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1
1.
눈을 떴다.
날이 눈 앞에 보인다.
잎사귀를 타고 흐르는 빗물처럼 새빨간 선혈이 창날을 타고 미간에 툭툭 떨어졌다.
도로시에 눈동자가 느릿하게 시우를 향했다.
그녀를 향해 창을 겨눈 그의 상태도 썩 좋아 보이진 않았다.
충혈된 눈.
굳게 다문 입술 사이로는 피가 흘렀으며 팔에 돋아난 울룩불룩한 핏줄은 아마도 왜곡장의 영향을 크게 받은 것처럼 보였다.
하기사, 예배당 없이도 어지간한 공격을 막아내는 수녀복의 방호성능을 일순간 무력화한 역장이다.
그 역장을 생산하는 원본을 쥐고 휘두른다는 것 자체가 어마어마한 부담을 전가하리라.
꼴이 우스웠다.
르뤼에가 충분히 분노를 삭이며 반쯤 내팽개쳐 둔 시련을 완수하고, 타인에 대한 착실한 적개심을 쌓았을 무렵 그를 돌려 보낼 예정이었다.
겉으로 표방한 이유는 르뤼에 옆에 마찬가지로 ‘나약한’ 그가 있으면 예방접종 차원의 배신이 효과가 떨어지기 때문이었다만….
그것만이 이유는 아니었다.
르뤼에와 잘 지내는, 도로시를 마음껏 미워하지 못하는 그를 보며 실로 오랜만에 소유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제껏 겪어 본 적 없는 인연을 갖게 된다면 어쩌면 자신도 르뤼에나 샬리트처럼 유약해 질 수 있지 않을까 작은 기대를 품었다.
잠시라도 함께 있어보고 싶었는데….
그 과정에서 신시우의 저항 따위는 계획에도 없었던 것이었다.
설마하니 완벽하게 제압당해 바닥에 눌려진 꼴이 될 줄이야.
“…왜 그랬어요.”
놀랍게도 그는 말을 걸어왔다.
창끝은 여전히 빈틈없이 도로시의 목숨을 끊을 준비를 하고 있었지만, 그 목소리는 알던 대로 나약함으로 점철되어 있었다.
“그냥 떠났으면 됐을 텐데….”
이것저것 착오가 생겼고, 몰골이 꽤 우습게 되었다만 계획에 딱히 차질이 생기는 건 아니다.
르뤼에는 공적에 대한 확실한 적개심을 갖추게 될 것이다.
타인을 믿기 전에 의심하는 법을 배울 것이다.
또한 게헨나에 가까운 마녀가 많은 신시우를 통해 조금이라도 안전한 울타리에 머물게 될 것이다.
도로시는 여기서 의미 없는 삶의 종지부를 찍는다.
친구의 딸, 그녀의 미래를 위해 악역을 맡고 죽는다.
이 정도면 제법 그럴듯한 ‘죽어야 할 이유’가 되지 않을까.
“죽여줘.”
도로시는 한숨을 내뱉듯 말한다.
“…….”
시우는 망설였다.
마지막까지 뜻대로 움직여주지 않는 남자다.
아주 가볍게 창을 내려찍기만 해도 도로시를 죽일 수 있을 진데 창은 조금의 미동도 없이 가만히 그 자리에 있다.
수녀복이 왜곡장의 영향을 최대한 억제해 주었으나 도로시는 배를 찔리며 낙인에 직접적인 손상을 입었다.
손상 부위는 마력의 저장고 역할을 하는 낙인의 획.
지금 이 순간도 혈액과 함께 방대한 마력이 빠져나가고 있었다.
영체를 유지하는 데는 지장이 없겠으나 상처를 지혈하고, 회복한다 하더라도 앞으로 마녀로서 제구실을 하기엔 글렀다.
“너무 아파서 그래. 고통 없이 끝내줘.”
망설임으로 흔들리던 그의 눈길에 다짐이 깃드는 것이 보인다.
도로시가 가망이 없다는 것을 알아차린 걸까?
아니면 르뤼에의 상태가 걱정되기 때문일까?
어느 쪽이건 자신을 공격해왔다는 분노에서가 아닐 것이다.
남을 생각하며 다진 각오다.
그러고보니 그에겐 성가신 역할만 떠넘긴 셈이다.
