사용하는 것이었다.
즉, 데네브는 감시의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있다는 말.
지금 여기에 감시나 감청 장치가 있는 건가?
루시는 역장을 펼쳐 주위의 마법을 확인했으나 특이 사항은 없었다.
애초에 있을 리가 없다.
여기는 예소드 저택의 본관이자 루시 예소드의 공방이다.
게다가 그 내용은 더욱 의미심장하다.
협박받고 계신 거라면?
게헨나에서 백작을 협박할 수 있는 간 큰 사람이 존재나 한단 말인가?
“재치 넘치시네요. 음, 오늘 만우절이던가요?”
하지만 세상 진지한 표정으로 슬쩍 쪽지를 치우는 데네브를 보자 뭐가 뭔지 더욱 알 수 없게 되었다.
데네브 나름의 조크라기엔 영문을 알 수 없었고.
그저 첩보물의 한 장면을 떠올리게 하는 숨 막히는 긴박감과 비장함은 당혹스러울 뿐이다.
“후….”
그런 루시 예소드의 반응을 뚫어지라 살피던 데네브는 확신했다.
역시 뭔가 숨기고 있다.
처음 쪽지를 보자마자 당혹감에 젖던 표정.
지금은 애써 농담으로 치부하려 하고 있지만 여전히 당혹스러움이 가시질 않고 있다.
정확하게 아픈 곳을 찔렸다는 의미다.
그녀으로선 협박당했다는 사실 자체를 부정하고 싶을 수 있다.
예소드 백작이 협박에 굴하여 몹쓸 짓을 당했다는 건 가십거리가 되기 충분한 추문이니 말이다.
아무리 친구 같은 관계를 유지한 데네브에게라도 알리고 싶지 않을 수 있겠지.
물론 데네브는 그런 부분까지 협상에 이용할 생각이다.
데네브는 즉각 준비했던 다음 쪽지를 내보였다.
[주변에 감시 마법, 혹은 금제가 걸려있다면 고개를 끄덕여주세요]
“데네브 백작님? 뭐하시려는 건가요? 감시 마법이나 금제라뇨. 여긴 제 공방이랍니다.”
“그럼 다른 마법은 걸려있지 않은 거군요. 확인해 봐도 괜찮을까요?”
“백작님이 원하신다면야 뭐…..”
데네브의 돌발 행동에 떨떠름함을 감추지 못하면서도 얼떨결에 어울려주는 루시.
“노래하라.”
간단한 확인 결과 주변에 수상한 마법은 찾지 못했다.
따라서 데네브는 혹시 몰라 준비해두었던 나머지 쪽지를 품에 도로 집어넣었다.
예상보다 훨씬 허술한 조치였다.
그렇다면 데네브가 상정했던 것보다 훨씬 예민한 문제를 목줄로 잡고 있을 수도 있겠노라 생각했다.
“솔직하게 말해주셔도 괜찮아요. 이미 다 알고 왔으니까요.”
“무슨 말씀인지 이해하지 못하겠어요.”
“제가 못 미더운 건 알고 있어요. 일단 시우 군은 저희 가문의 손님으로 있으니까요. 제가 이 자리에 온 건 잘못 꿰어진 관계를 제자리로 다잡기 위함이에요.”
오리무중이던 대화의 방향성을 알려주는 이정표가 나타났다.
협박의 여부와 감시의 여부를 물은 이유는 알 수 없다.
그러나 해석 가능한 이정표도 얼마든 있었다.
우선 신시우는 제머나이 가문의 데릴 사위라는 정황.
현재 심상찮은 데네브의 분위기.
이어진 ‘시우 군은 저희 가문의 손님’ , ‘잘못 꿰어진 관계’, ‘다잡기 위함’ 발언.
해독 가능한 이정표를 조합해 데네브의 행동 원인을 추론했다.
알비레오는 이미 시우와 루시의 연구에 대해 알고 있었다.
연구 이전에 루시가 그를 마음에 들어 해 유혹했다는 것도 알고 있었음에도 아무런 조처를 하지 않았다.
