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3
1.
저녁 식사 이후엔 다 같이 모여 그간 있던 일을 도란도란 나누며 포커를 쳤다.
술도 들어갔겠다.
흥겨워진 자리는 시우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평온하게 흘러갔다.
그러니까 시우나 르뤼에나 별다른 원성을 듣는 일 없이 무던히 흘러갔다는 이야기다.
그건 아마도 르뤼에가 미워할 수 없는 성격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냥 오만한 성격이기만 했다면 몰라도 속 정도 깊고, 무엇보다 어딘가 허당끼가 넘쳐 여러 사람의 쓴웃음을 자아냈으니 말이다.
가령 포커 칠 때 좋은 패만 들어오면 얼굴이 활짝 피고, 반대로 안 좋은 패로 블러핑을 칠 때면 세상의 멸망을 알아버린 선지자처럼 심각한 표정이 된다든가.
르뤼에는 순식간에 쌍둥이와 친해졌다.
프라이드로 똘똘 뭉친 르뤼에가 자칫 겉돌면 어쩌지? 하고 염려했었는데 공연한 걱정이었다.
뜻밖에 성격이 잘 맞는 건지 제머나이가 실은 세 쌍둥이였나 싶을 만큼 귀엽게 잘 어울렸다.
그렇게 어느덧 시각은 오전 1시.
기분이 좋으면 술을 듬뿍 마시고 뻗어버리는 습관을 지닌 르뤼에는 여지없이 빠른 페이스로 병나발을 불었다.
“쿠우우움. 쿠우우움.”
그 덕에 독특한 소리로 코를 골며 곤드레만드레 취해 소파 한구석에 떡실신 돼 있다.
오늘 먼 길을 이동한 데다가 어마어마한 경험을 했으니 몸이 온전치 않은 그녀로선 버티기 힘든 피로였던 것이다.
“이제 슬슬 정리할까요?”
계속 저대로 둘 순 없기에 침실로 데려다 주려는 시우.
타이밍 좋게 알비레오 백작이 들어섰다.
“귀염둥이들, 잘 시간이야.”
“벌써요?”
“너무 늦지 말아야지. 내일 수업도 있으니까.”
“네, 스승님.”
졸린 눈을 비비는 척 하품을 쩌억하며 순순히 일어나는 쌍둥이.
분명 ‘조수님이랑 오랜만에 만나는 거니까 오늘 밤새울 거에요!’라는 반응을 예상했던 시우로선 다소 의외였다.
“조수님 잘자.”
“저흰 먼저 잘게요. 안녕히 주무세요.”
“네, 오딜 님. 오데트 님. 모두 안녕히 주무세요.”
서로를 바라보는 자색 눈동자가 빛난다.
사실 오딜도 오데트도 계획이 있었다.
조수님과의 재회 이벤트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아마 여기 있는 모두가 ‘조수님과 알콩달콩 19금 이벤트’를 기다리고 있겠지.
그리고 오딜과 오데트는 견습마녀인바 다른 연인들과 달리 떳떳하게 관계를 나눌 수 없는 처지이다.
어차피 여기서 ‘저희 조수님이랑 해야 해요!’라고 강짜를 부려봐야 침실로 질질 끌려갈 운명.
즉, 일단은 말 잘 듣는 아이처럼 잠자리에 드는 척하고 몰래 조수님 방으로 숨어들 예정이었던 것이다.
“아유, 우리 쌍둥이들 말도 잘 듣네.”
“그럼요, 스승님.”
“저희가 언제 스승님 말씀 거스른 적이 있었나요.”
알비레오는 싱긋 웃으며 쌍둥이의 머리에 나란히 손을 얹는다.
“그럼그럼, 우리 귀염둥이들 오늘은 스승님이랑 같이 자자.”
“네?”
“엑?”
쌍둥이가 뭘 노리고 있을지는 불 보듯 뻔한 노릇이다.
아마 침실에 들자마자 오르골을 들고 창문으로 뛰쳐나가 신시우의 침소로 잠입하겠지.
벌써 첩보 에로물 한편 뚝딱이다.
물론 데네브를 통해 그쪽으로 하는 성교가 낙인에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는 검증을 받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쌍둥이는 아직 견습마녀다.
뻔히 엄한 짓을 할 걸 아는데다가 간만에 재회에 흥분한 결과 실수를 할 수도 있다.
