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녀의도시-569화 (569/917)

#569

1.

송골송골 땀이 흘렀다.

더위라는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고온.

크게 숨을 쉬는 것만으로 폐가 후끈하게 달아오를 것 같은 사우나의 열기 속에 시우는 우습게도 식은땀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흐음….”

르뤼에가 빤히 구슬땀이 흐르는 시우의 얼굴을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도로시 쪽으로 시선이 가는지의 여부를 감시하고 있음은 말할 것도 없다.

꼴사나운 질투임은 르뤼에 본인도 알고 있었다.

이만한 매력을 지닌 자신이 고작 남자 한 명을 상대로 누구 가슴을 쳐다봤느니 마느니 하며 땡깡 부리는건 참 폼이 나지 않는 치태다.

게다가 르뤼에가 견제해야 하는 상대가 누구인가?

원 없이 적의를 표출하며 깔아뭉갤 수 있는 게헨나의 여우들과는 달리 절친한 친구이자 멋진 선물을 여러 번 가져다준 도로시다.

이미 그를 누켈라비 왕국의 국서라고 소개했다.

더하여 그가 얼마나 자신의 매력에 흠뻑 빠져있는지 설레발치듯 자랑해 둔 가운데 ‘딴 여자 보지 말거라!!’라는 둥 견제하는 모습을 대놓고 보여주기는 몹시 민망했던 것이다.

따라서 르뤼에는 시우에게 남몰래 눈치를 주면서도 도로시가 이를 눈치채지 못하도록 주의하고 있었다.

물론 눈치 빠른 도로시는 르뤼에의 심사를 훤히 꿰뚫어보고 있었지만.

아무튼, 시우에게 르뤼에의 철벽마킹은 실로 진땀 나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단순히 그녀의 수영복 차림이 보고 싶다거나, 그 유혹을 이겨내는 게 고된 게 아니다.

세 뼘만 더 좁았더라도 세 사람이 무릎을 따닥따닥 붙이고 앉았어야 했을 비좁은 사우나.

애초에 이렇게 좁은 데 한 번도 특정 방향을 흘겨보지 않는 것은 몹시 어려운 일이었으니까.

더욱이 분홍 코끼리를 떠올리지 말라는 말을 들으면 자꾸 떠오르는 것처럼, 괜히 르뤼에가 찰싹 달라붙어 마킹을 하니 도리어 도로시 쪽으로 눈길이 가려 하는 것이다.

“엄~청 뜨겁긴 뜨겁네요. 저는 조금 씻고 올게요.”

가장 안쪽에 있던 도로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우가 르뤼에와 마주 본 채 앉아 있었으니 도로시가 나가기 위해선 자연스레 두 사람의 앞으로 지나가야 했다.

앞쪽이든 뒤쪽이든 시우의 눈에 자연스럽게 도로시의 헐벗은 몸이 드러난다는 의미.

그 점을 깨달은 르뤼에가 시우에게 연신 눈을 깜빡이며 눈짓했다.

딱히 도로시를 욕망 가득한 시선으로 바라본 적 없기에 억울하긴 했으나 르뤼에의 장단에 맞춰주었다.

그러나 이 상황이 재밌기 그지 없는 도로시는 전혀 시우에게 협력해줄 생각이 없는 모양이다.

“어머머~”

코 앞에서 도로시가 지나가는 기척이 느껴지는가 싶더니.

갑자기 전신에 부드러운 감각이 안겼다.

도저히 헷갈릴 수 없는 여체의 푹신함이 살갗 위에 비벼진다.

시우의 가슴팍에 맞닿은 것은 단순히 놓여있기만 해도 중량감이 느껴지는 묵직한 젖가슴.

보기 좋게 살집이 오른 허벅지가 시우의 허벅지 사이를 파고들고, 두 팔은 마치 애인에게 교태를 부리며 안기듯 허리를 둘러싼다.

시우는 눈을 뜨자마자 사태를 파악하고 숨을 멈췄다.

안 그래도 조금 전부터 코로 호흡하지 않게 주의는 하고 있었기에 체질로 인한 불상사는 없었다.

그보다, 도로시도 시우도 10분가량 사우나를 즐겼기에 흠뻑 땀에 젖은 상태.

끈적한 땀이 배어나 실내 공기에 비교하면 서늘하게까지 느껴지는 피부의 밀착은, 흡사 격렬한 성교 도중 잠깐 서로 부둥켜안고 눈을 마주치는 순간을 연상시켰다.

덮쳐지듯, 혹은 포개지듯 우연히 넘어졌다기에는 의도를 갖고 덮치지 않고서야 나오기 힘든 자세.

그리고 샐쭉하게 웃는 눈매를 보니 이건 도로시의 수작일 것이다.

