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2
1.
누구라도 한번 쯤은 들어 봤을 유명한 격언이 있다.
아는 만큼 보인다.
본디 지식이란 인생의 픽셀과 같아서 촘촘하게 밀도를 높일 수록 세상의 해상도가 달라지기 마련이다.
그리고 이 진리와 같은 격언은 감정의 영역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요컨데 비슷한 일이라고 하더라고, 얼마나 다채로운 감정의 파렛트를 지녔느냐에 따라 받아들이는 것이 다르다는 의미다.
좋고 나쁘고를 떠나서, 르뤼에는 본디 굉장히 단순하고 직선적인 성격이었다.
대인관계가 지극히 협소하며 오랜 세월 혼자서만 시간을 보낸 만큼 감정의 색채가 단조로웠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거기에 스승인 샬리트 누켈라비의 선민의식 주입까지 더해져 ‘내가 제일 잘 나가’ 의식으로 뚤뚤 뭉친 르뤼에는 싫은 일이 있으면 즉각 티를 내고, 좋은 일이 생기면 웃으며, 화가 나는 일이 생기면 화냈다.
다시 말해 지금처럼 기분이 나쁜 것을 며칠 동안 숨기며 그가 알아주기를 바란 일도 없었으며, 정확히 말로 설명하기 힘든 복잡 다변한 싫은 감정에 신음할 일도 없었다.
또한 그의 잘못 자체보다 그 잘못을 얼렁뚱땅 사과로 덮어내려는 태도에 더더욱 화가 날 일도 없었을 것이다.
“저번에도 그러더니 이번에도, 짐을 아주 핫바지로 보는 도다.”
시련의 방을 나와 혼자 씩씩거리며 아쿨라로 돌아온 르뤼에.
그녀가 이토록 뿔이 난 이유를 설명하려면 조금 시간을 되돌려야 한다.
정확히 일주일 전.
신시우의 암여우들에게 멋진 선전포고를 한 시점까지 르뤼에는 무척 기분이 좋았다.
다시 곱씹어봐도 흠잡을 곳 없는 선전포고였기 때문이다.
그 이후로도 르뤼에는 행복에 겨운 나날을 보냈다.
시련에 진심으로 몰두하는 것도 물론 좋았지만, 그것보다 좋은 것은 시련이 끝난 뒤 시우와 함께 꽁냥거릴 수 있었다는 점이다.
그것도 밀당이니 뭐니 눈치를 볼 것도 없이, 아주 합법적으로 말이다.
어떨 땐 격렬할 때도 있었고, 어떨 땐 끈적끈적할 때도 있었고, 또 어떨 땐 너무 달아 혀가 마비될 것 같은 달달한 날도 있었다.
세상에서 제일 기분 좋고 즐거운 놀이를 알게 되었으니 절제심 따위는 저 멀리 사라진 뒤였다.
그렇게 삼일을 줄창 잠도 자지 않고 시련과 성교를 반복하다 보니 르뤼에는 코피를 흘리며 털썩 쓰러졌다.
뭐, 그렇게 심각한 일도 아니었다.
평범한 인간이라면 몰라도 르뤼에는 마녀. 영체의 내구도와 회복력은 인간의 것을 아득히 웃돈다.
하루 휴식이면 모두 회복할 소모였다.
르뤼에가 시우에게 불만을 품게 된 시작점은 휴식을 위해 쉬었던 그 하루부터였다.
시련에 열심히 몰두할 때까지만 해도 매일매일 르뤼에를 안아주었던 시우가 혼자 시련을 한답시고 간호를 제대로 해주지 않은 것이다.
물론, 그도 같은 영체의 보유자이니 르뤼에의 증상이 별거 아니라는 건 알겠지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다.
“국서나 되어서야 여왕을 보필할 책무를 멀리하고 제 수련이나 힘쓰다니.”
여기까지가 르뤼에 삐짐 스택 하나.
그날 르뤼에는 온종일 침대에 누워 휴식하며 시우가 언제쯤 침대로 들어오나 기대하고 있었다.
비록 르뤼에가 쓰러진 시점은 그와 관계를 나누고 일어날 때인지라 마력이 부족한 것은 아니었다만, 어디 연인 간의 성관계가 마력충전만을 위해서이겠는가?
당연히 시우가 이전처럼 안아줄 줄 알았다.
그러나 침소를 찾지도 않고 제 시련에만 매달렸다.
여기서 삐짐 스택 둘.
‘뭐, 그럴 수 있도다.’
르뤼에는 이해하려 했다.
지난 사흘 간 르뤼에가 꿈의 요람을 독차지했기도 했고, 아무리 정력이 출중하다 한들 하루 10시간 12시간씩 관계를 맺었으니 그도 휴식이 필요하리라 애써 스스로를 다독였다.
그러고 보니 그가 먼저 관계를 요구한 적이 있긴 하던가?
하는 생각이 떠오를 때도 위와 같은 생각을 하며 애써 밀어냈다.
살짝 찜찜하긴 했지만 말이다.
‘으으으….’
