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녀의도시-560화 (560/917)

#560

1.

테이프 속 심해의 마녀와 신시우는 굉장히 친근한 듯했다.

정말로 시우가 녹음 사실을 모르고, 연출된 녹음이 아니라는 가정하에 말이다.

시우가 심해의 마녀와 가까워져 잘 지내고 있다는 편지를 읽었을 때까지만 해도 세 사람 모두 설마 설마 했다.

그녀들이 아는 신시우란 가는 곳마다 트러블에 얽히고, 동시에 마녀를 꼬셔버리는 마성의 남자였으니, ‘혹시 심해의 마녀까지 유혹해 버린 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드는 것은 지당한 일이었다.

그의 안위가 확실치 않은 상황에서 구태여 그런 속 좁아 보이는 의심을 하고 싶지 않았을 뿐이다.

제각기 침묵을 치키는 와중.

샤론이 먼저 입을 열었다.

아멜리아도 진지한 성격이고, 엘로아는 말할 것도 없으니 샤론이 환기를 위해 총대를 메지 않는다면 이 지옥 같은 침묵이 영원할 것만 같았다.

“역시, 시우네요. 어, 어디서든 무사하게 잘 지낼 줄…. 알았어요. 암요….”

분명 아까도 비슷한 말을 했던 것 같은데, 지금은 의미가 꽤 많이 다르다.

‘위험에 빠진 줄 알고 전전긍긍하며 찾고 있었는데 다행히 무사했다’와 ‘위험에 빠진 줄 알고 전전긍긍하며 찾고 있었는데 새로운 여자와 놀아나고 있었다’는 어마어마한 갭이 있는 것이다.

“그래요…. 무사하면 됐죠.”

아멜리아도 비슷한 심정이었다.

여태껏 시우의 편지를 읽으면서도 불편했던 것은 ‘왜 심해의 마녀가 그 정도의 호의를 베푸는가?’에 대한 확답이 없었기 때문이다.

잘 지내고 있다는 신시우의 녹음테이프를 들을 때도, 편지와 사진을 볼 때도 그 부분이 마음에 걸려 찜찜했는데, 이로써 심해의 마녀의 호의에 대한 근거가 나온 셈이다.

애틋한 남녀 관계.

이 이상으로 신시우의 안전이 보장되는 안전 선이 어디 있겠는가?

큰 이변이 없었다면 그가 아직도 무사하고, 또 조만간 무사히 귀환할 것이라는 게 확정 난 셈이다.

근데 또 그렇다고 마냥 좋아할 것이 아닌 일이, 가뜩이나 많은 연인 사이에 경쟁자가 하나 더 생긴 꼴이니.

그의 무사에 무작정 기뻐하자니 뭔가 아닌 것 같고, 그렇다고 화를 내거나 질투하는 것도 꼴사나운 것이다.

“다들 진정하게.”

입으로는 괜찮다고 해도 동요를 감출 수 없는 샤론과 아멜리아.

그 사이 평정을 되찾은 엘로아가 두 사람을 진정시켰다.

엘로아는 불의의 사고로 상실의 아픔을 경험한 적이 있다.

그때에 비하면 지금은 얼마나 얄팍한 고뇌의 시간인가?

“우리는 며칠 전까지 그의 생사도 알지 못한 채 각기 마음고생 하였네.”

그에 비해 신시우는 살아있다.

그것도 더없이 안전하게 살아있다.

엘로아는 그것만으로 감히 행복이라고 말할 수 있었다.

“허나 시우는 다친 곳도 없이 아주 잘 지내고 있지 않은가? 그간의 고생을 떠올리면 어딘가 못마땅한 마음이 생기는 것도 당연하네. 나 역시 그러하니. 하지만 얼마나 다행인가?”

“…그렇네요. 생각이 짧았어요.”

“티페레트 님 말씀이 맞아요.”

아멜리아도 샤론도 엘로아가 어떤 마음으로 그런 말을 하는지 알아챘다.

이윽고 조금 부끄러워졌다.

그의 무사를 확인하고 안도해도 모자랄 판국에 하잘 것 없는 질투심에 메일 뻔했으니.

엘로아는 싱긋 웃으며 숙연해진 분위기를 환기했다.

“나 역시도 아무렇지 않은 것은 아니네. 괘씸한 연인라고도 생각하네.”

“참 시우답달까…. 안 그래도 돌아오면 진짜 가만 안 두려고요. 넌 죽었어, 신시우.”

“제 스승님도 연인이 잘못한 일이 있거든 뺨을 때리고 힘껏 껴안으라 하셨어요. 지금은 무사히 돌아오길 바라며 수색을 계속해야겠죠.”

시우의 안전은 확인됐지만 여기 있는 그 누구도 수색을 멈출 생각은 없었다.

