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녀의도시-597화 (597/917)

#597

1.

“생각보다 오래 걸리네.”

곧 쌍둥이를 데려오겠다던 알비레오는 10분이 지나도, 15분이 지나도 오지 않았다.

별일이 생길 것 같진 않고, 괜히 이쪽에서 찾아 움직였다가 길이 엇갈리면 곤란하니 얌전히 응접실에 앉아 대기 중인 시우.

“햇살 좋다.”

편안하게 앉아 창으로 흘러들어오는 한참의 봄볕이나 만끽했다.

아쿨라가 훌륭한 잠수함인 건 맞지만 이 따사로운 햇살은 지상에서나 느낄 수 있는 것이었으니 말이다.

나른한 졸음이 몰려올 무렵.

응접실 저편에서 쫓기는 듯한 구두굽 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필연적으로 뒤따라왔어야 할 우당탕탕 소리가 없다.

만약 쌍둥이라면 ‘조수님!!!!’ 외침이 400M 전방 쯤부터 들려왔어야 할 텐데 말이다.

“하아… 하아….”

서두르느라 헝클어진 하얀 백발, 그럼에도 사그라지지 않는 단아한 외모.

전쟁에서 소식 없이 돌아온 남편을 마주한 백작 부인의 자태가 그러할까.

놀란 토끼 눈을 한 데네브 제머나이가 거기에 있었다.

같이 어항에 잡혀갔던 이후로는 굉장히 오랜만인 재회.

불가항력이었다곤 하나 그녀와 여러 번 금단의 관계를 맺었던지라 어떻게 대해야 할지를 모르겠다.

어항에서 나가게 되면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돌아가기로 합의했지만, 머리로는 알아도 마음은 심히 멋쩍은 것이다.

데네브가 보여주었던 여러 여성스러운 모습은 여전히 시우의 뇌리에 생생히 녹화되어 있었으니 말이다.

“안녕하세요…?”

그래도 어물쩍거렸다간 괜히 그것을 의식하는 것처럼 보인다.

자연스럽게 인사를 건넨 그때.

“시우 군!”

영화 속 귀부인처럼 정숙함과 기품이 넘쳐흐르는 새하얀 드레스 자락이 휘날린다.

데네브는 언니인 알비레오처럼 추진력을 더해 정강이를 까지 않았다.

대신 한 마리 백조처럼 날아들어 시우의 품에 안겼다.

“무사했군요...! 다행이에요…. 정말 다행이에요….”

기억 속의 것처럼 보드라운 가슴과 팔로 폭 안을 수 있는 가녀린 체구.

눈물이 글썽이며 윗눈질하는 자색 눈동자.

“데, 데네브 님.”

대충 감사를 표할 것은 예상했지만 이 정도로 격렬한 환영일 줄은 몰랐다.

전혀 상정 외의 일이라 깜짝 놀랐다.

소중한 연인을 대하듯 가슴팍에 가지런히 놓인 그녀의 손과 달싹이는 입술.

그 사이에서 달콤한 와인향과 함께 흘러나오는 말은 무려.

“보고 싶었어요….”

였다.

이해할 수 있다.

사실 시우가 위험에 빠졌던 것은 데네브를 탈출시키기 위함이었으니.

죄책감에 시달리던 데네브가 저렇게 말할 수도 있는 것이다.

“정말…. 걱정했어요….”

기분 탓인지 모르지만, 살그머니 입술이 가까워지면서 흰 눈이 쌓인 것처럼 긴 속눈썹이 파르르 감겼다.

여기까지만 보면 아무리 봐도 키스하려는 행동인데.

설마 아니겠지.

상대는 데네브 제머나이다.

그 정도로 사리분별이 되지 않을 리 없다.

그냥 좀 격렬한 포옹일 뿐.

“저기 데네브 님. 일단은 조금 떨어져 주시는 게….”

반가운 것도 알겠고, 마음도 참 고맙지만 이 꼬락서니를 곧 돌아올 알비레오에게 들켰다간 죽는다.

더군다나 쌍둥이에게도 할 말이 궁색하다.

데네브와 뒷구멍으로 검증한 것과 어항에서 마력 충전을 한 일은 오직 알비레오만이 알고 있으니 말이다.

“아…!”

헛바람을 들이키는 소리와 함께 데네브의 눈이 번쩍 떠졌다.

동시에 흐리멍덩해졌던 눈동자에도 총명한 기색이 돈다.

못 볼 꼴을 보였다는 듯 호다닥 일어나 몸가짐을 바르게 하는 데네브.

“미, 미안 해요.”

“아닙니다, 반겨주시니 감사한 걸요.”

취기로 붉은 뺨에 손바닥을 대며 허둥지둥거렸다.

하지만 저 모습도 여기까지다.

저렇게 반겨주는 모습을 보니 아마 사건의 경위에 대해 모르시는 게 분명하다.

“그런데…. 혹시 들으셨는지는 모르겠지만….”

데네브도 엄연히 작은 장모님.

