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1
1.
도로시는 예상보다 훨씬 늦게 일어났다.
거의 6시간가량을 곤히 잠들어 있었으니.
아무리 최적의 자세를 취한다 한들, 다른 사람에게 안긴 채론 좀처럼 편치 않은 일일 텐데도 말이다.
“흐응….”
졸음이 채 가시지 않는 졸린 비음과 함께 눈을 뜨는 도로시.
르뤼에가 이 꼴을 보았다간 어떤 난동을 피울지 벌써부터 두려우니 슬슬 깨우려던 차.
좋은 타이밍이었다.
“어….”
나른한 기색에도 불구하고 빈틈이라곤 찾아볼 수 없던 은색의 눈동자.
별 무리 같은 눈동자 위에 별안간 당황의 기색이 맴돈다.
아무리 천하의 마이페이스, 도로시라도 잠결이 남아있는 와중 비몽사몽은 피해 갈 수 없는 모양이다.
그토록 읽기 힘들던 그녀의 눈빛이 ‘뭐야? 어떻게 된 거지?’라고 고래고래 외치고 있었으니까.
“아하…. 참.”
그러나 당혹감은 오래가지 않았다.
도로시는 눈을 깜빡이는 몇 번 사이에 기묘한 기색을 말끔히 씻어내렸다.
스스로 생각해도 어이가 없는지 피식 웃던 도로시는 ‘우으으음!’ 기지개 켜는 소리를 내며 시우의 가슴팍에 볼을 마구 비빈다.
“지금 몇 시?”
“오전 8시요, 충분히 주무셨으면 비켜주세요. 시중들러 가야 합니다.”
“정말로 밤새 이러고 있던 거니?”
슬며시 밀어내자 잠자코 멀어지는 도로시.
“약속은 약속이니까요.”
“…….”
사우나에서 시우 위로 넘어졌던 척 안겨왔던 도로시를 르뤼에가 걱정해주었을 때와 같다.
또다시 드러난 물결은 어제 보았던 동요와 닮아 보였다.
그러나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세상은 자를 대어 자를 수 없는 문제투성이다.
제 그릇이 재지 못한 부분을 모조리 떠안을 만큼 넉넉하다 자만하지도 않는다.
그렇다면 어차피 이것저것 생각할 것 없는 셈이다.
오늘 떠나기로 했으니까 그녀의 본심을 파헤치려 드는 것도, 찝찝함인지 씁쓸함인지 모를 감정과도 작별이니.
“있지.”
“네?”
자리에서 일어서려던 그때 슬며시 물어오는 도로시.
“나와 함께 일하지 않을래?”
“…갑자기요?”
평소처럼 슬그머니 웃으며 농담을 던져오기에 대수롭지 않게 받아쳤다.
전처럼 ‘됐습니다’ 나 ‘싫습니다’ 라고 딱 잘라 말하지 못했다.
미처 매듭을 풀지 못하고 유보한 가슴 속 응어리 때문이었다.
여느 때처럼 한 방 먹은 채 대화를 끝맺음하고, 정말로 르뤼에에게 가려던 때였다.
“도미니카 공화국 인근에 내 소유의 섬이 있어. 비취색 바다가 하얗게 부서지는 백사장인데 경치가 꽤 끝내줘.”
도로시는 빤히 시우를 바라오며 말을 이어갔다.
매사를 농담 따먹기 쯤으로 여기는 그녀다.
이 역시 고약한 농담의 연장선이겠거니 했다.
그녀의 어안이 벙벙한 얼굴을 보고 말았으니 나름의 복수를 하겠다는 거겠지.
“위성 상으로도 포착되지 않고, 위치포인트 내에도 달리 정보가 없는 나만의 공방이야.”
“……?”
“연봉은 뒤탈 없이 깨끗한 300만 달러. 보너스도 휴가도 넉넉하게 챙겨줄 거야 매년 협상은 당연히 해 줄 거고~ 마법 연구에 관해서도 도움 줄 수 있어.”
도로시가 본업으로 돌아가 협상 테이블에 앉는다면 저런 느낌이겠구나 싶었다.
똑 부러지면서도 여유가 느껴지는 일류 협상가의 자세다.
허나 그 내용이 얼토당토않다면 일류 협상가가 아니라 그랜드 협상 마스터를 데려와도 설득할 수 없기 마련이다.
“업무는 뭔가요?”
매번 당하기만 하기도 뭐했기에 마지막 정도는 너스레를 떨었다.
“당연하잖아? 내 베개. 오늘처럼 잘 때 꼬~옥 안고만 있어주면 돼.”