눈으로 보이는 것만으로 안심하기엔 시우를 향한 걱정의 마음이 너무도 컸기 때문이다.

적어도 직접 만나고 꼭 끌어안기 전까지는 이전처럼 그를 찾아 나설 예정이다.

“그럼, 마저 들어도 괜찮겠나? 그대들과 이런 녹음 본을 듣는 것이 민망스럽기는 하나….”

“술이라도 내 올까요? 맨정신으로는 저도 조금….”

그렇게 세 연인은 테이블에 술상을 펴고 카세트테이프를 마저 재생했다.

샤론은 두 사람과 눈을 마주쳐 동의를 구하고 꾹 재생 버튼을 눌렀다.

-흐앙! 흥… 흐응….

-철퍽! 철퍽! 철퍽!

데크에서 재생되는 음성은 섹스 테이프나 포르노 같은 것이 아니다.

하다못해 들려오는 소리도 최신식 기억저장 장치에 피하면 조악하기 그지없었다.

지직거리는 노이즈는 예사고 제대로 된 마이크를 사용하지 않을 까닭에 군데군데가 아예 끊겨 있기도 했다.

그럼에도 너무도 뜨겁다.

더군다나 이 영상에 나오는 각자 처음으로 안겼던 남자이자 몇 번이고 뜨거운 잠자리를 가졌던 사람 아닌가?

고작 소리만으로도 어떤 자세를 취하고 있을지, 얼마나 기분이 좋을지, 저절로 상상이 가고 만다는 것.

그런 테이프를 셋이 나란히 앉아 듣고 있어야 한다는 것은 정신적 고문이었다.

-꺄항! 가, 갈 것 같니라…! 흐응, 흐응…! 흐하아아아앙!

적당히 볼륨을 줄었는데도 쩌렁쩌렁 울리는 신음에 아멜리아는 서툰 손놀림으로 후다닥 볼륨을 더 줄였다.

그렇게 30분가량 아무런 특이 사항 없이 진행되는 교접음을 듣고 있자.

술기운이 아닌 명백히 다른 기운으로 다들 얼굴이 불그스레 물든다.

사실 다들 무리한 수색작업을 펼치느라 긴장이 풀린 지금은 당장에라도 쓰러질 만큼 안도하고 있는 상황.

흘러내려 가는 방심의 오선지 위에 선정적인 가락이 더해지자 자연스럽게 그와 함께 보냈던 나날이 생각나는 것이다.

“…부럽다….”

저도 모르게 나직이 말하던 샤론은 두 사람의 놀란 시선을 받고 재빨리 자기변호를 시작했다.

지나치게 분위기를 못 읽었던 것은 아닐까 염려됐던 탓이다.

“다, 다들 안 부러워요? 나만 부럽나…? 이상하네….”

“…….”

동의를 받지 못한 샤론이 뻘쭘해하는 한편, 엘로아도 남몰래 당황하고 있었다.

예전에 시우가 샤론과 사랑을 나누는 소리를 훔쳐 들으며 혼자 위로했던 기억이 있다.

그때만큼 생생하지는 않아도 이런 낯뜨거운 내용을 듣고 있자니 샤론의 말대로 그의 품에 안기고 싶은 욕정이 피어났다.

당혹스러웠다.

이런 상황에서 질투보다 크게 느껴지는 성욕이라니.

그와 떨어져 지낸 몇 개월 동안 그토록 외로웠던 걸까?

-어떠냐? 츄릅… 입으로도 잘하지 않느냐?

-돌아누워 보라고? 왜 그러느냐?

-웃…! 입으로, 그런 곳을…! 음란하도다…! 포르노에서만 보았었는데헤엣…!

아무튼 제각기 아예 펼쳐지는 소리를 듣고 상상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69로군.’

‘그 자세 중이구나.’

조용히 생각하는 엘로아와 샤론.

“……?”

비교적 경험이 적은 탓에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아멜리아.

이제는 서로 눈도 마주치지 못하며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는 상황 속, 녹음 본은 슬슬 종막을 연주하고 있었다.

-안에…! 안에 싸주거라…!

“크흠…!”

“어휴….”

“…….”

-하아아아아아앙!

다시 한번 커다란 신음과 함께 시우의 거친 숨소리가 들려왔다.

이후엔 도란도란 대화를 나누며 욕실로 가서 씻자는 얘기가 나왔고, 테이프는 부자연스럽게 끊겼다.

“끝난 거죠?”

“그런데…. 왜 이런 녹음 본을 보낸 걸까요…?”

숨막힐 듯한 침묵이 가시고.

교접음과 신음이 만들어내는 관능에서 조금 정신을 차린 세 사람.

이제는 거의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신시우는 그의 편지에 나왔던 대로 심해의 마녀와 친근한 관계를 유지하며 잘 지내고 있다.

친근한 것도 정도가 있지 저건 너무너무 친근해서 문제일 정도다.