뭘 노리고 있는지는 명백하다.

“엑!”

맞은 편에서 들려오는 르뤼에의 만화 같은 비명.

도로시는 그것은 신경도 쓰지 않는다는 듯이 빤히 시우의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욕망을 측량하는 듯한, 그러면서도 장난기 가득한 시선.

“실례했어. 조~금 어지러워서.”

“구라인거 아니까. 후딱 일어나시죠.”

“구라라니, 나는 진실 밖에 말하지 못하는 입을 가졌는 걸?”

르뤼에가 펄펄 화를 낼 것이 당연하니 어서 도로시를 치우려 했으나 그녀가 워낙 뭉그적거렸다.

그 탓에 르뤼에가 성큼성큼 다가오는 쪽이 빨랐다.

아마도 이 경우도 불호령이 떨어지는 대상은 시우가 되겠지.

또 이 한심한 수작에 놀아나는구나 싶어 한숨을 숨겼다.

“괜찮느냐?”

하지만 르뤼에가 내뱉은 것은 치기 어린 질투로 말미암은 짜증이 아니었다.

도로시를 시우에게서 억지로 떼어놓는다거나 시우에게 투닥투닥 주먹질하지도 않았다.

그저 도로시의 어깨 밑으로 팔을 넣어 일으켰을 뿐이다.

“오랜만에 너무 오래 있다 보면 가끔 현기증이 나기도 하는 도다. 어서 가서 쉬도록 하여라.”

걱정 가득한 목소리로 도로시를 부축하는 르뤼에.

아무리 시우가 도로시에게 관심을 보이는 것이 싫고 은근히 질투심을 느낀다 해도 친구가 쓰러진 시점에선 걱정하는 마음이 앞서는 것이다.

설령 사우나를 즐기기 위해 자율방어를 해제해두었다 한들 마녀의 몸이 이 정도 열기에 큰 데미지를 받을 일은 없을 텐데도 말이다.

“…….”

그 순간 시우는 언제나 여유롭기 짝이 없던 도로시의 표정이 알 수 없는 감정으로 겹겹이 덮이는 것을 보았다.

너무도 얽히고설켜 있어서 겹쳐진 글자처럼 읽어낼 수 없는 감정을 최대한 가까운 한마디로 축약하자면.

동요.

“어머~ 감사해요 여왕님.”

그러나 언제 그랬냐는 듯 새하얀 미소를 가면처럼 쓴 도로시는 기꺼이 르뤼에의 부축에 몸을 맡겼다.

“이까짓게 무슨 감사할 일이더냐. 어서어서, 시원한 공기를 쐬고 물도 마시면 괜찮아질 것이니라.”

2.

한바탕 소동이 끝나고 시원한 우유를 나눠마신 세 사람은 르뤼에를 뒤따랐다.

사실 시우가 막 아쿨라에 타게 되었던 시절의 추체험이었다.

르뤼에가 배 안의 이런저런 시절을 자랑하며 돌아다니는 것을 졸졸 따라다녔을 뿐이라는 의미다.

도로시의 반응으로 미루어보아 가장 최근 노획품으로 설치한 영화관을 제외하면 딱히 달라진 부분은 없어 보이지만,

시우도 도로시도 딱히 지루한 기색을 내비치지는 않았다.

도로시의 경우 워낙에 본심을 읽기 힘들어 이유를 짐작키 어렵지만 시우는 신나하는 르뤼에만 봐도 흐뭇한 미소가 새겨졌기 때문이다.

함께 영화를 본 뒤엔 어젯밤과 마찬가지로 진탕 술을 마신 세 사람.

아마 도로시가 떠나는 날까지 이렇게 술을 마실 예정인가보다.

결국 녹아웃되기 직전까지 술을 진탕 퍼마신 르뤼에는 시우의 옆에 찰싹 붙어 몽롱한 눈빛으로 졸라왔다.

“슬슬 자야겠도다. 짐을 침소로 옮기도록 하거라.”

“네네.”

“도로시, 그대도 잘 자도록. 내일은 함께 심해 산책을 하는 것이 어떻겠느냐?”

“저는 여왕님과 함께라면 뭐든지 좋답니다~”

정답게 마지막 인사를 주고받은 르뤼에는 등에 업고 침실로 향한다.

취기로 달아오른 뜨거운 숨이 귓가를 간질이는 한편, 안주로 곁들인 달콤한 초콜릿 향이 은은히 풍겼다.

흐느적거리는 르뤼에를 침대에 앉혀두고 어차피 옷을 갈아입혀 달라 할 것이 뻔하니 잠옷을 준비한다.

“시우.”

그때 등 뒤에서 선명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물론 지금도 조금은 꼬부라져 있는 발음이었지만 제 발로 걷기 힘들 정도로 만취한 수준은 아닌, 한결 선명해진 음색이었다.

