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8
1.
“기사아아앙!”
다음날 숙취 따위는 개무시한 채 기운차게 일어난 르뤼에.
영체의 어마어마한 회복력도 물론 한몫했겠으나 르뤼에의 경우 딱히 마녀가 아니라도 지금처럼 씩씩하게 일어나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오늘은 할 일이 아주! 아주! 아주! 많도다!”
“변함없이 목청이 좋으시네요.”
시우는 쓴웃음을 지으며 밤새 탐닉하던 마법 연구 자료를 한곳에 모아 정리했다.
어제 새벽까지 도로시와 술잔을 기울인 이후, 소파에서 그녀를 감시하며 끼적였던 자료다.
태평하게 누워서 단잠에 빠진 상대 앞에서 줄곧 앉아있기만 한 것을 ‘감시’라고 말하는 게 맞는 말인가 싶긴 하지만 일단은 그렇다는 이야기.
르뤼에는 그런 시우를 보고 고개를 기울였다.
“응…? 여태 어디에 있다 왔느냐?”
저 샤우팅도 시우가 당연히 옆에 있으리라 생각하고 한 듯하다.
“응접실에 계속 있었습니다. 도로시 님이랑 대화를 하느라요.”
“도로시랑?”
의아해 하는 듯하더니 사탕을 발견한 어린애처럼 화색이 된 르뤼에는 곧장 침대에서 폴짝 뛰어내려 시우의 손을 잡고 몇 번이고 흔들었다.
“잘했도다. 어떠냐? 막상 이야기하니 잘 통하지 않느냐?”
“네, 뭐. 그렇습니다.”
사실 밤새 잠을 자지 않은 이유도, 당분간 시련에 가지 않은 이유도 도로시를 믿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친구와 친구가 친하게 지내면 좋은 일이다’ 라며 기뻐하는데 구태여 찬물을 끼얹을 필요가 있을까 싶다.
어차피 도로시는 일주일간 휴가가 끝나면 돌아가겠다고 말하기도 했고.
그때까지는 안으로는 감시, 겉으로는 적당히 어울려주며 르뤼에를 기쁘게 하면 되는 일 아니겠는가?
“자, 그럼 식사부터 하자꾸나.”
어젯밤 술에 취했던 르뤼에는 생김새와는 썩 어울리지 않게 마치 어린애처럼 어리광을 부렸다.
르뤼에가 어리광부리는 일이 하루 이틀은 아니나 그 수위가 꽤 남사스럽다는 게 맘에 걸렸는데….
행동에 허물이 없는 걸 보니 어제의 기억은 다행히도 술의 신이 거두어 간 모양이다.
“옷부터 갈아입으셔야죠.”
평소보다 두 배는 신바람 난 르뤼에가 잠옷차림으로 식당으로 달려가기 전.
그녀를 만류하면서 기운찬 아침을 시작하게 되었다.
2.
식사 자리에서 르뤼에가 꺼낸 제안은 충분히 예상 가능했던 부류였다.
그러나 다른 곳에 마음이 쏠려있던 상황에선 전혀 떠올리지 못하던 의표이기도 했다.
“사우나요? 너~무 좋죠.”
바로 옆에서 적당히 호들갑을 떠는 도로시의 호응이 들려온다.
한편 시우는 떨떠름했다.
“굳이...요?”
그야말로 굳이 다.
핀란드 전통 사우나를 이 바다 심처에 그대로 구현해낸 욕실은 시우에게도 만족스러운 휴식공간이었다.
처음 르뤼에와 사우나를 체험한 이후 종종 들렀으며 그때마다 르뤼에도 함께였다.
어쨌거나 저쨌거나 진득한 땀이 흐르는 혹은 물에 젖은 난초처럼 싱그러운 살갗을 바로 옆에서 볼 수 있는 공간이다.
당연하다는 듯 함께 수영복을 입고 들어섰지만 돌아 나올 땐 알몸이었던 때도 적지 않았다.
르뤼에만이라면 이제 와서 비키니 차림을 보거나 해도 딱히 상관이 없으나….
이 경우 도로시의 비키니차림까지 봐야 한다는 것이 문제였다.
고집을 부리면 충분히 열외할 수 있겠지.
그러나 시우는 아직 도로시를 충분히 신용하지 못한다.
아마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못하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다.
그런 상황에서 단둘이 시간을 보내게 하는 것은 가능한 피하고 싶었다.
‘에이 설마’라고 대강 넘어가고 싶어도 안일함의 대가가 너무 크다 보니 마냥 외면할 수 없었다.
도로시는 티가 나지 않을 정도로 재빠르게 시우를 훑더니 만연의 미소를 지으며 맞붙인 손바닥을 볼 옆에 올렸다.
“마침 수영복도 챙겨왔는데~ 셋이서 함께 놀면 재미나겠어요.”
