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녀의도시-595화 (595/917)

#595

1.

오랜만에 제머나이 저택의 중앙 정원을 가로지르며 시우는 물었다.

“다른 분들은 어디 계신가요?”

“연락은 보내뒀어요. 저녁쯤에 모두 합류할 거에요.”

“아직도 절 찾으러 다니시는 건가요?”

괜스레 미안한 마음과 걱정이 더 커지는 시우.

“네, 당신이 데려온 새 애인을 보면 다들 좋아라 하겠네요.”

톡 쏘는 알비레오.

“애인? 짐의 이야기인가?”

한참 정원을 구경하는 데 여념이 없다가 귀를 솔깃 세우는 르뤼에.

여기서 알비레오는 사소한 꼼수를 부렸다.

아직도 시우를 찾아 먼바다를 들쑤시고 다니는 그의 연인들에게 전언을 보내되 6시간의 지연을 둔 것이다.

다들 시우가 무사히 복귀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30분 안으로 튀어올 테니, 쌍둥이와 시우가 단둘이 보낼 시간을 최대한 연장해주기 위해서였다.

그동안 그를 찾기 위해 제머나이 백작가에서 태운 돈 만해도 얼마인데 이 정도는 괜찮지 않겠는가?

쌍둥이의 귀여움과 매력이야 단연 세계 제일이라 자부한다만 연적들이 너무 쟁쟁하다.

이번에 새로 합류한 심해의 마녀는 그렇다 쳐도….

만인의 존경을 받는 엘로아 공작, 현세 때부터 동거하며 여자친구 포지션을 꿰어찬 샤론, 비록 지금은 빚더미에 앉아있지만 마녀 사이에서도 발군인 미모와 어마어마한 돈복사 능력을 지닌 아멜리아까지.

편지와 녹음 메시지가 전달되었으니 한 달 전부터 그의 안전은 거의 확실시 되었다.

그녀들도 어디까지나 혹시나 하는 심정에 수색을 계속하고 있을 뿐이니 기만한다는 가책도 한결 덜어진다.

아직 견습마녀인 쌍둥이가 정면에서 경쟁하기엔 균형이 맞지 않으니, 그 스승이 나서서 도와주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요. 쌍둥이는 음악 수업 중일 테니 제가 가서 데려오도록 하겠어요. 그리고 누켈라비 님은….”

시우에게서 르뤼에를 향한 시선.

모처럼 만들어낸 단독 재회의 이벤트이다.

엄한짓을 할 수 없게 사방이 뚫린 응접실로 데려왔다.

이제는 방해꾼을 치울 차례.

옆에 심해의 마녀가 있으면 애틋한 재회의 감동이 생기려다가도 아수라장이 될 것이 뻔하다.

“무엇이냐.”

한참 두리번거리며 말없이 저택을 살피던 르뤼에는 알비레오의 시선에 똑바로 군청색 눈동자를 마주한다.

아랫사람을 대하듯 자연스레 턱이 치켜드는 모습은 썩 자연스러웠다.

잔뜩 위엄을 차리는 모양새지만 산전수전 다 겪어온 알비레오는 알 수 있다.

샬리트 누켈라비로부터 새로이 계승 받은 르뤼에 누켈라비는 대단히 어린 마녀, 게다가 이것저것 갖춰지지 않은 경험 없는 마녀라는 것을.

본인은 체통을 지키려 애쓰는 듯하지만 보더 타운에서 포탈을 탈 때부터, 마차에서 내려 정원을 걸을 때, 응접실로 향하는 짧은 길까지.

르뤼에는 처음 뉴옥 땅을 밟았던 보빙사처럼 거대한 문화충격을 받은 듯 보였다.

한평생을 바다 아래에서만 살았던 르뤼에에게 수십 명의 마녀가 거리를 나다니는 게헨나의 풍광이나, 화려함의 극치를 자랑하는 제머나이 저택은 잠시도 눈을 뗄 수 없는 신세계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관광을 빌미로 잠시 떼어내는 건 어렵지 않을성싶었다.

시우가 데려온 마녀라면 성정이 나쁠 것 같지도 않았고, 무엇보다 지금 그녀는 부상으로 기껏해야 견습마녀 수준의 마법을 사용한다니 별문제 없겠지.

“저택을 둘러보시겠어요? 시녀를 붙여 드릴게요.”

단번에 화색이 된 르뤼에.

하지만 이내 근엄한 표정을 지으며 점잖게 답한다.

“바다 아래 있는 짐의 궁궐보다야 못하지만, 그럭저럭 구색을 갖춘 훌륭한 왕국이도다.”

“과찬이에요. 구석구석 둘러보면 더욱 아름다운 곳도 많답니다.”

“둘러 보도록 하겠다.

