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녀의도시-572화 (572/917)

#572

1.

도로시가 예정보다 빨리 떠나 서운해하던 르뤼에지만 금방 기운을 차렸다.

그녀는 침울하게 주저앉아있는 대신 선물로 받은 간 군사학 자료와 잡지에 파묻히는 것을 택했다.

시련의 동행도 마다한 채 말이다.

시우가 시련을 가는 둥 마는 둥 제 할 일에 열중하고 있었기에, 이쪽도 할 일에 집중하기로 했다.

“진짜 경험치 이벤트네.”

한없이 실전에 가까운 대련이 가능한 시련.

더군다나 그저 잠재력이 발휘된 본인이 아닌 몇 배는 성능이 우월한 흑기사와 겨룰 수 있다는 건 절호의 경험이었다.

시련에 돌입하기 전과 시련에 한 달을 쏟아부은 지금을 비교하자면….

단순 전투력만으로 2배 이상이 차이가 나지 않을까?

처음에는 막막한 벽으로 느껴졌던 흑기사도 이젠 길면 석 달, 짧으면 한 달 안에 따라잡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계속해서 강해지는 시우와 달리 흑기사의 성장은 등록 당시 1회로 정해져 있으니 더욱 그런 거겠지.

가령 르뤼에와 관계를 맺은 이후 새롭게 얻어낸 마법을 흑기사는 전혀 사용할 수 없다.

물론 시우라고 한 번 관계를 맺었다 하여 고 위계의 마법을 단박에 복사해 낼 수는 없었다.

다만 거듭된 관계로 그 원형을 더욱 정밀하게 복제해 냈으며, 여러 시행착오를 거쳐 제 것으로 만들어내고 있었다.

그녀와 관계를 얻으며 체득하게 된 자성마법은 ‘마해(魔海)의 파도’이다.

최초 어항에서 르뤼에와 맞붙었을 때 작은 도시를 가볍게 집어삼킨 거대한 해일이 해당 마법이었다.

계통으로 분류하자면 역장 마법의 일종.

조금 더 상세한 가지를 타고 내려가자면 대량의 해수를 마력수로 치환해 파도를 일으키며, 그 물결을 매질로 삼는 역학적 파동 마법이다.

그렇게 일어난 성난 파도는 모든 저항을 미증유의 힘으로 찍어누르는 폭군 그 자체였다.

시우가 지닌 다른 마법과 비교해도 파괴력 하나만큼은 최고였다.

원소마법으로 강화한 그림자 갑옷이 파도에 직접 닿기도 전에 갈갈이 찢겨나갔으니 말이다.

그러나 ‘마해의 파도’를 그녀와 똑같이 사용할 수는 없었다.

복제의 미완성도는 둘째치고 한번 사용하는데 더럽게 많은 마력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르뤼에는 태생이 마력 부자다.

더군다나 르뤼에는 보조 특성을 지닌 다른 자성마법을 통해 실제 해수를 소환하는 식으로 초대형 건설기계급 연비를 효율적으로 감당했다.

하지만 시우에겐 그런 재주가 없다.

그런 상황에서 그녀의 파도를 고스란히 흉내 냈다간, 고작 한 번 파도를 일으키고 마력이 거덜 나게 된다.

그래서 시우는 우회로를 채택했다.

붉은가지의 왜곡장을 다루는 방식의 하나로써 이용하기로 한 것이다.

여태 실컷 해일이라고 설명했지만 실상 르뤼에가 거대한 파도를 일으키는 방법은 그 원리가 ‘로그 웨이브(Rogue Wave)’에 가깝다.

평평한 대양 한가운데 아무런 전조 없이 불쑥 치솟아 대형 선박을 좌초시키는 수십 미터의 변칙성 파도 말이다.

파도의 파장과 방향이 일치할 때.

즉, 파동이 중첩될 때 그 에너지는 집약되며 하나의 거대한 힘을 만들어낸다.

그 거대한 힘을 이끌어내는 시퀀스를 붉은가지의 ‘왜곡장’에 접목하는 것.

단순히 왜곡장을 제한, 압축, 해방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파괴력을 가미한 파동으로 이끄는 것.

이것이 며칠 간 이론으로 완성한 새로운 마법이다.

“오늘은 실전에서 써보자.”

얼추 준비를 끝냈다.

눈을 감고 꿈의 요람 위에 손을 올려 마력을 불어넣는다.

그 순간 침잠하는 의식.

오랜만에 느껴지는 현기증과 함께 예의 시련의 공간에 들어선 시우.

“어?”

하지만 공간 안에 들어섬과 동시에 위화감이 느꼈다.

본디 흑기사와 겨루던 이 시련의 공간에는 제대로 ‘끝’이 있다.