걱정하던 시우가 실은 유유자적한 잠수함 라이프를 만끽하고 있던 것도 모자라 제머나이 백작가의 힘을 빌려 르뤼에의 시민권까지 부탁했다는 사실을 알면 알비레오처럼 쌍심지를 치켜세울 테니 말이다.

사근사근했던 작은 장모님 안녕히 계세요, 라고 속으로 읊조린 뒤.

“…이렇게 됐습니다.”

고해성사하는 참담한 심정으로 나지막이 고백한다.

“그랬군요. 도울 수 있는 일이라면…. 도와야죠.”

“네?”

하지만 또 다시 전혀 의외의 반응이 돌아왔다.

데네브는 화를 내지도 정강이를 차지도 않았다.

“화 안 내시나요?”

“화를 내야 하나요…?”

도리어 되묻는 데네브.

“그…. 실은 유유자적 잘 살고 왔고 게다가 데리고 오기까지 했는데요?”

“시우 군이 절 탈출시키고 심해의 마녀에게 잡혀갈 때까지만 해도 어찌 될지 몰랐잖아요. 시우 군은 최악의 결과를 가정하고 행동한 것이고요.”

그건 그렇다.

그때는 당시 르뤼에는 굉장히 무시무시했고, 그토록 순둥이일 줄 몰랐으니.

“제가 고마운 건 시우 군의 그때 마음인 걸요. 이 와중에 새로운 여자를 데려온 게 밉상이긴 하지만…. 대신 쌍둥이는 잘 다독여주도록 해요. 절대 소홀히 하지 말구요. 물론, 절조 없이 행동하다 그릇에 피해를 끼치는 건 절대 안 되는 거 알죠?”

“네, 명심하겠습니다.”

놀랍게도 데네브의 질타 아닌 질타는 핀잔 수준으로 끝났다.

이것이 함께 고난을 넘긴 전우애에서 나온 끈끈한 정이라는 말인가.

잠시 감동하는 것도 잠시.

“…….”

“…….”

놀라울 정도로 서로 나눌 말이 없어지며 어색한 기류가 감돌았다.

그도 그럴 것이, 이제껏 데네브와의 커뮤니케이션은 콩 볶듯이 볶아대는 데네브와 쩔쩔매며 정강이를 얻어맞는 시우의 조합으로 이루어졌다.

데네브가 더는 시우를 갈구지 않는 이상 평소의 대화 패턴에서 거대한 이탈이 발생하는 셈이다.

다행이다, 괜찮다라는 말은 두어 번 반복하면 뻣뻣한 대화가 되어버리니 말이다.

“시우 군.”

“네.”

그때 멀뚱히 서 있던 데네브가 우물쭈물하더니 입을 연다.

그 뒤로도 한참이다 말을 고르는 듯 입을 다물고 이리저리 방황하는 시선을 보이는 데네브.

“하나만 물어봐도 괜찮을까요? 조금 사적인 질문일지도 몰라요.”

“네, 얼마든지요.”

가볍게 대답했지만 이후 데네브의 몸동작을 보곤 살짝 긴장했다.

공연히 옆머리를 정리해 귀 뒤로 넘기는 몸짓.

아래에서 머뭇거리는 미혹에 젖은 눈동자.

“그….”

저건 작은 장모님이 굉장히 겸연쩍고 민망할 때 하는 행동이다.

몇 번이나 봤기에 확신한다.

도대체 뭘 물어보려기에 저러는 건지, 심히 걱정된다.

“…시우 군의 성욕은 어느 정도인가요?”

“가, 갑자기 그런 걸 왜?”

“이상한 생각은 안해요! 절 누구라고 생각하시나요! 그, 그냥 이번에도 새로운 여자를 데려왔다길래…. 도대체 얼마나 굶주렸으면 그런지 궁금해서 그런 거에요.”

“그건 죄송합니다만….”

“그리고 중요한 질문이니 솔직하게 답변해 주었으면 해요.”

“음….”

이런 직설적인 질문을 받아본 적 없기에 답하기 망설여졌다.

성욕?

머리 냄새를 맡으면 무제한, 평상시에는 평범한 성인 남성 수준이다.

근데 이걸 물어보는 이유는 무엇이며, 또 거기에 솔직하게 대답해도 좋은 것인지 고민할 때.

데네브가 먼저 결정지어 버렸다.

“아무래도 부족한 거죠?”

“예?”

“그렇게 주위에 연인이 많아도 부족하니까 계속 들이는 거…. 아닌가요?”

어쩌다보니 인연이 닿았을 뿐 딱히 성욕 때문이었던 것은 아니다.

허나 데네브는 이미 반쯤은 단정 지은 말투였다.

시우가 반박할 틈도 없이 혼잣말처럼 이어갔으니 말이다.

“이제 와서 시우 군의 경박한 여성편력을 나무라봤자 의미가 있을까 싶어요.”

“그건 정말 면목없습니다.”

“아니에요, 혼내려는 게 아니니까. 일전에 나눴던 대화…. 기억하시나요?”