데네브보다 한결 관대한 알비레오라 해도 아무 조치 없이 쌍둥이를 위험에 내던져 둘 만큼 방임주의는 아니었다.
적어도 재회의 흥분이 가실 때까지는 격리조치다.
“아, 아니에요! 저희 정말 혼자 잘 수 있어요!”
“맞아요! 게다가 언니 잠버릇이 얼마나 고약한데요!”
“그래요! 오데트도 코를 코끼리처럼 골아요!”
“스승님이 옆에 계시면 분명 깨워버릴 거에요!”
오딜과 오데트는 물거품이 된 계획에 펄쩍 뛰며 어떻게든 자리를 피하려 들었다.
스승님의 옆이라면 절대로 몰래 나갈 수 없을 테니 말이다.
설령 몰래 나가는 것에 성공한다 해도 수습을 위해 덧붙일 변명도 문제다.
“괜찮아. 어렸을 땐 안 그런 줄 아니? 자자, 어서 가자.”
““힝….””
한참 뒤에 당첨된 걸 깨달은 복권이 유효기간이 지났다는 걸 깨달은 것처럼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연행되는 쌍둥이.
쌍둥이가 아무리 영악하다 한들 알비레오의 손바닥 안이었다.
2.
시우가 르뤼에를 안고 침대에 눕혀 놓기 위해 떠난 즉시.
놀자판이던 방 안에 미묘한 기류가 흐른다.
누가 말한 것도 아닌데 옹기종기 모여 앉은 샤론, 아멜리아, 엘로아.
말하지 않아도 서로가 원하는 바를 모두 알고 있는 듯하다.
그도 그럴 것이 무려 계절 하나가 지나간 뒤의 재회다.
같이 식사도 하고, 술도 마시고, 포커도 쳤지만 가장 중요하다 말할 수 있는 이벤트.
오늘밤 시우의 침대 옆자리를 차지하는 이벤트가 남아있었다.
“…….”
“…….”
“…….”
하지만 누구 하나 선뜻 입을 열지 못했다.
친한 친구들끼리 야한 이야기를 잘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지 않은가?
아무리 수색 과정에서 우정을 쌓았다 한들 입에 담기엔 다소 낯부끄러운 주제였던 탓이다.
머리에 열이 올라 이것도 했네 저것도 했네 투닥투닥 다투던 때가 아니었으니 말이다.
이대로라면 시우가 돌아올 때까지 진전이 없을 것 같았기에 별수 없이 샤론이 먼저 운을 뗐다.
“다들 오늘 밤에 뭐하시나요?”
다만 직구가 아닌 아리랑볼 같은 질문이었다.
어차피 이쯤 말해도 다 알아들을 터이다.
“나야 달리 약속은 없네.”
“저도요. 내일부터는 바빠지겠지만, 오늘 밤은 한가해요. 샤론 양은요?”
예상대로 의뭉을 떠는 엘로아와 아멜리아.
좌우를 살피던 샤론이 슬며시 한 발을 더 내밀었다.
“아하, 저는 예정이 있거든요. 시우랑 술을 좀 더 마실 예정이라…. 두 분 한가하시면 담소라도 나누시는 거 어떤가요?”
아멜리아도 그제야 눈을 번뜩인다.
앞에만 들었을 때는 기회다 싶었는데 샤론의 이어진 말을 해석하자면 ‘두 분은 양보하세요~’ 였기 때문이다.
“그건 어렵겠네요. 사실 저도 시우와 함께 술을 마실 예정이었어요. 샤론 양이야말로 내일 수업이 있을 텐데…. 준비해두는 거 어떤가요?”
“아니에요, 아멜리아 님. 수업 준비는 애진즉 끝내뒀어요. 아멜리아 님이야 말로 한동안 향수 공방에 못 들르신 걸로 아는데 영업준비는 충분하신가요?”
겉보기에는 서로의 내일을 염려하는 보기 좋은 모습.
하지만 엘로아는 둘 사이에서 시공간이 뒤틀어지는 영압의 격돌을 느꼈다.
시도 때도 없이 쌍둥이와 투닥거리던 샤론은 그렇다 쳐도 의외로 점잖은 아멜리아도 시우 문제가 걸리면 적극 다투는 것이다.
“…….”