꼭 안에서 죽음을 맞이하지 않더라도 중도 포기할 수 있게끔 사각형의 지면 끝에 낭떠러지가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것이 존재하지 않았다.

마치 목숨을 걸고 싸워야 하는 콜로세움처럼 하얀 벽이 상자처럼 사방을 감싸고 있었으며, 벽면과 지변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금빛으로 빛나는 무수한 마법식이 새겨져 있다.

“뭐야?”

전에 발출됐던 붉은가지가 다시 흑기사의 손에 들려있던 때처럼, 이 기현상 역시 버그일지도 모른다.

아무리 아티펙트라해도 꾸준한 유지보수를 해주지 않으면 고장 나버리니 말이다.

어쩌면 노후한 전자기기의 회로판이 노출된 것처럼, 이 아티펙트의 구성식이 드러나 버린 것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저 마법식은?”

그러나 내부의 마법식을 찬찬히 둘러보던 시우는 어쩐지 친숙함을 느꼈다.

동시에 불길함을 느꼈다.

사선을 넘나들며 얻게 된 본능에 가까운 직감이다.

-철컥 철컥 철컥

신기루처럼 나타난 흑기사.

내면의 잠재력을 완벽하게 개화한 신시우 자신.

그제야 이 케이지를 구성한 마법식의 정체를 깨닫는다.

제아무리 뛰어난 계산능력을 지닌 마녀라도 따라 할 수 없는 기풍(棋風).

모든 변수와 가능성에 대비하는, 바둑으로 비유하자면 인간보다는 슈퍼컴퓨터에 가까운 내면의 무의식.

그렇다면 저것은 선대 심해의 마녀가 의도해낸 것이 아니다.

모종의 오류도 아니다.

흑기사가 아티펙트에 간섭해 자신의 의도대로 새로이 그려낸 시련의 장이다.

무엇을 위해?

“어째서 구도의 마녀를 품지 않았지?”

투구 안에서 들려오는 대사는 낯선 자신의 목소리.

‘피어라’이외에는 들어본 적 없던, 모든 감정이 마멸된 무기질 한 음색이 뒷전을 때린다.

“어째서 가장 빨리 힘을 얻을 방법을 외면하지?”

책망이라기에는 아무런 원망이 없는.

충고라기에는 아무런 호의도 없는.

허나 분명히 어리석음을 지탄하는 논조의 말투.

“무슨 말이야?”

시우가 처음으로 깊숙이 잠든 무의식과 나누는 대화였다.

“너의 어리석음을 보다 못한 케테르는 그 알량한 마음의 짐을 덜어주었다. 나라면 네 몇 배는 높은 경지에 오를 수 있었다.”

“…….”

그 말보다는 이 상황이 당혹스러워 말문이 막힌다.

케테르가 뭘?

그리고 뭐가 어떻게 되려는 거지?

“더 많은 마녀를 품으면 되는 아주 간단한 일임에도 너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이어지는 사고.

시우는 다양하고 많은 마녀와 관계를 맺을수록 강해진다.

마법을 복사해내는 능력 덕분이다.

시우가 게헨나에 ‘원나잇구함’이라고 벽보를 붙였다면 적어도 수백 명은 최초의 남자 마녀와 관계를 지니기 위해 구름처럼 몰려들었을 것이다.

그랬더라면 흑기사의 말대로 다양한 마법을 손에 넣을 수 있었겠지.

하지만 이미 너무도 책임질 사람이 많은바.

기회가 여럿 왔음에도 가능한 자제해 왔던 건 사실이다.

그리고 그런 방법이 옳다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그런 부분에서 흑기사와 시우의 의견이 크게 갈린 모양이다.

“이제 너는 필요 없다.”

흑기사의 선언과 함께 사방으로 뻗은 마법식이 빛난다.

그 말과 좌안에 비치는 마법의 흐름을 파악해 그 종류를 파악한다.

생생한 꿈을 꾸는 듯한 실감은 사라지고, 이 공간 자체가 ‘현실’로 변모한 것을 발견했다.

“널 죽이고 그 몸을 차지하겠다.”

꿈의 요람을 장악한 마법식은 찰나의 꿈에 불과한 시련을 전혀 다른 공간으로 그려내었다.

표면의식의 주도권을 두고 벌이는 생사결의 장.

죽는다고 해도 깨어날 수 없다.

끝까지 달려나가 떨어질 낭떠러지도 없다.

이 안에서 패배하게 된다면 남는 것은 끝없는 무의식에 어둠 속에 갇히는 것뿐.

애초에 너무 안일했는지도 모른다.

꿈의 요람이 시우를 ‘무의식의 저변’으로 인도하는 것이라면.

범상치 않은 신시우의 무의식이 역류해 이 공간을 장악하는 것 또한 예상했어야 한다.

