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2
1.
“앞으로도 여기서 마음껏 골라 입게 해 줄 테니까….”
“조수님이랑 헤어져.”
태연하게 조건을 입에 담는 쌍둥이.
입에 케이크를 넣어주다 바로 빼버리며 터무니없는 조건을 요구하는 쌍둥이에게 르뤼에는 분개했다.
겨우 옷 몇 벌 자유롭게 입는데 국서를 포기하라고?
이럴 거면 차라리 보여주지라도 말 것이지.
절대 수용할 수 없는 교환비였다.
“말도 안되는 소리 하지 말거라! 간악한 거래에 짐이 응하리라 생각하느냐! 어디서 감….”
“그래? 그럼 다른 조건으로 하자.”
“우리랑 싸울 땐 마법 쓰지 않기 어때?”
르뤼에가 전부 화를 내기도 전에 쌍둥이는 재빨리 조건을 바꿨다.
애초에 쌍둥이는 르뤼에가 저 조건을 수용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마녀 명 걸고 약속하기.””
동시에 휙휙 르뤼에의 코앞에 새끼손가락이 들이밀어 진다.
터무니 없는 조건을 걸고, 그 뒤로 다소 가벼운 조건을 내건다면 협상이 쉬워진다는 전략을 사용한 것이다.
“너는 23 위계고 우리는 견습마녀잖아.”
“경쟁은 공평하게 해야지.”
“하.”
따라갈 수 없는 화제 전환에 당황했던 것도 잠시 르뤼에는 코웃음 쳤다.
왜 이제야 이 조막만 한 쌍둥이 자매가 옷을 보여주겠다는 둥 설쳐댔는지 확실히 그림이 보였다.
이 녀석들은 지레 겁을 먹었다.
“경쟁을 공평하게? 아주 귀엽게들 구는구나. 짐이 그렇게 두렵느냐? 두려우면 포기하여도 좋다. 압도적인 힘의 차이 앞에서 패배를 시인하고 도주를 택하는 건 전혀 부끄러운 일이 아니니 말이다.”
불과 한 달 안에 르뤼에는 힘을 되찾는다.
방금이야 비겁하게 2대 1을 하며 르뤼에를 제압했지만 조금만 지나면 사정이 완전히 뒤바뀌는 것이다.
“너희야말로 신시우를 포기하고 이 드레스룸을 짐에게 넘긴다면 자비를 하사해주마. 짐은 원한은 절대로 잊지 않는다. 짐을 멋대로 억압하며 간지럽혔던 일은 낙인을 계승해도 잊지 않고 갚아줄 것이니라.”
한마디로 전쟁 중 먼저 휴전을 제의하는 쪽이 더 똥줄이 타고 있다는 말.
그리고 르뤼에의 추측은 거의 진실에 가까웠다.
쌍둥이의 입장에서 르뤼에는 새로 등장한 다크호스다.
일견 저리 허접해 보여도 무려 옛 마녀의 맥을 이은 추방자 출신.
기존에 경쟁하던 세 사람은 힘으로 무엇을 하려 들지 않지만 르뤼에의 경우 어디로 튈지 모르는 공이었다.
물론 쌍둥이에게 든든한 뒷배가 있으니 그 힘을 마구잡이로 휘두르진 못할지라도 최소한의 안전장치를 걸어 놓으려는 것이다.
“어지간히 자신이 없나 보네.”
“겁먹었네, 겁먹었어.”
우위를 확신하고 웃음 짓던 르뤼에가 무시할 수 없는 말이 들려왔다.
“겁을 먹었다고? 헛소리 마라. 겁을 집어먹은 건 너희 아니냐.”
“우리는 하나도 안 무서운데?”
“오히려 네가 자신 없으니까 마법으로 이기려 드는 거잖아.”
쌍둥이는 번갈아 열변을 토했다.
“솔직하게 말해도 돼. 짐은 도저히 매력으로는 너희를 이길 수 없도다.”
“그러니까 무식하게 마법을 써서 사랑을 쟁취하겠느니라.”
“헛소리! 짐은 매력으로도 너희보다 훨씬 높은 경지니라!”
“그럼 왜 마법을 쓰지 않는다는 조건이 싫은 건데?”
“어차피 매력으로도 훨씬 높은 경지라며?”
사실 공평한 경쟁이고 뭐고 유리한 고지를 더 많이 점거한 쪽에서 순순히 이점을 내려놓을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쌍둥이가 벌이는 ‘교전 중 마법 포기 작전’은 실로 유치한 도발이었으며 궤변이었다.
“그러니까 자신이 없다고 생각하는 수밖에 없지.”
“말로는 여왕이니 뭐니해도 실은 우리가 두려운 거지?”
도발도 수준이 맞아야 통하는 법이다.