그런데 새삼스레 이 시점에서 신시우와의 연구를 가로막으려는 걸까?
온갖 억측으로 뻗어 나가기 전 루시는 솔직하게 묻기로 했다.
“데네브 백작. 조금 쉽게 설명해주시겠어요? 하나도 이해를 못 하겠네요.”
역시 말투가 곱게 나가진 않는다.
다른 일이라면 몰라도 디아나와 관련된 일이라면 한 치의 양보도 불가하다.
만약 제머나이 백작가가 신시우의 선점권을 주장해 연구를 방해하려 든다면 싸움도 불사할 생각이다.
“시우 군에게 협박받고 있으시죠?”
그렇게 투지를 다져가던 루시는 개 풀 뜯어 먹는 소리에 고개를 갸우뚱했다.
“네?”
“시우 군에게 협박받고 계시다는 거 알고 있어요.”
“…네?”
사고가 따라가질 못한다.
“협박이라뇨? 시우 씨가 저를요?”
“그렇게 의뭉 떠실 필요 없어요. 제가 여기 온 건 루시 백작을 돕고 해당 사건에 관한 확실한 책임을 지기 위해서니까요. 안심해주세요.”
어디서 뭔 얘기를 듣고 왔길래 저런 말도 안 되는 걸 진지하게 주워섬길까?
진심으로 지구가 평평하다 믿는 자들을 상대하는 기분이었다.
“어디서 또 헛소문이 도는 모양이네요. 하여간 할 일 없는 작자들. 남의 뒷이야기로 쑥덕이는 건 데네브 백작도 싫어하는 일 아니었나요?”
데네브가 살롱에서 헛소리를 들었구나 싶었다.
데네브쯤 되는 마녀가 유언비어에 이토록 진지하게 임할 수 있다는 게 신기할 따름이다.
실소를 지으며 이 의미 없는 주제를 마무리하려는 순간이었다.
“제가 눈으로 봤어요.”
루시는 머리가 멍해졌다.
“뭘요?”
“그가 당신과 관계를 맺는 모습을요.”
뭘 봤다고?
루시의 귓가에 삐—소리가 들려왔다.
먹먹한 이명과 동시에 데네브의 ‘봤어요 봤어요 봤어요’가 돌림노래처럼 울린다.
“아니, 아니, 아니…. 그걸 왜 봐요? 어떻게 봐요?”
“정말 죄송해요. 고의는 아니었어요.”
물론 이것은 중대한 문제였다.
빼도 박도 못한 사생활 침해.
제머나이 백작이 제아무리 예소드 백작과 가까운 사이라고 해도 침소를 엿보는 행위는 용납받지 못할 잘못이다.
하지만 화를 내기도 전에 몰려오는 어마어마한 수치심.
오늘 그와 침대에서 나눴던 행위가 파노라마처럼 스쳐 간다.
그러니까 데네브가 그것을 모두 보았다는 것 아닌가?
엉덩이를 맞는 장면도, 흡사 노예처럼 그에게 안기는 장면도, 싫은 척은 다 하면서 헐떡이는 장면도.
그제야 엉성했던 단서의 연결고리가 단단히 연결된다.
고기를 썰던 나이프를 힘없이 떨어뜨린 예소드 백작과 사뭇 진지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는 데네브.
“그러니 숨기실 필요 없어요. 물론 외부에 발설하고자 하는 마음은 전혀 없고요. 저는 그저 루시 백작을 돕고 싶어요.”
“…….”
루시 예소드 일평생 이렇게 당혹스러운 순간은 없었다.
자신이 취미 생활로 집필하는 소설이 시우에게 들켰을 때도 이만큼 땅이 꺼지는 느낌을 받지는 않았다.
“민감한 문제인만큼 최대한 신속하고 조용하게 처리하고 싶어 하시는 마음 알아요.”
“…….”
“정확히 경위를 들을 수 있을까요?”
루시는 고개를 푹 숙인 채 대답하지 않았다.
