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8
1.
“뭐? 아까 그 얼빠진 중2병 마녀가?”
“정말 심해의 마녀라고요?”
“그보다 진짜 여자친구 하나 더 만들어 온 거야? 조수님? 진심?”
“무사히 돌아오셔서 다행이긴한데…. 앞으로도 계속 이러실 거에요?”
“맞아! 벌써 몇 명이야 조수님!”
“무책임하게 고양이를 데려오는 집사 같아요!”
시우의 무사 귀환에 기뻐하던 쌍둥이가 모든 진실을 깨닫고, 더불어 시우를 달달 볶을 무렵.
“시우…. 하아….”
그의 안전을 눈으로 확인한 데네브가 안심하고 자기개발에 들어갈 무렵.
“얘네는 대체 어디 간 거야. 핫…! 데네브…! 너 또…!”
쌍둥이를 찾아 헤매던 알비레오가 수개월만인 블루투스 쾌감에 급히 근처 방으로 뛰쳐들어갈 무렵.
“으으….”
르뤼에는 간신히 몸을 추스른 채 복도를 걷고 있었다.
“하, 참, 어이가 없구나. 견습마녀들이기에 관대히 봐주었더니 이런 식으로 나올 줄은 몰랐도다.”
오딜과 오데트의 합공 앞에 몹시 추한 자태를 보였지만 르뤼에의 정신승리 방어력은 상상 초월했다.
어차피 패널티를 안고 있는 상황이었다.
나중에 몸을 회복하기만 한다면 두 곱절 세 곱절로 갚아주면 되는 것이다.
“다음에 만나면 봐주지 않고 혼쭐을 내줄 것이니라.”
그렇게 금방 회복한 채 씩씩하게 홀로 저택 둘러보기를 택했다.
마녀의 도시 게헨나는 바닷속 르뤼에의 작은 세계가 하찮게 느껴질 만큼이나 미적으로 탁월했으며 세련되었다.
특히 이 저택은 궁궐이란 표현이 아깝지 않을 만큼 눈길이 닿는 모든 곳이 아름다웠다.
“언젠가 짐의 지배하에 들어올 것이니라.”
르뤼에는 그 아름다운 풍경을 하나하나 눈여겨보며 언젠가 이 멋진 도시를 지배할 자신의 모습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그 시각 수색을 위해 현세로 나왔던 아멜리아, 샤론, 엘로아는 게헨나로 돌아와 있었다.
알비레오가 의도적으로 지연한 ‘시우가 무사히 복귀했다’라는 전언이 전해졌기 때문이 아닌, 순전히 우연의 산물이었다.
원래 아멜리아는 벌금을 갚느라, 샤론은 쌍둥이에게 수업하느라, 엘로아는 어지러운 현세 질서를 바로잡느라 각기 다른 이유로 바쁜 몸이다.
그런 것들보다 시우의 안전과 생사가 중요했기에 사활을 걸고 수색활동을 계속했던 것일 뿐.
그러나 시우의 안전은 르뤼에가 몰래 끼워 넣었던 녹음테이프로 인해 99.9% 확실해졌다.
발칙한 도발을 하는 심해의 마녀에 대한 분노 + 0.01%의 불확실한 가능성 탓에 수색을 계속했지만, 그렇게 한 달이나 추가적인 수색을 하게 되었으니 슬슬 원동력이 바닥나게 된 것이다.
수색의 양상 역시 전처럼 간절하고 급박하지 않았고 말이다.
따라서 세 사람은 일시적인 수색의 중단 겸 휴식기를 갖는 것으로 합의.
일단 게헨나로 돌아온 뒤 휴식을 취하게 되었다.
“흐음, 저것 또한 제법 멋진 분수로구나.
잘 쌓아둔 블록처럼 질서정연한 장미 덩굴.
그 사이로 호젓하게 난 산책로를 따라 걷던 르뤼에는 우뚝 멈춰 섰다.
눈앞에 굉장히 이질적인 존재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편안하고 짧은 바지에 바람막이를 입은 현세 복장의 마녀였다.
아쿨라에서라면 마녀 한 명 얼굴을 보는 것도 굉장히 어려운 일이지만 여기는 마녀의 도시다.
새삼 현세 복장 차림의 마녀를 만났다 하여 이질적이라 생각할 리 없다.
르뤼에가 해당 마녀를 이질적인 존재로 분류한 것은 그 외모가 워낙에 독특했기 때문이다.
우선 질끈 뒤로 묶은 머리카락색이 이상하다.
하늘하늘 떨어지는 벚꽃 잎처럼 연한 분홍빛.
그리고 눈동자 색도 이상하다.
마력을 사용하지 않아도 반짝반짝 빛이 나는 듯 강렬한 마젠타색.
그 마녀 역시 르뤼에를 인식했는지 발걸음을 우뚝 멈춰선 채 빤히 시선을 던져온다.
