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2
1.
도로시는 자신의 속내에 있던 모든 말을 풀어놓았다.
그녀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어떤 생각으로 그런 행동을 했었는지 담백하고 담담하게 전했다.
또한 제 생각이 너무도 섣불렀으며 잘못되었다는 것까지도 말이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르뤼에의 앞날을 걱정했던 도로시가 악역을 자처해 연극을 벌인 셈이었다.
독선이라고 해도 좋은 행동이었다.
두 사람의 사정을 묻지 않은 돌발 행동이기도 했고 말이다.
그러나 르뤼에는 실로 대인배적인 면모를 보이며 도로시를 기꺼이 용서했다.
용서했을 뿐만이 아니라 중간부터 감정이 격해진 나머지 도로시를 끌어안은 채 엉엉 울었으며, 천하의 도로시도 글썽이며 눈물을 보였다.
도로시가 그런 행동을 한 동기를 이해하지 못하는 바는 아니었지만, 다소 헛고생한 감은 있다.
도로시가 구태여 그렇게 행동하지 않았더라도 시우는 르뤼에가 공적 사회로 나가게 둘 생각이 없었으니 괜히 피 터지는 싸움만 한 셈이 아닌가?
르뤼에는 배를 푹 찔렸고 말이다.
아무튼 도로시도 르뤼에도 휴식이 필요했기 때문에 휴가는 강제적으로 연장되었다.
도로시의 표현대로 바보 같을 정도로 평화로운 나날이었다.
비오고 난 뒤 땅이 굳어지듯 도로시와 르뤼에는 전보다 한결 친근해 보였으며, 무엇보다 도로시는 예전처럼 가면 같은 미소가 아니라 제법 솔직한 웃음을 내비칠 수 있게 되었다.
시우도 도로시에 대한 경계심을 제법 내려놓고 어울릴 수 있었다.
이렇게 결과만을 생각하면 도로시가 벌였던 일도 전부 헛수고는 아닌 듯도 싶다.
아무튼 그로부터 사흘이 흐르고.
시우는 침대에 걸터앉은 채 심란한 마음을 가라앉혔다.
장소는 묘한 기류가 흐르는 르뤼에의 침실.
옆에 딸린 간이 샤워실에서 들리는 물소리가 명경지수를 유지하려는 마음에 자꾸만 파문을 남긴다.
“좋아 일단 정산.”
원래 마음이 복잡할 때는 긍정적인 생각을 하면서 보내는 거다.
우선 시우는 시련을 극복했다.
어느 정도 템빨의 이점을 이용했다지만 꿈의 요람을 장악해 폭주한 흑기사를 제압했다.
또한 22 위계의 도로시도 제압했다.
비록 도로시가 ‘죽이지 않고 생포한다’라는 제약하에 싸웠으며, 같은 자리에서 오랜 대치가 일어난 덕에 얻어낸 결과긴 하다.
그래도 일전에 같은 22 위계의 비앙카를 상대로 아무것도 하지 못했던 것을 생각해보면 크나큰 발전이 아닐 수 없다.
이대로라면 스승님을 따라다니며 일을 돕는 것도 가능할 성 싶었다.
르뤼에의 경우 며칠 뒤 게헨나로 데려가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회로의 중추에 손상을 완전히 회복하기 전까지 안전한 장소에서 휴식을 취하기 위함이었다.
게헨나라면 저런 부상도 훨씬 원활히 치유할 수 있을 테니 회복 이후 아쿨라로 돌아와 시련을 이어나갈 예정이다.
물론 르뤼에는 명목상 추방자이니 게헨나의 입국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추방자는 그 부정적인 어감에 비해 정의가 다소 느슨하다.
게헨나에서 사고를 쳐 쫓겨난 마녀도 추방자, 보다 끔찍한 사고를 쳐 공적으로 지정된 마녀도 추방자, 위 두 사례에 해당하지 않고 현세에 소속을 둔 마녀도 추방자이니 말이다.
즉, 게헨나의 시민권이 없다는 공통 요소가 있지만 죄의 무게는 제각각이라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르뤼에는 옛 마녀의 후계, 추방된 적이 없는 추방자다.
충분한 대가를 지급한다면 시민증의 취득은 어렵지 않을 것이라고 도로시가 말해주었다.
실제로 시우를 치료하기 위해 찾아왔던 예빈 스미르나 역시 제머나이 백작가에 의해 시민권을 복권 받지 않았던가?
르뤼에가 물려받게 될 유산을 일부 기증하는 대가로 시민권 취득을 노려볼 생각이다.
그 과정에서 당연히 제머나이 백작과 대화를 진행해야 하는데….
대충 반응이 이러지 않을까?
