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6
1.
결투 장소라기엔 너무도 호화로운 롱 갤러리.
격렬하게 마주치는 시선 속 르뤼에가 느낀 것은 같잖음이었다.
두 사람 모두 제법 앙칼진 시선으로 노려보고 있다만 상대는 고작해야 견습마녀.
진지하게 쌍심지를 치켜세운 채 드잡이를 벌이는 것부터가 여왕의 품위를 훼손하는 것이다.
따라서 르뤼에는 드높은 품위를 드러내는 것으로 기선 제압하려 했다.
위엄 어린 옥음을 듣는다면 당연히 알아서 길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여왕의 어전이다. 무릎을 꿇고 경의를 표하여라.”
한편 피아노 연습 시간을 땡땡이치다가 페챠를 괴롭히는 르뤼에를 마주한 쌍둥이.
오딜과 오데트는 난데없이 튀어나온 독특한 캐릭터를 보며 심히 당황했다.
조그마한 티아라가 얹혀진 짙은 군청색의 머리칼.
어둡게 빛나는 바다처럼 짙은 남청색의 눈동자.
과거의 복식을 재해석해 유려하게 재해석한 예스러운 복장이 아니라, 과거에서 그대로 가져온 듯한.
직설적으로 말하자면 촌스러운 드레스다.
“어디서 봤었나?”
“아니, 처음이야.”
‘과거 파티나 무도회에서 만났던가?’ 기억을 되짚어 보았지만, 분명히 처음 보는 마녀다.
“견습마녀지?”
“응, 언니. 그런 것 같아.”
덤으로 주변에 풍기는 마력의 기도를 따라 분석하자면 견습마녀다.
“못 들었느냐? 짐이 분명 여왕의 어전이라 하였도다.”
사람이 말을 했으면 마땅히 반응이 와야 하는데 저들끼리 쑥덕거리는 모습에 빈정이 상한 르뤼에.
잔뜩 심사가 꼬인 목소리로 엄포를 놓는다.
하지만 쌍둥이에게 씨알도 먹히지 않을 엄포였다.
분명 견습마녀는 마녀보다 힘이 약하다.
그러나 쟁쟁한 게헨나 마녀 중 오딜과 오데트에게 함부로 대했던 마녀는 없었다.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오딜과 오데트가 제머나이의 이름을 물려받을 것이며, 이름 높은 명문 백작 가와 척을 지고 싶어하는 마녀는 어디에도 없는 까닭이다.
그런데 문제가 생기면 10초 만에 스승님이 달려올 앞마당에서 저런 태도를 고수하다니.
“언니, 뭔가 있는 것 같아.”
“있어 봐, 겁먹을 게 뭐야? 어차피 견습마녀잖아.”
오히려 르뤼에의 당당한 태도는 쌍둥이에게 경계심을 이끌어내었다.
‘잘 모르는 사람이지만 엄청나게 대단한 마녀의 견습마녀 아니야?’ 싶었던 것이다.
“오호, 무릎으로 기며 불경을 사죄해도 모자랄 판국에 아직도 두 발로 땅을 딛고 서 있느냐? 관을 보아야 눈물을 흘리겠구나.”
가뜩이나 독특한 르뤼에의 말투에 어울리지 않게 힘껏 내리깐 목소리가 더해지자 쌍둥이로선 어색한 연극조로만 보였다.
개성있는 마녀는 많다지만 저만큼 기행을 일삼는 마녀는 처음이기에 황망하게 입을 벌리고 르뤼에를 바라보는 쌍둥이.
그 모습이 꼭 데칼코마니처럼 똑같다.
“…아하.”
“…그거 맞는 것 같지 언니?”
“응.”
“어휴.”
하지만 약 5초 뒤.
결론이 나왔다.
잔뜩 펌프질 된 자의식.
주변 분위기를 제대로 읽지 못할 정도로 자신의 세계관에 파묻힌 모습은 질풍노도의 시기를 겪었던 쌍둥이의 모습과 쏙 빼닮았다.
그것이 벌써 몇 년 전이니 눈앞의 마녀는 쌍둥이보다 어린 견습마녀라는 의미다.
“하긴 우리도 저렇게 놀았던 때가 있었지. 괜히 멋있어 보이고 싶어하는 마음 다 이해해.”
“맞아 맞아, 언니는 칠흑의 오딜. 나는 순백의 오데트였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오딜과 오데트의 눈에서는 적개심이 사라지고, 오히려 애잔한 것을 보는 듯한 눈빛으로 바뀌었다.
철없던 시절에야 자아도취가 가능한 거지, 조금만 시간이 지나도 흑역사로 점철된 후회의 앨범을 장식하게 된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친절한 조언까지 덧붙여 주었다.