눈을 마주쳐도 피할 생각도 없이 도전적으로 던져지는 눈빛에 르뤼에의 눈썹이 꿈틀한다.
“무얼 그리 빤히 보는 게냐?”
“…….”
건방지게 대들던 시녀하며, 쌍둥이하며, 아예 대놓고 관찰하듯 위아래를 훑어보는 마녀까지.
이 도시는 여왕에 대한 기본적인 예우를 갖추지 않는다.
“할 말이 있거든 고하거라. 허나 중요한 안건이 아니라면 지나가는 표현이 좋을 것이다. 짐은 지금 심기가 몹시 불편하니라.”
그러나 괜히 사고를 일으키지 말라는 시우의 전언도 있었고, 무엇보다 르뤼에 자신이 몸 상태가 좋지 않다는 걸 경험으로 확인했다.
르뤼에는 아무 말 없이 빤히 이쪽을 바라보는 마녀를 스쳐 지나가 관광을 마저 완료하려 했다.
“멈추게.”
단호한 목소리가 르뤼에의 옷자락을 움켜잡는다.
무인처럼 감정이 절제된, 그럼에도 숨길 수 없는 격정이 또렷하게 음각된 목소리였다.
현세와 게헨나를 살아가는 마녀 대다수는 분홍 머리 공작에 대해 알고 있다.
23 위계의 엘로아 티페레트 공작.
그녀가 얼마나 많은 전장을 넘어섰는지.
삶을 통틀어 몇이나 호문쿨루스를 토벌했는지.
천방지축으로 날뛰는 공적이 왜 마젠타 색의 눈동자를 보면 꽁지 빠지게 도망치는지.
잘 알고 있다.
“호오? 지금 짐에게 멈춰 서라 한 게냐? 한낱 천것이?”
그러나 불행히도 르뤼에는 그녀의 정체에 대해 알지 못했다.
그렇기에 오히려 시비를 걸어주길 기다리고 있었다는 양 웃음을 띠며 엘로아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그 순간.
움찔.
저도 모르게 몸을 떨고 말았다.
일자로 다 물린 채 결연한 의지를 보이는 입술과 올곧게 찔러오는 시선.
르뤼에보다 살짝 작은 키임에도 태산에 짓눌린 듯한 중압감.
상대는 바람막이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고 있을 뿐인데 아주 날카로운 검 한 자루가 이쪽을 겨누는 예리함이 등골을 저민다.
살면서 이 정도의 압박감을 느낀 것은 처음이었다.
이게 정녕 같은 마녀에게서 뿜어져 나올 수 있는 프레셔란 말인가?
“묻고 싶은 것이 있네.”
분홍 마녀가 한 걸음씩 가까워질 때마다 본능적으로 뒷걸음질치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그리고 굴욕감에 젖는다.
아무리 약체화된 상태라 해도 누켈라비 왕조의 여왕이 고작 다가오는 상대가 두려워 뒷걸음질을 친다고?
“무엇이냐! 더 다가오지 마라! 거기서 묻거라!”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르뤼에는 한껏 목청을 돋은 후 가슴을 펴고 눈을 부릅떴다.
과연 위엄에 굴복했는지 제자리에 멈춘 분홍 마녀.
“이걸 알아보겠나?”
그녀는 주섬주섬 품에서 손바닥보다 작은 소형 자기테이프 저장 매체 즉, 카세트 테이프를 꺼냈다.
르뤼에에게도 익숙한 물건이었다.
시우와의 관계를 녹음한 영상과 선전포고문을 기록해 몰래 끼워 넣은 것이었으니 말이다.
즉, 저걸 품에서 꺼내었다는 건 저 분홍머리 마녀 역시 신시우의 연인이라는 것.
“역시 알아보는군.”
아무런 답도 하지 않았지만, 분홍머리 마녀는 노련한 형사처럼 르뤼에의 반응만으로 정체를 짐작했다.
르뤼에는 실력에 자신이 있었다.
어떤 강대한 적이 와도 사역마와 마해의 힘을 빌려 격퇴할 자신이 말이다.
설령 약체화 된 상태일지라도 여왕의 위엄으로 어떻게든 해결하겠다는 낙관도 곁들였기에 아무렇지 않게 저택을 활보하고 있었다.
그러나 테이프를 아무렇게나 주머니에 쑤셔 넣는 상대를 보자 그 낙관에 금이 간다.
그때 뭐라고 녹음했더라?
천것이니 첩 정도는 허용해 주겠다느니 상대를 잔뜩 화나게 할 말을 했던 것 같은데.
설마하니 그 업보가 이렇게 다가올 줄이야.
“그, 그대도 신시우의 연인이느냐?”
“그렇네, 그대는 심해의 마녀임이 분명하겠지?”
“잠깐! 거기서 움직이지 말라고 하였도다!”
무서울 정도로 빠른 걸음으로 다가오는 엘로아를 보고 르뤼에는 태어나 처음으로 공포를 느꼈다.
“그렇다면 하나 더 묻겠네. 시우는 지금 어디 있는가?”
