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녀의도시-566화 (566/917)

#566

1.

10년 만에 재회한 친구를 성대히 환영하기 위해 르뤼에는 화려한 연회를 열었다.

연회라고 해봤자 참가자는 르뤼에, 시우, 도로시 그 외 승조원 다수였지만 말이다.

아나스타샤 조리장이 요리솜씨를 십분 발휘한 결과 식당 테이블 위에는 온갖 산해진미가 상다리 부러지게 차려졌다.

르뤼에는 평소 아껴 마시던 귀한 위스키까지 아낌없이 진상하며 도로시의 입함을 반겼다.

그렇게 떠들썩한 분위기 속에 먹고 마시며 대화를 나누고, 식사를 물린 이후에는 다 함께 응접실에 모여 포커를 쳤다.

한껏 놀자판이 분위기였으나 시우의 관심은 도로시를 관찰하는 것에 있었다.

르뤼에를 바라보는 눈빛이나 말투, 대하는 태도를 유심히 살핀다면 아직 확신할 수 없는 그녀의 본 모습과 속내도 간파해낼 수 있으리라 믿었다.

하지만 역시 철두철미한 공적이라 해야 할까, 아니면 완전히 헛다리 짚은 채 오해하고 있기 때문일까.

별다른 특이사항은 없었다.

알게 된 것이라고 해봐야 그녀가 상당히 르뤼에에게 잘 어울려준다는 사실 하나뿐이었다.

“폐하, 정신 차리세요.”

“흐우으믕음…. 짐은 아직… 안 취했도다….”

신바람이 나서 술을 얼마나 마셔댔는지 곤드레만드레 된 르뤼에.

영체가 이 지경이 되려면 정말 술을 궤짝째로 마셔야 한다.

그리고 르뤼에는 그 어려운 일을 직접 해내었기에 제 발로 제대로 걷지도 못하고 시우에게 어정쩡하게 매달려 있었다.

소파에 앉아 손버릇처럼 카드를 뒤섞던 도로시가 그 모습을 보고 피식 웃었다.

“사이 좋네~ 도와줄까?”

“됐습니다. 폐하, 방으로 모시겠습니다.”

“으으음…. 오늘 밤엔… 침소로 오거라….”

잔뜩 꼬부라진 르뤼에의 술주정.

여느때 같았으면 그런갑다 하고 말았을 말이지만 하필이면 썩 불편한 관람객이 있다는 것이 문제였다.

떨떠름한 표정으로 힐끗 소파를 돌아보자 도로시가 흥미진진한 눈빛으로 두 손을 들어 올리며 너스레를 떨었다.

“방해 안 할게~”

대꾸할 가치를 느끼지 못하고 르뤼에를 반쯤 들춰 맨 채 침대로 향한 시우.

마녀가 된 이후에도 어지간하면 정기적인 수면에 들었는데 한동안 잠자는 건 물 건너갔다.

르뤼에와 시우가 함께 잠들었을 때 도로시가 무슨 짓을 할지 모르니 말이다.

같은 이유로 시련도 잠시 중단, 르뤼에가 시련에 도입하는 것도 잘 꼬드겨 말릴 예정이었다.

그렇다면 르뤼에를 눕혀 둔 채 도로시가 엄한 짓 하지 못하도록 감시하는 게 나머지 일정이겠지 싶다.

드넓은 침대 위에 그녀를 눕히고 일어서려는 순간 덥썩 르뤼에가 소매를 잡는다.

취기가 올라 벌게진 얼굴.

“옷…. 잠옷…. 잠옷….”

“갈아입으시려고요?”

“웅…웅….”

비몽사몽한 와중에도 잠옷만큼은 확실히 입고 자겠다는 의지를 보이는 여왕님.

옷장에서 그녀의 잠옷을 꺼내오자 곧장 어리광을 부린다.

“입혀주거라, 그대가.”

“알겠습니다. 만세 하세요. 만세.”

“만세에….”

흐느적흐느적 침대에 걸터앉아 팔을 쭉 들어 올리는 르뤼에.

윗옷을 벗기고 브래지어의 후크를 풀은 뒤 빼냈다.

와이어에 눌려있던 자국이 묘하게 그녀를 벗겨냈다는 실감을 더해줘 선정적이다.

부드럽게 출렁이는 가슴을 애써 외면한 채 잠옷 대용 원피스를 입혀주자 고개를 털며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정리하는 르뤼에.

