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9
1.
“조수님, 괜찮아. 아무도 안 온다니까? 츄웁…. 쮸웁…. 쓰읍, 조수님. 여기까지 와놓고 자꾸 뺄래?”
오딜이 시우와 3개월 만의 꽁냥꽁냥 시간을 보낼 무렵.
“조수님, 쪼잔해요! 키스만이잖아요. 자꾸 거절하시면 저희 홀딱 벗어버릴 거에요? 후후, 이런 곳에서 알몸을 보이는 모습을 들킨다면…. 어떻게 될지는 알고 계시겠죠?”
오데트가 막 블라우스의 단추를 풀어 가슴을 보여주는 것으로 협박할 무렵.
“시우!”
“경쟁자 발생!”
“공작님! 저희가 먼저 왔어요!”
르뤼에를 격퇴하고 뛰쳐 들어온 엘로아가 그 수라장을 발견할 무렵.
“시우 군… 시우군…. 하아… 하아….”
“데네브…. 이 정신 나간 것아….”
데네브의 손장난이 박차를 가하고, 알비레오가 통한의 눈물과 또 다른 무언가를 흘릴 무렵.
“잘 마실게요.”
“그럼요.”
샤론은 방에서 아멜리아와 술을 마시고 있었다.
슬슬 한 손으로 꼽기 힘들어지기 시작한 시우의 하렘 속 샤론의 포지션을 논하자면 원만한 중재자라고 할 수 있겠다.
최초엔 서로 향한 오해에서 탓에 티격태격 다투었던 쌍둥이와 원만한 우정을 쌓아가고 있었으며, 서툴기 짝이 없는 엘로아에게는 조력자 포지션을 유지 중.
그러나 아무리 샤론이라도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기 힘든 사람이 있었으니 아멜리아 메리골드다.
원체 얼음을 조각해 빚어낸 것 같은 서늘한 분위기에 요정 같은 미모에 선뜻 먼저 말을 걸기가 힘들다.
그것도 모자라 샤론은 아멜리아에게 큰 말실수를 한 전적이 있었으니 뭔가 대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샤론 양.’
‘네?’
‘술 한잔할까요?’
그렇기에 게헨나에 되돌아온 아멜리아가 단둘이 술자리를 제안했을 때 샤론은 깜짝 놀랐다.
물론 힘들 일을 같이하면 정이 든다고 궂은일을 하면서 제법 내적 친밀감이 쌓였다.
지쳐 잠든 샤론에게 아멜리아가 말없이 담요를 덮어주는가 하면 ‘아무 일도 없을 거니까 울지 마요’ 같은 말로 서로의 용기를 북돋아 준 적도 있다.
일이 그렇게 됐거니와 설마 사교성이 전혀 없어 보이는 아멜리아가 그런 제안을 해올 줄이야.
‘좋아요!’
더군다나 마침 차분히 대화를 나눠보고 싶던 샤론인지라 화색이 되어 완전 예상외의 술자리를 수락했다.
그리고 샤론이 머무는 제머나이가의 별채에서 벌어진 술자리 분위기는….
“…….”
“…….”
완전 예상대로였다.
아니, 예상 그 이상이었다.
상호 간에 유의미한 대화 없이, 안주 없이 비워진 술병이 벌써 절반이다.
가장 길게 이어진 대화가.
‘아멜리아 님, 이 술은 무슨 술인가요?’
‘멘델 구릉 포도주에요.’
‘1989? 엄청 비싸 보이는 술이네요.’
‘그런가요? 그냥 가져왔어요.’
‘아하.’
였으니 더 말할 것도 없다.
무슨 대화를 나눠야 할까?
생각해보니 가끔 수색 장소가 겹쳐 선상에 단둘이(진조의 마녀를 제외하면) 남았을 때도 대화다운 대화를 한 적이 없다.
이제와서 꽃바람부는 담소가 이어지길 바랐던 것이 욕심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두 사람의 공통 관심사이자 화제는 시우 이야기 정도인데, 거긴 어떤 위험이 매설되어있을지 모르는 지뢰밭이니 논외.
기왕 이렇게 된 거 조금 더 용기를 내 본 샤론은 얼마 전 아멜리아에게 샀던 향수 이야기를 꺼냈다.
큰맘 먹고 사치를 부리던 샤론에게 억소리를 안겨주었던 물건이자, 거의 곧장 시우가 실종되는 바람에 두어 번 뿌리고 고이 모셔둔 물건이다.
워낙 오래 말을 안 하고 있어서 나온 삑사리를 가다듬고 말을 잇는다.
“커흠, 그나저나. 아멜리아 님의 향수 정말 향이 좋아요.”
“고마워요.”
다시 침묵.
역시 이 정도 노력으로는 대화를 이어갈 수 없는 것인가?
하지만 아멜리아도 아무 생각없이 샤론에게 독대를 요청한 것이 아니다.
같은 남자를 사랑하고 그의 곁에 머문다는 건 어찌 보면 필연적인 사랑의 경쟁을 의미한다.
