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0
1.
가능한 빨리 거사를 끝내려 했지만 무려 4시간이나 걸려버렸다.
르뤼에를 재우고 나오기까지 2시간 정도를 잡고 있었으니 2배로 오버한 셈이다.
침대 위에선 소심한 응석쟁이로 변하는 작은 여왕님이 오늘따라 적극 어리광을 부려왔기 때문이었다.
르뤼에가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잠이 들 때까지 미지근한 물에 적신 수건으로 몸을 닦아주고,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통에 별 수 없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 상황이 싫었다거나 곤란하기만 했다는 얘기는 아니다.
날이 갈수록 뜨거워지는 르뤼에의 애정행각에 흐물흐물 녹아내린 입꼬리를 바로 잡으며, 도로시가 있을 응접실로 돌아왔다.
“좋은 밤이야.”
도로시는 어제와 똑같은 자세로 소파에 누워 느긋하게 시가를 피우고 있었다.
괜스레 멋쩍다. 그녀의 투명한 은색 눈동자가 뭐든지 꿰뚫고 있으리라는 마음 때문이었다.
“정~말 다정하구나?”
“네?”
“의심이 가는 공적의 감시를 마다하면서까지 공주님의 응석을 받아줬잖니?”
“…….”
적당히 무시한 채 맞은 편 소파에 앉자 도로시는 몸을 빙글 돌려 엎드린 채 히죽히죽 웃었다.
“칭찬받으면 쑥스러워하는 편이야?”
“그런 건 아닙니다.”
“그건 그렇다 치고. 설마 4시간 동안이나 할 줄이야. 전에 내가 조루라고 했던 건 정정해야겠어.”
흠칫 몸이 굳었다.
4시간 동안이나 했는지 안 했는지는 어떻게 아는 건지.
“여기까지 공주님의 애달픈 울음소리가 들리던걸.”
“…….”
사정시 발생하는 마력의 파장만큼은 혹시 몰라 역장 마법으로 차단해두었다.
다만 응접실과 침실 사이의 거리가 꽤 되는 편이었기에 방음 대책이 전무했던 것도 사실이다.
“내가 유~달리 청각이 예민한 편이라.”
안 그래도 막 질펀한 성교를 나눈 뒤 얼굴을 보는 것이 어쩐지 껄끄러웠는데.
정말로 온갖 소리가 다 들렸을 것으로 생각하니 뻘쭘함이 두 배가 되었다.
“그건 그쯤 얘기하고, 하나 부탁할 것이 있습니다.”
“뭐? 그런 천박한 부탁은 정~말 곤란한데.”
아직도 놀리고 싶은 마음이 남아있는지 유달리 치근덕거리는 게 심하다.
말끝마다 달라붙는 추파를 애써 무시한 채 본론을 꺼냈다.
“그 질척거리는 것 좀 어떻게 안 될까요?”
“질척거린다니 너무해~”
“제가 곤란해하는 걸 보고 싶은 건 알겠는데. 폐하의 앞에서 요상한 건수를 만드는 건 자제해 주셨으면 합니다.”
“건수? 무슨 건수?”
예상대로 시치미를 뚝 떼는 도로시.
“자세히 말해주지 않으면 모르겠는데?”
“괜히 폐하의 질투심을 자극하지 말아 달라는 말입니다. 가슴을 과시하는 듯한 포즈를 취한다거나, 넘어지는 척 품에 안기는 일이요.”
“그렇다면~ 내 부탁과 교환할래?”
도로시는 당연하다는 듯이 물물 교환을 제시한다.
하긴 그녀가 순순히 부탁이나 권고를 받아들일 것이라곤 생각지 않았다.
대충 고개를 끄덕이자 자리에서 일어난 도로시가 테이블을 빙 돌아 다가온다.
한껏 경계하고 있자니 슬며시 옆에 앉는 도로시.
“뭡니까?”
“그냥, 옆에 앉은 것뿐인걸?”
“아뇨, 그거 말고 부탁이요.”
“날 안아줄래?”
도로시는 곧장 본론을 꺼내왔다.
당연하지만 은유적인 표현이건, 직접적인 표현이건 들어줄 수 없는 부탁이다.
“싫습니다.”
아무리 교환을 위한 부탁이라지만 무슨 꿍꿍이를 지니고 있는지 모를 도로시다.
옆에 앉는 정도의 접근을 허용한 자체가 그녀로부터 아주 조그마한 신용을 얻었다는 증거긴 했으나….
아무튼 이 이상은 곤란하다.
시우의 쌀쌀맞은 답변에도 도로시는 조금도 물러설 기색이 없었다.
그저 빤히 얼굴을 바라보다 이야기를 시작했다.
“아직도 날 의심하니?”
“의심하지 않는 편이 더 어렵죠.”
“그건~ 내가 공적이니까?”
이건 불합리한 질문이다.
