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1
1.
두 자루의 붉은 창끝이 날카롭게 번쩍였다.
분명 휘어지지 않는 곧은 창대일진대 마치 뱀처럼 몸을 꼬는 한 쌍의 곡선.
그 사이에선 연신 왜곡장과 붉은 결계가 녹아내린 쇳물처럼 흘러나온다.
-쾅!
피어나는 폭음 속에서 먼저 몸을 뺀 것은 여느 때와 같이 흑기사 쪽이었다.
간격을 벌리지 않으려 곧장 따라붙는 것은 여느 때와 같이 신시우 쪽이었다.
-파직!
리본의 방해를 걷어내며 기어이 뻗어진 창이 흑기사에 투구 한쪽에 비스듬한 사선을 긋는다.
일전과 비교하면 장족의 발전이지만 만족스러운 성과는 아니었다.
아쉽게도 조금 짧다.
차라리 발을 내디딜 때 창대를 한 번 고쳐 쥐었다면 투구가 아니라 머리에 확실한 타격을 가할 수 있었을 텐데.
찰나와도 같은 무의식이 흘러가고 턴이 바뀌었음을 직감한다.
-키잉!
맑은 소리와 함께 번지는 푸른 마력.
시우와는 비교할 수 없이 딜레이가 짧은 좌표이동과 함께 겨우겨우 거리를 좁혔던 흑기사가 저 멀리 사라진다.
지금까지 거의 골백번을 붙어본 상대.
무엇을 위해 거리를 벌린 것인지는 알고 있다.
하지만 머리로 알고 있다 하여 항상 완벽한 대처가 가능한 것은 아니다.
시우는 전력으로 내달렸다.
목표는 족히 수백 m은 거리를 벌린 흑기사.
흑기사의 주변엔 덩굴처럼 뻗은 검은 리본, 가속식이 새겨진 그것은 석궁의 시위처럼 붉은가지를 당긴다.
과거 비앙카를 상대로 시우가 써먹었던 투창을, 흑기사는 더욱 세련되고 정교한 방식으로 사용하고 있다.
“피어라.”
우선 방어는 불가능하다.
길게 늘어진 저격총의 총열처럼 이어진 링 터널은 본디 확산되어야 할 에너지를 한 점에 집약한다.
그 압축 능력은 시우가 대응할만한 것이 못됐다.
마법으로 대처하려고 해도 EMP에 직격당한 전자기기처럼 고장 나버리고, 물리적인 힘으로 쳐내는 것은 당연히 무리다.
즉, 마력으로도 물리력으로도 대처할 수 없는 필살의 일격.
공간 이동식을 활용해 자리를 벗어나려고 한 적도 있었지만 발출되는 타이밍을 맞추지 못한다면 꿰뚫리는 것은 매한가지였다.
따라서 여기부터는 반반의 확률이다.
왼쪽으로 뛰느냐 오른쪽으로 뛰느냐, 한쪽을 골라 전력으로 회피할 뿐.
이 이상의 대처법은 아직 찾아내지 못했다.
-텅!
오늘은 왼쪽.
시우의 진각이 힘껏 대지를 떠밀며 화살처럼 날았다.
붉은 섬광이 번쩍이는 듯하더니 피부가 저릿해지는 열감이 귓전을 스치고 지나간다.
뒤를 이어 수 배는 느리게 뻗은 소리와 헤집어진 바람이 머리칼을 흔들었다.
피했다.
이것을 호기로 삼아 단숨에 거리를 좁힌다.
조금이라도 더 가벼워지기 위해 갑옷을 해제한다.
해제한 갑옷을 고스란히 그림자의 날개로 삼아 지면을 활강하며 저 높이 떠 있는 흑기사에게 날아가려는 순간.
“피어라.”
무덤덤하게 선고를 내리는 영창과 붉은 가지의 창끝.
쇠뇌처럼 쏘아진 화살에 꿰인 시우의 몸이 형편없이 땅으로 추락했다.
2.
“뭐야.”
여지없이 흠뻑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닦아내며 시우는 고개를 기울였다.
분명히 피했다.
흑기사의 최고의 일격인 붉은가지 투창을 간발에 차로 빗겨냈는데, 거기서 인터벌 없는 제 2 격이라니.
심지어 분명 어두컴컴한 공간 저 너머로 빗나간 붉은가지가 언제 쏘아졌느냐는 듯 다시 흑기사의 손에 들려 있었다.