바지까지 깔끔하게 벗기고 일어서려는데 다시 덥썩 소매를 잡아왔다.

“시우.”

“네, 폐하.”

“시우가, 눕혀주면 좋겠노라….”

르뤼에가 이 정도로 취한 것은 본 적 없었는데 아마 그녀의 주사는 굉장한 어리광쟁이가 되는 것인 모양이다.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하고 좌우로 몸을 기우뚱거리는 와중에도 목소리에서는 평소 볼 수 없는 애교가 철철 흐른다.

“네네, 눕혀 드릴게요.”

침대가 넓다고 꼭 편하기만 한 것은 아니라는 걸, 그녀의 침대에서 자며 깨달았다.

물론 아무리 잠버릇이 고약해도 절대 밖으로 떨어질 리 없다는 장점은 있지만, 중간에 누우려면 몇 번이나 데굴데굴 굴러야 하는 것이다.

결국 신발을 벗고 그녀를 번쩍 든 채 침대 중앙에 눕혀 주었다.

“이제 됐나요?”

“웅…. 좋느니라.”

“저는 조금 더 있다 자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주무시고 계세요.”

이제 정말 떠나려는데 르뤼에의 작은 손이 또다시 소매를 잡아왔다.

“시우.”

“네.”

“미안하도다.”

“네?”

신나게 먹고 마시다가 갑자기 무슨 일인가 싶어서 되묻자 중얼거리는 르뤼에.

“뺨…. 때려서 미안하니라…. 짐은, 그대를 믿는데, 그대는 짐을 믿지 못하는 듯하여 조바심이 났도다.”

“딱히 그런 건 아니었습니다.”

“알고 있도다. 짐이 멋대로 오해한 것이겠지.”

오늘 오전에 있던 일을 말하는 듯했다.

당연히 조금도 신경 쓰지 않고 있었기에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괜찮습니다. 별로 아프지도 않았어요.”

“그리고…. 그리고, 짐이 시련을 끝내지 않으면 안아주지 않는 듯하여서…. 매우 화가 난 상태였도다…. 어째서냐? 짐과 하는 것이 싫은 게냐? 아니면 짐이 빨리 시련을 끝내야 돌아갈 수 있으니 일부러 짐을 애태우는 것이냐?”

이제야 르뤼에가 왜 요새 뚱했던 것인지도 알아차렸다.

달리 의도는 없었고 타이밍이 좀 꼬였을 뿐이지만, 그녀가 어떻게 오해하고 있었는지도 조곤조곤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

“그런 건 아니었으니까 걱정 말고 주무셔요.”

그것만으로는 안 되겠다는 양 고개를 도리도리 젓더니 빙글 몸을 뒤집는 르뤼에.

손을 허리께에서 꼼지락거리는가 싶더니 원피스의 치맛자락을 훌렁 뒤집어 탱글탱글한 엉덩이를 내민다.

술기운이 볼기짝까지 번져 그녀의 두 뺨처럼 발그레하다.

“마음껏… 때려도 좋느니라.”

“예?”

“짐의 엉덩이를 마음껏 때리면서…. 그대가 하고 싶은 대로 해도 좋다고 하였다.”

설마 아까 농담으로 말한 것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인가?

시우라도 혹한 제안이었지만, 오늘은 상황이 너무 좋지 않다.

한시라도 빨리 혼자 선내에 남은 도로시를 감시하고 가능하다면 대화도 좀 더 나눠볼 심산이었으니.

“폐하, 죄송하지만 오늘은….”

어떤 변명을 해야 할지 고민하며 말을 꺼냈다.

하지만 끝까지 이야기할 필요는 없었다.

“쿠우…쿠우….”

르뤼에는 엉덩이를 발라당 깐 채 그대로 꿈나라로 떠나있었다.

옷을 정리하고 이불을 잘 덮어 준 뒤 다시 응접실로 발길을 돌렸다.

2.

“왔구나?”

도로시는 제집 안방처럼 편안한 자세로 소파에 누워 시우를 맞이했다.

그 짧은 사이에 뭔가 개수작을 할 것 같지는 않았다만 저 정도로 태평하니 도리어 의외다.

도톰한 입술 사이엔 하드보일드한 사상과 성격을 지닌 그녀와 썩 어울리는 시가가 물려있었다.

물론 수녀복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지만 말이다.

“생각보다 빨리 왔네. 몸은 좋은 것 같던데~ 아래쪽은 영 비실비실 한가 봐?”