“아니, 이걸 어떻게 예상해.”

생각해보니 더 말이 안 된다.

설마 그 무의식이 이 정도로 규격 외의 존재이리라고 감히 상상이나 했겠는가?

“피어라.”

운동 겸 가벼운 마음으로 새벽 조깅에 나섰다가 약수터에서 곰을 만난 것과 다름없다.

대화는 여기까지라는 듯 붉은가지를 들어 올리는 흑기사에 맞서 시우 역시 갑옷을 걸쳤다.

2.

그 시간 르뤼에는 할랑할랑 시간을 때우고 있었다.

“오오…. 이건 꼭 사야겠노라.”

홈쇼핑보며 호들갑 떠는 아줌마처럼 군사 잡지의 니미츠급 항공모함을 보며 군침을 다시는 르뤼에.

이 멋진 항모 위에 우뚝 서서 거친 바닷바람에 망토를 펄럭이며 지휘봉을 휘두르는 모습은 상상만 해도 너무 즐거웠다.

“그나저나…. 가격이…. 꽤나 비싸도다.”

420억 달러라니.

얼마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적지 않은 돈임은 분명하다.

아마 유산을 전부 물려받아도 감당하기 힘들 만큼 말이다.

여기에 안에 빼곡하게 함재기를 탑재하고 호위 함대를 꾸리는 돈만 해도 한 재산이 들 것 같았다.

끙끙거리며 고민하던 르뤼에는 얼마 지나지 않아 명쾌한 해답을 냈다.

“문제없도다! 주변 국가를 약탈하면 되는 노릇!”

여차하면 미군 기지를 습격해 굳이 돈을 주지 않고 무료로 수탈하는 방법도 있을 것이다.

꿈 많은 소녀가 뭉게뭉게 행복한 상상의 나래를 펼칠 무렵.

르뤼에가 벌떡 일어났다.

잠수함 내에서 기척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분명 몇 시간 전에 떠난 줄로만 알았던 절친한 친구 도로시의 기척이었기에 르뤼에는 잡지를 내던지고 곧장 응접실로 달려갔다.

“도로시! 이게 무슨 어쩐이냐!”

“여왕님~ 안녕하세요~”

볕 좋은 봄철, 새순을 뜯고 신이 난 새끼사슴처럼 폴짝폴짝 달려가 덥석 안기는 르뤼에.

도로시는 팔을 벌려 가볍게 르뤼에의 육탄 돌격을 받아주었다.

“휴가는 끝이라고 하지 않았더냐? 말도 없이 이렇게 돌아오는 서프라이즈라니! 이러면 짐이 너무너무 기쁘지 않느냐!”

해맑게 웃으며 좋아하는 르뤼에를 보며 도로시도 마주 웃었다.

“사실~ 오래 머물건 아니고, 잠시 놓고 온 물건이 있어서요. 아, 겸사겸사 깜빡한 선물도 있고요.”

“놓고 온 물건? 선물?”

어리둥절해하는 르뤼에의 눈에 시리도록 짙은 은빛으로 빛나는 도로시의 마력반사광이 들어온다.

왜 도로시가 마법을 사용하는 걸까?

선물이라는 것이 특수한 아티펙트일까?

아무런 의심 없이 그녀의 품에 안겨있던 르뤼에는 복부에서 번지는 아릿한 통증을 느꼈다.

‘푹’ 하고 뒤늦게 들려온 작은 소리는 살을 찢고 헤집었다기보다는 두부에 포크를 꽂은 듯한 가벼운 소리였다.

“아…. 어?”

하얗게 빛나는 검을 든 도로시의 손.

검날이 관통한 아랫배.

하얀 옷감 위로 꽃처럼 피어나는 붉디붉은 혈흔.

배를 헤집은 검이 복부에 박힐 때와 마찬가지로 아무런 저항 없이 가볍게 빠져나간다.

“쿨럭…!”

르뤼에는 기침을 토하며 아연하게 도로시와 제 상처를 번갈아 보았다.

반사적으로, 뒤늦게 마법을 행사하려 했지만 아무런 조짐도 일어나지 않았다.

도로시가 공격한 곳은 마녀라면 절대로 상처 입어서는 안 될 급소였으니까.

털썩 쓰러진 르뤼에는 믿기지 않는다는 눈으로 도로시를 올려보았다.

“왜… 도로시…. 왜...?”

도로시는 여전히 웃고 있었다.

양 입가에 낚싯바늘을 걸어 위로 당겨놓은 듯한 미소였다.

“여왕님 저의 마지막 선물이자, 교훈이에요.”

소름이 끼쳤다.

항상 내비치던 자애로운 미소가 손을 피로 물들인 순간조차 조금도 빛바래지 않음에.

“공적은 너무 믿지 않는 편이 좋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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