“업무와 비교하면 연봉이 세네요.”
“아무렴~ 복리후생으로 나와 뜨거운 하룻밤을 보낼 수도 있는 걸. 네가 베개라면 하루 8시간이라도 응석 부릴 수 있어.”
“하하.”
실없는 농담을 주고받으며 르뤼에를 깨우러 갈 준비를 하자니 팔이 뒤로 쭈욱 당겨진다.
뒤를 돌아보자 거기엔 웃음기를 거둔 도로시가 있었다.
“대답은?”
단순히 농담이라고 여기기 힘들 정도로 반듯한 시선이 던져진다.
이제껏 그녀의 행동 중 가장 진지한 모습이리라.
그제야 일련의 대화가 농담 따먹기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어느 쪽이건 대답은 달라지지 않는다.
정중하게 거절했다.
“모처럼 스카웃 제의는 감사하지만, 이직은 힘들 것 같습니다.”
“그거 아쉽네.”
진심이라기엔 너무도 순순히 물러서는 도로시를 보며 역시 알다가도 모를 마녀임을 느꼈다.
2.
도로시는 약속을 지켰다.
아침 식사 자리에서 일정보다 빨리 휴가를 끝내게 될 것 같다는 말을 꺼낸 것이다.
르뤼에는 몹시 서운한 표정이 되어 아랫입술을 내밀었다.
“벌써 떠난다니. 속상하도다.”
“저도 너~무 섭섭해요.”
“왜 이렇게 서둘러 가느냐?”
도로시는 르뤼에가 눈치채지 못할 만큼 힐끗 시우를 보았다.
“시장이 한~창 좋은 흐름이어서요. 태평하게 보내고 있다 보니 초조해지네요.”
아침에 다소 흐트러졌던 도로시의 모습은 간데없었다.
조금 전 그녀가 일류 협상가로 보였다면 르뤼에에게 보이는 사근사근함은 거의 백화점 VIP를 대하는 판매원 수준이었다.
“짐이 다 사주면 안 되겠느냐? 지금 당장은 지급할 수 없으니 누켈라비 왕국의 국고채를 발행해 주겠노라.”
“어머~ 황송하기도 해라~ 하지만 제가 현금이 급해서요.”
“10년 만기 기준으로 이율 10% 보장인데도 안 되겠느냐?”
적당히 핑곗거리를 대고 빠져나오려다 상세한 제안이 나오자 살짝 당황하는 듯한 도로시.
“오늘만 날이 아닐걸요. 이제 여왕님이 어디 계신지 알았으니 언제든 찾아올 수 있어요.”
“그래도…. 아직 그대와 하고 싶은 것이 잔뜩 있거늘. 10년 만의 재회치곤 너무 짧다. 아쉽도다.”
아직 전부 먹지 못한 막대사탕이 흙바닥에 떨어져 버린 양 뾰로통하게 입술을 내민 채 한숨을 푹푹 쉬는 르뤼에.
예상외로 순순히 약속을 이행한 도로시를 보며 안도 아닌 안도를 내뱉을 무렵이었다.
“여왕님.”
“왜 그러느냐?”
“잠시, 그를 빌려 갈 수 있을까요?”
옆에서 둘의 대화를 듣던 시우도, 질문을 받은 르뤼에 본인도 전혀 예상치 못했던 부탁이었다.
아마 시우 역시 지금 르뤼에처럼 황당한 표정을 짓고 있을 게 분명하다.
반쯤 농담으로 치부했던 저 말을 정말로 할 줄이야.
“지금 뭐라 하였느냐?”
“신시우를 빌려갈 수 있을지 여쭈었어요.”
당혹감도 잠시 르뤼에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진다.
그 짧은 사이에 르뤼에가 시우를 놀란 듯 바라보는 걸 놓치지 않았다.
‘나 모르는 사이에 협의가 되어있느냐?’ 같은 눈빛이었기에 열심히 고개를 내저었다.
시우는 분명 거절 의사를 밝혔으니까.
“그건 어렵도다. 그대도 이게 상식적인 제안이 아님은 인지하고 있을 터. 그러나 어떤 목적으로 데려가려 하는지 이유를 듣겠노라.”
“똘똘해 보여서~ 이것저것 일을 시켜볼 예정이에요.”
르뤼에의 표정은 복잡했다.
화를 내어야 할지, 아니면 좋게 돌려 말해야 할지 고민하는 듯했다.