하지만 혼자 누워 있는 시간이 길수록 머리 안에선 마구니가 자라났다.
‘그러고 보니까 밀땅이 아닌 건 알겠는데, 정말로 시련을 한 적이 아니면 안아주질 않는구나.’
‘왜 시련이 아니면 안아주지 않지?’
‘설마 짐과 사랑을 나누는 행위를 당근처럼 활용할 셈인가?’
‘짐이 시련을 끝내야 그 암여우들을 만나러 갈 수 있으니까?’
거기까지 생각이 미쳤을 때 르뤼에는 저 자신도 깜짝 놀랄만한 짜증을 느꼈다.
르뤼에와의 관계를 당근쯤으로 여기는 그의 행동은 더더욱 분하게 다가왔다.
‘후우…. 평정심 평정심….’
그럼에도 르뤼에는 꾹꾹 그 감정을 눌러담았다.
어디까지나 억측일 수도 있으니 마지막으로 한 번 더 확인하기로 했다.
본격적으로 르뤼에의 삐짐스택이 풀스택이 되어 시련을 멀리하게 된 계기는, 병상에서 일어난 르뤼에를 보고도 시우가 관계를 요구하지 않았을 때였다.
당연히 시련을 끝낸 뒤에야 관계하겠다는 듯한 그 태도는 르뤼에의 가설에 확신을 더해주었다.
신시우는 한시라도 빨리 그 여우들에게 돌아가기 위해, 섹스를 미끼 삼아 르뤼에에게 시련을 종용하는 것이다.
설령 이게 저번처럼 오해에 불과하더라도, 그의 행동이 그렇게 비칠 수 있다는 점에서 시우에게도 귀책사유가 있다.
그 시점에서 르뤼에는 대놓고 화내는 것 대신 기분 나쁜 티를 풀풀 내며 드러눕는 것을 선택했다.
‘아, 몰라, 나 안 해’ 모드가 되어 시련에는 눈길조차 주지 않은 것이다.
‘자비로운 짐이 이해해야겠지.’
사실 이조차도 르뤼에에겐 엄청난 선처이자 마지막 기회였다.
이정도로 르뤼에의 행동이 바뀐다면 시우도 자신의 언행을 돌아보겠지.
솔직하게 사과하며 잘못을 빈다면 이해 못할 것도 없었다.
르뤼에가 옆에 있는데도 다른 연인을 만나고 싶어하는 점이 괘씸하긴 해도 역지사지의 심정으로 이해해줄 수 있다.
이쯤되면 많이도 참았다.
자신의 정신적 성장에 어깨가 으쓱 해 질 만큼 참았다.
“그런데…. 뭘 잘못했는지도 모르고 일단 사과부터 하고 보다니!”
그리고 그 모든 것보다 얼렁뚱땅 넘어가려 했던 시우의 태도가 르뤼에의 분노를 키웠다.
“멍청한 놈! 쓸모없는 놈! 짐이 앞으로 시련을 하나 봐라! 저어어얼대! 저어어어얼대! 시련 따위 하지도 않겠다!”
르뤼에의 분노에 찬 포효가 한적한 복도를 울리는 그때.
복도에 설치된 램프에 붉은 불이 들어오며 빙글빙글 돌아갔다.
램프에 붉은 불이 들어올 때는 딱 두 경우.
전시훈련 때, 그리고 실제로 위험이 감지되었을 때.
복도에 설치된 스피커를 타고 음탐장의 목소리가 울렸다.
-함장님, 전정실로 와주시길 바랍니다. 잠정 잠수함 경보입니다.
그리고 오늘은 예정된 훈련 날이 아니었다.
르뤼에는 황급히 전정실로 달려갔다.
2.
심해의 마녀로부터 국지도발을 받은 직후.
당장에라도 건방진 말을 내뱉은 심해의 마녀를 혼내고 싶었으나 세 사람은 딱 하루만 휴식을 취하기로 했다.
그도 그럴 것이 거의 두 달이 다 되어가는 시간 동안 눈 한번 제대로 붙이지 못한 채 시우를 찾아 헤맸다.
드넓은 망망대해에 잠수하랴 탐지 마법을 쓰랴 온갖 고생을 하는 동안 다들 피로감이 극에 달한 것이다.
서두르는 것은 좋지만 지나친 과로는 도리어 효율을 해치기 마련이다.
썩 마음에 드는 방식은 아니었으나 시우의 안전도 일차 확보했겠다.
당장 조급함과 초조함이 사라지자 아주 약간은 숨을 돌릴 수 있게 되었다.
오클랜드 지부장이 호의로 내어준 객실은 뉴질랜드 최대 도시 오클랜드의 명물 하버 브릿지가 내려다보이는 5성급 호텔의 스위트 룸.
안에 딸린 욕실만 두 개, 방은 세 개였기 때문에 아멜리아와 샤론은 제각기 방에 들어가 늦저녁의 달콤한 수면을 누리고 있었다.
“흐음….”
한편 엘로아는 낡은 라디오 겸 카세트 데크를 앞에 둔 채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그 안에는 심해의 마녀의 녹음테이프가 들어있다.
