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녀의도시-573화 (573/917)

#573

1.

무의식 속 신시우, 곧 흑기사는 실제 시우보다 훨씬 강하다.

아무리 괄목상대할 성장을 이루어냈다지만 현시점에서 양자 간의 스펙 차이는 현격했다.

이제껏 몇 번이고 흑기사와 겨루었지만 단 한 번도 이기지 못했던 것이다.

거기에 시련에 직접 개입해 자신의 사냥터를 만들어낸 흑기사는 ‘최초 1회 등록 당시의 강함으로 유지된다’라는 제약마저 풀어버렸다.

시우와 상호작용할 정도의 대화가 가능하고 부리는 마법의 질이 월등하게 올라갔다는 점이 이를 뒷받침한다.

그러나.

-까드드득!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터지는 마력과 왜곡장의 스파크.

서로 얽히다 못해 찢어져 쉴 새 없이 흩날리는 리본의 자락 속에 시우는 벌써 5분 넘게 흑기사와 대치 중이었다.

단순히 운이 좋았기 때문이 아니다.

실제 목숨이 걸려있는 만큼 평소보다 처절하게 저항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패배할 경우 어떻게 된다’라는 상세한 확증은 없었지만 아무리 봐도 ‘짜잔 사실 별거 아니었습니다’하고 넘어갈 분위기는 아니다.

목숨이 위험하다는 위기감은 평상시 잠들어 있던 잠재력까지도 발휘하게 한다.

“후웁!”

공기를 듬뿍 머금었던 폐가 북소리 같은 호흡을 내뿜는다.

일회전하며 가속이 실린 날카로운 창끝이 빽빽한 리본의 견제를 뚫고 흑기사의 투구를 찔렀다.

피할 수 없는 일격에 대한 흑기사의 반응은 기민했다.

왜곡장이 듬뿍 농축된 창을 투구의 굴곡 면을 이용해 흘려낸 것이다.

일반적인 마녀라면 그것만으로 지대한 타격을 입었을 것이다.

’마법’으로 이루어진 갑옷의 회로를 타고 진입한 왜곡장과 결계가 정교한 전기 회로에 물을 붓듯이 치명적인 합선을 야기했을 테니까.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흑기사는 시우와 같은 종류의 마법을 다룬다.

왜곡장을 다루는 솜씨에서도 저쪽이 한 수 위.

무구의 이점에만 기대어 제압하기엔 무리가 따른다.

다만 근접전에는 시우가 한 수의 우위를 점하기에 이전 양상과 같이 철저하게 파고드는 시우.

찰거머리처럼 달라붙는 상대를 떼어내고 요격 거리를 확보하려는 흑기사.

족쇄를 풀어내고 모든 힘을 발휘하는 흑기사와 아슬아슬한 접전을 이룰 수 있는 결정적인 이유는 달리 있다.

바로 사방을 감싸고 있는 마법식이다.

흑기사는 시련을 임의로 개조하기 위해 펼쳐야 하는 마법식에 능력 일부를 할애하고 있다.

그것도 싸움의 여파에 실시간으로 부서지는 마법식을 즉각 피드백하고 수정하는 건, 실상 시우로선 흉내 낼 엄두도 나지 않는 곡예였다.

그러나 찰나의 꿈에 불과한 ‘꿈의 요람’을 목숨을 건 투기장으로 바꾸려면 막대한 연산을 요구할 터.

“흡!”

그러한 이점을 살리기 위해 진각을 거칠게 밟는다.

발끝을 따라 원형으로 퍼져 나간 힘이 마법진을 뒤흔드는 순간 흑기사의 반응이 더뎌지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쉐에엑!

음속을 넘어 길게 뻗어지는 창격이 심장을 향한다.

목숨을 걸고 있다는 점만 빼면 단조롭게 느껴질 만큼 지난 시련과의 양상이 똑같았다.