‘시우 군, 제가 질문하나 해볼까요? 한 달 동안 실종 상태였고, 다음 한 달 동안 행방이 묘연했던 어떤 사위가 불쑥 돌아와서 새로운 여자를 위한 시민권을 달라고 하면…. 그 장모는 어떤 기분이 들 것 같나요?’
눈이 웃지 않는 웃음을 지으며 고상하게 차를 홀짝일 장모님 얼굴을 생각을 하니 벌써 위가 꼬여온다.
“그건 나중에 생각하자….”
가장 다행인 점은 르뤼에가 게헨나행을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도로시의 행동이 연출임이 밝혀진 이상, 르뤼에가 ‘역시 공적이라고 나쁘기만 한 것은 아니지 않느냐! 역시 게헨나의 겁쟁이들보다는 공적 추방자 편이 좋다!’라고 여길 가능성도 있었는데.
도로시와 시우의 진심 어린 설득이 도움되었던 모양이다.
순순히 따라가는 걸 대가로 딱 하나의 요구를 하기는 했지만 말이다.
마지막으론 도로시의 이야기다.
함께 르뤼에의 진로에 대해 고민할 때 복잡한 표정을 짓는 시우를 보며 도로시는 딱 잘라 말했다.
무슨 말을 할지 알 것 같지만, 고민할 필요 없다는 양 말이다.
‘마녀 역사상 공적 칭호가 면책받았던 적은 한~ 번도 없어.’
‘아무리 그래도 연좌는 너무 부조리하지 않나요?’
‘공적으로 지정된다는 건 마녀 사회가 가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억제력이야. 형벌로 비유하자면 사형 선고지. 만약 공적 칭호가 계승 이후에 사라지는 것이라면? 너도나도 온갖 짓거리를 다 벌려 위계를 올린 뒤에 홀라당 계승해 버릴걸?’
반박할 수 없었다.
뭔가 부조리함을 느껴지는 시스템이 유지되고 있다면 그건 겉으로 보이지 않는 원인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도로시는 조만간 몸을 추스르는대로 자신의 공방으로 돌아가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그녀의 선택에 시우의 표정이 어두워졌던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시우와의 싸움에서 도로시는 극악한 부상을 입었다.
낙인에 손상을 입은 것이다.
낙인은 마력회로와 같이 반영체 상태이기에 장기를 아예 적출해 버린 것이 아닌 이상 자연스럽게 회복된다.
설령 자궁에 창이 박혔다고 해도 형상기억합금처럼 천천히 제 기능을 찾아가는 것이다.
하지만 도로시가 입은 부상은 붉은가지에 의한 것이었다.
비록 수녀복의 강력한 방호 성능으로 낙인이 아주 파괴되진 않았지만 마력 저장로를 담당하는 획에 회복 불능의 상처를 입었다.
중요도로 따지자면 가장 치명적인 획의 손상이다.
노트북의 다른 모든 것이 정상적으로 작동해도 배터리가 고장 난다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다.
‘왜 그렇게 미안해해?’
‘…어찌 됐건 저 때문이니까요.’
‘나는 마법을 자유자재로 쓸 수 있었을 때보다 지금이 훨~씬 행복한데? 소중한 친구를 얻었잖아.’
라고 도로시 본인은 말하고 있었지만.
상실감이 없을 리 없다.
마녀에게 마법의 상실이란 사지 일부가 결손나는 장애보다 끔찍한 것일 텐데 말이다.
그때, 물소리가 멎었다.
샤워실 안에서 도란도란 울려오던 대화 소리도 멎었다.
“준비되었느냐? 도로시는 방금 준비를 마쳤도다.”
“네, 그런 것 같네요.”
도로시보다 한발 앞서 쫄랑쫄랑 다가오는 르뤼에.
평상시라면 침대 위에 자연스럽게 뒤엉켜 키스를 나누고 바로 섹스를 나눴겠지만….
르뤼에의 표정은 그 어느 때보다 사뭇 진지했다.
또한 옷차림 역시 야시시한 복장이 아닌 단정한 잠옷차림 그 자체다.
“부탁을 들어주어서 고맙도다. 그리고 고집을 부려서 미안하도다.”
“아닙니다. 저도 책임감을 느끼고 있으니까요.”
다소 건너뛴 감은 있지만, 오늘 시우와 뜨거운 하룻밤을 보낼 상대는 르뤼에가 아니라 도로시이기 때문이었다.
물론 흑기사의 쓴소리를 받아들여 ‘아 세상에 모든 마녀를 따먹고 무쌍을 찍어 봐야겠다’라고 다짐한 건 아니다.
이는 일련의 사건이 종합되어 만들어진 결과물이었다.
도로시는 낙인에 손상을 입었다.