르뤼에가 ‘짐’이라는 일인칭을 사용하고, 바다의 여왕으로서의 자부심이 매우 강하며, 과할 정도로 체통을 지키려 든다는 건 이미 짐작한 사실.

알비레오는 어렵지 않게 그녀에게 어울려 주었다.

“시우 짐은 잠시 구경하고 오겠도다. 여기서 얌전히 잘 있도록 하여라. 사고 치지 말도록.”

“네, 이따 뵐게요. 제가 말씀드렸던 거 기억하시죠?”

그래도 되나? 라는 표정으로 알비레오를 보았지만 애초에 그녀에게서 나온 제안이다.

르뤼에는 시녀 중 한 명인 페챠의 도움을 받아 롱 갤러리 쪽으로 사라졌다.

“원래 말투가 저래요? 진짜 여왕인 건가요?”

멀어지는 르뤼에의 뒤통수를 보며 묻는 알비레오.

시우도 처음 봤을 땐 상당히 적응되지 않았기 때문에 쓴웃음을 지으며 그녀의 당혹스러움에 동조했다.

“음….”

심해의 마녀에 대해서는 워낙 알려진 것이 없다 보니 살짝 헷갈리던 알비레오.

그러나 시우의 애매한 반응에 벌써 정황 대부분을 파악한 모양이다.

“조금 까다롭고 엉뚱한 구석이 있지만, 나쁜 사람은 아니에요.”

“누가 변호해 달래요?”

여전히 심기가 불편한 알비레오는 시우에게 핀잔을 던지고 쌍둥이를 데리러 갔다.

지금 시각이면 분명 피아노실에서 있어야 하는데….

“응?”

피아노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잠깐 쉬고 있나 싶어 문을 열었는데도 쌍둥이는커녕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이 녀석들….”

어쩐지 페챠가 주춤주춤 거리더라니.

여지없이 어디론가 사라져 농땡이를 치고 있던 것이다.

2.

르뤼에는 페챠의 안내를 받으며 홀린 듯이 저택의 이곳저곳을 구경하고 있었다.

보더 타운의 허름한 정경을 보며 내심 코웃음 치던 르뤼에였지만, 아르스 마그나 타운에 들어서면서 게헨나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어 버렸다.

그 중에서도 제머나이 저택은 백미라고 할 수 있겠다.

흑백 영화 속에서 보았던 베르사유의 궁전 따위보다 훨씬 화려한 그 모습은 정원부터 르뤼에의 혼을 쏙 빼놓기 충분했던 까닭이다.

한 치의 헝클어짐도 없이 블록처럼 다듬어진 장미 나무와 대리석으로 조각된 분수들.

시든 부분 하나 없이 만개한 꽃에서 풍겨오는 싱그러운 향기.

저택의 내부는 어떠한가?

대낮부터 커튼을 쳐 어스름을 의도한 복도엔 고급스러운 붉은 융단이 빼곡하게 깔렸고, 촛대에서 흔들리는 촛불은 녹아 흐르는 황금을 연상시킨다.

또한 귀족적인 기품을 뿜어내는 롱 갤러리의 내부는 문화재라는 표현이 걸맞을 만큼 유서 깊은 장식품들로 장식되어 있었다.

“흐음, 이건 무엇이냐?”

더불어 그 대단한 마녀님이 눈이 휘둥그레져 감탄하는 리액션이 훌륭했기에 저도 모르게 어깨가 으쓱해진 페챠.

능숙한 큐레이터처럼 질문을 받아가며 장식품의 기원을 읊어주었다.

전문적으로 배운 적은 없다 해도 젖먹이 때부터 저택에서 살며 자연스레 알게 된 것들이었다.

“루이 14세가 생전 사용하던 전신 거울이에요. 재작년에 큰 주인님께서 경매에서 들여오셨어요.”

“그렇다면…. 이것은 무엇이냐.”

“아연화의 창시자인 앙투안 바토의 그림이에요. 이태리 궁정 생활에 대해 묘사하고 있는 그림이라고 들었어요.”

“그렇다면…. 저것은 무엇이냐?”

“제머나이 백작가를 상징하는 조각상이에요. 전전전 대 제머나이 마녀님께서 현세의 예술가에게 의뢰해 받아오셨다고 해요. 이, 이름이…. 레오나르도 뭐였는데....”

“다 빈치?”

“네, 그분 맞는 것 같아요.”

르뤼에 역시 예술적 소양을 갖춘 어엿한 마녀.

벽에 걸려있는 그림이나 군데군데 서 있는 조각품이 하나만 잘 훔쳐도 평생 먹고 살 걱정 없는 물건이라는 건 알 수 있었다.

그렇게 정신 없이 관광을 하다 보니 그의 연인 중에 분명 제머나이가의 견습마녀가 있다고 했던 것을 떠올렸다.

어떤 여자인지 얼굴이라도 봐두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신시우를 아느냐?”

“예?”