따라서 처음엔 그저 질투를 느끼고 시우의 사랑이 다른 사람에게 나뉜다는 것에 아쉬움을 느꼈다.
그러나 시우의 생사도 제대로 확인할 수 없는 상황에서 서로를 의지하며, 아멜리아도 조금은 생각을 달리하게 되었다.
만약 아멜리아 혼자 수색에 내던져졌다면 견뎌낼 수 없었을 것이다.
일전 공적 사냥을 위해 사막을 떠돌 때처럼 정신력의 마멸을 견디지 못해 쓰러지길 반복했겠지.
그러나 이제 아멜리아는 혼자가 아니었다.
그 옆에는 샤론이 있었고, 엘로아가 있었다.
혼자라면 이겨낼 수 없었던 상황 속에서도, 둘에게, 특히 샤론에게 용기를 받을 수 있었다.
연적이란 어떤 의미에선 경쟁자이지만, 또 어떤 의미에서는 같은 방향을 함께 걸어가는 동반자라는 걸 깨닫게 된 것이다.
따라서 아멜리아가 이 자리를 마련한 것도 샤론과 더욱 가까워지기 위해서였다.
다른 연인은 둘째치고 샤론과는 유독 마찰이 잦았었으니 말이다.
그렇기에 샤론이 절망하려던 때, 이번엔 아멜리아가 대화의 끈을 붙잡았다.
“샤론 양의 살결은 부드러워서 좋은 향이 날 것 같았어요.”
“앗! 감사해요.”
“청순함 속에 파묻힌 관능을 피워올린다고 할까요? 저도 작업하면서 즐거웠어요.”
살결? 청순? 관능?
뭔가 같은 여자에게 듣기엔 오싹오싹한 평가이긴 해도 일단 칭찬이니까 웃고 보는 샤론.
“즐거우셨다니 다행이네요.”
그리고는 깨닫는다.
왜 이 단순한 사실을 놓치고 있었을까?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지.
상호 간의 칭찬은 뻑뻑하기 그지없는 대화의 톱니바퀴에도 적당한 기름칠이 될 것이 분명하다.
“아멜리아 님도 참 아름다우세요. 아, 입에 발린 말이 아니에요. 사실 처음 봤을 때도 굉장히 요정 같은 분이구나라고 감탄했어요.”
“그런가요?”
칭찬이 어색한지 눈을 살짝 동그랗게 뜨는 아멜리아.
우울하고, 힘들어하고, 화내고, 무표정인 그녀만 보다가 저렇게 놀라는 표정을 보니 또 다른 매력이 느껴졌다.
여전히 조금 어색해도 대화가 이어진다!
침묵은 금이라는 격언은 거짓부렁이 임이 분명하다.
주고 받는 대화라는 게 이토록 해방감을 선사할 줄이야!
모처럼 이어진 대화에 신이 난 샤론은 술김에 나불거리기 시작했다.
“네, 머리카락도 정말 가느다랗고 숱이 많은 금발이시잖아요. 이렇게 예쁜 금발은 마녀들을 통틀어도 찾기 힘들게 분명해요.”
“그러는 샤론 양도…. 정말 아름다워요. 저도 사실 많이 주눅이 들었으니까요. 몸매도 훨씬 여성스러우시고….”
아멜리아의 시선이 힐끗 샤론의 가슴을 향했다.
“아뇨아뇨, 저보다 가슴 큰 마녀님은 계셔도. 아멜리아 님보다 고운 마녀는 없을 거에요.”
“아니에요, 샤론 양도 매력적인걸요. 눈동자가 특히나…. 맑은 호수를 보는 것 같다고나 할까.”
그렇게 이어진 칭찬 릴레이.
그러나 서로의 부분부분을 꼬집어 칭찬하더라도 가짓수는 한정되기 마련.
서로의 미모를 치켜세워주는 것은 대화의 서두로나 적합하지 계속 주고받으면 모양새가 굉장히 이상해지고 만다.
즉, 이처럼 옆에서 시우가 본다면 ‘얘네 뭐하지?’ 싶어 할 대화처럼 변해버리는 것이다.
하지만 선물을 받으면 돌려줘야 하는 의무감이 생기는 것처럼 칭찬을 받고 그대로 대화를 끝내기에도 뭐했다.
샤론이 어떻게든 자신의 칭찬으로 대화를 마무리하려던 와중.
커다란 탈선이 발생해버렸다.
“뭘요, 저는 솔직히 같은 마녀에게 대시 받을 때마다 소름만 끼쳤는데요. 아멜리아 님에게 받는다면 기쁠 거라는 생각마저 했어요.”
술김 + 무리하게 칭찬할 구석을 찾는 상황 + 어느 정도의 본심.
그 결과 뭔가 커밍아웃 같은 칭찬을 해버리고 만 것이다.
“네?”
아멜리아의 대인관계 능력이 절멸에 가깝다고 하지만 눈치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뭔가 핀트가 어긋남을 본능적으로 느끼고 어느 때보다 크게 놀라는 아멜리아.