안 그래도 단순히 공적이라는 이유만으로 도로시를 멀리하는 게 찜찜해지던 차다.
하다못해 그녀가 추방자이기만 했더라도 이 정도로 경계하며 배척하지는 않았을 터.
그러던 중에 던져진 ‘내가 공적이니까?’라는 질문은 마음의 불편함을 가속하기 충분했다.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자 도로시는 피식 웃었다.
살짝 취한 듯한 웃음이었다.
“쉬운 일은 아니지. 공적을 믿는다는 건.”
“굳이 공적이 아니었더라도 그런 부탁은 듣지 않았을 겁니다. 제가 무슨 공공잽니까?”
엉겁결에 변명하듯 덧붙였으나 그런 뻔한 변명이 그녀에게 통할 리가 있나.
도로시는 아쉬운 듯한 쓴웃음을 지었다.
그 입꼬리에는 믿기 어렵게도 야속한 한숨이 매달려있다.
“자꾸 그러시는 이유가 뭔가요? 딱히 절 좋아하시지도 않잖아요.”
애초에 만난 기간도 짧거니와 둘 사이의 상호작용이라 해봤자 의심하는 시우와 그걸 즐기며 놀려대는 도로시가 전부였다.
그녀가 딱히 욕정을 느끼는 것 같지도, 남자 마녀에 대해 커다란 호기심을 지닌 것 같지도 않다.
적어도 지금까지 그녀가 보인 태도를 되돌아본다면 말이다.
“그건 그렇지. 원래 이런 얼빠진 행동은 하지도 않아.”
예상대로 반론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도로시.
“하지만, 나는 최근에 꽤~나 즐겁거든. 이렇게 바보 같은 평화가 얼마 만인지 떠올리기 어려울 만큼 말이야.”
“…….”
“아까도 말했다시피 넌 다정해.”
“비행기 태워줘도 나오는 거 없습니다.”
갑작스레 추켜 올리는 말에 멋쩍어지려던 차.
“너는 날 공적이라는 이유만으로 미워하지 못하잖니?”
도로시는 진지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여태 가볍고 설렁설렁 이라고 느껴졌던 태도를 뒤집고 한없이 진중한 눈빛이었다.
“대부분 그렇겠죠.”
“아니, 그렇지 않아. 대다수의 사람은 아주 쉽게 타인을 미워할 이유를 찾기 마련이야. 피부색이 다르니까, 사상이 다르니까, 소속이 다르니까 등등 한없이 편리한 잣대를 내세우며 경계 밖으로 타인을 밀어내. 후후, 선구자라도 되는 양 말하는 것도 웃기네. 당장 나 자신도 그러면서.”
일전 그녀가 제 인생에 대해 털어놨을 때처럼 아무래도 좋을 듯한 말투였다.
하지만 같은 담담한 말투라도 그녀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훨씬 생생하게 엿볼 수 있는 담담함이었다.
“하지만 넌 그러지 못해. 날 의심하고, 경계하고, 감시하면서도 끝없이 고민하지.
그 의심이, 경계가, 감시가 정말로 타당한 일인지 우스우리만치 진지하게 고뇌하고 되짚어 봐. 어차피 얼마 가지 않아 헤어질 상대인데도 말이야.”
우스운 일이었다.
시우는 도로시를 그토록 경계하고 의심하고 있는데, 오히려 그녀에게선 신뢰를 받고 있었다니.
물론 그 신뢰는 시우의 물렁함에 대한 신뢰였겠지만 말이다.
도로시는 시우에게 손을 뻗어 슬며시 잡았다.
예상보다 훨씬 부드러운 손끝이 빙빙 손바닥을 간질인다.
“가령 내가 네 품에 안겨 무방비한 상태로 잠이 든다 해도. 넌 절대 날 헤치지 않겠지?”
“폐하가 화낼 테니까요.”
“역시 칭찬받는 걸 부끄러워하는구나. 하지만 아니야, 이 잠수함에 르뤼에가 없다 해도 넌 그러지 않을 거야.”
단언하는 듯한 말투에 반박을 꺼내려 했으나 그녀의 분석은 정확했다.
결국 퉁명스럽게 답할 수밖에.
“한 마디로 호구라는 말이죠?”
“응, 그 말대로.”
키득거리며 웃던 도로시는 조금 더 엉덩이를 가까이 붙여 앉으며 달짝지근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독초 같은 공적들 사이를 구르다 보면 말이야. 휴가의 마지막 정도는 그런 무해함에 안겨보고 싶어. 뭐, 너는 얼굴도 잘생겼고 몸도 좋으니 가능하면 섹스까지 해보고 싶지만~ 거기까지 해줄 것 같진 않으니까.”
“휴가의 마지막?”
“추가 베팅이야. 지금 날 안아준다면 내일 곧장 휴가를 마치고 사라져 줄게. 다시 알콩달콩한 공주님과의 신혼 생활로 돌아가면 된다는 거지.”