새롭게 이론을 정립한 왜곡장의 파도를 써볼 예정이었지만, 아무리 시우라도 ‘이론만’ 완성한 기술을 실전에서 써먹을 만큼 대담하진 않다.

차라리 흑기사가 멈칫거리는 타이밍을 물고 늘어져 근접전만 유도한다면….

-휘리릭!

곧은 일격에 흑기사는 창을 풍차처럼 돌려 응수했다.

많은 격투기와 검투에서 사용되는 ‘패링’이 증명하듯 일직선의 공격은 옆에서 들어오는 힘에 취약하다.

이대로라면 창끝이 옆구리 사이를 스쳐 지나가고 수를 빼앗길 터.

이를 꽉 물고 흘러나가려는 호흡을 다잡는다.

“스읍…!”

한창 찔러나가던 창격을 억지로 멈춰 세운 것이다.

-삐걱

당연하지만 아무리 영체와 갑주로 강화된 몸이라도 역동작은 신체에 막대한 부담을 준다.

위태로운 삐걱거림과 함께 뼈가 탈구된 것은 아닐까 싶은 격렬한 통증이 무릎부터 전신에 내달렸다.

하지만 제대로 붙잡았다.

턴이 넘어가지 않았다.

“하압!”

기합과 동시에 회전에 영향을 받지 않게 창날 쪽으로 베어낸다.

부채꼴을 그리며 커다랗게 휘둘러진 참격.

호의 궤도에는 정확히 흑기사의 목이 걸려있다.

승리를 확신했고.

그 확신이 너무 빠른 단정이었음을 깨닫는다.

-빠각!

확실한 손맛.

시우의 창은 분명 흑기사를 강타했다.

허나 살과 갑주를 가르는 느낌은 아니었다.

흑기사가 도리어 시우를 향해 돌진하며 창격에 몸을 던졌기 때문이다.

이제껏 거리를 벌리려는 시도만 해왔기에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타격점을 앞으로 당겨 피해를 최소화하는 방어법.

길게 휘둘러진 창격은 필연적으로 원심력의 영향을 받는다.

창날 쪽은 충분히 가속이 붙어 강력하지만, 안쪽은 훨씬 힘이 덜하다.

흑기사는 창격에 얻어맞은 힘을 이용해 반대편으로 발을 박찼다.

인간의 몸, 그것도 200kg이 가뿐히 넘어가는 갑주를 두른 몸이 야구공처럼 날아간다.

그토록 지켜내려고 했던 간격이 단번에 벌어진 것이다.

“뭐...?”

일반적인 통념에 의하면 누구나 쉽게 떠올릴 방법일 터.

그러나 시우가 경악한 이유는 그저 의표를 찔렸기 때문만이 아니다.

시우가 휘두르는 창은 ‘일반적인 통념’ 수준의 일격이 아니다.

발경, 마력의 신체강화, 파워드 슈트나 다름없는 갑주, 만병지왕의 계약 덕분에 기술적으로 완벽하게 구사된 일격이다.

힘이 한껏 줄어든 안쪽이라 해도 달리는 덤프트럭에 몸을 던진 것이나 다름없다.

그 증거로 그림자를 분사하며 멀어지는 흑기사의 왼팔이 기형적으로 꺾여있다.

갑옷을 벗겨 내면 뼈가 튀어나왔을 것이 분명한 개방성 골절.

건틀렛의 틈새로 쉴 새 없이 핏방울이 흩어지는 게 보인다.

하지만 그것으로는 부족했다.

자칫 제 목숨을 앗아갈 수도 있던 도박적인 한 수는 왼팔을 대가로 흑기사에게 유리한 거리를 안겨주었다.

“피어라!!!”

어물쩡거리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뒤늦게 흑기사의 뒤를 쫓는다.

거리가 이만큼 벌어진 이상 흑기사의 턴으로 넘어간 것과 다름없다.