하늘색 청명한 눈동자가 정처 없이 떨리는 것을 본 샤론은 뒤늦게 제 말실수를 자각하고 뒷수습에 나섰다.
“아뇨아뇨! 그런, 그런 성적인 의미가 아니라! 만약 아멜리아 님이랑 키스하는 상상을 해도 거부감이 들지 않을 정도로 매력적이시라는 말을… 하려고….”
애드리브에 약한 샤론답게 완벽히 실패한 뒷수습의 표본이었다.
이건 진짜 망한 것 같다.
샤론에겐 시우가 있는데 아멜리아에게 델라 같은 추파를 던져버리고 만 것이다.
“…….”
한편 아멜리아는 샤론의 그런 발언을 듣고 곰곰이 생각했다.
드디어 시우와 소피아뿐만이 아니라 외부로도 발걸음을 떼려는 아멜리아.
소피아가 보면 기뻐하며 눈물을 줄줄 흘릴 광경이었겠지만, 마음을 새로이 먹었다고 하여 아멜리아의 대인관계 능력이 일취월장하는 일은 없었다.
따라서 샤론의 살짝 선을 넘은 발언에도 아멜리아는 엉뚱한 착각을 하고 말았다.
키스하는 상상을 해도 어색하지 않다니….
아멜리아에게는 너무도 느끼하고, 뭔가 등골이 오싹해지는 칭찬이었다.
그러나 샤론은 오두막에 틀어박혀 있던 아멜리아와는 다르게 현세에 오랫동안 머물렀던 마녀이다.
아멜리아가 가서 보았던 현세는 게헨나보다 훨씬 개방적인 곳 아니던가?
그쪽에선 이런 식의 문화가 흔할지도 모른다는 판단을 내리고 샤론에게 어울려주었다.
“헤헤, 제가 조금 오바했죠? 원래 안 이러는데 술을 좀 마셨더니….”
“저도 마찬가지예요.”
“네...?”
“샤론 양은 입술도 예쁘니…. 키스하면 부드러울 것 같아요.”
그리고 아멜리아의 속내를 모르는 샤론은 되려 눈이 휘둥그레졌다.
키스하면 부드러울 것 같다고?
혹시 조금 전 말실수를 농담으로 무마해주려는 시도인가 싶어 아멜리아의 표정을 살폈으나.
“…….”
아멜리아는 한 치의 웃음기도 없이 샤론의 입술을 빤히 보고 있다.
즉, 농담이 아니라는 의미다.
‘뭐야뭐야뭐야뭐야’하는 무한 코러스가 샤론의 머리를 잠식했다.
말실수를 캐치해서 자연스럽게 추파를 던져오는 듯한 능청스러운 발언.
외국 영화에서.
특히 주로 바 테이블 같은 곳에서 자주 봤던 장면이다.
“샤론 양은 키스…. 많이 해봤나요? 저는 좀처럼 익숙해지질 않아요.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모르겠어요.”
그것도 모자라 제 입술을 살며시 쓰다듬으며 묻는 아멜리아.
물론 아멜리아로선 샤론의 칭찬에 잘 대응해주었고 때마침 키스 이야기가 나왔으니, 아예 대화 주제를 옮긴 것이었다.
다른 행위라면 몰라도 키스라면 비교적 가볍게 입에 담을 수 있는 행위이고, 아멜리아는 시우와 키스할 때마다 유독 어려움을 느꼈으니 말이다.
아랫입술을 물고 혀를 빨기는 하는데 그게 맞기는 하는 건지.
아마 시우와 훨씬 많이 입술을 포개었을 샤론이라면 어떻게 하는 건지, 내심 솔직하게 물어보고 싶었던 차다.
그러나 이미 어느 정도 오해에 사로잡혀 있던 샤론에겐,
‘아멜리아 님이라면 키스해도 싫을 것 같지 않아요.’
‘저도요, 그러니까 샤론 양이 키스하는 방법을 직접 알려주시겠어요?’
처럼 너무도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흐름이었다.
설마 아멜리아는 다른 마녀처럼 양성애적 성향이 짙은 걸까?
저건 설마 직접 키스하는 방법을 알려달라는 말이 아닌가?
아니, 그보다 이미 서로 시우가 있는데 저런 말을?
그러고 보니 궁녀들이 왕의 성은을 입지 못하고 독수공방하다 동성애에 빠져든 예도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아, 아, 아멜리아 님…. 저, 저는…. 아무리 그래도 그건 좀 아닌 것 같아요. 뭔가, 뭔가 시우에게 미안하달까….”
“……?”
망상을 풀가동한 샤론의 얼굴이 벌겋게 물들고, 아멜리아가 샤론의 이상 반응에 고개를 갸웃할 무렵.
-덜컥!
“흠, 이런 곳도 있구나.”
르뤼에가 문을 열고 들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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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로아 티페레트 일러스트 입니다
John Kafka 선생님이 그려주셨습니다
원본은 공지에 올려두겠습니다
큰 화면으로 감상하시길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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