이 역시 대꾸할 가치가 없기에 딱히 대답하진 않았다.

“제가 올 걸 알고 있었나요?”

“의심 많은 성격이니까~ 수상쩍은 공적을 감시하고 싶겠지. 마침 잘됐어. 나도 좀 더 마시고 싶었거든.”

맞은 편 소파에 앉자마자 테이블 위에 못 보던 물체가 놓여있다는 걸 발견한다.

크리스탈 와인 디캔터, 더 정확히는 그 안에 담긴 붉은 액체.

저 점성과 색상을 알아보지 못할 리 없다.

혈액이다.

게다가 그 안에는 마력수 따위와는 비교할 수 없는 아주 짙은 마력이 담겨 있었다.

단숨에 경계심이 맥스까지 치솟는다.

즐거워하는 르뤼에와 더불어 몇 시간은 도로시와 어울리긴 했으나 내적 친밀도나 신뢰도는 여전히 바닥에 가깝다.

그 와중에 병에 담긴 수상쩍은 혈액이라니.

“들켜버렸네.”

디켄터 안의 내용물보다 미소를 지어 보이는 도로시.

그러나 어쩐지 대놓고 그런 짓을 하는 그녀를 보는 순간 치솟았던 위기감이 감퇴한다.

언행은 물론 복장에서도 악취미적 성향이 드러나는 그녀라면 딱 봐도 수상쩍은 물건을 보란 듯이 꺼내놨을 가능성이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그녀는 시우가 돌아올 것을 기다리고 있다고 하지 않았던가?

도로시는 시우의 의심과 경계를 불쾌해하기는커녕 살살 자극하며 재미있어하는 듯했다.

“이건 뭡니까.”

“마녀의 피.”

“그걸 왜 꺼내두고 있는 거죠?”

도로시는 말로 설명하는 대신 직접 용례를 보여주었다.

여유로운 손짓으로 시가를 홀더에 올려놓더니 혈액이 담긴 디켄터의 유리 마개를 제거한다.

그리고 위스키가 절반쯤 담긴 온더록스 잔에 피를 뚝뚝 떨어뜨렸다.

본디 밝은 호박색을 띠고 있던 위스키가 석륫빛으로 변한다.

도로시는 아무런 주저 없이 그것으로 입술을 축였다.

참 비위 상하는 광경에 입술을 일그러뜨리자 도로시는 묘하게 풀린 눈으로 황홀하다는 듯한 숨을 뱉었다.

그 모양새가 꼭 마약이라도 한 것 같다.

이마저도 놀리는 것인지, 아니면 정말 뭔가 있는 건지.

애초에 마녀의 피라는 말을 들은 시점부터 꺼림칙함이 가시질 않는다.

그렇게 한참 동안 멍한 눈길로 허공을 바라보던 도로시의 눈동자에 생기가 돌아왔다.

“너도 마실래?”

“됐고, 설명이나 해주실래요?”

“여기까지 오는 길에 아는 마녀를 만났어. 조금 곤란해 보이길래~ 도와주는 대가로 헌혈을 받아왔지.”

“헌혈?”

죽이지는 않았다고 말하고 싶은 건지, 아니면 은유적인 표현인지 모르겠다.

“그 친구의 피는 아주 독특해서 술에 타 마시면 일시적인 저주에 걸려. 그러면 기분도 좋아지고~ 아주 예쁜 환각이 보이거든. 마치 만화경 같아.”

“…….”

실제로 환각제였다.

“평소에는 비싸게 굴어서 거~의 못 마시는데, 이만큼의 수확이라니 경사지.”

“죽이지는 않았다고 말하는 건가요?”

“죽이긴, 황금알을 낳는 거위배를 가르는 거잖아. 안 해~ 그런 비효율적인 짓은.”

실로 유쾌한 듯이 히죽히죽 웃음을 짓는 도로시.

전부터 느꼈는데 이 양반 뭔가 페리윙클 누님을 도덕적으로 잔뜩 꼬아 놓은 사람 같다.

철저하게 이득을 추구하는 사업가적 면모가 보인다고 해야 하나.

사람 놀리는 것을 인생의 낙으로 삼는다고 해야 하나.

“아무튼 모처럼 왔으니~ 술동무나 해주련?”

어차피 감시책을 도맡기도 했고, 정작 르뤼에의 등장 이후부턴 제대로 조사하지 못하기도 했다.

정보를 조금 더 털어내기 위해서라도 시답잖은 대화에 어울려주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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