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녀의도시-600화 (600/917)

#600

1.

비록 힘에서 밀릴지언정 초목도 벌벌 떨게 하는 카리스마로 분홍머리 마녀를 제압한 르뤼에는 의기양양했다.

다만 불운한 사고로 힘의 차이를 보여주지 못하고 반석 위를 구른 것이 한이었지만 말이다.

어쨌거나 저쨌거나 르뤼에의 탐험은 계속되었다.

발길 닿는 대로 저택을 구경하다 별장까지 도달한 르뤼에는 아무런 거리낌 없이 실내로 발을 들였다.

르뤼에게 있어 자신은 귀빈이다.

초대받지 않은 장소라 한들 발길을 옮기는데 두려움이 없던 것이다.

“이리 오너라!”

롱 갤러리가 있는 본관보다는 조금 오래된 건물이라는 느낌은 있지만, 잘 관리된 골동품처럼 낙후되었다기보다는 예스러운 정취가 넘치는 장소였다.

“흐음, 짐의 거처로 삼기 알맞도다.”

르뤼에는 이 별채가 마음에 쏙 들었다.

물론 호화롭기 짝이 없는 본관도 마음에 든다.

하지만 그곳은 시도때도없이 사용인이 돌아다닐뿐더러 지나치게 화려한 나머지 어딘가 불편하다.

파티 드레스가 보기에는 예뻐도 편안해 보이는 건 양털 파자마인 것처럼 말이다.

가뜩이나 조용한 곳에서 조용한 사역마들과 살아왔던 르뤼에는 궁궐처럼 넓은 실내보다 이렇게 닫힌 공간이 마음이 놓였다.

“여기는 짐이 접수해야겠느니라.”

시우의 말대로 몸을 회복하기 위해 당분간은 게헨나에 머물러야 할 터.

르뤼에는 이곳을 거처로 삼기로 반쯤 마음먹었다.

그러나 겉보기로만 숙소를 판가름할 수는 없는 노릇, 객실이나 침대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발을 옮겼다.

로비 뿐 아니라 계단을 오르고 나서 쭉 늘어선 방 하나하나도 마음에 들었다.

베개가 없고 하얀 천으로 덮여있기는 했지만 손님이 머물지 않는데도 깨끗하게 정돈되어있는 침대.

먼지 한 톨 묻어나오지 않는 가구.

특히 ‘ㅁ’자 형태의 별채 중심에 고요한 중정(中庭)이 있는데 안쪽으로 나 있는 복도 유리창을 통해 어디서든 혼자 감상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게 최다 가산점 포인트다.

아쿨라의 정원이라 해봤자 각종 채소와 허브를 기르는 수경 재배기가 전부였으니 말이다.

“시우와 함께 망고나무도 심고, 파인애플도 심으면 취미거리로 괜찮을 것 같도다.”

아무리 당찬 르뤼에라도 낯선 곳을 홀로 돌아다니는 건 피로감이 쌓이는 일이다.

그 탓에 경직되었던 입꼬리가 행복한 상상과 함께 느슨해진다.

“음?”

그 와중에 르뤼에의 눈길을 사로잡는 방.

층수는 3층.

로비와 정반대 편에 있으면서 동시에 가장 넓은 면적을 차지하는 듯한 방이었다.

문도 여타 다른 방에 비해 월등히 크고 말이다.

이 방을 침실로 삼겠다고 다짐한 르뤼에는 문을 열었다.

당연하게도 노크 따윈 하지 않았다.

-덜컥!

“흠, 이런 곳도 있구나. 음?”

르뤼에의 시야에 들어온 것은 두 마녀.

역시 마녀의 도시라는 이름답게 어디를 가나 마녀가 보인다는 사실에 새삼 감탄하며 그 면면을 살핀다.

한 명은 금발의 마녀.

갑작스러운 손님의 등장에 깜빡이는 눈은 하늘을 찍어내어 수채통에 연하게 풀어낸 듯한 하늘색이 독특했다.

추가로 얼굴이 제법 반반하다.

다른 한 명은 짙은 녹발.

맨발로 숲을 뛰어다니며 꽃의 노래를 부른다는 설화 속 님프가 실존한다면 저렇지 않을까 싶은 외형으로, 저쪽 역시 얼굴이 제법 반반하다.

“누구세요?”

그 중 가슴이 더 큰 녹색 마녀가 물었다.

옆에 금발 마녀가 녹색 마녀에게 묻는다.

“샤론 양이 아는 분 아니었나요?”

“아뇨, 저도 처음 봐요.”

불청객을 두고 그런 대화가 오갔지만 르뤼에는 전혀 주눅 들지 않았다.

“아아, 볼 일들 보거라. 구경만 하다 갈 터이니.”

라고 말하며 귀찮은 듯 손을 살랑였을 따름이다.