그에 데네브는 자신의 모든 가설이 들어맞았으며, 그녀의 의도대로 좋은 타이밍에 협상을 추진했음을 확신했다.
이로서 시우는 최악의 선택지를 피할 수 있을 터.
이제 예소드 백작이 받아들일 만한 처벌안과 보상안을 내세우고 중재하면 끝나는 시점이다.
침묵을 지키는 루시의 정수리를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입을 연다.
이 정도 단서를 주었으니 루시도 데네브가 원하는 바를 알 것이다.
굳이 말을 돌릴 필요 없이 본론을 꺼냈다.
“이 불미스러운 사건이 외부로 발설되는 일은 절대로 없을 거에요. 다만 신시우는 저희 가문의 사위인 걸 고려해주실 수 있을까요?”
“…….”
“어영부영 넘어가자는 말은 아니에요. 충분한 보상을 해드리겠어요. 단, 정당한 절차를 거쳐 처벌 받게 하길 원합니다.”
이제 할 말은 전부 전했다.
“데네브 백작….”
한참의 침묵 끝에 귀가 새빨갛게 달아오른 루시 백작이 입을 연다.
하긴 여자로서 그런 짓을 당한 데다가 그걸 타인의 입으로 듣고 말았으니….
수치심이 그녀의 심장을 좀 먹고 있을 것이다.
“…처벌은 원치 않아요.”
어지간히도 중대한 사항이 약점으로 잡힌 모양.
혹은 와신상담하여 훗날 그녀가 직접 손을 쓰려는 것일 수도 있다.
“물론 데네브는 믿어요. 마음도 고마워요. 하지만 처벌은 원치 않아요.”
루시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잘 삶은 문어처럼 벌겋게 익어있는 그녀의 눈가엔 그렁그렁한 눈물이 맺혀있다.
“루시….”
“애초에 처벌이라니…. 어불성설이에요….”
어불성설인건 또 뭔가?
이쯤되자 데네브도 초조해졌다.
중재자가 되지 못한다면 간섭의 여지가 줄어들어 버린다.
“어째서죠?”
“하아…. 어쩌다 이런 일이….”
한탄과 한숨만을 거듭하던 루시가 입술을 달싹였다.
“제가…. 원해서 한 거니까요.”
여기서 진실을 밝히는 건 루시의 비밀스러운 취향을 알리는 것과 다름 없다.
그러나 데네브가 단단히 오해하고 있는 상황에서 ‘맞아요! 그가 절 협박하고 범했어요!’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
순전히 오해 탓에 시우에게 불똥이 튕기는 것을 원할 리 없다.
“루시, 숨기고 싶어한다는 건 알겠어요.”
“아니, 정말로.”
“마냥 덮어놓을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걸 아시잖아요.”
“정말이라니까요?”
“루시….”
따라서 수치심을 무릅쓰고 진실을 밝혔으나 당연히 전혀 믿지 않는 데네브.
심지어 애잔한 눈빛으로 바라본다.
“정말이라고요!”
잠시 정적.
“제가 봤던 모든 게 루시 백작의 요구였다고요?”
“그, 그렇다니까요….”
“루시 백작, 저는 바보가 아니에요. 제가 본 모든 장면이 합의하의 관계라 주장하는 것이라면…. 절대 믿을 수 없어요.”
무릎을 꿇어서 개처럼 기어가고, 노예처럼 손을 쓰지 않고 남성기를 꺼내고, 엉덩이를 얻어맞는 것이 합의하고 진행된 일이다?
성고문이나 다름없다.
세상에 그런 말도 안되는 취향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
“솔직하게 말해주세요.”
“솔직하게 말했잖아요! 부끄러운 걸 참고 조금의 거짓도 없이 말했잖아요!”
“그렇다면 그런 행위를 요구할 만큼 루시 백작의 취향이 유별나다는 건가요? 믿지 못하겠어요.”
“아아아악!”
부끄럽고, 민망하고, 속 터지는 대화는 약 30분가량의 문답을 주고받고야 갈무리 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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