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5
1.
“헉!”
정신을 차리자마자 벌떡 일으킨 상체.
주위를 두리번거리자 시련 전과 똑같은 방 안의 풍경이 보인다.
안에서 깨고 부수고 난리 부루스 춰도 어디까지나 마법으로 구현된 VR 공간 안.
외부 환경은 전혀 변하지 않는 것이다.
워낙에 긴박감 넘치는 전투를 하고 나서인지 잠깐 잊고 말았다.
식은땀이 뚝뚝 흐르는 몸을 더듬더듬 더듬었다.
구멍도 없이 새것처럼 말짱하다.
정신줄도 제대로 붙잡고 있고 갑자기 인격이 탈취되었다거나 하는 일도 없다.
한참 멍하니 앉아 있던 시우는 재차 확신한다.
“이겼다.”
시련을 클리어했다.
그것도 다소 패널티를 지고 있었다고는 하지만 족쇄마저 풀어낸 흑기사를 상대로.
초반에는 정말 아무것도 못 하고 탈탈 털려버렸던 흑기사를 상대로 말이다.
“이겼다.”
온갖 난잡한 패턴을 구사하던 난공불락의 레이드 보스를 솔로 플레잉으로 토벌한 감각.
그 감각은 남자라면 누구나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찌르르 흐르는 아드레날린.
성취감과 승리에 대한 도취가 그보다 짙은 농도로 혈관을 따라 흐른다.
주먹을 불끈 쥐고 항상 르뤼에가 나른한 자세로 누워 기다리는 소파를 바라보며 희보를 전했다.
“폐하! 제가 시련을 아주 멋지게 클리어했습니다!”
하지만 거기엔 반쯤 졸다가 ‘응? 응? 그게 무슨 말이더냐? 정말 시련을 클리어했단 말이냐?’라며 어안이 벙벙해하다가도 진심으로 축하해주면서도 르뤼에가 없었다.
아직 아쿨라에 남아 잡지를 탐닉하고 있는 모양이다.
희희낙락하며 르뤼에에게 이 멋진 영웅담을 전해줄 생각에 들 떠있다가, 잠시 멈칫했다.
“어?”
흑요석처럼 반들거리는 표면을 지닌 꿈의 요람.
그 위를 잠식하던 금빛의 프랙털 문양이 서서히 옅어지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그 옆에는 분명 제머나이 저택에 비치되어 있어야 할 붉은가지가 옆에 살포시 놓여 있었다.
시련에서 가짜를 이용해 불러낸 진짜 붉은가지.
그건 시련을 벗어난 현실에서까지 부름에 응했던 것일까?
아니면 현실에서 불러왔기에 시련 안까지 침투할 수 있던 것일까.
어느 쪽이건 확신은 없었다.
격렬했던 사투를 떠올리자 새삼 피로감이 몰려왔다.
마력이 바닥난 것을 제외하면 육체적으로는 아무런 소모가 없다.
하지만 정신력 소모가 어마어마했기에 잠깐 소파에 엉덩이를 붙이고 전투를 되짚어보는 시간을 가졌다.
“진짜 개쩔었지.”
그간 고생하던 상대에게 승리를 받아냈다는 자체도 기뻤지만, 그 과정도 드라마틱하기 짝이 없었다.
한 끗에 5억을 태우는 블러핑으로 판돈을 쓸어 먹은 기분이랄까.
하룻밤은 족히 술자리 안주로 삼을 무용담이지만 새삼 자아도취 한 번 더 하려고 앉아있는 게 아니다.
눈을 감고 조용히 마지막 순간을 되뇌었다.
리플레이를 보며 피드백할 시간이다.
마지막 진짜 붉은가지를 불러낸 것은 즉흥이었다.
몇 번의 행운과, 몇 번의 요행, 더하여 몇 번의 광기 어린 도박이 요구되었다.
그 상세를 하나씩 되짚어 복기하려 했으나….
“두 번 할 짓은 못되네.”
결론은 하나뿐이었다.
적어도 지금의 배는 되는 마법적 성취를 올리거나, 붉은가지를 조금 더 확실히 통제하지 못하는 이상 다시는 못 한다.
애초에 시련 속에서 붉은가지를 불러낼 수 있던 이유는 불완전하게나마 매개가 되어 준 ‘가짜’가 있었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없는 백지에 그림을 그리는 것.
선이 그려져 있는 그림에 색칠 공부하듯 색만 채워넣는 것.