이미 마음에 쏙 드는 집을 구경하는 것에 정신이 팔려있던 까닭이다.

더군다나 이미 쌍둥이 견습마녀에 거쳐 분홍 마녀를 상대하느라 심력을 소모한바 불필요한 에너지 소비를 하고 싶진 않았다.

애석하게도 이곳 게헨나는 심해의 마녀의 위명이 충분히 퍼지지 못 한 촌구석이고, 우민들을 일일이 나무라다가는 르뤼에만 피곤해지리라는 것을 알아차렸으니 말이다.

“흐음…. 죄다 싸구려 술들이구나.”

제 집을 활보하듯 찬장을 뒤적이며 태연하게 혹평을 던지는 르뤼에.

어이가 없어 화를 낼 타이밍도 잡지 못하던 샤론이 슬슬 한소리 해야겠다 느낄 무렵.

“뭐하는 짓이죠?”

샤론이 있는 힘껏 화낸 것보다 수 배는 서늘하고 냉기가 풀풀 넘치는 목소리가 스산하게 퍼졌다.

그렇다.

트리니티 아카데미에서도 무서운 부교수님이라는 소문이 자자할 정도로 한 성깔 하는 아멜리아다.

최근 여러 경험을 거치며 부드러워진 경향이 있다지만 코앞에서 벌어지는 오만방자한 행동을 좌시할 정도로 자비롭지는 않은 것이다.

“음?”

찬장에서 꺼낸 술병의 라벨을 제멋대로 살펴보던 르뤼에도 주의를 돌렸다.

손가락으로 제 턱을 가리키며 눈을 동그랗게 뜨는 르뤼에.

“그래요, 당신.”

“하, 이래서 근본 없는 마녀들이란….”

떠받들어 지는 것만으로 충분한 심해의 여왕이 언제부터 위대함을 스스로 드러내야 했단 말인가?

그러나 앞서 경험했듯 이곳은 촌구석.

무지를 탓하여 벌하기엔 시우의 당부가 마음에 걸리니 관대히 신분을 밝히려던 찰나.

“근본이 없다? 근본이 없는 건 멋대로 남의 저택에 찾아와 대화를 방해한 것도 모자라 도둑고양이처럼 찬장을 뒤적이는 사람이 아닐까요?”

생각도 못한 발칙한 지적이 돌아왔다.

단순히 거기까지라면 르뤼에도 할 말이 많았다.

하지만 실내온도가 단숨에 영하로 떨어진 듯한 냉엄한 목소리.

눈살 하나 찌푸리지 않았고 언성도 높이지 않았지만, 어떤 위협적인 협박보다 무서워 보이는 무표정이 말문을 틀어막는다.

“어디의 누구인지는 묻지 않겠어요. 듣고 싶지도 않아요. 당장 제자리에 돌려놓고 나가도록 하세요.”

실로 여제의 서슬에 어울리는 위압감이었다.

스승이 화를 내면 딱 저런 느낌으로 무서웠었다.

마치 견습마녀 때로 돌아간 듯한 착각에 사로잡힌 르뤼에.

“들리지 않나요?”

그러나 눈앞의 마녀는 르뤼에를 꾸짖으려는 스승이 아니며, 르뤼에 역시 견습마녀가 아니다.

억지로 용기를 북돋는다.

여기서 꼬리를 마는 시늉이라도 하는 건 르뤼에의 프라이드가 용납하지 못했다.

“잘 들리도다. 허나 거절하겠다.”

“거절?”

새파란 안광에 움찔한 르뤼에.

“저는 괜찮아요, 아멜리아 님. 그냥 둘러보고 있는 건데요.”

“예의와 범절은 상호 간의 존중이 있을 때 존재하는 거에요.저런 후안무치한 행동을 넘겨버리는 건….”

“괜찮아요. 정말로.”

“샤론 양이 그렇다면야…. 멋대로 나서서 미안해요.”

아멜리아 피어에 덩달아 움찔하고 있던 샤론이 뒤늦게 그녀를 만류하고 뒤늦게 불청객의 정체를 물었다.

“저기 혹시 누구세요?”

옆의 금발과 비교하면 유약하게마저 느껴지는 태도에 미미하게 남은 위축감을 벗어던진 르뤼에.

오히려 그 질문을 기다렸다는 듯이 대사를 읊는다.

“짐으로 말할 것 같으면 고대부터 두려움을 사던 옛 마녀이자, 바다 어미로 숭배받던 샬리트 누켈라비의 정통 계승자! 깊은 바다를 아울러 지배하며, 천상천하에 보다 높은 자가 없는 위대한 누켈라비 왕조의 여왕! 만민을 굽어살피며 대적한 자는 여지 없이 침몰시키는 르뤼에 누켈라비니라!”

한껏 있어 보이게 만들기 위해 여러 자료를 참고하여 만든 소개사다.