“짐과 동행한 남자 말이다.”

“네, 남자 마녀님 말씀하시는 거죠? 저희 굉장히 유명하신 분이니까요.”

“이 저택의 견습마녀가 그의 첩 중 하나라 들었다.”

영특한 페챠는 그것이 오딜과 오데트를 지칭하는 말임을 알아차렸다.

그의 연인 중에는 저 높으신 티페레트 공작님도 계시고, 사근사근하고 착한 샤론 언니도 있고, 쌍둥이가 무서워하던 메리골드 교수님도 있으니 말이다.

“처, 첩이요?”

“그래, 짐이야말로 신시우를 국서로 삼은 정진 정명한 본처이니 그 외 천것은 모두 첩이 아니겠느냐? 한 번 얼굴을 보고 싶도다. 안내하거라.”

오만불손한 태도였지만 그런 행동을 하고 있다는 자각조차 없어 보인다.

즉, 이 정체 모를 마녀님은 태생이 아주아주 높은 사람이라는 뜻이다.

그렇다해도 귀여운 쌍둥이를 가차 없이 매도하는 르뤼에의 모습은 반발심을 갖게 하기 충분했다.

발끈한 채 입을 삐쭉 내민 페챠.

“싫어요.”

아무리 대단한 마녀라 해도 여긴 위세가 대단한 제머나이 백작가이다.

사용인을 함부로 해치는 건 전쟁선포나 다름없다.

그것을 믿는 페챠는 당당하게 말했다.

“뭬야?”

“땡땡이치고 계셔서 어디 있는지도 몰라요. 알아서 찾아가세요.”

고작해야 시종에 불과한 페챠가 단호하게 거부의 기색을 내비치자 당황한 르뤼에.

이 위엄 어린 명령을 일개 시녀가 거절할 줄이야.

이것이 게헨나 시녀의 당돌함이라는 건가?

아무래도 본때를 보여줘야 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아무래도, 짐의 위명이 이 구석진 촌동네까진 전해지지 못한 듯하도다. 이름 모를 시종이여. 짐이 누구인지 알고 그딴 망발을 지껄이는 것이냐?”

쌍둥이에 비견되는 뾰족한 하이소프라노 톤이지만 서슬 퍼런 르뤼에의 엄포에 찔끔한 페챠.

“누, 누구 신데요.”

“짐은 고대부터 두려움을 사던 옛 마녀이자, 바다 어미로 숭배받던 샬리트 누켈라비의 정통 계승자! 깊은 바다를 아울러 지배하며, 천상천하에 보다 높은 자가 없는 위대한 누켈라비 왕조의 여왕! 만민을 굽어살피며 대적한 자는 여지 없이 침몰시키는 르뤼에 누켈라비니라!”

태어나서 들은 것 중 제일 긴 자기소개를 들은 페챠가 당황하는 모습을 본 르뤼에는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이 정도면 충분히 알아들었을 터, 이제 석고대죄하며 설설 기는 걸 기대하고 있었는데.

“페챠, 거기서 뭐 해?”

“스승님이 저희 찾으셔요?”

완벽하게 똑같은 두 개의 목소리가 거의 시차 없이 들려왔다.

목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린 르뤼에의 눈에 들어온 것은, 마력의 흐름으로 짐작건대 견습마녀.

두어 명이 붙어 한참은 손질한 것처럼 잘 말려있는 검은 머리칼.

자수정을 떼어다 조각한 양 아리땁게 빛나는 오묘한 눈동자.

귀족 영애님처럼 풍성한 치맛자락과 턱 끝으로 끈을 내려 묶은 하프보닛.

여기까지라면 조금 예스러운 게헨나식 코디겠거니 하고 넘어갔을 것이다.

하지만 두 명이었다.

인형을 쏙 빼닮은 견습 마녀가 두 명이었던 것이다.

제머나이 백작가가 쌍둥이로 유명한 마녀라는 것을 전해 듣지 못했던 르뤼에에게는 짐작도 못 했던 일이었다.

하지만 여기서 당황한 채 끝낼 수는 없다.

어차피 상대는 고작해야 견습마녀.

이곳까지 발걸음을 옮긴 김에 서열 정리를 끝내버릴 셈이다.

“오딜 님…! 오데트 님…!”

당황하던 차에 든든한 아군을 만나자 쪼르륵 달려들어 등 뒤로 숨는 페챠.

그 반응이 심상찮음을 느낀 쌍둥이는 즉각 적개심 어린 눈동자를 처음 보는 여자에게 던졌다.

“넌 뭐야?”

“그쪽은 누군데 페챠를 괴롭혀요?”

한 쌍의 시선과 두 쌍의 시선이 치열하게 맞부딪쳤다.

“호오?”

그 당돌함에 입꼬리를 말아올리는 르뤼에의 웃음이 전쟁의 서막을 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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