그 점은 조금 미안하지만 어여쁜 조카님을 데려가려면 이 정도는 고생하는 게 당연하다 싶다.
르뤼에에게 어울리는 다정한 남자다.
그 사실에 안도하며 도로시는 눈을 감았다.
“마지막으로 남기고 싶은 말이 있나요?”
아마 여기서 ‘살려줘’라고 애걸복걸한다면 그는 고민하겠지.
하지만 구차한 변명을 입에 담으며 계획을 망가뜨릴 정도로 삶에 미련이 남아 있진 않았다.
“가능한 심장으로 부탁할게. 얼굴이 흉해지고 싶진 않거든.”
“…….”
무겁게 고개를 끄덕인 그의 창이 올라갔다.
고통 없는 마무리를 위해 팔에 힘줄이 솟는 것이 보인다.
심장이 토마토처럼 터지기 직전.
“시우! 멈추거라!”
복도를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르뤼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시우는 휘둥그레진 눈으로 소리가 들려온 쪽을 보았다.
도로시의 말에 따르면 분명히 제압했다고 들었는데 저렇게 기운찬 목소리가 들려오다니.
이게 어찌 된 연유인지 살피기 위해 도로시를 보았으나 그녀도 시우만큼이나 놀라고 있었다.
아니, 시우보다 더 놀라고 있었다.
도로시는 분명 르뤼에의 마력회로를 일시 마비시켰다.
제대로 된 마법은커녕 족히 한 달은 요양이 필요할 부분에 정확히 말이다.
더군다나 아쿨라의 제어권과 동시의 사역마의 제어권을 탈취해 르뤼에를 구류하도록 명령을 내려두었다.
그렇다면 르뤼에는 어떻게 여기 왔다는 말인가?
마법을 행사할 수 없다면 아쿨라와 왕국을 오가는 것을 불가능하다.
르뤼에가 힘껏 달음박질해 달려오는 것이 보인다.
머리끝까지 화난 양 달려오던 르뤼에.
그러나 도로시와 시우의 몸 상태를 보자마자 핏기가 싹 가시는 게 보였다.
“시우, 괜찮느냐?”
“네, 저는 뭐 다친 곳은 달리 없습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요?”
혼란스러워하는 시우를 한번 꽉 껴안은 르뤼에는 비틀비틀거리며 도로시의 상태를 살폈다.
배에 뚫린 구멍.
르뤼에의 상처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상태가 심하다.
“이 배신자년!”
르뤼에는 뺵 소리를 지르며 도로시 옆에 섰다.
당연하지만 아무리 도로시가 크게 다쳐있다고 해도 르뤼에의 분노를 가라앉힐 수는 없을 것이다.
하긴 친구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마녀에게 그런 짓을 당했다면, 아무리 순진해 빠진 르뤼에라도 화를 내겠지.
“짐의 옥체를 다치게 한 극악무도한 역적은 징역 500년이다! 누구 멋대로 죽으려고 하는 게냐!”
그런 예상을 르뤼에는 너무도 쉽게 배신했다.
울음을 참으려 아랫입술을 꽉 말아물기까지 했음에도 그녀의 눈에서는 구슬 같은 눈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그리곤 도로시의 상체를 일으켜 껴안는다.
도로시는 멍하니 상처에 치유 마법을 거는 르뤼에를 바라보았다.
“배신한 것은 용서할 수 없다! 하지만 이대로 죽어버리는 것 또한 절대로 용납하지 않을 것이니라!”
상처가 아물어간다.
르뤼에가 어떤 방법으로 회로를 회복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회복이 불완전한 것은 명백했다.
23 위계의 대마녀가 고작 이 정도의 마법을 사용하며 땀을 뻘뻘 흘리고 힘들어했던 것이다.
하지만 르뤼에는 어떻게든 안간힘을 사용해가며 도로시의 상처를 수복했다.
도로시는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단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당혹감이 가슴을 채운다.
“하지만…. 저는, 여왕님을 배신했는데요…. 그런데 왜….”
“그렇다고 해서 친구가 죽는 것을 바라는 사람이 어디 있느냔 말이다!”
친구.
이 지경이 되어서도 친구라.
르뤼에는 도로시의 예상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어리석게도.
