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4
1.
업어가서 대충 내팽겨치고 얼굴에 낙서를 해도 모를 만큼 곤히 잠든 르뤼에를 침대에 눕혀주고 테라스로 나서 담배를 물었다.
몸이 찌뿌둥하다.
그간 외부를 떠돌면서 피로가 쌓인 걸까?
익숙하고 마음 편한 장소에 오니 졸음이 몰려왔다.
“후우….”
담백한 담배 연기로 졸음을 쫓으며 앞으로의 일정에 대해 되짚어 보았다.
그래도 밤 바람이 선선한 것도 제정신을 차리는데 한결 도움을 준다.
“일단은 팔인가?”
일전 제머나이 백작의 지원을 받아 달아놓은 자기 의수의 문제.
코하브 백작의 날림 서비스 탓에 여전히 감각이 없었다.
자유롭게 움직이기에 전투에는 큰 지장은 없지만 여간 불편한 게 아니랄까.
코하브 백작은 시우의 몸을 연구하는 대가로 치료를 돕겠다고 말했기에 뒷순위로 밀어두었던 문제다.
안그래도 레이드몹 취급받고 있는 신세에 마력 증폭과 낙인 복제 및 이식 기능까지 밝혀진다면 바람 잘 날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 문제는 예빈을 찾아 상담해 보기로 하고.
“다음은 예소드 백작님.”
성교를 통한 낙인 이전 연구가 삼 개월가량이나 턱 막혀있었다.
원래는 한 달에 한 번씩 실험을 하기로 했는데 말이다.
게헨나로 다시 돌아오기도 했고 내일쯤 찾아갈 예정이다.
“그리고 기부금이 문제인데….”
현 시점에서 가장 골치 아픈 것이 이 부분이었다.
르뤼에가 시민권 취득을 위해 기부해야 하는 금액은 한화로 약 80억.
사실 르뤼에가 시련을 해결하지 않아도 아쿨라의 보물고를 조금만 털면 쉽사리 해결될 금액이다.
르뤼에 본인을 위해 사용되는 돈이니 떼온다고 해서 딱히 켕길 일도 아니고 말이다.
문제는 알비레오 백작이 이번 자금 조달에 조건을 걸었다는 점이다.
그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을 것, 그리고 자금의 출처를 분명히 할 것.
언뜻 너무한 조건이라 생각이 들지만 꼭 그렇지도 않다.
알비레오는 사위가 새로이 데려온 여자친구를 위해 자신의 ‘이름’을 빌려 보증인이 되어주었다는 점에서 충분히 관대한 처사를 보였다.
즉, 알비레오의 요구는 사위의 방종에 대한 벌임과 동시에 테스트인 셈이다.
“그런데 80억을 어디서 구하냐.”
샤론이 10년 내내 빚쟁이 생활을 하며 벌어들인 돈이 13억이랬다.
물론 그 당시 샤론은 17 위계였고 지금 시우는 대마녀 급의 전력을 보유하고 있으니 상황이 조금 다르기야 하겠지만….
한참 골똘히 생각하고 있을 무렵 등 뒤에서 들려오는 인기척에 등을 돌렸다.
“식사는 즐겁게 했나요?”
“아 데네브 님, 산책 중이셨나요?”
“네, 자기 전에 잠시.”
그곳엔 가벼운 옷차림을 한 데네브가 있었다.
어쩐지 기시감이 풍기는 장면이었다.
창백한 달빛이 흐르는 둥근 어깨와 풀어헤친 하얀 백발.
눈 둘 곳 없이 민망한 얇고 하얀 나이트 드레스는 함께 어항에 갇혀있을 때 항상 보던 옷차림이다.
그때는 망토라도 걸치고 있었지 계절이 바뀌어 숄로 바뀌어 더욱 시선 처리가 민망했다.
그런 옷차림 때문일까?
낮의 데네브와 밤의 데네브는 분위기가 확연히 달랐다.
빤히 보면 안된다는 걸 알면서도 마치 관성에 이끌리듯 드러난 살결에 눈길이 끌린다.
보드라워 보이는 가슴골이라든가, 백조의 솜털처럼 뽀송뽀송한 귀밑머리라든가, 우아한 건축물처럼 아름다운 쇄골이라든가, 목 옆의 작은 점이라든가.
특히 마지막 부분은 실로 불경한 상상력을 자극한다.
시우는 데네브의 비밀스러운 장소 어디 어디에 앙증맞은 점이 찍혀 있는지 알고 있으니 말이다.
“아….”
뒤늦게 시우의 시선을 눈치챈 것인지 숄을 여미며 새초롬하게 눈길을 떨구는 데네브.
저 표정마저 눈에 익다.