“신시우는 저리 멀끔해 보여도 삼처사첩을 꿈꾸는 짐승 같은 사내니라. 그대와 단둘이 여행을 보냈다간 어떤 남사스러운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다.”
우선은 설득하기로 한 모양.
침착하고 낮은 어조로 신시우의 위험성을 설파하는 르뤼에.
“걱정해 주셔서 감사해요~ 하지만 저는 여왕님께서 생각하시는 것보다 담대하답니다.”
도로시는 얄미울 정도로 태연하게 싱긋 웃음 지으며 답했다.
어차피 시우가 거절 의사를 밝혔다.
르뤼에가 허락할 가능성도 한없이 희박한 데다가 설령 그녀의 허락을 받아낸다 해도 시우는 떠날 생각이 없다.
도로시가 어떤 저의로 저런 말을 꺼내는지 알 수 없었다.
공기가 무거워졌다.
“그대의 말이, 누켈라비 왕국의 국서를 짐에게서 빼앗아 가겠다는 뜻임을 알고 있느냐?”
여왕님의 하이소프라노 옥음이 나직하게 울린다.
포획한 먹잇감을 노려지는 맹수의 으르렁거림과도 같이 들렸다.
“빼앗다니요. 잠시 빌려 가겠다는 의미였습니다. 불쾌하셨다면 죄송해요.”
이번에도 선뜻 물러나는 도로시.
도로시가 물러선 만큼 르뤼에도 언짢은 기색을 풀었다.
물론 양보하지 않을 부분에 대해서는 완고히 제 의견을 주지했지만.
“용서한다. 짐 역시 마지막 날에 얼굴 붉히고 싶지는 않노라.”
“가벼운 농담이었는데. 정~말 죄송해요.”
“알면 되었다. 짐은 그대와의 우정을 소중히 하고 싶으니 그런 말 꺼내지 말거라.”
“네~ 알겠습니다.”
‘설마 싸울까?’ 하는 불안한 마음으로 지켜보고 있던 시우로선 안도했다.
식사가 끝나고.
도로시는 주섬주섬 챙겨온 짐을 챙겨 떠날 채비를 마쳤다.
“그럼, 머무는 동안 잘 챙겨주셔서 감사해요. 이만 가볼게요.”
시우의 문제로 잠깐 화났었지만 여느 때처럼 금세 풀려버린 르뤼에다.
인제 와서는 도로시가 예상보다 일찍 떠나게 된 섭섭함 쪽이 더 커진 모양이다.
“도로시.”
“네, 여왕님.”
성큼성큼 다가가 도로시를 꽉 껴안는 르뤼에.
소중한 인형을 껴안는 것처럼 다정한 포옹이었다.
“다음에는 언제 올 예정이느냐?”
“저도 모르겠네요~ 아마도 다음 휴가 때가 아닐까요?”
르뤼에는 겉으로는 도로시가 아무렇지 않은 척 물러섰지만 내심 속상해하고 있을 가능성까지 고려했다.
“너무 섭섭해하지 않았으면 좋겠느니라.”
“어머? 어떤 부분이요?”
“짐이 신시우를 내어주지 않은 것 말이다.”
르뤼에의 머리를 쓰담 쓰담 해주며 웃는 도로시.
“괜찮아요~ 무리한 부탁이라는 건 알고 있었답니다.”
“짐은 그대 역시 소중하다. 시련만 끝나고 자유롭게 여행 다닐 수 있는 날이 오면…. 셋이서 즐겁게 여행하자꾸나.”
“…….”
잠깐 침묵을 지키던 도로시는 웃는 낯으로 답했다.
“저도 어서 그런 날이 오면 좋겠네요.”
3.
도로시가 처음 만났을 때처럼 홀연히 떠나고 잠수함엔 다시 시우와 르뤼에만 남게 되었다.
성가신 방해꾼이라고 딱 잘라 말하긴 어렵지만 아무튼 도로시 탓에 시련을 하지 못했었으니 그간 쉰 만큼 더 열심히 할 예정이다.
“시우.”
“예.”
“설마 도로시를 따라 떠나고 싶었던 건 아니겠지?”
“그럴 리가요.”
친하게 지내라고 할 때는 언제고, 도로시가 시우에게 눈독을 들이자 곧장 불안한 마음이 생겨난 듯하다.
불안해하는 르뤼에를 다독여 준 이후 곧장 시련에 돌입하기로 했다.
아무래도 미뤄진 만큼 마음이 급했기 때문이지만….
그건 잘못된 선택이었다.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는 것을.
조금 더 르뤼에와 함께 있어주어야 했음을 뒤늦게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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