일생일대의 숙적을 노려보는 것처럼 지긋이 데크를 노려보는 엘로아.
괜스레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그녀의 모양새는 수상쩍기 그지없다.
엘로아는 녹음본을 조금 더 정교하게 분석해보겠다는 구실로 제 방에 들여왔다.
허나 그것이 어디까지나 남에게, 그리고 스스로에게 내보이는 변명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엘로아는 심호흡을 하더니 볼륨을 아주 작게 낮추고 재생 버튼을 눌렀다.
-흐앙! 흑..! 흐윽…!
즉시 흘러나오는 애달픈 교성.
-헉! 헉!
그리고 잘 들리지 않지만 주의 깊게 들으면 식별 가능한 시우의 거친 숨소리.
-철퍽! 철퍽!
격렬한 성교로 땀이 오른 살갗이 찰싹찰싹 부딪치는 음란한 교접음이 엘로아의 귓가를 한가득 채운다.
엘로아는 자리에서 일어나 부자연스럽게 데크가 올려진 테이블 근처를 빙빙 맴돌았다.
마른 침이 자꾸만 목을 넘어간다.
사실 일전에도 시우의 관계를 엿보며 혼자 괴로웠했던 적이 많았다.
수호자의 계약 탓에 그가 페리윙클과 격렬한 성교를 나누는 것을 강제로 보게 되었으며, 열쇠 구멍을 통해 샤론과 시우가 몸을 섞는 것을 훔쳐보며 속옷을 축축하게 적셨고, 바로 옆방에서 샤론과 시우가 성교하는 소리를 들으며 자위했던 적도 있다.
엘로아는 그 당시 느꼈던 정체불명의 스릴감과 배덕감을 기억하고 있었지만, 본격적으로 연인 관계가 된 이후에는 그녀부터가 그런 상황이 생기는 것을 의도적으로 피했다.
관음(觀淫)이라니.
그것도 사랑하는 제자이자 연인인 신시우를 관음하는 것으로 성적 흥분을 찾는다니.
대쪽 같은 엘로아에게는 스스로 용납할 수 없는 행위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설프게 밖에 몰랐던 그때와 달리 엘로아는 시우에 의해 관능의 꽃이 만개했다.
거기에 현세의 문제로 시우와 떨어지게 되며 독수공방 한 지도 어언 몇 개월에 달하니 엘로아의 몸은 잔뜩 굶주려있는 상태였다.
여기에 여성이란 시각적인 매개보다는 청각적인 자극에 더욱 흥분을 느끼기 마련.
엘로아 역시 예외는 아니며 개인적인 경험으로 원치 않게 관음의 흥분을 기억하고 있는바, 오늘 들었던 이 녹음 본은 다른 사람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자극적인 물건이었던 것이다.
이제 시우도 안전할 것이고, 고작해야 그가 모르게 조용히 들을 뿐이니, 이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평소라면 타협하지 않았을 철의 의지가 오늘만큼은 버들잎처럼 나약하게 휘청인다.
“…….”
엘로아는 마치 실수인 척 테이블에 덜컹 부딪쳤다.
그리곤 물러서지 않은 채 조용히 테이블 모서리에 바짝 붙어섰다.
치마를 슬쩍 들춘 채 눈을 감고 둥근 모서리 위에 가랑이 사이를 천천히 비비기 시작한 엘로아.
“웃…!”
고작 한두 번 움직였을 뿐인데 몇 년 동안 가려웠던 등을 처음으로 긁은 것 같은 상쾌한 쾌감이 전신을 감싼다.
중간까지만 해도 존재하던 심리적 거부감과 배덕감이 말끔하게 씻겨나갔다.
“하아….”
벚꽃이 내려앉듯 아름다운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고, 입술 사이로 탁한 한숨이 흐른다.
녹음본 속에서 들려오는 음란한 소리에 맞춰 조금씩 허리를 움직이려던 그때.
“티페레트 님!”
벌컥 문을 열며 샤론이 들어왔다.
그 짧은 사이 어찌나 심취해 있던 것인지 기척을 조금도 느끼지 못한 것이다.
엘로아는 초인적인 신체능력을 발휘해 펼쳐졌던 치맛자락을 정리하고, 정지 버튼을 눌렀으며 소파로 슬라이딩했다.
“무, 무, 무, 무슨 일인가?”
허나 은밀한 시간이 들킬지도 몰랐다는 위기감에 하얗게 질린 얼굴과, 어정쩡하게 어색한 자세, 떨리는 목소리까지는 숨기지 못했다.
샤론은 그런 엘로아를 어리둥절한 눈으로 보다가 이내 왜 여기에 뛰쳐 들어왔는지 떠올린 것인지 급하게 외쳤다.
“지, 진조의 마녀가…!”
급보를 받고 다급하게 오클랜드로 달려오는 사이 홀로 수색함 위에 방치되었던 진조의 마녀, 클레흐 아스모데.
그녀의 자취가 감쪽 같이 사라졌다는 급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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