이 상황이 퍽 재미있는 듯하다.
“문제라도 있느냐?”
“…아뇨, 없습니다. 저도 준비하지요.”
마음가짐을 다시 잡았다.
끽해야 수영복이다.
이런 말 하긴 좀 그렇지만 여태껏 무수히 많은 알몸을 섭렵해오지 않았던가?
고작해야 수영복 차림으로 사우나를 즐기는 것에 무얼 벌벌 떨고 있던 건지….
시우는 제 섣부른 걱정에 피식 코웃음을 쳤다.
아무래도 도로시가 선내에 발을 들인 이후에 신경과민이었던 모양이다.
식사자리에서 해산해 각자 옷을 갈아입고 욕실에서 재집결했을 때.
시우는 자신의 불안함이 이성보다는 본능적 직감에 의한 것이었으며, 또 그것이 생각보다 정확한 위기감지 능력이었음을 자각했다.
“어머어머, 이거 참 오랜만이네요. 여왕님 저희 예전에도 꽤~나 자주 했었죠? 오래 참기 내기.”
항상 둘밖에 이용한 적 없던 욕실에 이형의 존재가 떡하니 섹시한 도발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매끈한 겨드랑이를 훤히 드러내고 가슴을 강조하는 한편 요염하게 엉덩이를 뺀 자세다.
허리께에서 흔들리는 잿빛 머리카락은, 칙칙한 잿빛이라기보다는 은발과 슬쩍 섞여 요염하게 빛났다.
가볍게 170cm를 넘을 것 같은 키는 시우보다야 머리 반 개 작지만, 여자로서는 전혀 작지 않은 신장이다.
저런 가슴을 지니고 저렇게 가느다랄 수 있을까 싶은 허리와 유연한 곡선을 그리며 이어지는 순산형 골반은 극히 비현실적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남자의 시선을 강하게 잡아끄는 것은 키와 골반뿐이 아니었다.
가슴.
수녀복으로도 커버가 되지 않는.
과일에 비유하자면 멜론만 한 가슴이 그 풍만함을 적나라하게 과시하고 있다.
아무리 영체라도 저 정도 중량을 완벽한 물방울 형태로 지탱할 순 없는지 농익은 과실처럼 드리운 가슴을, 노출도가 굉장히 높은 모노키니가 지탱한다.
해변가를 지나다니면 열이면 열 지나가던 남자를 뒤돌아보게 할 미드의 위용엔 젖탱이라고 불려 마땅함 직한 천박함과 모성의 상징이라 칭해져야 할 거룩함이 혼재해있었다.
“어….”
간신히 둘러싼 긴장감을 단숨에 무장 해제하는 여자의 무기.
‘난 가슴 크기는 상관없어~’라고 말하는 남자조차 한 번쯤 혹하게 하는 사이즈.
시우도 멍청하게 입을 벌린 채 홀린 듯이 바라보고 말았다.
10초 만에 의식을 되찾은 것도 초인적인 의지에 가까웠다.
“…….”
그 옆에 서서 시우의 반응을 본 르뤼에의 눈동자가 점처럼 작아져 있는 것이 보인다.
제자리에서 꽁꽁 굳어버린 르뤼에는 휙휙 부산스럽게 고개를 돌리며 시우의 얼굴과 도로시의 가슴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자신의 사우나 제안이 자충수였음을 깨닫게 된 르뤼에.
“먼저 가볍게 씻을까요?”
느긋하게 발걸음을 뗀 도로시가 보란 듯이 욕조에서 따뜻한 물을 몸에 끼얹자 물줄기가 흡사 폭포처럼 가슴을 타고 흐른다.
“…….”
아직 르뤼에가 견습마녀였던 시절에도 도로시와 함께 사우나를 즐긴 적이 있었다.
그때는 지금처럼 수영복을 입은 것도 아니고 알몸이었다.
그러나 도로시의 커다란 가슴을 보면서 딱히 선망이나 동경을 품은 적은 없다.
기껏 품은 감상이라야 ‘어깨가 아프겠군’ 정도였다.
허나 그건 르뤼에가 남자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으며 관심이 없던 시절의 이야기다.
이제 르뤼에는 남자라는 생물이 얼마나 가슴을 좋아하는지는 익히 알고 있다.
당장 시우만 해도 그렇지 않은가?
함께 침대에서 뒹굴 때 가슴을 꽉 움켜쥔 채 사정하는가 하면, 엎드린 자세에서 앞으로 팔을 뻗어 과실처럼 드리운 젖가슴을 쪼물거릴 때도 있다.
키스에 이어 애무를 시작할 때면 으레 약속이라도 한 듯이 젖꼭지를 아기처럼 빨아댔고, 위에서 움직일 때도 엉덩이 아니면 가슴으로 손이 가던 시우다.