좌표이동식을 활용하니 뭐니 하는 문제가 아니다.
가뜩이나 다루기 어려운 붉은가지를 의도적으로 폭주시킨 뒤 쏘아낸 직후에 좌표이동식으로 회수한다?
단언컨데 불가능하다.
그렇게 쉽게 제어할 수 있는 물건이었더라면 스승님이 적기사를 상대할 때 그 고생을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뭐지…. 버근가?”
현실이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시련 공간 안에서라면 가능할지도 모른다.
어디까지나 아티펙트의 힘을 빌려 가상현실을 재현한 것에 불과하니, 무의식의 성능이 잘못 측정되었다면 이런 사고가 발생할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바닥에 앉은 채로 한참이나 궁리해 보았지만 뾰족한 답은 나오지 않았다.
앉은 자리에서 해답을 낼 수 있는 문제는 아닌 것 같다.
학구열이 불타면서 더 없는 가뿐함이 마음을 감쌌다.
그래도 일주일 전, 시련을 끝내고 나올 때면 항상 느끼던 찜찜함은 없어졌다.
일주일 전 르뤼에가 시우의 부탁을 받고 메시지를 전달해 주었기 때문이다.
르뤼에의 조력으로 시우의 걱정을 하고 있을 사람들도 연락을 받았을 것이고, 비록 상호 간의 대화는 불가능하지만 그게 어디인가?
생사도 모른 채 마음고생 하고 있었을 여러 연인이 안심하게 되었다는 것만 해도 다행 중 다행이었다.
“그렇게 열심히 도와줄 줄은 몰랐는데.”
처음엔 얼핏 질투를 내비치며 섭섭해하던 르뤼에도 막상 시우가 열심히 편지를 쓰는 것을 보고 감화된 것인지 가슴을 텅텅 치며 호언장담했다.
가능한 이른 시일 내에 이 편지가 연인에게 전해질 수 있도록 돕겠노라고 말이다.
마녀 명까지 걸며 제 일처럼 나서주었으니 어찌 고맙지 않을쏘냐.
한편, 그 고마운 여왕님은 시련의 방에 들여 놓은 소파에 누워 팔자 좋게 낮잠을 주무시고 계셨다.
한결같은 모습에 쓴웃음이 나온다.
잠옷도 갈아입지 않은 채 배를 훤히 드러내놓고 긁적이는 르뤼에.
자는 자세가 술 진탕 마시고 소파에 누운 아저씨 같다.
“폐하.”
“웅….”
르뤼에는 배를 북북 긁다가 눈을 떴다.
“하아아아암…. 시련은 끝냈느냐?”
늘어지게 하품을 하고 기운 좋게 기지개까지 편 르뤼에.
“네, 폐하는 오늘도 하지 않으시나요?”
“귀찮도다…. 힘들도다….”
“매일매일 열심히 하자고 약속했잖습니까. 작심삼일은 딱 삼일만 지키라고 만들어진 말이 아니 옵니다.”
“에잇! 귀찮다고 하지 않았느냐! 모처럼 꿀 같은 낮잠이었거늘 그대 탓에 뒷맛이 쓰도다!”
도리어 역정을 내는 르뤼에.
그녀는 헝클어진 머리를 정리하더니 클레오파트라 자세로 소파에 도로 누워 쩌억 하품을 했다.
시우의 말마따나 르뤼에가 시련에 혼신의 힘을 다한 것은 정확히 3일까지였다.
첫날에 6번, 이튿날에 5번, 또 사흘째에 6번.
잠도 제대로 자지 않고 시련에 매달렸으니 말이다.
그말은즉슨 하루에 대여섯 번씩 마력 충전을 받았다는 말이다.
시련을 끝낸 르뤼에는 번번이 뽈뽈뽈 다가와서 시우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그 때문에 시련의 방에는 소파와 테이블만이 아니라 침대가 자리 잡게 되었으며 하루에 세탁해야 할 시트만 해도 서너 장을 가뿐히 넘어가게 되었다.
그렇게 버닝을 한 나머지 삼 일째 마지막 시련 땐 코피를 줄줄 흘리며 깨어났었지.
그때의 기세만 해도 시우보다 빨리 공략이 끝낼 성 싶었으나….
르뤼에는 거짓말처럼 시련을 그만두었다.
그녀가 시련의 방에 놀러 와서 뒹굴기만 한 지가 벌써 나흘 째다.