“일전이라 하심은?”

“어항으로 들어서기 전에요.”

쌍둥이의 전초기지에서 데네브에게 꼬냑 주도 수업을 받았던 때의 말인가?

“제가 그때 말했었죠? 검증은 한 번으로 부족할 것 같다고.”

“그랬…었죠?”

그러고보니 그런 말을 했었다.

곧장 데네브와 앞으로도 관계를 나눠야 하는 상황이 오며 자연스럽게 논의되지 않았던 문제였다.

일전 ‘이중 삼중으로 철저하게 검증하지 않으면 곤란하지 않을까요?’라고 말하던 데네브의 얼굴이 머릿속에서 재생된다.

“…….”

말하는 사이 데네브의 양 뺨이 산딸기처럼 달아오른 것은, 취기와 따사로운 햇볕 탓만은 아닐 것이다.

많은 생각과 상황의 변화가 있었다.

그의 성정이 선함은 알고 있다.

쥐뿔도 없는 노예 시절부터 쌍둥이를 위해 두 번이나 목숨을 걸었고, 현세로 나간 뒤에는 굳이 휘말리지 않아도 될 공적 토벌에 발을 들였다.

친구가 잡혀갔다는 이유로 공적에게 일기토를 신청하질 않나, 폭주한 메리골드 남작을 위해 위험 지대에 발을 들였다.

한없이 호구 같지만 언제나 자신이 아닌 남을 위해 위험을 무릅쓰는 사람이었다.

그래도 밉상인 건 어쩔 수 없던 사위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쌍둥이를 홀라당 채어 간 것도 모자라 주변에 여자들이 끊이질 않으니.

더군다나 검증 와중에 그런 흉한 몰골을 보이게 하고 습관까지 남겨버렸으니.

곱게 보려야 볼 수가 없었다.

그러나 어항 속에서 시우는 그저 푼수 같은 사위 놈이 아니었다.

누구보다 든든한 버팀목이었으며, 심지어 데네브를 위해 대신 심해의 마녀에게 잡혀가기까지 했다.

그토록 못살게 굴었던 데네브를 위해 말이다.

생사를 보장할 수 없는 어항 속 하루가 다르게 지쳐가던 데네브는 점점 시우를 의지하기 시작했고, 결국  데네브의 유혹으로 일선을 넘어버렸다.

그렇게 홀로 나온 뒤 자기혐오와 죄책감에 뒤덮여 밤을 지새웠다.

데네브를 원망하지 않는 쌍둥이를 볼 때마다 너무도 미안했다.

그런 배려를 받으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런 생사를 모르게 된 시우를 떠올리면 마치 행방불명이 된 부군을 대하는 듯했고, 다른 누구도 아닌 사위에게 그런 감정을 품는 자신의 모습이 혐오스러워 견딜 수 없었다.

그리고 그의 무사가 확인되었던 날 데네브는 깨달았다.

세상에는 아무리 노력해도 떨쳐낼 수 없는 감정도 있다는 사실을.

이런 비겁한 변명을 입에 담으면서까지 안기고 싶은 품이 있다는 것도.

그러니까 딱 한 번만 더 어리광을 부려보자.

술김을 빌어.

쌍둥이가 계승 받을 때까지 안전을 위해 데네브가 대신 욕정을 품어주겠다는 핑계로.

덤으로 뒤로하는 관계에 관해 철저한 검증을 거치겠다는 핑계로.

“그러니까....”

만약 여기서 거절당하거나 그가 곤란한 모습을 보인다면 즉각 사위를 향한 시험이었다고 웃어넘기며….

“제가 대신 시우 군의 욕망을….”

“조수니이이임!!!”

“우와! 조수님이다! 조수님!”

하지만 데네브의 말은 전해지지 못했다.

“오딜 님! 오데트 님!”

시우를 발견한 쌍둥이가 우당탕탕 달려와 그의 품에 안긴 것이다.

주인을 마중 나온 강아지처럼 그의 품에 안기는 쌍둥이를 보며 데네브는 말을 주워담았다.

그간 우울함이 싹 씻긴 듯 기쁨의 웃음과 안도의 눈물을 흘리는 쌍둥이를 보며 뭉클하게 가슴을 찌르는 죄악의 가시를 재차 더듬었다.

달려들어 뺨을 비비고 뽀뽀를 퍼붓는 쌍둥이를 부둥켜안으며 곤란한 듯 데네브를 바라보는 시우.

“데네브 님, 무슨 말씀 하시려고 하셨나요?”

역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데네브는 마지막 미련을 접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아무리 노력해도 떨쳐낼 수 없는 감정이 있다 한들 그걸 반드시 표현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가슴에 품은 채 묵묵히 외면해야 하는 것이다.

“좋은 시간 보내요. 개구쟁이들! 엄한 짓 하면 혼난다!”

““네! 스승님!””

이렇게도 긴 인생이었는데 아직도 배울 것이 남아있었다니.

데네브는 슬쩍 미소를 짓곤 세 사람을 위해 자리를 비워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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