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7
1.
한창 스승님과 대련에 몰두하던 당시.
그러니까 창이 아닌 검을 주무장으로 사용했을 당시의 이야기다.
엘로아나 시우가 사용하는 검술은 음속을 가뿐히 돌파하는 초인의 것이므로 당연히 인간이 따라 할 수 없다.
그러나 그 기반은 분명 세간의 검술을 원류(源流)로 삼고 있기에 그녀는 시우에게 여러 가지 타입의 검술을 보여주었다.
동서양 등 문화권에 따라 달라지는 검술.
검의 종류에 따라 달라지는 검술.
검리(劍理)에 따라 달라지는 검술.
그 시점 이미 만병지왕의 계약을 지니고 있었던 만큼 빠른 속도로 검술이론을 습득하고 받아들이던 시우였으나 쉽게 이해할 수 없는 부류가 하나 있었다.
둔검(鈍劍).
문자 그대로 읽자면 ‘둔한’ ‘검’이다.
변화무쌍한 환검, 속도의 극을 추구하는 쾌검, 유로 강을 제압하는 유검.
다들 그럴듯한 구석이 있는 검술이었지만 둔검만큼은 아니었다.
‘스승님, 그런데…. 느린 검을 어디에 써먹나요?’
다른 것은 유창하게 설명하며 시범을 보이던 엘로아도 그 질문에는 제법 고민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직접 보겠느냐?’
그렇게 대련 속에서 그녀가 선보인 둔검은 실로 당혹스러운 것이었다.
일견 빈틈투성이이지만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숨이 턱 막히는 중압감.
검을 맞대는 순간 느끼고 마는 힘의 차이.
모든 수를 읽히고 있다는 조바심에 엉겁결에 칼을 휘두르면 어느덧 목 바로 아래 시퍼렇게 날이 서 있다.
‘대단하네요….’
시우는 순수하게 감탄했으나 엘로아는 고개를 내저으며 부끄러운 듯한 미소를 보였다.
‘이건 사실 둔검이라고 말할 수 없다네. 실력차이가 완연하기에 그럴듯하게 보일 뿐이지.’
‘그런가요?’
‘실로 그렇다네. 사실 둔검이란 것이 후발선제와 정중동(靜中動)의 묘리를 담고 있다고 포장하지만 나 역시도 실제로 본 적은 없다네. 수련용으로나 적합하겠군. 이런 것도 있구나 정도로만 알아두게.’
한참 수련에 열중해있던 시기기에 조금 더 자세히 물었다.
‘그렇다면 실전에서 둔검을 완벽하게 구사할 방법은 없을까요?’
잠깐 고민하던 엘로아는 답했다.
‘…그렇다면 아마도 중검과 혼합된 형태로 나타나리라 생각하네. 필요한 건 힘. 정면에서 들어오는 모든 힘을 걷어내는 아주 압도적인 힘이겠지.’
시우가 아는 한 가장 무예에 정통했던 스승님조차도 판타지에 불과하다며 넘어갔던 둔검.
그것이 지금 시우의 눈앞에서 생생한 현실감과 함께 펼쳐지고 있었다.
또 온다.
“하압~”
-쾅!!!
아무리봐도 맥 빠지는 나른한 기합과 가볍게만 휘둘러진 검이다.
후발선제니 뭐니 복잡한 검리는 모르겠다.
다만 그저 무겁고, 너무나도 강력하며, 한 번 받아내는 것만으로 팔은 물론 허리와 허벅지가 부서질 것 같은 충격이 전신에 전류처럼 퍼졌다.
높은 곳에서 등으로 떨어졌을 때처럼 숨이 턱 막혀오며 시야가 하얗게 변한다.
무지막지한 폭력 앞에 도망갈 틈 따위는 없었다.
그 충격을 가까스로 상쇄하고 앞을 보면 느릿한 추가타가 날아오고 있다.
-콰아아앙!
허리도 쓰지 않고 팔힘으로만 휘둘러진 검이 이 정도의 힘이라니.
더군다나 모든 정신력을 짜내 가까스로 내미는 반격을 그대로 찍어누르며 강행해오다니.
무식할 정도로 우직하나, 무식할 정도로 강력하기에 차마 대응할 수가 없다.
전혀 인간을 상대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이 검격이라면 거대했던 크라켄마저도 힘으로 짓눌러 버릴 듯싶었다.
-콰아앙!
붉은가지가 괴로운 듯 비명을 지르며 왜곡장을 이리저리 떨쳐도 시우의 몸을 좀먹기나 할 뿐.
수녀복을 걸친 도로시에게는 별 다른 영향이 없어 보였다.
더는 버티지 못하고 방패를 직조해냈다.
단단함을 목적으로 한 것이 아니라 한 번 부서지면서 충격을 최소화하는 일회성 방탄복 같은 역할이다.
-콰직!
