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3
1.
“쩝….”
조용히 입맛을 다셨다.
최초 화색을 내비치던 르뤼에의 반응을 보아하니 예상대로 꽤 묵혀두었던 불만이었고, 그에 비해 잘못을 제대로 알고 사과했더라면 손쉽게 용서받을 수 있는 상황이었다.
“하…. 진짜 병신인가.”
사과를 듣고 기뻐하던 르뤼에의 표정과 진상을 알고 머리카락을 고슴도치처럼 삐쭉 세우며 열을 내던 표정이 번갈아 맴돈다.
물론 사실은 조금 다르지만, 르뤼에가 화내던 모습을 보면 씨알도 먹히지 않았을 것이다.
“차라리 왜 화났느냐고 물어보면 됐을 걸….”
아무튼 변함없는 사실은 많고 많은 선택지 중에 제일 병신같은 선택지를 골랐다는 것이다.
밤늦게 곤드레만드레 취해 들어온 남편에게 ‘집구석에 들어올 생각하지 마!’라고 불호령 하는 아내처럼, 잠수함 입국 금지를 선언한 르뤼에.
시련을 수행한 체력도 남지 않았고 언제 변덕을 부려 돌아올지 몰랐기 때문에 잠자코 테이블에 앉아 그녀를 기다렸다.
그러나 한 시간이 지나도, 두 시간이 지나도 르뤼에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바로 쫓아가야 했나?”
어쩌면 ‘아직까지 무엇을 하고 있는 게냐!’ 라며 씩씩거리고 있을지도 모르지.
그대로 남아 있어도 그녀를 찾아 사과해도 혼날 확률이 반반이라면 최소한 사과를 위한 모션이라도 취하는 것이 좋다.
만약 여기에 계속 남아있는 것이 정답이었다 해도 똑바로 사과한다면 순순히 받아줄 성격이니 말이다.
그렇게 잠수함에 다시 오른 시우.
여느때처럼 상부 관측대를 거쳐 함내로 돌아온 시우.
잠수함 전체가 르뤼에의 영역인 만큼 입함을 알아차렸을 것임에도 르뤼에의 그림자는 보이지 않았다.
다시 경우의 수는 두 가지.
정말 보고 싶지 않을 만큼 화가 났거나.
마중을 나오지는 않았지만 내심 찾아와주길 기다리고 있거나.
이 경우도 선택은 어렵지 않았다.
르뤼에라면 일단 만나러 왔다는 사실 자체를 양형 요소로 삼아줄 것이다.
꼭 그런 계산적인 생각이 아니라도 솔직하게 사과하고 싶기도 했고 말이다.
차례차례 함내를 뒤지던 시우는 우뚝 멈춰 섰다.
“그래서…! ……! ……! 땠느냐?”
어디선가에서 잔뜩 흥분한 듯한 르뤼에의 목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다.
그것도 분함을 이겨내지 못하고 혼자 중얼거리는 말이라기엔 너무도 즐거운 듯한 목소리였다.
음원지는 침몰선에서 건져낸 유구한 역사의 위스키를 즐길 수 있는 몰트 바.
승조원들이랑 대화라도 하고 있나?
의문을 품고 발을 들인 시우는 전혀 뜻밖에 광경을 볼 수 있었다.
수녀복을 입은 누군가가 인자한 미소를 지은 채 손짓 발짓을 더해 신나게 떠드는 르뤼에의 말동무가 되어주고 있던 것이다.
때마침 안대를 벗고 있던 시우는 즉각 그 수녀가 마녀라는 것을 알아보았다.
육감적인 몸매를 모두 가리지 못하는 펑퍼짐한 수녀복.
언뜻 평범하게 보이는 수녀복의 곳곳에서 강대한 마력의 여파를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등부터 양팔 아래로 길게 늘어진 소매까지.
하나의 거대한 십자가 형태를 이루며 상징체계를 구축하고 있다.
자기장처럼 흐르는 패턴으로 미루어 볼 때 아마도 방어형.
마력의 밀도를 볼 때 어지간한 마법은 상쇄할 수 있는 최고 성능의 아티펙트인 것 같았다.
굳이 거기까지 가지 않더라도 이런 잠수함에 들어올 수 있는 수녀라면 평범한 인간 여자는 아닐 터.
“…그래서 말이다….”