피어나는 꽃처럼 사방으로 뻗는 검은 리본과 그것을 시위 삼아 장전된 붉은가지.

이제 남은 건 질릴 만큼이나 겪어본 홀짝의 시간이다.

흑기사는 팔을 대가로 살아남았고 시우에겐 왼쪽으로 피하느냐, 오른쪽으로 피하느냐의 선택지만이 남았다.

붉은 빛이 번뜩였다.

착각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찰나의 순간 오른쪽으로 힘껏 내달린다.

-쇄애애액!

힘껏 투창 된 붉은가지가 스쳐 지나간 궤적.

그 부근의 피부에 일제히 솜털이 오소소 돋아났다.

하지만 회피에 성공하고 전력으로 거리를 좁히는 지금도 불안함이 남아있다.

마지막 시련 당시 흑기사는 발사됐던 붉은가지를 모종의 방법으로 회수해 즉각 재사용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도.

단발성 버그가 아니었다는 양 다시금 흑기사의 손에서 생생한 살기를 뿜어내는 붉은가지.

“피어라.”

우아하게 피어난 검은 꽃.

다시 한 번 강요된 러시안 룰렛.

두 번의 행운은 없었다.

행운의 여신은 흑기사에게 입을 맞춰주었다.

공중으로 날아오르던 시우의 몸은 왜곡장의 여파에 휘말려 지면으로 추락했다.

2.

도로시는 식은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자신을 올려보는 르뤼에와 눈을 마주쳤다.

이지경이 되었는데도 그 눈동자에 적의가 없다.

오로지 당혹감, 통증에 의한 괴로움, 그보다 훨씬 큰 충격만이 존재할 뿐이다.

예상했던대로, 아니 그보다 훨씬 허술하기 짝이 없는 대응이었다.

도로시의 자성마법은 근접전에 특화되어 있다.

검격이 닿을 거리 안에서라면 최강자의 반열에 들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제 아무리 23 위계의 자율방어라도 손쉽게 거리를 내어준 이상 가볍게 관통할 수 있다 장담했지만….

설마하니 검날이 복강을 헤집는 그 순간까지 자율방어가 작동조차 하지 않을 줄이야.

르뤼에가 얼마나 안일한 마음가짐을 지녔는지가 새삼 실감이 났다.

“도로시…. 왜…. 갑자기 왜 그러느냐…. 감히 짐의…. 짐을….”

꿈틀거리며 어떻게든 일어서보려 하는 르뤼에.

그 수고는 번번이 무위로 돌아갔다.

상처를 덮던 손이 긁어낸 바닥에 핏자국이 번져갈 뿐이다.

상처 자체는 그다지 깊지 않다.

회복 마법을 사용한다면 사나흘의 요양으로 충분하고, 그게 아니더라도 영체 특유의 회복력으로 한 달이면 멀끔히 털고 일어날 상처다.

문제는 상처를 입은 위치였다.

도로시는 많은 마녀를 죽여왔고 마녀를 무력화하기 위한 최고의 급소가 어딘지를 숙지하고 있었다.

단전을 비스듬하게 꿰뚫고 들어간 검날은 낙인 자체에는 유효한 훼손을 가하진 않았다.

하지만 영성체를 베어내는 도로시의 검날은 정확히 낙인으로부터 전신에 뻗는 마력 회로의 중추를 베어냈다.

이렇게 된 이상 제 아무리 23 위계의 마녀라도 일반인과 다를 것이 없어지는 것이다.

“어리석은 여왕님….”

도로시는 전장에 스러져간 병사를 위해 기도하는 성녀처럼 르뤼에의 머리맡에 조용히 무릎을 꿇었다.

“그렇게 남을 쉽게 믿어서야 괜찮으시겠어요?”

“친우를 믿는 것이…. 뭐가 나쁜 일이란 말이더냐....”

“신뢰와 방심은 전혀 다른 문제랍니다.”