뼈가 부러지는 소리와 혼동할 법한 파쇄음과 함께 몸이 허공을 가르는 것을 느꼈다.
의도적으로 몇 번이나 나뒹굴어 충분히 충격을 줄인 뒤 스프링처럼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도로시는 느릿하게 걸어왔다.
도망친 적을 추격한다기에는 산책이라도 나온 모양새다.
부조리하게도 전투의 긴박감은 오직 시우에게만 전가된 모양이다.
“엄~청 대단하네. 이 정도로 잘해낼 줄이야.”
적기사 이후 근접전에서 이 정도로 밀려본 것은 처음이었다.
마녀 중에는 근접전투에 취약한 부류가 절대적으로 많다.
더군다나 시우에겐 사기적인 성능의 붉은가지가 존재하니 근접전에서 밀릴 일 따위는 없을 줄 알았다.
아직 부상다운 부상은 없었지만 나름 비장의 한 수로 삼던 분야였기에 정신적 충격이 크다.
양자 간의 거리 20M.
인간에게는 충분한 안전거리지만 인간을 초월한 두 사람에게는 지척이나 다름없는 지점에 도로시는 멈춰 섰다.
“이 정도에서 그만두는 게 어떻겠니? 순순히 날 따라온다면 더 괴로워질 일도 없어. 나쁜 짓은 안 할게. 하루 이틀은 너도 꽁하겠지만~ 조금 지내다 보면 나름 만족할걸?”
“내가 그쪽 뭘 믿고.”
일전의 도로시였다면, 이런 상황이 아니라 정말 별수 없는 상황이었다면 따라나섰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친구의 등을 찌르고, 더러운 수작이나 부리는 공적을 믿어 봤자 예후는 결코 좋지 못할 것이다.
“휘어지지 못하면, 부러질 뿐이지.”
그렇게 말한 도로시는 느긋하게 다시 거리를 좁혀왔다.
그와 반대로 시우는 거리를 벌렸다.
다가오는 적에게 뒷걸음질치는 건 시우로선 정말 드문 일이었다.
“피어라.”
현시점 시우가 가할 수 있는 최고의 일격은 리본의 장력을 이용한 붉은가지의 투창.
이면결계 속 구현된 예배당은 예상대로 범상한 장소가 아니었다.
그토록 격렬한 싸움이 벌어졌는데 돌조각 하나 나뒹굴지 않는다는 것이 그 증거다.
반대로 말하자면 튼튼한 활대로 사용할 수 있는 구조물이 얼마든지 있다는 말이다.
도로시가 아무리 강한 힘을 지녔을지라도, 또한 수녀복의 방어력이 아무리 극상일지라도 이 일격은 다르다.
폭주시킨 왜곡장을 압축, 단숨에 쏘아 보내는 최고 화력의 공격이다.
그 위력은 준비 상태에서도 여실히 증명되었다.
-우우우우웅!
미칠 듯이 날뛰는 왜곡장을 압축하고 압축하여 붉은가지 안에 응축한다.
흑기사는 너무도 태연하게 해내는 일이지만 시우에게는 아직도 살짝 버거운 일격.
그래도 일전처럼 왜곡장을 몸 안으로 들일 필요는 없다.
다소 위력은 줄어들겠지만, 그 정도의 숙련은 마쳤다.
미증유의 힘이 담긴 창끝이 자신을 겨누는 순간에도 도로시는 느긋하게 걸어오고 있었다.
“두려워 말라.”
도로시의 영창 이후 그녀의 머리 위로 하나의 고리가 떠올랐다.
천사의 휘광을 나타내기 위해 그려낸 것이 변형되어 마치 천사의 트레이드 마크처럼 굳어진 고리.
순백으로 빛나는 그것은 흡사 작은 은하계처럼 거대한 힘을 품고 천천히 회전한다.
그와 동시에 그녀의 등 뒤로 뻗은 순백의 날개는 실로 천사라는 모습에 걸맞은 성스러운 자태다.
백조처럼 우아하게 펼쳐졌던 날개는 이동용 마법이 아님이 분명했다.
느릿하게 펄럭이는 순간 형체를 잃고 깃털로 화했으니.
다만 그 커다란 날개를 구성하던 깃털 한 가닥 한 가닥이 사방에 비산한 채 느릿하게 떨어져 내렸다.
-슈아아아악!
어차피 이제 와서 가폭주 상태인 붉은가지를 회수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있는 힘을 다한 투창이 대기를 가르며 도로시에게 쇄도했다.
—————!!!!
소리의 영역을 넘어 충격파에 달하는 굉음이 널따란 예배당에 메아리를 남긴다.
이만한 충격에도 흙먼지 하나 일지 않아 깨끗한 시야에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음속의 수십 배의 속력을 지닌 채 날아가던 붉은가지가 느릿하게 낙하하는 깃털에 닿자마자 궤도가 수정되었다.