그리고 아마 그녀의 급격한 행동 변화에 자신이 연관되어있다는 것을 시우는 직감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그럼 정리하고 들어갈까요? 저도 다 끝난 참입니다.”
“그러거나 말거나 맘대로 하거라.”
왜냐하면 그녀가 시련을 그만둔 직후부터 르뤼에의 말투에 은근히 짜증과 투정이 섞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괜스레 어리광부리는 것에 가깝다고 생각하지만.
그렇다.
원인은 알 수 없지만 르뤼에와의 관계에 트러블이 생긴 것이다.
아마 르뤼에가 시련에 도전하지 않는 것도, 주변에서 알짱거리면서도 단 한 번도 동침을 요구하지 않는 것도, 갑자기 각방을 쓰게 된 것도 같은 이유에서 일 터.
여기서 가장 큰 난관은 그 이유가 무엇인지 시우는 당최 짐작할 수 없었다는 점이다.
발정났던 자신에 의해 그렇게 거친 취급을 받았음에도 관대히 용서했던 그녀가 이토록 길게 뒤끝을 남길만한 일이 뭐가 있단 말인가?
“폐하.”
“왜 그러느냐?”
기다렸다는 양 고개를 돌리는 르뤼에.
일단 사과라도 해볼까?
“죄송합니다.”
“그래? 이제야 죄송하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냐?”
이로써 뭔가 잘못해서 르뤼에가 삐졌다는 가설이 확실해졌다.
르뤼에는 요즈음 가장 활기찬 모습으로 소파에서 일어나더니 빵긋빵긋 웃으며 시우에게 다가왔다.
“언제 사과할지 기다리고 있었느니라. 뭐, 짐의 마음은 하해와 같이 넓고 자비로우니 그 정도 실수야 얼마든지 눈감아 줄 수 있도다.”
“아, 하하하….”
“이런 사소한 문제로 질질 끌었던 그대가 나쁘다. 모두 그대 탓이니라.”
“그, 그렇죠….”
살갑게 팔짱까지 끼는 르뤼에.
요즘 태도가 살얼음 같았던 걸 떠올리면 지극히 그녀다운 변화였다.
애초에 르뤼에는 뒤끝이 아예 없다 해도 좋은 편이고, 사과했으면 금방 해결됐을 문제라는 의미다.
“식사나 하자꾸나. 오랜만에 질 좋은 과일을 대령하라 시키겠다. 아! 오랜만에 같이 사우나에 들어가는 건 어떻겠느냐?”
“넵.”
그러나 언뜻 술술 풀려가는 상황 속에도 시우는 오히려 체한 것 같은 불편함을 느꼈다.
남녀 관계는 미로와 같다.
쉼 없이 헤매고 곤경이 생기는 게 당연하다는 말이다.
따라서 상황이 지나치게 순조롭게 흘러갈 때는 항상 잊어서는 안 된다.
곧게 뻗은 길 끝에는 반드시 낭떠러지가 존재한다는 것을.
싱글벙글 웃으며 걷던 르뤼에가 우뚝 멈춰섰다.
“아, 그러고 보니….”
그녀의 짙은 흑청발이 곱게 찰랑대더니 삐걱하고 고개가 돌아갔다.
정확히 시우를 바라보며 말이다.
그 얼굴에 웃음기는 없었다.
“정확히 어떤 부분이 죄송한지는 알고 있는 것이렷다?”
불편함을 느끼던 이유가 이거였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확인 차 물어보았을 뿐, 시우는 어떤 부분에서 르뤼에가 심통 났는지 알지 못한다.
‘오빠가 뭘 잘못했는데?’ 같은 역질문이 들어온다면 도저히 답을 낼 수 없는 것이다.
등골을 따라 식은땀이 쫙 흐르는 것을 느꼈다.
이건 위험하다.
차라리 사과하지 않으니 못했다.
“저, 그러니까….”
르뤼에의 질문이 지극히 클리셰적인 질문이라면, 거기에 제대로 된 답을 놓지 못했을 때의 상황도 진부하지 않겠는가?
예상대로 르뤼에의 동공이 점처럼 좁아진다.
“설마…. 짐의 진노에 일단 덮어 놓자는 식으로 사과한 것은 아니겠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는 시우의 모습에 르뤼에는 조용히 팔짱을 뺐다.
“돼었도다. 그대가 하는 짓은 항상 요 지경이니라.”
일주일 전 보냈던 메시지가 육지에 도착했을 무렵.
아쿨라에선 또 다른 파란이 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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