3개월이라는 짧은 시간은 그녀가 보여주었던 매혹적인 모습을 빛바래게 만드는 덴 부족했던 모양이다.
“그…. 죄송합니다. 제가 보고 싶어서 본 게 아니라….”
“남자라면 어쩔 수 없죠. 엄밀히 따지자면 제가 매력적인 탓이겠네요.”
어색해 하면서도 농담으로 상황을 넘겨내는 데네브.
시우는 조금 감동했다.
정말 이게 시우가 알고 있던 작은 장모님이 맞나?
가을철 독사 같던 표독스러움은 이미 간데없다.
어리광은 물론이오 다소 억지를 부려도 들어줄 것 같은 포근한 모성만이 있을 뿐이다.
첫 재회 때도 그렇고 오늘 식사자리에서도 그렇고 데네브로부터 어마어마한 점수를 따낸 것이 분명했다.
데네브는 물 위를 걷듯 고요히 다가와 시우의 옆에 바짝 섰다.
정원이 내려 보이는 테라스 난간에 손을 얹는 데네브.
“…….”
“…….”
실은 많이 어색하다.
두 사람은 분명 어항에서 있던 일은 어항에 묻겠다 약조했다.
그러나 이미 한 번 변해버린 관계성.
ctrl+z를 누른 것처럼 완전히 백지화하는 건 어려울지도 모른다.
긴 침묵 속 시우가 조용히 담배케이스에 담뱃불을 비벼끄는 사이.
데네브가 입을 열었다.
“날이 선선하네요. 곧 여름인데도.”
“이거라도 걸치시겠어요?”
냉큼 겉옷을 벗어 그녀의 어깨 위에 덮어주었다.
새삼 남자와 여자의 덩치 차이가 크다는 걸 알게 된다.
데네브의 가녀린 체구가 거의 폭 안기듯 옷에 둘러싸였으니.
“고마워요.”
“별거 아닌 걸요.”
가볍게 놀란 듯 눈을 치켜뜨다가 미소와 함께 감사를 표하는 데네브.
“그나저나 엿들으려던 건 아니었는데. 80억은 무슨 이야기인가요?”
제머나이의 힘을 빌려 르뤼에의 시민권 취득을 받게 되었단 것은 이미 이야기가 되어있다.
하지만 기부금을 대신 내게 되었다는 자초지종을 말해주자 데네브는 금시초문이었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런 일이 있었네요.”
“제가 책임져야 할 문제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
조개처럼 입을 다물던 데네브가 뜻밖의 제안을 해왔다.
“시우군.”
“네.”
“제가 도와줄까요?”
“좋은 방법이라도 있으신가요?”
고개를 끄덕이는 데네브.
“제 비자금이라면 그 정도 금액은 어렵지 않게 마련할 수 있을 거에요.”
“설마 돈을 대신 내주신다는 말씀이셨나요?”
“네.”
당연히 돈을 벌 방법을 주선해주겠다는 줄 알았는데 덜컥 그 커다란 금액을 내주겠다니.
물론 게헨나 뿐 아니라 현세에서도 공룡 기업을 이끄는 데네브라면 그까짓 푼돈이라는 선에서 정리되는 금액이겠지만….
“따지고 보면 제 탓으로 시우 군이 곤란해진 걸요.”
“마음은 정말 감사합니다. 하지만 힘들 것 같아요.”
하지만 받을 수 없는 돈이다.
애초에 이건 큰 장모님의 테스트다.
작은 장모님에게 돈을 받아다가 제출했다간 가루가 될 정도로 까일 것이 분명하다.
진상을 알게된 알비레오가 데네브와 어떤 관계냐고 성을 낼 걸 상상하자 오싹 등골이 떨려왔다.
“그렇지만…. 뭐라도 도와주고 싶은데….”
“정 그러시다면 적당한 일거리를 물색해 주시면 감사히 받겠습니다.”
“그 정도로 될까요? 여차하면 위장 취업은 어떨까요?”
“아, 아뇨, 정말 괜찮습니다.”
“실수 없이 깔끔하게 장부 조작을 해줄 수도 있어요.”
위장취업? 장부조작? 그거 정말 안전한 거 맞나?
굳이 안전 문제가 아니라도 정당하게 증명을 마치려던 처지에서 받아들이기 힘든 제안이었다.
은밀한 제안을 모두 거절하자 데네브는 더 돕지 못해 아쉽다는 듯 입술을 삐쭉 내밀었다.
“뭐, 시우 군의 뜻이 그렇다면 어쩔 수 없죠. 들어가 볼게요.”
조금 새침해진 목소리에서 비로소 예전 데네브의 모습이 다시 보인다.
차라리 조금 다행이었다.
“시우 군, 옷에 얼룩이 좀 있네요.”