“어머~ 손님이 오셨네요~”
시우를 발견하고 나긋한 목소리와 함께 가벼운 묵례를 건네는 수녀.
흔들리는 잿빛의 머리와 더없이 독특한 은빛의 눈동자가 인상적이었다.
“마침 잘 왔도다.”
르뤼에는 잠깐 멈칫하더니 인심 썼다는 듯이 의자에서 폴짝 내려와 다가와 팔을 질질 끌고 수녀 앞에 세웠다.
“저분은…. 누구 신가요?”
“짐의 첫 번째 친구니라! 도로시, 이쪽은 아까 말했던 신시우. 누켈라비 왕국의… 노예다.”
소소한 복수인지 하루아침에 국서에서 노예로 강등됐다.
금방 복직할 것 같으니 큰 문제는 없지만, 사실 시우는 이런 시시한 농담을 되새길 여유가 없었다.
그동안 하도 험한 일을 겪어서 그런가?
아니면 생사를 넘나든 경험이 말해주는 본능의 경종일까?
수녀라기엔 지나치게 육감적이며, 아름다운 마녀의 앞에 서자마자 피부에 끈적끈적하게 스며드는 거부감을 느꼈다.
그것은 화려한 버섯을 보았을 때, 입을 한껏 벌린 육식 동물을 보았을 때, 본능적으로 느끼는 감정과 같다.
겉으로는 티를 내지 않았지만, 언제든 전투에 돌입할 수 있게 촉각을 곤두세운다.
“…….”
“…….”
인사를 하지 않은 채 서로 묘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두 사람과 그 사이에서 고개를 갸웃거리는 르뤼에.
침묵을 먼저 허물며 인사를 건네온 것은 도로시 쪽이었다.
“안녕하세요, 저는 도로시 사하퀴엘. 구도의 마녀라고 불리고 있어요. 여왕님의 국서를 뵙게 되어 영광이에요.”
“…신시우라고 합니다. 마녀 명은 달리 없습니다.”
“어머나~ 짐작대로 요새 이름을 날리시는 남자 마녀시군요. 잘 부탁해요~”
손을 뻗어 악수를 청하는 도로시.
이걸 잡아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고 있을 때 르뤼에가 옆구리를 쿡쿡 찌르며 눈치를 주었다.
마지 못해 부드러운 손을 가볍게 잡고 두어 번 흔든 뒤 놓았다.
2.
불편한 첫 인사 이후엔 거북함이 안주인 술자리가 재개되었다.
르뤼에나 도로시의 반응을 보면 이 자리에서 불편한 것은 시우 혼자인듯하지만.
“아직 어색한 듯하니 소개해주겠노라. 도로시는 짐의 스승의 친우이자 현세에서 아주 잘 나가는 무기상이도다. 이 아쿨라도 도로시가 구해다 준 것이니라.”
“그렇군요….”
당장 깽판을 칠 생각도, 명분도 없다.
고작 느낌이 좋지 않다는 이유만으로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초치기엔 도로시는 르뤼에의 손님이자 친구였다.
어쩌면 과민반응이자 헛다리일지도 모르는 노릇이다.
“혹시 게헨나에 머무시나요?”
따라서 시우는 자연스럽게 도로시에게 질문을 던졌다.
무엇보다 절대적인 정보량이 너무 부족했기에, 대화를 통해 이 뜬금없는 손님의 정체를 파악해야 했다.
시우의 질문에 대신 눈살을 찌푸린 것은 도로시가 아닌 르뤼에였다.
상당히 언짢은 듯한 모습.
질문의 의도가 무엇인지 단박에 알아차린 기색이었다.
“그게 중요한 일이더냐?”
하지만 도로시는 하늘을 우러러 부끄러움 없다는 듯 늘어진 눈꼬리를 휘며 답했다.
“추방자, 더 정확히 말하자면~ 공적이겠네요.”
너무나도 태연한 반응에 도리어 헷갈리던 찰나, 도로시는 특유의 나긋나긋한 말투로 설명을 이어나갔다.
“하지만 선대의 악행으로 받은 죄과가 연좌되었을 뿐, 지금은 소소한 사업체만 운영하면서 조용히 지내고 있답니다~ 그렇게 무서워할 것 없어요.”
“사업체라면?”
