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4
1.
시우의 자지는 낙인 한정으로 만병통치약에 준한다.
그러나 모든 상처를 거짓말처럼 낫게 해주는 마법의 치료법은 아니었다.
도로시의 손에 의해 부상을 입은 르뤼에의 환부는 마력 회로의 중추.
즉, 시우로서도 당장 손을 쓸 수 있는 게 없었다.
따라서 게헨나로 함께 복귀한 이후 치료를 앞당기고 게헨나에서 목이 빠져라 기다리고 있을 애인들을 만나는 게 목표였다.
그렇게 도착한 보더 타운의 출입국 관리소.
르뤼에의 경우 시민권이 없었기 때문에 신원조회에 제한이 걸렸다.
“제머나이 백작님께 연락해주세요.”
난데 없는 추방자의 불법 입국에 경계심 어린 눈빛으로 다가오는 출입국장.
그녀를 납득시키는데 한 마디면 충분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시우는 게헨나에서 모르는 이 없는 유명인사였고, 그 뒷배에 티페레트 공작과 제머나이 백작이 있다는 것 역시 유명했으니 말이다.
물론 고작 이름을 댔다 하여 ‘추방자’를 게헨나 안으로 들여줄 만큼 게헨나의 시스템은 느슨하지 않았다.
르뤼에는 출입국장의 감시하에 대기실에서 머물게 되었으며, 우선 시우만 제머나이 백작을 만나기 위해 이동하게 되었다.
“폐하, 다시 한 번 말씀 드리지만 절대 사고 치시면 안됩니다. 여기에 앉아만 계셔야 해요? 금방 올 테니까.”
“아아아아아! 알겠도다! 도대체 몇 번을 이야기하느냐!”
르뤼에가 투정을 부리는 것도 이해한다.
게헨나로 떠나기 전부터 귀에 못이 박일 만큼이나 누누이 경고를 했으니.
도로시의 진심 어린 충언과 시우의 조언을 따라 게헨나의 시민권을 취득하겠다 마음먹은 르뤼에였으나, 게헨나 마녀를 향한 그녀의 적개심은 여러 차례 확인했다.
비록 지금 르뤼에가 사용 가능한 힘이 견습마녀 수준으로 제한된다 한들 사고를 치려면 얼마든지 칠 수 있으니 아무리 주의해도 지나치지 않았던 것이다.
“그보다 이 싸구려 홍차는 무엇이냐. 더 근사한 것을 대령하도록 닦달토록 하여라.”
과연 르뤼에는 잠수함 밖을 나와서도 르뤼에였다.
그래도 처음으로 게헨나에 왔으니, 그것도 불확실한 신분인 추방자로서 방문했으니 조금 기가 죽을 법도 하건만 행동에 아무런 변화가 없다.
“네네, 알겠습니다.”
여러 투정을 부리는 르뤼에를 간신히 달래놓자 알비레오 백작이 출입국 관리소로 오는 중이라는 보고를 받았다.
슬슬 위통이 오기 시작한다.
시우가 실종된 이후 대략 상황이 어떤 식으로 돌아갔을지는 쉬이 짐작 가능했다.
연락이 말끔하게 두절되었던 한 달가량은 여러 사람이 아주 피 말리는 나날을 보냈겠지.
사정을 모르는 외부에서 보기엔 공적과 추방자의 모호한 경계에 놓인 옛 마녀에게 납치당한 상황일 테니 말이다.
그렇게 걱정을 잔뜩 끼치던 사위가 되려 납치범을 ‘새 애인이에요. 하핫!’하고 데려왔다?
벌써 그 눈총과 등쌀을 버틸 자신이 없다.
잠시 후.
허겁지겁 달려온 기색이 역력한 큰 장모님과 독대한 뒤 그간 있던 일과 현재 상황을 미주알고주알 털어놓았다.
그 구구절절한 사정을 듣던 알비레오의 표정 변화를 시우는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다행스러움과 안도 섞인 미소 => 은은히 번지는 화를 참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미간=> 경멸 어린 눈총과 호통을 참기 위해 꽉 다문 이.
이후엔 아주아주 인자한 표정과 그녀에게서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다정한 말투를 내보이며 홍차를 홀짝이는 알비레오.
“시우 군, 제가 질문 하나 해볼까요? 한 달 동안 실종 상태였고, 다음 두 달 동안 행방이 묘연했던 어떤 사위가 불쑥 돌아와서 새로운 여자친구를 위한 시민권을 달라고 하면…. 그 장모는 어떤 기분이 들 것 같나요?”