그리고 쌍둥이 특유의 양면공격이 버무려진 유치한 도발은,
르뤼에에게 전문 맞춤 눈높이 도발이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쌍둥이의 계략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오딜의 자색 눈동자가 르뤼에의 흔들리는 시선과 빤히 마주한다.
“만약 부정하고 싶다면, 이 옷이랑 구두를 가져가고 마녀 명을 걸고 약속하면 돼. 우리랑 경쟁할 때는 마법을 쓰지 않기로.”
“언니! 잠깐만! 이거 우리한테 너무 불리한 거 아니야? 마법을 포기하는 용단으로 매력에 대한 자신감을 증명할 수 있는 데다가 예쁜 드레스 구두 세트까지 얻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주고 말았잖아!”
옆에서 호들갑을 떨며 바람을 잡는 오데트.
“게다가 이 원피스 좀 봐 고귀한 로얄블루의 색상! 거기에 소매에는 장인이 한땀 한땀 정성껏 수놓은 레이스가 우아함을 한층 더해주고 있잖아!”
“흐음…. 확실히 저 녀석에게 아주 잘 어울리기는 하겠네. 저 촌스러운 드레스도 그럴듯하게 소화해내고 있으니까. 백조처럼 아름다운 각선미를 살려주는 구두에 원피스가 더해진다면 조수님의 사랑을 듬뿍 받긴 하겠네.”
날 때부터 찰싹 달라붙어 있던 쌍둥이답게 즉흥으로 짜인 연기라고는 믿기지 않을, 실로 억대 연봉의 쇼호스트에 버금가는 티키타카였다.
“언니, 고작 마법을 포기하는 걸로 이런 무기를 교환한다면 우리가 되레 불리해지지 않을까? 진짜 여왕님처럼 보일 것 같아.”
“오데트, 네 생각이 맞는 것 같아. 르뤼에라고 했나? 교환은 없던 걸로….”
휘리릭 르뤼에의 손이 잔영만 남을 정도로 빠르게 움직이더니 오딜의 손에 들려 있던 드레스와 구두가 순식간에 넘어갔다.
물론 일부로 뺏어가기 쉽게 헐겁게 잡고 있던 것이다.
“이미 늦었느니라.”
르뤼에는 득의양양한 미소를 지으며 쌍둥이를 바라보았다.
쌍둥이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자니 아무리 생각해도 이득뿐인 교환이었다.
“위대한 누켈라비의 이름을 걸고 맹세한다. 너희와 드잡이를 벌이게 되면 마법을 사용하지 않겠다. 허나 이것만 받고 넘어가기엔 너무 아쉽구나. 다른 옷들도 몇 가지 둘러보는 것으로 간지럼 피웠던 일에 대해서도 관대히 용서하겠노라.”
따라서 말을 바꿀세라 재빨리 맹세한다.
“그래? 그럼 좀 더 둘러보자.”
“오늘 저녁 식사 자리에서 입을 만한 드레스도 볼래?”
“으, 응...?”
목적을 완수한 쌍둥이의 반응은 르뤼에의 예상과는 너무도 동떨어져 있었다.
잘못된 교환 조건을 내세운 것을 르뤼에가 냉큼 낚아챈 것이니 분노하거나 좌절해도 모자랄 판국인데….
마치 계획대로였다는 듯 비열한 웃음을 지으며 사근사근하게 어깨를 감싸는 것이다.
“너 분명 마녀명 걸었다?”
“어기면 어떻게 되는지 알지?”
“간지럼 피운 거 복수 하지 않는 것도 마녀명 건 거지?”
“언니 각서도 받아두자.”
허나 그런 것들을 지적하기엔 당장 눈앞에 보이는 보물 더미 같은 옷더미가 너무도 매혹적이다.
쌍둥이와 르뤼에는 유달리 차이 나는 신체 부위가 있지만 커다란 문제는 되지 않았다.
“오오, 이건 어떠냐?”
“최고! 당장 모델해도 되겠다!”
“이건 어떠하냐!”
“으아아악! 여왕의 품위가 너무 눈부셔!”
“음하하하하!!!! 그 정도이냐?”
그만큼 많은 옷이 드레스룸을 채우고 있었으니 말이다.
“이건 너무 숨 막힌다….”
“원래 코르셋이 좀 빡세긴 해. 대신 허리가 가늘어 보이거든. 오데트 그쪽 잡아.”
“셋 하면 당겨 언니! 셋!”
“끄으으윽! 내장이 나온다…!”
예쁜 옷을 듬뿍 입어본 르뤼에게도.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고 리액션 야무진 르뤼에에게 인형놀이를 해보는 쌍둥이에게도.
모두모두 즐거운 시간이었다고 한다.
2.
시우의 무사 복귀를 기념하는 즐거운 저녁시간.
백작 가의 식당에는 산해진미의 향기가 넘실거렸다.
참가 인원은 총 9명.