당연히 그의 시선과 반응이 곱게 보일 리가 없다.
르뤼에는 시우에게 쿵쾅거리며 걸어갔다.
놓치지 않았다.
시우가 사우나에 발을 들이고 도로시를 발견하는 순간 단단히 얼이 빠지는 것을.
“그 흐물거리는 얼굴은 무어냐. 무어냐. 무어냐.”
시우의 발등을 꾹꾹 밟으며 조곤조곤 속삭이는 르뤼에.
무서울 정도로 낮은 목소리였고 눈동자는 여전히 점처럼 쪼그라들어 있었다.
“짐의 가슴은 성에 차지 않는다는 것이냐? 그 음탕하기 짝이 없는 시선 처리는 무엇이더냐.
행여 도로시에게 들릴까 봐 목소리를 한껏 죽인 채 시우를 책망하는 르뤼에.
시우의 행동이 친구에게 실례되어서라기보다는 꼴사나운 질투를 들키고 싶지 않기 때문이었다.
“아니, 아니, 폐하.”
필경 도로시는 이런 아수라장을 원하고 있었으리라.
아까부터 혼나는 시우를 힐끗거리며 묘한 웃음을 짓고 있으니.
“그러다가 아주 나중에는 코를 파묻고 쭙쭙 빨겠더구나. 짐의 국서가 되어서 다른 연인도 포기하기 어렵고, 그 와중에 짐의 친우에게도 눈독을 들이다니. 짐은 그대가 사람인지 발정 난 짐승인지 정녕 모르겠느니라.”
꾸욱 꾸욱.
딱히 아프지는 않았지만 계속 시우의 발을 밟는 르뤼에.
“명심하거라 짐이 분명 도로시와 가까이 지내라 말했으나 그건 어디까지나 친구와 친구 사이의 관계이니라.”
“아무렴요.”
“그렇다면 왜 그렇게 빤히 봤는지 해명하거라.”
남자의 본능이라고 답해봐야 화를 돋우기밖에 더할까.
그러나 아무 말이나 주워섬겨 변명하고 싶은데 그 외에 마땅히 명분 삼을 것이 없는 게 난감하다.
“해명하거라.”
곤란해하는 시우를 두고도 한 치의 양보 없이 허리에 손을 얹은 채 재촉하는 르뤼에.
이정도로 반응이 좋을 걸 알고 있었다면 시우가 들어서는 타이밍에 맞춰 모델처럼 포즈를 취하던 도로시의 심정도 이해가 간다.
그 고약한 장난과 성이 난 르뤼에 사이에 샌드위치가 된 입장에서는 곤란하기 짝이 없었지만.
“여왕님.”
얄궂게도 그 타이밍에 구명 튜브를 던져준 사람은 이 모든 난리 통을 만들어낸 장본인이었다.
“왜 그러느냐.”
그런 도로시의 뒷공작을 눈치채지 못한 르뤼에는 친구에게 화풀이하는 멋없는 짓은 하지 않았다.
다만 ‘두고 보자’라고 입 모양으로만 말한 채 뒤돌아설 뿐이었다.
“오랜만에 제가 씻겨 드릴게요.”
“짐 혼자서도 잘 씻을 수 있노라.”
“원래 여왕님은 시중이 필요한 법이랍니다. 자, 어서.”
안도의 숨을 들리지 않게 내쉬자 시선이 느껴졌다.
르뤼에의 머리를 차분하게 감겨주는 도로시의 장난기 어린 시선이었다.
“…….”
만약 저런 행동이 도로시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 나왔더라면 쓴웃음으로 응수해주었겠지.
남자라면 복에 겨울 해프닝에 내심 뿌듯했을지도 모른다.
르뤼에가 질투를 느낄 만큼이나 좋아해 주고 있다는 의미기도 했으니까.
하지만 일련의 발랄한 사건에도 가슴을 채우는 것은 안개비에 젖은 외투처럼 먹먹한 무거움 뿐이다.
어렵다.
여태껏 마주했던 모든 문제와 비교해도 가장 분간이 곤란했다.
그녀는 적일까?
아니면 르뤼에와 함께하는 이 순간만큼은 아군일까.
단순히 공적이라는 이유만으로 그녀의 모든 행동을 경계하는 것이 옳을까?
아니면 공적이기에 어떤 전후 관계에도 의혹을 지닌 채 주시해야 하는 걸까.
본디 타인을 믿는 것은 쉽지 않다.
다른 누군가를 불신을 한다하여 잃을 것은 없지만, 신용은 언제나 무언가를 저당 잡기 때문이다.
어제부터 줄곧 느끼는 거북한 감정 너머로 언제 화냈냐는 듯 도로시와 즐겁게 수다를 떠는 르뤼에의 모습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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