물론 겉으로 드러나는 표정이 모든 감정을 대변해주지는 않는다.
언뜻 기품 넘치는 알비레오의 점잖은 목소리 속에 어마어마한 진노가 스며들어있다.
더불어 시우의 등도 땀으로 축축해졌다.
“저, 정말 죄송합니다.”
“어머? 제가 죄송하다는 말을 듣고 싶은 걸로 보이셨나 보네요, 호호. 그냥 질문이었는데. 제대로 대답해 주세요.”
입가를 가리며 꺄르륵 웃는 알비레오.
전기의자에 앉은 사형수가 버튼을 누를까 말까 장난치는 집행인을 본다면 이런 심정일까?
“화가…. 많이 나실 것 같습니다.”
“아하, 화? 그렇죠. 화도 많이 나죠. 쌍둥이들이 울고불고 난리를 치는 걸 달래는 와중에 데네브가 우울증에 걸려서 두문불출하고…. 그 덕에 혼자서 고생했어요.”
흥분했는지 점점 거칠어지는 알비레오의 숨소리.
“아, 혹시 군수용 소나의 가격이 얼마인지는 아시나요? 저는 이번 기회에 처음으로 알게 되었는데…. 아주 비싸더라구요. 우리 귀한 사위님 몸 하나 다칠까 걱정되어 그 넓은 망망대해에 선박 수십 척을 띄우고 전전긍긍하면서 개고생에 개고생을 한 사람한테….”
더불어 그녀의 미소 역시 점토로 된 가면을 뜯어내듯 무시무시한 무표정으로 변해간다.
“감히 그딴 부탁을 해?!!!!!”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백에 숨도 못 쉬고 쪼그라드는 시우에게 극대노한 알비레오의 사자후가 쏟아졌다.
그야말로 대마녀다운 포스.
“당장 일어나요!”
“넵!”
직립부동으로 뒷짐을 진 시우 앞에 찻잔을 거칠게 내려놓은 알비레오가 바짝 붙어선다.
그리고 여지없이 뾰족한 구두 굽으로 조인트를 까며 갈구기 시작했다.
“우리 귀염둥이들이 뭐가 부족하다고! 그렇게 애인군단을 두고! 그것도 모자라서 눈만 마주치면 꼬셔버리고!”
“억! 억! 억!”
“게다가 데네브한테까지! 저번에 검증으로 한 번 몸을 겹치더니 다른 쪽도 궁금하던가요?”
“그, 그건 사정이 있었습니다…!”
“나도 알아요! 마법 충전이니 뭐니 때문이라면서요!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당신 뼈가 가루가 되는 한이 있더라도 당연히 피했어야죠!”
알비레오도 부당한 꼬투리 잡기라는 건 알았다.
실제로 그가 돌아온다 해도 이 부분에 관해서는 책임을 묻지 않을 예정이었다.
비록 입에 담기도 숭한 관계를 맺었다 해도 시우가 대신 잡혀간 덕분에 데네브가 무사히 돌아올 수 있었다.
공과를 논하자면 그에게 고마움을 표해도 모자랐다는 의미다.
하지만 심해의 마녀를 꼬여 와 시민권 좀 어떻게 해달라는 그를 보니 간신히 균형을 맞추던 고마운 마음이 뿌리까지 사라져버렸다.
“도대체가 어떻게 되먹은 남자길래. 제 여동생에, 쌍둥이, 티페레트 공작, 메리골드 양, 에버그린 양, 예소드 백작에 또 누구 있어요! 솔직하게 말해요!”
“뭐, 뭘 말하라 하시는 건지….”
“당신이랑 관계 맺은 여자 다 말하라구욧!”
이걸 말해도 될까?
오히려 활활 타고 있는 알비레오에게 기름을 붓는 꼴은 아닐지 심히 염려되지만 얼버무린다고 넘어가 줄 것 같지도 않다.
“그… 예빈 씨랑….”
“그건 알아요. 치료 목적이었으니 봐주죠.”
“페리윙클 님이랑….”
“행운의 마녀요? 그 사람이랑은 어쩌다가요?”
“일전에 목숨도 구해주셨고, 이것저것 일이 있었습니다.”
아연한 표정을 짓던 알비레오는 이마를 손으로 짚고 도로 의자에 털썩 앉았다.
도로시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야 할지 말 지 망설이고 있던 터에 알비레오는 눈을 꾹 감은 채 손을 흔들었다.
“그만, 그만. 아, 어지러워….”
“면목없습니다….”
정신적 피로감에 탄식하던 알비레오는 더 이상 화낼 기운도 없는지 한숨만 푹푹 쉬다 입을 열었다.