“네, 폐하.”

뒤를 돌아보자 침대에 걸터앉은 르뤼에가 눈을 끔뻑거리고 있다.

하긴 어제보다 훨씬 덜 마셨고 시간도 10시 정도로 잘 시간도 아닌데 어째 빠르게 피로를 호소한다 했다.

그 짧은 사이에 술이 순식간에 깼을 리는 없을 테니 애초에 술에 잔뜩 취했던 것이 연기였다는 말.

르뤼에는 꿈지럭꿈지럭 괜히 엉덩이를 시트에 비볐다.

이제껏 르뤼에와 침대에서 뒹군 것만 두자릿수다.

어울리지 않게 묘한 분위기를 잡는 그녀의 행동이 무엇을 암시하는지 정도는 훤히 꿰뚫고 있다.

“이리 와보거라.”

도로시가 허튼짓 못하게 감시도 해야 하지만, 어제 르뤼에가 불만을 품던 이유 중 하나가 ‘시련하기 전에는 먼저 하자고 해주지 않아서’도 있으니….

마냥 무시하고 나설 수도 없었다.

시우는 잠자코 르뤼에의 앞에 슬쩍 한쪽 무릎을 꿇고 눈높이를 맞추었다.

“오늘 그대가 무엇을 잘못했는지는 알고 있겠지?”

언젠가 받아본 적 있는 것 같은 질문.

그때는 잘못된 답변으로 르뤼에를 머리끝까지 화나게 하고 말았던 질문이기도 했으나, 지금은 분위기가 조금 달랐다.

책망 자체가 어쩐지 핑계에 불과한 듯한, 어떤 답변도 용서받을 것 같은 편안한 분위기였다.

“모르겠습니다.”

“오늘 욕실에서 도로시의 몸을 핥듯이 바라보지 않았더냐.”

“…그 정도였나요?”

“그렇다. 욕망에 가득 차 있던 그대의 시선을 짐은 분명 보았느니라.”

르뤼에는 눈을 감고 과장되게 고개를 끄덕이며 입술을 뾰로통하게 내밀었다.

참 다양하게도 표정을 짓는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짐도 이해는 간다. 도로시의 젖가슴은 분명 규격 외이다. 여자의 가슴과 골반과 엉덩이에 환장하는 그대라면 충분히 유혹에 이끌릴 수도 있도다.”

“이끌린 적까지는 없는데요….”

분명 시선은 갔지만 성적인 무언가를 느끼기엔 그녀를 향한 경계심이 너무 컸다.

즉, 진실을 고했을 뿐이지만….

“쓰읍…!”

침을 쓰읍 삼키며 시우의 해명을 일소하는 르뤼에.

그래도 한 번의 변명은 귀담아들어 주는 그녀의 행동양상을 생각해 볼 때 역시 진지하게 화났기보다는 다른 목적이. 있다는 걸 다시 한 번 눈치챌 수 있었다.

“짐이 걱정하는 건 그대의 의지 문제가 아니니라. 오늘만 해도 보아라, 사우나에서 도로시가 넘어지는 바람에 그녀의 체취를 맡을 뻔하지 않았느냐? 그대가 발정이 나 버린 나머지 짐의 친우를 덮치게 된다면 들 낯이 없어지니라.”

그 점은 시우가 가장 조심하고 있는 부분이었다.

한편 쓰윽 눈동자만 위로 올려 눈치 보는 강아지처럼 흰자를 보이는 르뤼에.

“더군다나 요새 사흘간이나 내지 못했으니…. 그대도 욕정이 많이 쌓여있을 터.”

중요한 이야기를 꺼내듯 한 호흡을 삼키더니 말을 잇는다.

“손님에게 결례를 범하지 않도록, 대신 짐의 몸으로 그대의 욕정을 품어주겠노라.”

거창한 말이 이것저것 붙었지만….

본심은 일목요연했다.

시우는 쓴웃음을 지으며 몸을 숙였다.

별 수 없이 르뤼에의 어리광에 조금 더 어울려줘야 할 것 같다.

기다렸다는 듯이 안기며 입술을 부딪쳐오는 르뤼에.

아까 향기로만 맡았던 쌉싸름한 초콜릿 향이 혀에 얽혀온다.

“츄웁… 츄유웁….”

기세등등하던 모습과는 달리 마치 애무하듯 입안에 들어온 혀를 순종적으로 빨아대는 르뤼에.

옷을 한 꺼풀씩 벗겨나갈 때마다 움찔움찔 떨리는 어깨가 사랑스럽다.

아무리 콧대 높은 여왕님이라도 침대 위만 올라오면 이토록 귀여워지니 시우도 도저히 미워할 수가 없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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