4시간 내내 쌍둥이와 옷 구경을 하느라 시장기도 돌았고, 생전 처음 보는 게헨나 풍 요리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기에 르뤼에의 침샘은 마를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어느덧 제법 친해진 쌍둥이에게 이것저것을 물어보며 정신없이 앞 접시에 요리를 덜어 담는다.
“너희 잠수함에는 이런 거 없지?”
“흥, 그래도 해산물 요리만큼은 아쿨라를 넘볼 수 없을 것이다. 짐의 왕국에는 아나스타샤 주방장이 있느니라.”
“그래? 다음에 놀러 가면 해줘.”
“물론이다. 짐은 원한을 잊지 않지만 융숭한 대접 또한 절대 잊지 않고 보답하니라.”
새로 사귄 쌍둥이와 잘 어울리는 르뤼에를 보며 보호자인 시우가 안심하고 있을 때.
알비레오의 미간에는 쓰고 치워둔 냅킨처럼 주름이 잡혀 있었다.
“술잔이 비었네요. 제가 따라드릴게요.”
“아닙니다. 이미 충분히 마셔서.”
“아니에요, 제가 할게요.”
“어…. 감사합니다.”
왜냐하면 본디 호스트석에 앉아있어야 할 데네브가 알비레오의 옆을 벗어나 시우에게 찰싹 달라붙은 채 음식을 덜어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저들끼리 놀고 떠드느라 바쁜 쌍둥이와 르뤼에를 제외한 나머지 인원은 어안이 벙벙한 채 그 낯선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원래 데네브는 다 함께 식사할 때면 시우의 테이블 매너를 물고 늘어지며 잔소리하기 바빴다.
‘식기는 바깥쪽부터라고 했죠!’
‘누가 스프를 불어서 식히나요! 스푼으로 저어서 식혀요!’
‘나이프를 누가 그렇게 쥐나요! 우리 쌍둥이들을 보세요! 얼마나 똑 부러지고 기품있게 식사하는데요!”
식사예절은 중요한 부분이기도 하고 데네브가 시우를 갈궈대는 이유를 다들 알고 있었기에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던 일이다.
그런데 지금은….
“시우 군, 이것도 먹어 보세요. 오렌지 리큐르와 조리한 치킨 소테랍니다.”
“아, 데네브 님. 감사합니다.”
“맛이 어떤가요?”
“훌륭합니다.”
이꼴이다.
그 모습이 꼭 서방님께 이 음식 저 음식을 먹여주고픈 새색시 같다는 건 지나친 착각일까?
물론 어항 안에서 나름의 사투를 벌이느라 전우애가 쌓였고, 무엇보다 시우가 데네브를 대신해 위험을 무릅썼으니 감사한 마음도 존재할 것이다.
데네브의 반전이 고마움의 표시라면 아주 맥락 없는 것은 아니라는 의미다.
다들 그렇게 수긍하고 저마다 식사에 집중하고 있었지만 알비레오에게는 조금 다르게 보였다.
어항에서 벌어진 일이 비단 ‘사투’ 뿐이 아니라는 걸 유일하게 알고 있던 까닭이다.
데네브의 분별력을 믿으려 해도, 자신이 생각하는 것이 섣부른 예단이라 믿으려 해도….
“후후, 그렇죠? 모처럼 직접 솜씨 좀 발휘했어요.”
“아, 네. 요리도 잘하시네요.”
“부족하면 얼마든지 말해요. 아, 이것도 먹어볼래요?”
저런 모습을 보고 있자면 데네브를 향한 백 년의 신뢰도 흐려지고 마는 것이다.
그러고보니….
알비레오는 새삼 주위를 살폈다.
그나마 위화감을 느꼈는지 데네브와 시우를 미심쩍은 눈으로 힐끗거리는 샤론.
예법에 한 치도 어긋남 없이 귀족의 교본서처럼 식사에만 집중하는 아멜리아.
반주를 곁들이며 천천히 취해가고 있는 티페레트 공작.
채소를 골라내어 르뤼에의 접시에 몰아주는 오딜 오데트.
수북하게 쌓인 채소를 불평없이 먹어치워 가는 르뤼에.
시우에게서 한시도 눈을 떼지 않는 데네브까지.
오싹.
갑자기 등골이 시리다.
왜냐하면 굉장히 두려운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 자리의 여성 진은 전부 시우와 어떤 방식으로든 몸을 섞었다.
알비레오만 빼고.
“먼저 일어날게요. 식사 즐겁게 하세요.”
이미 연인이 많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구별하니 한결 생생하게 피부에 와 닿는 느낌이다.
이따 데네브를 불러 잔소리를 좀 해주어야겠다 다짐하며 먼저 식당을 나선 알비레오.
“정신 똑바로 차려야겠네….”
오늘도 못난 사위놈 탓에 알비레오의 시름은 깊어만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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