지금 안아주는 대가로 내일 사라진다라….
그 말은 굳이 그녀를 경계하거나 의심할 필요도 없어지고, 시련에의 도전도 정상화됨을 의미한다.
어찌 보면 살짝의 리스크를 담보로 얻는 가장 효율적인 안전이었다.
무엇보다 딱히 의도도 불손해 보이지 않으니….
“좋습니다.”
괜히 옆에 두고 스트레스를 키울 바에 한번 안는 게 낫다.
오늘 사우나에서도 갑자기 덮쳐오지 않았던가? 그걸 한 번 더 한다고 생각하면 될 뿐.
“이렇게 쉽게? 내가 그렇~게 사라졌으면 좋겠어?”
“네.”
자지러지게 웃는 도로시.
갑자기 기습하거나 하진 않겠지? 싶지만, 그 점에 대해서는 크게 걱정하진 않았다.
자율방어는 애매해도 신체 능력에 관해서는 이미 아득한 초인의 경지에 이르른 시우다.
더군다나 마력의 흐름을 볼 수 있기에 마법이 발동하는 전조를 육안으로 확인하고 대처할 수 있었다.
그래도 긴장을 유지한 채 팔을 벌리자 그녀가 몸을 기울여 왔다.
아무리 공적이니 뭐니해도 여자는 여자다.
이내 푹신하고 말캉한 가녀린 신체가 품 안에 그윽이 안긴다.
강하게 안으면 부드럽게 녹아버릴 듯 나긋한 몸매.
무엇보다 이 가슴.
흉악할 정도의 가슴이 꾹꾹 아랫배를 압박하는데 브라도 착용하지 않은 것인지 그 윤곽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하아~”
어정쩡하게 팔을 벌리고 있자 두 손이 허리를 감쌌고, 귀를 바짝 심장 부근에 붙여왔다.
꾸욱 강해지는 압박과 동시에 더해지는 가슴의 압박이 예상보다 훨씬훨씬 신경 쓰인다.
“계속 그렇게 있을 거야? 꼬옥~ 안아줘야지.”
뭐, 이제까지 의심한 값이라 치자.
팔을 그녀의 등 뒤로 둘러 마주 안았다.
생각보다도 작은 체구와 가녀린 어깨였다.
어쨌거나 신체의 밀착이란 상당한 친밀감을 불러오기 마련이다.
최초 뻣뻣했던 긴장이 한결 가시자 나른한 정적 속에 도로시의 만족스러운 콧소리만이 들렸다.
“좋네. 처음이야. 이렇게 남자 품에 안긴 건.”
낯간지러운 말과 함께 눈을 살포시 감고 완전히 체중을 기대는 도로시.
사람의 온기가 그리웠다는 양, 자장가를 불러주면 금방이라도 잠이 들 것처럼 편안한 얼굴이다.
“…….”
형용할 수 없는 기묘한 기분이 들었다.
이런 비슷한 감정을 느꼈던 때를 기억하고 있다.
파올라 소치틀.
비겁의 마녀라고 불렀던 그녀를 처치하고 나서던 길이었지.
제자를 살리기 위해 공적이 되길 자처했던 그녀는 비록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은 흉악했으나 ‘악인’이라고 단정 지어 말할 수 없는 인물이었다.
당장 샤론이나, 아멜리아나, 스승님 혹은 쌍둥이 등등.
주변의 소중한 사람이 시우의 실수로 죽게 된다면.
그리고 인외비도의 길을 걷는 대가로 그것을 만회할 수 있다면 과연 파올라와 다른 길을 걸었을지 장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비슷한 이유로 만약 자신이 낙인을 물려받자마자 공적이 되었다면, 에아나 비앙카 같은 썅년들 사이에서 뒹굴어야 했다면 과연 얼마나 깨끗하게 살 수 있는지도 확답할 수 없었다.
‘테러 단체나 카르텔에 무기를 파는 것을 그만두면 안 될까요?’
저도 모르게 나올 뻔한 말을 황급히 주워담았다.
도로시를 공적을 바라보는 눈이 아닌, 어쭙잖은 연민의 눈으로 바라보고 있기에 드는 오지랖이다.
솔직히 그녀가 나쁜 사람이 아니었으면 좋겠다고 바라고 있다.
그러나 시우는 아무것도 해줄 수 없고, 책임질 방법 또한 없다.
헛웃음이 나올 것 같은 알량한 정의감을 자조하는 사이.
잠이 든 것처럼 곤히 눈을 감은 도로시의 한쪽 눈이 슬쩍 떠진다.
꺼림찍한 마음에 시선을 피하는 시우.
“가슴 정도는 주물러도 모른 척해줄게.”
“됐습니다.”
그 농담을 마지막으로 도로시는 시우에게 안겨 새근새근 잠이 들었다.
정말로 편안하다는 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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