질펀하게 살이 부딪칠 정도로 친근해질 필요가 있을까?

“이 테이프는…. 내가 한 번 더 들어보겠네.”

“잠시만요, 아직 남아있는 것 같아요.”

엘로아가 재조사를 위해 테이프를 거둬가려는 사이, 아직도 끊기지 않고 흐르는 소리를 들은 아멜리아가 제지한다.

아마 씻으러 간 뒤에도 계속 녹음되어 있던 테이프 위에 또 다른 음성을 덧씌운 것 같았다.

-아아, 마이크 테스트, 잘 되는도다.

확실히 아까보다 훨씬 마이크에서 가까워진 듯한 목소리.

크흠크흠 헛기침을 두어 차례 하더니 말을 잇는다.

-잘 들었느냐? 신시우의 ‘옛’ 연인들이자, 이런 시시콜콜한 드잡이가 없었다면 짐의 옥음(玉音)도 듣지 못했을 천것들아.

여기부터가 본론이다.

그것을 직감한 세 사람은 긴장했다.

-짐은 고대부터 두려움을 사던 옛 마녀이자, 바다 어미로 숭배받던 샬리트 누켈라비의 정통 계승자. 깊은 바다를 아울러 지배하며, 천상천하에 보다 높은 자가 없는 위대한 누켈라비 왕조의 여왕, 만민을 굽어살피며 대적한 자는 여지 없이 침몰시키는 르뤼에 누켈라비라 하니라.

아마도 신시우와 떨어져 혼자 녹음 중인 모양인데.

그렇다면 의도를 추측할 수 없던 섹스테이프의 진의와 꿍꿍이가 곧 밝혀지리라는 것이 자명했기 때문이다.

-그대들의 연인인 신시우와 짐이 사랑을 나누는 소리는 잘 들었느냐? 짐의 노획품 중 디지탈 카메라나 캠코더가 없는 것이 천추의 한이로다. 짐이 얼마나 신시우를 살살 녹여버리는지 더욱 상세히 보여줄 기회였거늘. 짐의 치맛자락을 붙잡고 늘어지기에 친히 사랑을 베풀어 주었다.

엘로아의 눈썹이 꿈틀 움직이는 것을 샤론은 놓치지 않았다.

-그대들의 연인 신시우는 어제부로 누켈라비 왕조의 국서가 되었도다. 게헨나에 틀어박혀 마법 연구만 하는 겁쟁이 마녀들이 품기에는 너무 아까운 사내로다.

말맺음과 동시에 세 사람은 동시에 알아차렸다.

이 테이프를 보낸 목적이 다름 아닌 도발이라는 것을.

-본디 짐은 원하고자 있는 것이 생기면 손에 넣느니라. 양보와 상생은 그릇이 간장 종지만 한 우군(愚君)의 미덕. 바다와 같은 포부와 야망을 지닌 짐은 그대들과 신시우를 공유할 생각 따위 터럭만큼도 없다. 허나 신시우가 그대들을 각별히 여기는 바, 목숨을 빼았지는 않겠다. 몹시 자비롭게도 첩으로 살아가며 한 달에 한번 얼굴을 보는 것쯤은 윤허하겠노라.

당당한 음성으로 내뱉는 오만한 발언에 아멜리아의 눈초리가 슬쩍 좁아진다.

-그가 얼마나 짐에게 흠뻑 잠겼는지 아느냐? 하긴 알겠지, 전부 들었을 테니. 사실 짐도 이번이 처음이로다. 그 전까진 남녀의 성교라는 것이 이렇게 행복한 일인지 몰랐도다. 막, 안이 엄청 울리고 머리가 붕붕 뜬다! 가끔은 너무 좋아서 눈물도 나니라. 그의 씨를 듬뿍 받고 함께 누워있을 때면 구름 위에서 낮잠을 자는 것처럼….

부자연스럽게 끊기는 잠깐의 정적.

-아, 이 부분은 덮어씌워야겠도다. 흠…. 너무 푼수같으니.

혼자 쫑알거리는 목소리가 멀찍이 들려왔다.

아무래도 잘못 녹음한 부분을 제대로 커트하지 못한 것 같지만, 지금 세 사람에게는 그것마저 도발의 일환으로 받아들여질 뿐이다.

-아무튼 조만간 시련을 완수하고 지상을 정벌하기 위해 나설 참이다. 이제부터 신시우는 짐의 소유니 불만이 있다면 짐의 앞에서 미천한 혓바닥을 놀려보도록.

뚝.

그렇게 테이프가 끝났다.

“…찾죠.”

“동의하네.”

아멜리아와 엘로아는 매서운 투지를 다졌고, 샤론은 입만 쩍 벌린 채 무모한 도발을 감행한 심해의 마녀의 앞날을 대신 걱정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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