시우는 그에 대한 미안함을 느끼고 있다.
르뤼에는 게헨나에 따라가는 대가로 한 가지 대가를 머리 숙여 부탁해왔다.
그게 바로 도로시와의 성관계였다.
독점욕이 강한 편인 르뤼에가 성적 향응과 쾌락을 위해 그런 부탁을 해온 건 아니다.
저래 봬도 르뤼에는 무려 23 위계의 마녀.
마법에 대한 지식도, 그 넓이와 깊이도 시우보다 한참이나 깊다.
휴가를 보내는 와중에도 도로시의 부상에 슬퍼하던 르뤼에는 서고를 뒤져가며 한가지 가능성을 찾아냈다.
앞서 설명했듯이 ‘적출’이 아니면 낙인은 자연 회복된다.
설령 창상이나 관통상을 입었더라도 영체의 가공할 회복력은 자궁마저 재생해 내고 그 위에 다시 낙인이 깃든다.
즉, 왜곡장에 의해 쇼트가 온 획을 정상구동할 수 있다면 도로시가 마법을 되찾는 것도 가능하리라는 것.
그 수단은 공교롭게도 자기화가 필요 없을 정도의 순수한 마력을 방출하는 시우의 자지였다.
가장 비슷한 비유를 들자면 전기 충격을 통해 멈춰버린 심장을 다시 뛰게 하는 것도 비슷하다고 볼 수 있겠다.
이것저것 머리 아픈 상황이었으나 시우는 기꺼이 그 실험에 동참하기로 했다.
마법을 사용할 줄 알게 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우조차 마법 없는 생활이 상상이 가지 않을 정도이다.
앞으로도 현세에서 살아갈 도로시에게, 그리고 수 대에 걸쳐 마법을 쌓아온 그녀에게 마법을 되찾아준다.
지푸라기 같은 가능성이라도 붙잡아보지 않고서는 배길 수가 없는 것이다.
시우보다 훨씬 더 그 중요성을 체감하고 있을 르뤼에는 질투심 하나 없는 진지한 표정으로 손가락을 꼽아가며 설명했다.
“그대가 호색한이라는 건 알고 있다. 하지만 너무 거칠게 하지 말도록 하여라.”
“네네, 어차피 그렇게 진득하게 하지도 않을 겁니다.”
성교 과정을 생략한 채 사정만 하는 꿀벌 섹스.
이미 몇 차례 경험이 있다.
어차피 필요한 것은 사정뿐이니 같은 절차를 밟을 것이다.
-끽
“그럴 필요 없어요.”
샤워실의 문이 열리며 수증기가 뿜어져 나온다.
그 뒤로 느릿하게 도로시가 걸어나왔다.
소피아보다도 우월한 무려 I컵의 위용은 그녀가 걸음을 뗄 때마다 눈을 뗄 수 없게 출렁인다.
“저는 아~주 능숙하거든요.”
세상은 넓고 가슴 큰 여자는 많으니 I컵보다 커다란 여자도 얼마든지 있을 것이다.
하지만 단언컨대 저보다 완벽한 I컵은 없다.
저 군살 하나 없는 잘록한 몸매에 멜론보다 큰 모성의 상징이 출렁이다니.
보정 하나 없는데도 보정이 들어간 동영상을 눈앞에서 보는 느낌이다.
없던 욕망도 즉석에서 제조해버리는 특대 맘마통이다.
“으으….”
막상 도로시를 망설임 없이 제 침소에 들였던 르뤼에도 반쯤 얼이 나간 시우를 보자 새삼 안절부절못하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이내 눈을 질끈 감고 자리를 박찬다.
“남은 시간은 둘이 잘 보내도록 하거라. 짐은 남녀의 관계를 엿볼 정도로 문란하지 않도다. 영화를 보고 있을 터이니 끝나면 찾아오거라.”
뒤를 힐끔힐끔 보면서도 자리를 비켜준 르뤼에.
저렇게까지 말하는 이상 정말로 자리를 비켜줄 생각인가보다.
르뤼에가 도로시의 도발에 보였던 반응을 생각하면 무조건 옆에서 지켜볼 줄 알았는데.
조금은 의외였다.
이제 침실에 남은 것은 도로시와 시우뿐이었다.
“…….”
“준비됐지?”
그나저나 꽤나 여유로워 보이는 도로시를 보며 과거 그녀가 했던 말이 떠올라 물었다.
어색함을 풀기 위한 간단한 아이스 브레이킹이다.
“남자 품에 안기는 건 처음이었다고 하시지 않았나요?”
“안길 품이 남자뿐이겠어? 긴장하는 게 좋을 거야. 난 아~주 능숙하거든.”
그렇게 말하는 도로시는 슬쩍 윙크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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