“이봐 어린 친구. 숙녀답게 행동해.”
“맞아, 너 지금은 그게 멋있다고 생각할지 몰라도 나중에 엄청 후회한다.”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게냐?”
쌍둥이의 제멋대로인 납득에 르뤼에는 전혀 쫓아가지 못했다.
“컨셉을 잡으려면 조금 멋지게라도 잡지 그게 뭐니 얘.”
“차라리 악룡에 의해 영혼이 둘로 갈라져 버린 비운의 쌍둥이 마녀 설정이 더 멋진 듯.”
“그렇지. 내가 했지만 솔직히 컨셉은 잘 짰다니까?”
“맞아맞아, 커서 생각해 보니 부끄럽긴 해도 나름의 낭만은 있었어 언니.”
번갈아가며 속사포처럼 쏘아대는 특유의 화법에 정신이 혼미해진 르뤼에.
그러나 정확히 무슨 말인지는 모를지라도 둘의 반응이 자신을 바보 취급한다는 것 정도는 알아차렸다.
꼬인 심기와 함께 꿈틀하는 눈썹.
시우의 충언도 있겠다, 견습마녀이겠다.
좋게좋게 가려 했는데 저런 무엄한 반응이라니.
“호오, 당차구나. 허나 주제를 넘게 혀를 놀린 대가는 무겁도다.”
원래 매를 아끼면 견습마녀를 망치는 법이다.
여기선 실력 행사를 통해 확실히 위계질서를 다 잡아주자, 그렇게 생각한 르뤼에는 영창을 읊었다.
“깊게 잠겨라.”
손짓을 따라 일어나는 푸르른 마력의 물결이 일어난다.
비록 지금 부상을 입어 몸이 온전치 않지만, 기껏해야 견습마녀를 혼내는 데는 만전일 필요조차 없다.
“마, 마법? 언니! 얘 어디 아픈가 봐!”
“페챠! 우리 뒤로 숨어!”
쌍둥이의 눈이 뒤늦게 휘둥그레지는 것을 보며 르뤼에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물에 잠겨 허우적거리면서 반성토록 하거라.”
의표를 제대로 찔린 까닭에 대응은 이미 늦었다.
최소한의 방어식만 펼친 채 페챠를 감싸는 쌍둥이.
그러나.
“응?”
거대한 해일이 일어나 갤러리 전체를 가라앉혔어야 할 마력의 파도가 르뤼에의 발치에서 찰랑거린다.
소나기 후 물웅덩이를 밟았을 때 철퍽하고 튀어 오르는 정도로 말이다.
차라리 간단하고 쉬운 마법을 사용했다면 이토록 처참히 실패하진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몸 상태를 고려하지 않고 호기롭게 복잡한 마법을 구사했으니 자명한 결과였다.
“이거 봐라? 간덩이가 부었네?”
“페챠, 잠시 비켜 있어요.”
“네, 네…!”
호다닥 알비레오나 데네브를 부르러 달려가는 페챠.
“넌 좀 혼나자.”
“하, 언니. 요즘 후배 물이 왜 이래?”
쌍둥이가 보기엔 대화 중 난데 없이 죽빵을 날리려다 저 혼자 자빠진 꼴이다.
그것도 자칫하면 누군가 다칠 수 있었던 상황이니 분위기가 단숨에 험악해졌다.
“이, 이게 왜…? 기, 깊게 잠겨라…! 으갸악!”
당황한 르뤼에가 다시 한 번 마법을 시전하는 것보다 쌍둥이가 달려와 몸통 박치기를 하는 것이 빨랐다.
“감히 대뜸 마법을 날린다 이거지? 좋아, 아무래도 선배로서 후배에게 합당한 예절을 가르쳐야겠어. 오데트 구두 벗겨.”
“응, 언니. 가슴 좀 크다고 유세 부리는 것도 아니고 아주 괘씸한 후배야. 혼내주자.”
마법이 없이 신체조건으로만 싸움이 결정되는 이상 수적으로 쌍둥이가 우세하다.
더군다나 오딜과 오데트는 취미로 승마와 사냥을 즐기기에 잠수함에서 굴러다니기만 한 르뤼에보다 힘이 좋았다.
단숨에 풀 마운트 포지션을 점한 오딜이 르뤼에의 손목을 잡아 바닥에 누른다.
암만 버둥거려도 박제 당한 곤충 표본처럼 바닥에 찰싹 달라붙은 르뤼에의 구두를 훌러덩 오데트가 벗긴다.