붉은가지의 왜곡장이 맞닿은 깃털을 즉각 태워버렸기에 아주 미세한 수정에 불과했다.
허나 시우와 도로시 사이에 휘날리던 깃털은 족히 수 만장.
상호식별이 곤란해질 정도로 많은 깃털은 조금씩 조금씩 붉은가지의 궤도를 아래로 틀었으며 그 속도마저 죽여버렸다.
그 결과 허무하리만치 쉽게 제압당한 필살기.
-까깡!
아음속 정도로 느려진 붉은가지가 새된 소리를 내며 예배당 바닥에 박혔다.
각종 아티펙트와 마법에 영향을 주는 만큼 과연 여태껏 생채기 하나 없던 예배당을 일부 파손하긴 했으나 유의미한 결과라고 보기엔 어려운 것이었다.
절대방어.
시우는 저도 모르게 그 단어를 떠올렸다.
비앙카가 장거리 폭격에 특화된 마녀였다면, 도로시는 정반대의 성향.
모든 공격을 방어하는데 특화된 마녀였던 것이다.
위협이 사라진 것을 깨달았는지 사라지는 천사의 고리와 깃털.
아까 휘날리던 깃털은 천사의 고리를 마력로로 삼아 생겨났던 것이다.
언뜻 불규칙하게 흩날리지만 모든 개체가 하나하나 정교하게 짜인 마법식.
더 자세히 말하자면 그물 형태의 방어식이나 다름없다.
따라서 그 상태를 장기간 유지하는 것은 소모가 크기 때문일 것이라고 추측을 했다.
“…….”
그러나 이내 이러한 노력이 무의미하게 느껴진다.
과연 저 벽을 넘어서는 것이 가능한 걸까?
“신앙이란 믿음에서 시작돼. 실존하지 않을지라도 불특정 다수가 같은 믿음을 공유하는 순간 그건 실존하는 게 되는 거야.”
“…….”
“문화와 시대를 가리지 않고 등장하는 신의 사자가 그 예시지.”
어떤 신화에서든 빠지지 않는 자들이 있다.
신의 위업을 대행하는 자들.
천사.
“인간은 간악하지. 성스러움만으로는 신앙을 느끼지 못해. 그렇다면 신앙은 어디에서 오는 걸까?”
묻지 않은 것을 줄줄이 설명하는 도로시에게는 이미 승리에 대한 확신이 느껴졌다.
“바로 힘, 압도적이며 절대적인 힘이야. 내 자성마법은 천사의 힘을 구현한 ‘절대력’. 내 의지가 꺾이지 않는 한 외부의 어떤 힘도 이 절대력에 간섭하지 못해. 즉, 물리적인 마법이 특기인 네게는 정~말 최악의 상대라는 거지.”
조각조각 끼워 맞추던 가설이 그녀의 안일한 자랑 덕에 하나로 연결된다.
전력으로 맞부딪쳤음에도 일말의 미동도 없던 검.
한 차원 위의 힘을 행사하듯 시우를 일방적으로 몰아치던 완력.
붉은가지마저 멈춰 세우는 압도적인 방어력까지.
그녀의 말에 따르면 전투에서 발생하는 물리적 반작용은 전부 시우가 감당한 셈이 된다.
물리법칙 중 가장 기본적인 법칙을 무시하는 사기적인 힘이었다.
그 말이 절반만 사실이래도 시우에겐 승산이 희박했다.
가장 자신 있던 분야에서 전혀 상대되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이전처럼 패배한다고 해서 죽음이나, 혹은 그것보다 끔찍한 미래가 기다리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도로시는 시우를 썩 마음에 들어하는 듯 했으니.
꺾이려는 마음.
나약한 내면의 목소리가 유혹한다. ‘이쯤 했으면 잘한 거야’ 라고.
하지만.
리본을 뻗어 붉은가지를 낚아챘다.
도로시는 그런 시우의 행동을 아무런 방해 없이 내버려뒀다.
숱한 난관을 함께 돌파하게 해 주었던 그것을 다시금 손에 굳게 잡았다.
“피어라.”
투창으로 바닥났던 마력을 재충전하고 투지를 다잡는다.
무슨 바보 같은 소리란 말인가.
아쿨라에 도로시에게 당해 어떤 지경이 되어 있을지 모르는 르뤼에가 있다.
아직 사지도 멀쩡하고, 마력 충전도 남아있으며 무엇보다도….
“포기하라고 알려준 건데. 고집이 너무 센걸?”
실망했다는 듯, 하지만 어쩐지 기쁜 듯한 미소를 지으며 도로시는 검을 들어 올렸다.
그 순간 시우의 눈이 훑은 장소는 붉은가지가 헤집었던 예배당의 바닥.
그렇다.
포기는 이르다.
시우는 아직 전부를 내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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