하지만 엘로아는 협의회에서 적극적으로 자기주장을 해본 적이 없었다.
샤론과 쌍둥이 또는 아멜리아는 평범한 연인 관계로 끝이지만, 엘로아는 시우의 스승이자 연인이다.
자신에게 특히나 엄격한 엘로아의 도덕 기준상 이미 사제관계라는 배덕을 범한 그녀가 의견을 적극 피력하기엔 제 발이 저리는 것이다.
“정 그렇다면…. 시간을 나눠보는 건 어떤가?”
기껏해야 이 정도의 중재안을 제시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렇게 되면 너무 부족할 것 같은데…. 이번에는 두 분이 조금 양보해주시죠?”
“저도 마음 같아선 샤론 양과 엘로아 님께 양보하고 싶지만…. 오늘 시우에게 꼭 해야 할 말이 있어요.”
살짝 붕 떠버린 엘로아를 두고 아멜리아와 샤론은 열변을 이어갔다.
점잖은 말씨 속 가속되는 열기.
“에휴, 이대로는 끝이 안 나겠어요..”
“시우가 오기 전에 끝내야 하니…. 조금 다른 방향으로 대화해볼까요?”
비슷한 형태로 논의하다 감정싸움으로 번져 파국을 맞이한 전적이 있는 만큼 아멜리아와 샤론은 한발 물러서기로 했다.
“그렇다면 시우가 선택하게 해보는 건 어떤가?”
다시 엘로아의 제안.
“시우 성격상 그건…. 아마도 절대 안 될 걸요?”
즉각 난감해하는 시우를 떠올리는 샤론과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이는 아멜리아.
그는 침대 위에서는 한 마리의 짐승이지만 밖에서는 한없이 우유부단하니 말이다.
누구도 양보하기 싫고, 누구도 뒤처지기 싫은 이 상황.
고민을 거듭하던 샤론이 입을 연다.
“기왕 이렇게 된 거…. 저희끼리 이벤트를 준비해 볼까요?”
답이 나오지 않는 교착 상태에서 샤론의 발언은 단숨에 두 사람의 관심이 쏠렸다.
“이벤트? 그게 뭐죠?”
“제가 예전에 구글에서 봤는데 가끔 색다른 플레이를 해주면 연인 간의 사이를 돈독히 하는데 좋다고 해요. 게다가 어쨌거나 시우가 무사히 돌아온 걸 축하하는 날이잖아요. 근데 이건 다들 아시지 않나…? 이벤트 해보시지 않았나요?”
“흠, 확실히 좋아했던 기억은 있네. 그게 상황을 해결할 수 있다는 말인가?”
“그러니까…. 우리 셋이서 다 같이 쳐들어가는 거죠.”
진지하게 말하는 샤론의 말은 곧 4P 제안이었다.
“어, 어떻게 그런 파렴치한 행동을…!”
“넷이서 함께? 진심으로 하는 이야기인가?”
경악하는 아멜리아와 거의 경기를 일으킬 지경이 된 엘로아.
순식간에 얼굴이 불그스레 변한다.
사실 제안을 꺼낸 샤론도 뺨이 화끈거렸다.
하지만 두 사람의 반응을 보아하니 나름대로 노림수가 먹혀들었기에 내심 미소를 지었다.
이건 샤론이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굉장히 파격적인 제안이다.
그만큼 침대 위에서 흐드러지는 표정이나 달콤한 신음 혹은 아양을 떠는 목소리는 여자로서 남에게 보여주기 부끄러운 것.
점잖기 그지없는 아멜리아나 고지식한 엘로아가 선뜻 이 제안을 수용할 것 같진 않다.
만약 두 사람이 부끄러움으로 포기 선언을 하면 빈자리를 홀로 독차지.
이런 요행도 노리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이벤트라면 시우가 엄청 좋아할 걸요?”
그렇기에 이 이벤트가 ‘시우를 위한 것’임을 강조해 빠져나갈 구석이 없게 만들었다.
하지만 물러설 줄 알았던 아멜리아도 엘로아도 포기 선언을 하지 않았다.
잠시 고민하던 아멜리아가 굳은 의지를 보인 것이다.
“하죠. 티페레트 공작께선 괜찮으신가요?”
“그냥 옆에서 있는 정도라면 할 수 있을 것 같네.”
역시 두 사람 모두 순순히 포기할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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