“이, 이거 놔라! 몸만 정상이었다면 너희 같은 것들은 손가락 하나로 눌러버렸을 것이다”
견습마녀의 아래 깔리게 된 굴욕에 르뤼에는 얼굴을 벌겋게 하고 소리쳤다.
“어휴, 엄청 목청 좋네. 변명하지 마. 추해 추해.”
“참회의 시간을 보내도록 해. 안 봐 줄 테니까.”
“그리고 나중에 엄마 모셔와.”
“맞아맞아, 넌 상담 좀 받자.”
쌓인 오해로 본의 아니게 패드립을 하게 된 오딜.
하지만 르뤼에는 그걸 알아챌 겨를도 없었다.
즉시 지옥과 같은 고문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흐갸아아악! 꺄하하하하…!”
르뤼에의 맨발을 간질이기 시작한 오데트.
그렇지 않아도 간지럼을 잘 타는 르뤼에는 마법을 써 떨쳐내려다 순식간에 계산이 꼬여버렸다.
“이거이거 또 마법 쓰려고 하네. 하지만 어림도 없지.”
“그치그치, 이 지옥의 간지럼 속에서 계산할 수 있을 리가.”
“꺄하! 으햐아악! 흐갸갸가각!”
둘이서 온갖 투닥거림을 다해 본 오딜과 오데트다.
마법을 사용하지 않고 가장 효과적으로 상대를 제압하는 방법은 간지럼이라는 걸 알고 있다.
“와, 엄청 펄떡거리네. 로데오하는 것 같아.”
“언니, 엉덩이로 허벅지 좀 눌러줘.”
“그만…! 그만하거라…! 짐의…! 짐의…! 분노가 두렵지 않느냐아아!”
“그러면 손목을 잡기 힘들 것 같은데? 차라리 겨드랑이로 할래?”
“그럴까? 이러다 걷어차일 것 같아.”
“흐브으브읍! 으브으브…!”
아무리 괴로움을 호소해도 아랑곳하지 않는 쌍둥이의 모습은 르뤼에에겐 사이코패스로까지 느껴졌다.
“흐항! 흐아아앙!”
정신이 혼미해질 정도의 간지러움과 호흡곤란.
겨드랑이, 옆구리, 발 등등.
약점을 파고드는 쌍둥이의 능란한 손길에 르뤼에의 육체는 기억해냈다.
르뤼에의 첫 경험.
아직 성감이 개화하지 않았던 시절, 진득한 간지럼과 동시에 가해졌던 성적인 쾌락을.
그 이후로도 오묘한 감각과 야릇함을 잊지 못해 종종 깃털 애무 플레이를 즐기곤 했던 르뤼에다.
즉, 그녀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간지러움이라는 행위와 성적 흥분 곡선이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던 것이다.
“흐앙… 흐하아아… 흐으… 흐으….”
한참 르뤼에 간지럽히기에 열중해있던 오데트의 손길이 멈칫했다.
르뤼에를 속박하던 오딜도 멈칫한 채 경악한 오데트와 시선을 교환했다.
“그만…. 하라고 하지 않았더냐…. 흐윽… 흐윽….”
뭔가 이상하다.
처음엔 분명 웃음뿐이었다.
그 뒤로 조금씩 이상한 소리가 들렸을 때도 지쳐서 헐떡이는가 싶었다.
하지만 벌겋게 달아오른 르뤼에의 표정과 촉촉하게 눈물로 젖은 눈가.
그 점액질이 묻어나오는 것처럼 느껴지는 콧소리는 쌍둥이도 익히 아는 것이었다.
조수님과 행복한 시간을 보낼 때 언니의, 혹은 여동생이 내는 숨소리였으니 말이다.
“세상에….”
“맙소사….”
설마 이 상황 속에서 저런 반응을 보일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상대는 기행을 일삼는 중2병 견습마녀일 뿐 아니라 어마어마한 변태였던 것이다.
“오데트 너, 이상한데 만졌어?”
“아니! 언니도 봤잖아! 내가 그런 델 왜 만져….”
오싹하고 등골에 소름이 돋는 오딜과 오데트.
그전까지 괘씸하다느니 혼내줘야겠다느니 하는 생각이 송두리째 사라졌다.
아무리봐도 계속 상종하기엔 너무 위험하다는 결론이 나왔다.
일단 피해야 한다.
덤으로 신고해야 한다.
“도, 도망치자.”
“어, 언니…! 같이 가…!”
두 사람은 녹초가 된 르뤼에를 버려둔 채 후다닥 도망쳤다.
“…으으….”
홀로 남겨진 채 움찔거리는 르뤼에.
잔뜩 헝클어진 머리칼과 옷차림에서 그나마 힘껏 차렸던 위엄은 자취를 감춘 뒤였다.
다음화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