이제 시건방지게 눈을 똑바로 뜨고 대들던 금발 마녀가 벌벌 떨고 옆에 들러리 녹색 마녀가 이제껏 저지른 불경에 거품을 물며 놀라는 장면을 기대하고 있었건만.

“…….”

“…….”

조용하다.

그것도 지나치게 조용하다.

“아….”

그 정적을 깬 것은 샤론이었다.

대마녀인 샤론조차 뒤늦게 파악할 수 있던 미미한 진동과 함께 와인잔의 표면 위로 미미한 물결이 번져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무중력 상태에 들어선 것처럼 두둥실 작게 떠오르는 포도주 방울.

-우우우웅!

그리고 곧장 방 안의 온갖 가벼운 물건이 깃털처럼 부유한다.

눈 깜빡할 사이 일대는 아멜리아의 영역이 되어 있었다.

“심해의 마녀?”

일전 한 번 에아 사달멜리크의 침입으로 아픈 기억을 지녔던 아멜리아다.

그것이 반복되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는 지금, 그것도 시우를 납치해간 심해의 마녀가 눈앞에 있는 지금, 손속에 여유를 둘 생각은 없었다.

아멜리아의 눈가에 시리도록 눈부신 마력반사광이 흘러내린 순간.

르뤼에는 조금 전 분홍머리를 만났을 때보다도 직관적인 공포를 느꼈다.

금발 마녀는 아까 분홍 머리와 같은 23 위계였다.

그토록 찾기 어렵다는 드높은 경지의 마녀가 어째서 발길이 닿는 곳마다 나타나는 건지 한탄할 여유도 없다.

확실한 건 지금 르뤼에가 저 거대한 힘 앞에 저항할 방법이 어디에도 없다는 것이었으니.

르뤼에는 시나브로 몸 안을 잠식한 작은 마력의 입자를 느꼈다.

통상적인 상태에서는 자연 소멸할 미립자, 그러나 어떠한 촉매가 주어진다면 즉각 무서운 속도로 부풀어 오를 입자가.

시련에서 느꼈던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생생한 죽음의 공포가 덜컥 목을 조여오자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기다려요! 아멜리아 님!”

“본인의 입으로 심해의 마녀임을 밝혔어요.”

“일단 대화로 해도 되잖아요! 어떤 상황인지도 모르고요!”

“대화도 할 거에요. 그리고 크게 다치게 할 생각도 없어요.”

다 이겼다고 생각한 순간 극독을 뿌려대는 마녀도 있었다.

상상도 못할 방식으로 함정을 파두었던 마녀도 있었다.

아멜리아가 겪은 공적이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갈 같은 자들이 다수였다.

그리고 심해의 마녀는 지극히 공적에 가까운 추방자이다.

저택의 주인인 백작으로부터는 아무런 전언이 없었다.

심해의 마녀가 저택을 제집처럼 돌아다니고 있다면 불법 침입일 확률이 매우 높다.

언뜻 약체화되어 있는 듯해도 눈앞의 마녀가 불온한 목적으로 잠입해온 추방자라면 우선은 전력을 다해 제압하는 것이 옳다고 판단했다.

“…욱….”

서로 다른 경험 탓에 각기 다른 판단을 한 아멜리아와 샤론.

두 사람의 언쟁은 순식간에 끝나버렸다.

“…우욱….”

입술을 꽉 깨물고 울음을 필사적으로 참고는 있지만 결국 무리였던 모양이다.

설마 이럴 줄은 상상도 못했다는 듯 토끼 눈을 뜨고 방울방울 눈물을 흘리는 심해의 마녀.

그건 두 사람의 예상을 아득히 넘어가는 약한 모습이었다.

마음을 모질게 먹었던 아멜리아조차 ‘뭔가 실수했나?’싶어 재빨리 마법을 거둘 만큼 말이다.

“거봐요, 아멜리아 님. 울잖아요….”

“아니…. 이게 무슨….”

“아, 안 울었느니라.”

아멜리아의 살기등등한 기세를 정면에서 받아내기에 르뤼에는 너무 여렸던 것이다.

동시에 힘없는 자의 설움이 폭발한 르뤼에.

실은 알고 있었다.

게헨나에 돌아오자마자 여기저기서 깨지고만 있다는 사실을.

마법만 제대로 있었으면 아까 그 건방진 쌍둥이도, 분홍머리도, 금발과 옆에서 말리는 시누이 짓을 하는 녹색 마녀도 본때를 보여줄 수 있을 텐데….

“너희 모두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짐을 이토록 핍박하다니! 시우에게 다 일러서 혼쭐을 내줄 것이니라!”

울면서 뛰쳐나가는 르뤼에를 아멜리아와 샤론 모두 붙잡지 못했던 건.

두 사람의 머릿속 이미지와 실제 심해의 마녀의 갭이 성단 사이의 거리만큼이나 차이가 났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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