우선은 자리를 피해야 한다.
상대는 온전한 상태에서 마주해도 승부를 장담할 수 없는 강자였다.
흉악한 게헨나의 마녀에게 참수당하는 자신의 모습이 머리에 아른거리는 듯하다.
“깊게 잠겨라!”
경험이 부족하다지만 르뤼에는 대마녀.
조금 전 쌍둥이를 상대로 실패했던 것을 반면교사 삼아, 이번에는 제한된 힘으로도 실수 없는 마법을 구사해냈다.
좌우에서 덮쳐드는 마력의 파도.
이것으로 눈속임하고 전력으로 도주할 심산이었다.
“두고보자! 다음에 힘을 되찾으면 상대해주겠노라! 켁!”
그러나 뒷목을 제압당한 르뤼에는 달려가던 자세 그대로 뒤로 자빠졌다.
위를 보자 무표정하게 르뤼에를 짓누르는 상대의 얼굴이 보인다.
“어… 어떻게…?”
분명히 무방비한 상대가 몰아치는 파도에 휩쓸리는 것을 보았다.
아무리 견습마녀 수준의 마력으로 발휘되었다 한들 약한 마법은 아니었다.
마법이 없다면 뼈가 부러져 뒹굴어도 이상할 것이 아닌 마법이다.
그런데 상대는 마법도 사용하지 않은 채 그 사이를 비집고 나와 르뤼에를 제압한 것이다.
“히익…!”
불끈 쥐어 진 채 얼굴에 그림자를 드리우는 주먹을 보고 겁에 질린 르뤼에.
이대로 엎어진 르뤼에의 안면에 불끈 쥔 정권이 향한다면 무방비하게 내어줄 수밖에 없다.
끔찍하게 아플 게 분명하다!
“…….”
그러나 눈물이 고일 만큼 눈을 질끈 감고 한참을 기다려도 고통도 충격도 없었다.
슬며시 한쪽 눈을 뜨자 분노 대신 난처한 듯 망설이는 분홍 마녀의 얼굴이 보인다.
덤으로 뒷목을 짓누르던 힘도 느슨해졌다.
사실 엘로아는 르뤼에를 마주한 즉시 정체를 깨달았다.
심의상의 문제로 르뤼에의 녹음테이프를 듣지 못했던 쌍둥이와 달리 그 독특한 말투와 목소리를 확연히 기억하고 있었던 까닭이다.
시우의 말대로라면 나쁜 마녀는 아니지만, 그토록 발칙한 도발을 했으니 응분의 대가를 치르게 해주는 것이 당연한 수순.
원래라면 눈물이 쏙 빠질 때까지 혼쭐을 내줄 심산이었건만….
어떤 영문인지는 몰라도 힘을 제대로 발휘할 수 없는 심해의 마녀.
더군다나 하는 짓을 보니 허술하기 짝이 없는 게 영락없이 철없는 어린 마녀다.
진지하게 윽박질러 봐야 무엇하나 싶었던 것이다.
“시우와 함께 돌아온겐가? 그는 무사한가?”
“그, 그렇다!”
후다닥 일어나 옷자락을 터는 르뤼에.
“그는 어디에 있는가?”
“저쪽 저택에 있느니라.”
아까 빠져나왔던 본관을 가리키자 고개를 끄덕이는 분홍마녀.
그녀는 잠깐 망설이더니 지체 없이 발길을 돌려 르뤼에에게 등을 보였다.
전부 이긴 싸움에서 제발로 물러나간 것이다.
혹시 이건?
사실상 승기를 잡았음에도 추가 타격을 가하지 않고 순순히 물러나는 상대.
이번에야말로 르뤼에의 위엄 앞에 함부로 건드려서는 안 된다는 걸 깨달은 것은 아닐까?
즉, 단순한 힘보다 르뤼에의 카리스마가 승리한 것은 아닐까?
“분홍머리!”
둘 사이의 거리가 충분히 멀어졌을 무렵.
자신감을 되찾고 엘로아의 뒤통수에 외치는 르뤼에.
“지금은 짐의 힘이 제한되어 추태를 보였으나 이 주, 아니 삼 주 뒤에 다시 경합을 나누길 원하는 바다! 그때는 지금처럼 순순히 보내주지 않을 것이니라!”
서둘러 시우를 보러 가려던 엘로아의 표정이 살짝 멍해졌다.
물론 르뤼에의 행복회로대로 카리스마에 짓눌렸다거나 겁을 집어먹었기 때문이 아니다.
애초에 물어볼 것이 남은 르뤼에를 등지고 시우를 찾는 것도 우선 순위가 달랐기 때문이다.
그런 순간 들려오는 막고라 신청이라니.
인생에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날까지 남은 삶의 행복한 순간을 만끽하도록 하여라!”
제 할 말만 던져놓고 후다다닥 뛰어가는 르뤼에의 뒷모습을 엘로아는 한참이고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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