“소소하게 무기 밀매와 중개업을 하고 있답니다. 주로 쿠데타 정권이나 테러리스트, 카르텔이 주요 고객이에요.”
“자랑스레 말할 일은 아닌 것 같은데요.”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만 된다면 팔지 못할 것이 없다지만 하필이면 무기상이라.
어제 팔아넘긴 기관총과 총알이 오늘 당장 사람을 죽여대고 있다는 사실을 안다면 평범한 신경 줄로는 하지 못할 짓이다.
적어도 시우는 그랬다.
그런 의미에서 지극히 공적다운 사업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런 말 하지 마세요. 제 고객은 현금화가 불편한 다이아몬드로 대량의 무기를 확보할 수 있어서 좋고, 저는 창고에서 녹슬어가는 고철 더미를 다이아몬드로 바꿀 수 있어서 좋고. 이런 게 건전한 상생 관계 아니겠어요?”
“…글쎄요.”
“제가 판매한 무기보다 담배가 죽이는 사람이 훨~씬 많을 텐데. 혹시 신시우 씨는~ 담배회사 사장도 싫어하나요?”
“말장난하자는 건 아니었습니다.”
말꼬리를 잡고 늘어지는 것을 정중히 쳐냈다.
말하는 것을 듣자하니 비지니스 정신이 투철한 죽음의 상인 자체였다.
그런 주제에 수녀복을 입고 있다니 더더욱 악취미로 느껴졌다.
아마도 그녀의 자성 마법과 관련된 것이겠지만 말이다.
그녀의 사업과 꾸밈새는 아무래도 좋다 치고 의문이 한둘이 아니다.
심해의 마녀는 추방자이자 옛 마녀다.
공적과 추방자가 교류를 나누는 것은 그리 드문 일도 아니기에 선대 누켈라비와 도로시 사이의 연줄은 썩 어색하지 않다.
하지만 르뤼에가 시련을 끝내기 전까지 물 위로도 나가지 못하게 신신당부했던 선대 누켈라비다.
갓 계승 받았다 해도 무려 23위 계가 되는 르뤼에에게 여러 안전장치를 채울 만큼 신중한 인물이라는 의미.
그런 선대 누켈라비가 부주의하게 계승된 지 얼마 되지 않은 르뤼에를, ‘공적’이 만나게 한다?
정말 가까운 친구 사이라 믿었던 것일까?
“여기는 어떤 일로 오게 되셨나요?”
좋지 않은 목적이 있다면 곧이곧대로 말해주지 않겠지.
하지만 과정을 듣는 것만으로도 도움이 될 것이다.
의심에서 비롯한 질문은 자연스레 취조와 비슷했고, 르뤼에는 그것이 거슬렸던 모양이다.
시우의 팔을 휙 잡아끌며 만류한다.
“신시우! 아까부터 왜 그러느냐! 그녀는 짐의 친우이니라!”
“아니에요, 여왕님. 딱히 특별한 반응도 아니랍니다.”
“어서 무례한 언행에 대해 사과하거라!”
시우는 입을 굳게 다물었다.
공적에게 갖는 거부감은 단순히 선민의식이나 차별의식에서 비롯한 것이 아니었다.
비앙카 벨릴리도, 에아 사달멜리크도, 파올라 소치틀도.
지금껏 시우가 만났던 공적은 죄다 어딘가 머리가 이상한 여자들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그나마 동정의 여지라도 있던 비겁의 마녀와 다르게 에아와 비앙카는 광기 어린 사디스트였으며.
목적을 위해선 수단을 가리지 않는 정신병자였다.
르뤼에의 친구라는 이유만으로 믿으라는 건 무리한 주문이고 어리석은 주문이다.
“사과하면 도로시도 기꺼이 용서해 줄 것이며, 짐 역시 어전에서 행패를 부린 그대의 잘못을 문제 삼지 않겠노라.”
하지만 시우는 입을 열지 않았다.
그저 맞은 편에 앉은 도로시의 얼굴을 뚫어지듯 바라보았다.
그녀가 어떤 표정을 지으며 이 상황을 지켜볼지 관찰하기 위해서.
“따라오너라.”
관찰은 결국 아무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참다못한 르뤼에가 시우를 끌고 바 밖으로 나올 때까지.
도로시는 조금의 흠결도 없는 자애로운 미소를 띄운 채 시우를 바라보기만 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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