그때 겉옷을 돌려주려던 데네브가 멈칫하더니 그것을 다시 품에 안았다.
“네? 어디요?”
시우가 기웃거리며 살피려 했지만 데네브 품에 고이 안긴 옷을 살펴보긴 어려웠다.
재빠르게 말을 잇는 데네브.
“아마 얼룩이 너무 작아서 눈치 못 챘을 거에요. 아마 식사 중에 묻은 것 같은데 세탁을 맡겨서 내일 돌려 드릴게요.”
“네?”
“잘 자요.”
말릴 틈도 없이 빠른 걸음으로 사라지는 데네브.
뒤통수에 감사한다고 말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대체 뭐지?”
당최 알 수가 없었다.
2.
모두 잠들었을 고요한 시각.
데네브는 조용히 시우의 방문을 열고 들어섰다.
“이 시간이라면 분명 혼자겠지….”
심장이 두근두근 뛰었다.
달빛이 내리쬐는 침대 위엔 사위 신시우가 세상 물정 모르고 잠들어 있다.
옷차림은 팬티 바람.
그 덕에 위에서 빨래를 해도 좋을 만큼 잘 갈라진 근육이 속속들이 보인다.
-달칵
“노래하라.”
방해꾼이 없도록 문을 잠그고 수면 마법을 노래한다.
이걸로 어지간한 방해에도 그는 깨어나지 못할 것이다.
즉, 데네브를 방해할 사람은 이제 아무도 없다.
거기서 기인한 고양감.
고양감을 느끼는 자신에 대한 죄악감과 수치심을 가슴 한쪽에 묻고 침대로 다가섰다.
발꿈치를 밀어주는 것은 죄악감과 수치심보다 강렬한 욕망이다.
그를 품고 싶은, 그에게 안기고 싶은, 그와 사랑을 속삭이고 싶은 욕망.
조용히 그의 속옷을 벗겼다.
일전 데네브의 속을 몇 번이고 휘저어주었던 크고 단단한 하물이 하늘 높을 줄 모르고 솟아있다.
그리고 데네브의 욕망은 그 치솟음을 감히 품어낼 만큼 깊어져 있었다.
달빛마저 부끄러웠기에 눈을 감았다.
그의 단단한 가슴을 짚고 말을 타듯 위에 올라탄다.
“하아….”
그의 진득한 체취와 배덕감이 칵테일 된다.
비강을 타고 흘러넘치는 그릇된 쾌락이 뇌를 마비시킨다.
“시우 군…. 미안해요. 하아, 미안해요…. 정말 미안해요…. 이러면 안 되는 거…. 아는데….”
덧없는 사죄의 말을 연신 입에 담으며 그의 위에서 부드럽게 허리를 흔드는 데네브.
잔물결 위에 흔들리는 낙엽처럼 살랑살랑 움직이던 데네브의 허리가 뻣뻣하게 굳는다.
“하아앙…!”
감내하기 벅찬 신음.
여러 감정이 혼재한 오르가즘.
여운에 잠기던 데네브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더니 이내 옆으로 털썩 쓰러진다.
기승 위 자세에서 그런 식으로 거칠게 쓰러진다면 음경골절이라는 대참사가 일어날 수 있지만, 그럴 일은 없었다.
“……”
애초에 이 모든 것이 데네브의 상상이었으니 말이다.
데네브는 아기처럼 몸을 웅크린 채 그의 겉옷에서 묻어나오는 체취를 맡고 있었다.
흥건하게 젖은 손가락이 비참함을 가속한다.
“뭐가 어디부터 잘못된 걸까….”
시우가 실종되었을 때.
데네브는 그것이 패륜을 저지른 자신에 대한 하늘의 징벌이라 생각했다.
사무적이었어야 할 마력 충전을 남녀 간의 진득한 성관계가 되도록 유도하고 유혹한 것은 데네브 본인이었으니 말이다.
따라서 그가 무사히 돌아올 수 있다면 다른 모든 것을 포기하겠노라 하늘에 맹세했다.
두 번 다시는 그를 사모하는 눈빛으로 바라보지 아니하겠노라고, 아무 일도 없던 그때처럼 돌아가겠노라 맹세했다.
허나 돌아온 그를 보자마자 굳은 다짐이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아무리 쌍둥이를 보고 마음을 다잡으려 해도 그럴 수 없다.
초월적인 충동이 데네브를 내던지는 것을 느꼈다.
지금만 해도 얄팍한 거짓말로 그의 옷을 받아와 그 체취를 맡으며 허덕이고 있지 않은가?
아찔한 쾌락 뒤를 찾아오는 건 우울한 죄책감과 자기혐오뿐.
“하아….”
삶의 말미에 불쑥 찾아온 늦사랑은 열병처럼 데네브를 애달프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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