그 순간 주위로 승조원들이 몰려들었다.

아쿨라의 주인인 르뤼에가 공격을 받았음을 감지한 순간 함장의 보호를 위해 마치 백혈구처럼 달려드는 것이다.

충성심 높은 승조원들이 이 광경을 보고 어떤 선택을 할지 르뤼에는 알고 있었다.

“아, 안 된다…! 멈추거라!”

하지만 그들은 겨우 잡일을 맡는 사역마에 불과하다.

그에 비해 도로시는 전투라면 이골이 난 대마녀.

결과가 너무도 일목요연하였기에 르뤼에는 다급하게 승조원들을 만류하려 들었다.

-탁

“자자~ 멈춰.”

도로시가 손끝을 튕기는 순간 흉흉한 기세로 권총을 꺼내 들던 승조원들의 동작이 일제히 멎는다.

또한 르뤼에는 아쿨라와 그녀를 연결하던 패스가 순식간에 탈취되었음을 느꼈다.

선대 누켈라비와 함께 잠수함을 개조했던 도로시다.

르뤼에의 마력이 끊긴 시점에서 잠수함과 이에 소속된 승조원의 계약을 빼앗는 것은 접시 위의 케이크를 먹는 수준의 일이었다.

“포박해. 환부는 지혈하고.”

불과 몇 초 전까지 분개한 듯 달려오던 충성스러운 부하들이 도리어 르뤼에를 포박한다.

르뤼에가 망연한 표정으로 면면을 살펴도 그들에겐 일말의 동요도 없었다.

지금까지 르뤼에를 떠받든 것은 모두 연기일 뿐이며, 그 본령은 기계 장치였을 뿐이라는 듯 묵묵히 도로시의 명령을 수행한다.

“여왕님은 이 사역마들을 무척 아끼는 듯싶으시던데~ 보이시나요? 이 녀석들은 그저 부품일 뿐이에요. 여왕님의 누켈라비 왕국 놀이는 소꿉놀이에 불과하고요.”

“아니다! 이들은 모두 짐에게 충성을 바치는…!”

“그렇다면 제 명령을 멈춰보시죠?”

“아나스타샤, 나타샤….”

르뤼에는 승조원 하나하나의 이름을 부르며 부탁했다.

그러나 그들이 따르는 건 르뤼에의 간절한 외침이 아닌 도로시의 냉담한 명령이었다.

르뤼에는 저항할 기력마저 잃은 듯 멍하니 도로시를 바라보았다.

이내 푹 숙여진 고개.

뺨을 타고 구슬 같은 눈물이 뚝뚝 흐른다.

“왜, 왜 이러는 것이냐. 짐의 마법이 목적이더냐? 아니면….”

“여왕님의 마법은 계통이 너무 달라 하~등 참고할 거리가 없답니다. 하지만 꽤~나 근사한 장난감을 가지고 계시더라고요.”

르뤼에는 경황이 없는 와중에도 그것이 신시우의 이야기임을 알아차렸다.

“안된다…! 그를 어떻게 할 생각이더냐…!”

“마법 연구에 유용하게 써야겠죠?”

“아니 된다…! 안된다…!”

불길한 상상의 자락이 펼쳐지고.

자신이 칼에 찔렸을 때보다 격렬하게 발버둥치려는 르뤼에의 앞에 도로시는 성큼 다가선다.

“여왕님.”

르뤼에의 뺨을 천천히 쓰다듬는 도로시.

“이게 공적의 삶이랍니다. 마법을 위해서라면 뭐든지 하고, 소중한 친구의 제자라 할지라도 뒤에서 칼을 꽂는. 덧없는 욕망으로 점철된 삶.”

기이할 정도의 기백에 저도 모르게 흠칫 물러선 르뤼에에게 도로시는 언제나처럼 알 수 없는 미소를 내비쳤다.

“참 우습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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