원망하고 책망하면서도 도로시가 죽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라고 있었다.
아니.
정말 어리석은 것은 누구일까.
2.
“먼저, 그대는 틀렸느니라.”
겉으로보이는 상처가 전부 회복되었을 무렵.
르뤼에는 본격적으로 화내기 시작했다.
“짐의 백성은 그대가 말하던 대로의 부품이 아니었다. 짐을 향한 충성심은 소꿉놀이가 아니었다! 그들은 너의 명령을 안간힘을 쓰며 저항한 채 짐을 풀어주었느니라.”
상식적으로 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아쿨라의 승조원은 전부 아쿨라에 소속된 사역마다.
그러나 르뤼에와 쌓아온 유대는 기적을 빚어냈다.
승조원들은 함장으로 등록된 도로시의 명령을 거부하고 르뤼에를 도왔다.
“당장 그대가 틀렸다는 것을 인정하거라!”
도로시는 고개를 푹 숙였다.
계획이 어그러진 것이 부끄러운 게 아니다.
어떤 표정으로 르뤼에를 바라보아야 할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상한 점이 한둘이 아니도다. 그대의 행동에는 석연찮은 부분이 너무 많다. 그러니 왜 그런 짓을 했는지 상세히 고해 이 답답함을 풀도록 해라.”
한편 르뤼에는 아무런 생각 없이 도로시를 구명한 것이 아니었다.
먼저 도로시가 르뤼에의 몸에 입힌 상처.
낙인에는 어떠한 직접적인 손상도 입히지 않은 채 마력회로의 중추만을 절단했다.
이것은 상처라기보단 차라리 수술에 가까울 정도로 깔끔했다.
아무런 조치가 없어도 한 달이면 무리 없이 회복할 수 있는 부상이었다.
거기엔 모순이 있었다.
도로시는 마법의 종류가 달라 르뤼에의 낙인이 쓸모없다 말하였지만 다른 마녀의 낙인은 그 자체로 가치가 높다.
23 위계의 낙인이라면 공적 사회에 가져가 경매에 부치기만 해도 천문학적인 가격에 거래될 것이다.
그러나 도로시는 르뤼에의 낙인에는 아무런 관심을 보이지 않은 주제에 제압하는 방식은 낙인에 손상이 가해지지 않는 온전한 방식으로 행했다.
이건 훗날을 대비해서도 가장 최악의 처분이었다.
분노한 르뤼에가 힘을 되찾기까지 고작 한 달.
후환을 없애기 위해서라도 죽이거나, 낙인에 영구한 상처를 남기는 것이 정상이다.
뒤통수를 쳐 시우를 빼앗으려 했을 만큼 악독한 행적과는 너무도 상반되고 허술한 처치였던 것이다.
물론 이것만으로 도로시가 악인이 아니라는 보장은 할 수 없다.
그녀에게 쥐꼬리만 한 양심이 남아 있었기에 차마 친우의 딸을 죽일 수 없었던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르뤼에는 친구를 믿었다.
아무리 하찮은 가능성이라도 믿을 여지가 있으면 믿고 싶었다.
“…….”
도로시는 르뤼에의 말을 들으며 시우의 얼굴을 보았다.
그의 입장에서는 방금까지 목숨을 걸고 싸웠던 배신자.
그런데도 르뤼에의 설득 아닌 설득을 듣는 시우는 천천히 그녀의 주장을 믿는 듯 보였다.
콧웃음을 치고 싶을 정도로 허술하고, 맹목적인 신뢰, 끈끈한 유대.
그것은 도로시가 일직이 나약함이라고 단정 짓고 배제하려 들던 허점이었다.
하지만 도로시가 제 입으로 변호해도 허무맹랑할 말을 진심으로 믿는다는 양 읊는 르뤼에는 결코 유약해 보이지 않았다.
강해보였다.
빛나 보였다.
도로시는 깨달았다.
자신은 그저 오만했을 뿐이다.
삶에 가치 따위는 없다는 둥 말하며 자신이 살아온 길만이 정답으로 여기고 르뤼에에게 설파하려 했을 뿐이다.
정작 그녀는 그런 것이 필요 없을 만큼 충분히 강한데도 말이다.
“정말 죄송해요.”
그 말을 시작으로 도로시는 입을 열었다.
다음화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