둘 중 어려운 쪽을 뽑으라면 단연 전자이리라.
모처럼 번뜩인 영감으로 시행한 슈퍼 플레이가 굉장히 까다로운 조건에서만 사용 가능했던 일회성, 사실상 재현 불가능하다는 사실은 조금 아쉬웠지만….
그래도 유의미한 수확이다.
임기응변으로나마 흑기사를 이겼고, 또 붉은가지의 새로운 가능성을 미리 보았다.
뭐든 첫술에 배부르려면 배가 터지는 법이다.
“당이나 좀 충전하자.”
이제 돌아가서 느긋하고 행복한 잠이나 자 볼까.
지친 머리를 이끌고 돌아가려는 때였다.
“역~시 여기에 있었구나?”
요 며칠간 익숙해진 나른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당분간은, 어쩌면 평생 듣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목소리였다.
기둥이 양옆으로 늘어서 있는 긴 회랑.
어찌나 드넓은지 평범한 성량으로 얘기해도 메아리가 울리는 회랑 끝에 수녀복을 입은 한 마녀가 서 있다.
“도로시님? 일하러 가신 것 아니었나요?”
그녀는 성큼성큼 붉은 융단 위를 걸어왔다.
아주 오래된 친구를 만난 양 반갑기 그지없는 발걸음이었다.
“응, 그러려고 했는데. 볼 일이 남아서.”
“저희 약속했지 않나요?”
“오늘 떠난다고 했잖아. 오늘은 아직 16시간이나 남아있는걸?”
실로 도로시다운 능청이었다.
점점 가까워지는 도로시.
“그것도 그렇네요.”
갑작스러운 도로시의 등장에 느낀 감정은 뜻밖에도 반가움이었다.
워낙에 쫓아내다시피 매몰차게 떠나보냈기 때문에 생겨난 부채감 때문일까?
아니면 은연중 그녀가 나쁜 사람은 아니라는 결론은 내렸기 때문일까.
도로시의 말마따나 ‘내일 곧장 사라진다’했으니 해가 지기 전까지는 다소 시간이 남았다.
잠깐 침울해 졌던 르뤼에가 그녀의 깜짝 복귀에 좋아할 생각을 생각하니 덩달하 마음이 흐뭇해졌다.
두 사람의 거리는 20M 남짓.
도로시를 향해 마주 다가서던 시우의 발걸음이 멎었다.
승전고를 울리면서 고양되었던 심장도 함께 멎는다.
무방비하게 그녀와 마주하려는 순간 불현듯 위화감이 등골에 스며든 것이다.
“도로시 님. 잠깐 멈춰주시겠어요?”
“응? 왜?”
서로의 표정을 상세히 확인할 수 있는 거리에서 도로시는 시우가 시키는 대로 멈춰 섰다.
위화감의 정체는 어찌 보면 사소한 것이었다.
또한 여기서 그 의문에 대한 질문을 꺼내는 건 여전히 도로시를 신뢰하지 못한다는 증거를 보이는 것과 다름없다.
사소한 위화감을 무시함으로써 도로시를 존중하는 모습을 보이느냐.
끝까지 의심을 놓지 않는 모습을 보이며 위화감을 해소하느냐.
잠깐의 고민 끝에 선택했다.
“폐하는 어디 계시죠?”
“아쿨라에서 잡지를 보고 뒹구시더라고.”
이상할 것이 없는 대답이고, 지극히 평범한 대답이다.
시우가 마지막으로 확인한 르뤼에도 제 침실에 엎드려 잡지를 뒤적이던 뒷모습이었으니, 그녀의 대답 자체에는 의구심을 품을 여지가 없다.
하지만.
“왜 함께 오지 않으셨나요?”
이것이 위화감의 핵심이다.
도로시가 떠난 뒤에 꽤나 침울해하던 르뤼에다.
떠날 줄 알았던 친구가 돌아왔다면 한시라도 옆에서 떨어지지 않으려 하지 않을까?
과대망상일진 몰라도 시우가 지금까지 지켜본 르뤼에라면 필경 그렇게 행동할 터.
시우는 시련을 행하는 동안 르뤼에와 떨어져 있었다.
도로시는 시우가 정신을 잃었을 때 아쿨라로 먼저 되돌아왔다.
그리고 도로시는 르뤼에 없이 혼자 이 자리에 왔다.
물론 단순히 르뤼에의 변덕일 가능성도 없진 않다.