“좋아요. 어디까지 가나 한 번 보죠.”
“이제 다시는 이런 일 없게 해보겠습니다.”
“…또 당신 말을 믿느니 차라리 빚보증을 서지….”
알비레오는 품에서 종이와 만년필을 꺼내 무언가를 휙휙 써내려갔다.
힐끗 보자 임의적 보석 청구서라는 글귀가 보였다.
이러니저러니해도 부탁을 들어주려는 것처럼 보였기에 조금 감동했다.
“저도 무작정 부탁하려 했던 건 아닙니다. 제가 해야 할 일이 있다면 알려주세요.”
“당연히 그럴 예정이었어요. 그걸 말이라고 해요?”
추방자가 다시 게헨나의 시민권을 취득하기는 쉽지 않다.
게헨나에서 발언권이 있는 제머나이 백작조차도 쉽게 단정 지을 수 없을 만큼 말이다.
일전 부상당한 시우를 치유하기 위해 면책권을 신청했을 때도 많은 뇌물과 압력을 행사해야 했다.
“그래도 심해의 마녀는 옛 마녀이고 추방당한 전적이 없으니, 심사에 유리하게 작용할 거에요.”
“넵.”
“…시민권 취득을 위해서는 게헨나에 도움이 되며, 동시에 위협이 되지 않는 마녀라는 걸 증명할 필요가 있어요.”
“그건…. 어떻게 해야 하나요?”
“안전성 심사라면 제머나이의 이름으로 문제없이 진행될 거에요. 남은 건 게헨나에 도움이 되는 점을 증명해야 하는데…. 가장 간편한 건 기부금이죠.”
그간 고마운 점도 많겠다 어지간해서는 시우의 편의를 봐주었지만, 이번만큼은 물러설 생각이 없는 알비레오다.
받아내야 하는 만큼 전부 받아낼 생각이었다.
“빌려주겠어요. 단, 당신 힘으로 마련해 갚으세요. 만약 주변 다른 여자에게서 받아내거나 한다면 절대로 용서 하지 않을 거에요.”
“알겠습니다.”
“억울해하거나 야박하게 군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이건 당신에게 내리는 시험이에요.”
“그럴 리가요.”
쌍둥이가 낙인을 물려받게 된다면 막대한 부 역시 함께 물려받게 될 텐데, 알비레오가 지켜본 바 신시우는 돈이 줄줄 새는 구멍이었다.
그런 잠재적 위험 요소를 내버려두고 떠날 바엔 신시우 혼자서도 설 수 있다는 여부는 증명받고 싶었던 것이다.
물론 가장 본심은 색골 사위 놈이 물어온 새 연인을 위해 기부금을 내고 싶지 않았다는 거지만.
“이 정도의 시련도 홀로 극복하지 못한다면 쌍둥이를 만나는 건 포기하세요.”
시우가 포기해도 쌍둥이가 포기하지 않을 테니 그다지 의미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진지한 눈빛으로 말하는 알비레오.
시우 역시 그녀가 무엇을 염려하는지는 알기에 구태여 말대꾸하진 않았다.
그럴 상황도 아니고.
“네, 제가 꼭 마련하겠습니다. 그래서…. 금액은 어느 정도일까요?”
“금화 일만 파운드요. 상환 기한은…. 그래요, 내후년까지로 하죠. 꼼수는 용납하지 않겠어요. 취득 경로까지 상세하게 보고하도록 하세요.”
대충 만만한 값은 아닐 거라 예상했지만 설마하니 그런 거금일 줄이야.
부자 마녀들 옆에서 구르느라 금전 감각이 많이 훼손된 지금도 큰돈이다.
그래도 양심은 있다.
대놓고 앞에서 놀란 티를 내지는 않았다.
예전이라면 장기를 복제해 팔아도 마련할 수 없는 목돈이었지만, 지금 시우에게는 여러가지로 돈을 벌 수단이 있으니 말이다.
“알겠습니다.”
제법 의연하게 대답하는 시우의 모습에 그나마 화를 조금 가라앉히는 알비레오.
“패기는 좋네요. 관리국장을 만나 보석 신청을 하고 올테니 기다리도록 하세요.”
“넵.”
백작인 그녀가 움직이자 보석 승인 자체는 금방 끝났다.
옛 마녀라고 생각했던 심해의 마녀가 계승을 끝낸 어린 마녀라는 사실을 알게 된 알비레오가 ‘어린 마녀 패티쉬라도 있느냐’고 갈궈댔던 것을 제외하면 비교적 순조롭게 저택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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