사실 시우가 아무리 열심히 예상해도 종종 예상 밖의 일을 태연하게 저지르는 르뤼에니.
“내가 준 잡지가 굉~장히 마음에 드신 모양이더라고.”
도로시는 손짓을 하며 너스레를 떨었다.
딱히 시우의 의심에 상처받은 것 같지도 않고 지극히 도로시다운 반응.
그런데도 이 찜찜함은 뭘까?
뭔가 놓치고 있는 건 아닐까?
“죄송합니다. 제가 조금 과민반응한 것 같네요. 르뤼에 님 몰래 스카웃 제의하러 오신 줄 알았어요.”
가장 유력한 예시였다.
도로시가 르뤼에를 만나지 않고, 곧장 시우를 납치하러 온 경우일 수도 있으니.
연봉 협상까지 제시할 정도면 나름 마음에 들었다는 건데 충분히 가능성 있지 않겠는가?
“그랬다간 여왕님에게 혼쭐날 텐데? 그보다 그건 뭐야? 못 보던 물건인데.”
붉은가지를 가리키며 묻는 도로시.
“제 주 무장입니다.”
“우라늄 봉 같은 걸 들고 싸우는구나?”
그녀는 한 눈에 본 것으로도 제법 정확하게 특성을 파악해냈다.
마법적인 관점에서 봤을 때 붉은가지는 치명적인 방사성 원소를 뿜뿜 뿜어대는 창에 가까웠으니.
“그런 셈이죠.”
이내 쓴웃음을 지으며 경계를 풀어 보였다.
태연하게 그녀의 옆으로 다가서자 싱긋 웃음 짓는 도로시.
“이제는 의심 하지 않는 거야?”
그리고.
-까각!
금속과 금속이 맞부딪치는 거센 마찰음이 시우의 옆구리에서 들려온다.
“어머? 이걸 막네?”
사정거리 안으로 들어오는 순간 옆구리로 새하얀 칼을 들이민 도로시와.
처음부터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이 붉은가지로 그것을 비틀어 쳐낸 시우.
도로시가 깜짝 놀랐다는 듯이 눈을 치켜뜨는 동안 뒤로 도약해 거리를 벌렸다.
조금만 방심했더라도 치명적일, 거의 아무런 전조가 없는 암수였다.
시우는 경계를 완전히 풀고 있지 않았다.
단지 도로시가 제지하기 전까지 가까이 다가오려 했던 점을 기억해 그녀의 의도대로 상황을 연출해 보았을 뿐이다.
신뢰를 내보이고 이쪽에서 도리어 거리를 좁히며 텅 빈 옆구리를 보여준다.
간단한 테스트의 결과는 일목요연했다.
적어도 친분을 다지자고 텅 빈 옆구리에 칼을 박아넣지는 않을 테니.
“…하아.”
당장은 기습적인 일격을 막아냈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동시에 낙담했다.
끝까지 그녀를 의심한 것이 정답이었음을 깨달았는데도 ‘역시 내가 맞았어!’ 같은 명쾌한 기분은 없었다.
그저 더럽게 입맛이 썼다.
“세상 물렁한 사람인 줄 알았는데~ 제법인걸?”
그냥 한 번 정도는 기대대로.
차라리 혼란스럽고 복잡해도 좋으니 ‘모든 공적이 나쁘기만 한 것은 아니다’라는 교훈을 주고 끝났으면 안 됐던 걸까.
실로 투정 같은 원망이 야속함과 함께 자라났다.
그 허술함과 무른 마음가짐을 잡아 뜯듯 떼어낸다.
지금은 쓰잘데기 없는 감상에 젖을 때가 아니다.
도로시가 여기에 있다는 말은, 그리고 이토록 대놓고 싸움을 걸어왔다는 의미는 르뤼에 역시 안전을 보장할 수 없다는 말.
시우에게 했다시피 기습적인 공격을 던졌다면 르뤼에는 필경 당했을지도 모른다.
“미안한데, 난 한 번도 공적을 믿은 적 없어.”
도로시의 등 뒤로 이면결계가 뻗어 나가기 시작했다.
숭고함으로 기둥을 세우고 신성함으로 벽돌을 짜맞춘 듯한 예배당이 드넓은 회랑을 덮어 씌워가듯 현현했다.
“예전에 말했던 대로~ 정말 못하는구나. 거짓말.”
시련을 끝내고 난 이후 고작 10분.
도로시의 놀림 섞인 웃음과 함께 제2전이 막을 열었다.
다음화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