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9
1.
시간을 조금 더 거슬러 시우가 아직 편지를 전부 쓰지 않은 시점.
르뤼에는 그가 잠수함 곳곳을 촬영하고 녹음에 매달리는 동안 본 왕국을 들러 시련을 마쳤다.
앞으로 열심히 하겠다고야 했지만 러브러브 섹스로 후덜덜거리는 다리를 이끌고 시련에 임한 것은 당연히 나름대로 생각이 있어서였다.
“실로 천재적이도다!”
아주 좋은 아이디어가 떠오른 것도 모자라, 오늘 시련에서 상당히 진전이 있었기에 기분이 좋아진 르뤼에.
싸우고자 마음을 먹고 10분이나 버텼으니 평소라면 100분 정도는 시우 앞에서 자화자찬했을 것이다.
하지만 르뤼에가 빠른 걸음으로 객실로 향하는 것은 시우에게 시련의 성과를 자랑하기 위함이 아니다.
함정을 준비하기 위해서였다.
함정의 대상은 신시우가 누켈라비 왕국의 국서가 되어서도 잊지 못하고 연락을 요망하는 연인들.
처음에는 질투를 느꼈지만 르뤼에는 빠르게 투지를 회복했으며 반격의 서막을 위해 계획을 세웠다.
“어차피 짐보다 매력적인 마녀가 존재할 리 있겠느냐.”
천상천하 유아독존, 만인지상의 여왕인 르뤼에는 고작 연적의 등장에 휘청일 정도로 나약하지 않은 것이다.
도리어 손가락이나 빨며 기다리고 있을 그의 연인에게 아주 특별한 메시지를 특달 배송해주기로 결심했다.
“준비 오케이도다.”
구형 카세트테이프 녹음기의 상태를 확인하는 르뤼에.
일전 노획품으로 녹음기 두 개와 공테이프 한 상자를 얻었으나 사용처가 없어 창고에 처박혀 있던 애물단지였다.
그 중 하나는 시우가 연인에게 목소리를 녹음하기 위해 가져갔고 지금 르뤼에의 손에 들린 것이 나머지 하나.
“여왕과 싸운다는 것이 얼마나 혹독한 일인지 가르쳐주겠노라!”
르뤼에는 주섬주섬 옷 주머니에 녹음기를 넣고 문을 열었다.
스탠드 아래서 하늘거리는 담배의 부류연.
시우는 펜을 든 채 편지를 적어 내려가고 있었다.
그 옆에는 수십 장은 되어 보이는 종이가 빼곡하게 쌓여있다.
점심까지 녹음을 끝내는 모습을 보았으니 그때부터 지금까지 쭉 편지를 쓰고 있었다는 말이 된다.
르뤼에는 살짝 질렸다.
편지라 해봐야 한두 시간이면 끝날 일인 줄 알았건만 도대체 뭘 얼마나 쓰는 것인지….
“아직도 편지를 쓰고 있는 게냐?”
“네, 전해야 할 분이 많아서요.”
호기심이 치솟은 르뤼에였으나 내용을 훔쳐본다거나 보여달라고 부탁하는 촌스러운 짓을 하지 않았다.
그런 행동은 도리어 자신감이 부족하다는 방증이 될 뿐이다.
“연인이 몇이나 되길래 그렇게 오래 걸리느냐? 손이 아플 것 같도다.”
일단 한 명이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기에 침대에 걸터앉으며 묻는 르뤼에.
자연스럽게 녹음기가 들어있는 코트를 벗어 머리맡에 걸어 두었다.
“다섯 명이요.”
“음음, 다섯이라….”
쑥쓰러운 듯이 말하는 시우의 답변에 대충 고개를 주억거리던 르뤼에.
그러나 그의 답변을 되짚어보던 중 도저히 믿을 수 없는 발언이 섞여 있음을 확인한다.
“잠깐, 다섯이라 하였느냐?”
“그렇습니다.”
르뤼에는 해괴망측한 표정이 되고 말았다.
침대 위의 능숙함으로 미루어보아 꽤 카사노바겠거니 생각하긴 하였다.
허나 다섯이라니, 연인만 모아도 농구 게임이 가능한 수준이다.
르뤼에는 이내 피식 코웃음을 쳤다.
진실이라고 받아들이기엔 너무도 터무니없는 숫자였기 때문이다.
“농이 늘었구나. 잠깐이지만 속아 넘어갈 뻔했도다.”
하지만 아무 말 없이 쓴웃음을 짓는 시우를 보며 표정이 굳는다.
저게 농담을 하는 사람의 표정이라고?
아니다.
애초에 신시우는 그런 시시한 농담을 즐기는 타입도 아니다.
“…농담이 아니라고? 어찌 사람이….”
“음,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었습니다.”
“허….”
르뤼에는 기가 차는 것을 느꼈다.
동시에 살짝 머리가 아득해졌다.
워낙에 자신감 가득한 르뤼에지만 한둘이면 몰라도 무려 다섯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남자는 하나고 여자는 여럿이니 아마 그의 주변은 피투성이 전쟁터일 터.
앞서 말했듯 르뤼에는 자신의 매력에 강한 자신감이 있었기에 전장에 몸을 담는 것 자체가 두려운 것은 아니었다.
르뤼에 누켈라비가 누구인가?
무려 23 위계의 낙인을 물려받은 심해의 마녀다.
설령 그의 연인이 바락바락 대들며 실제 싸움을 걸어온다 해도 때려눕히면 그만인 것이다.
어차피 시련을 극복하고 난다면 무력으로도 르뤼에의 상대가 되지 못할 테니 말이다.
다만 군소 왕국의 전쟁터에 강력한 신흥 왕국이 참전한다면 어떻게 될까?
군소 국가들은 휴전을 선언하고 동맹을 맺게 될 것이며, 일제히 르뤼에 왕국을 견제하는 구도가 될 것이다.
특히 르뤼에가 강대한 대마녀라는 것을 깨닫고 무력 싸움을 완전히 배제한 그들만의 규칙을 내세울 시, 쪽수가 밀리는 르뤼에 쪽이 열세에 몰릴 가능성도 있었다.
그 부분은 제아무리 르뤼에라도 살짝 부담스러웠다.
“좋다, 영웅호색이라는 말이 있으니 이해하니라. 뭐, 그대가 영웅인지는 잘 모르겠다만.”
“하하….”
그렇다면 선제 조치는 더더욱 필수적인 셈이다.
부정하고 싶지만 그 여우들은 르뤼에보다 먼저 시우를 꾀었고 분에 넘치는 애정과 관심을 받고 있다.
모름지기 권력이란 기 싸움에서 시작하는 것.
이쪽이 확실한 우위에 있다는 것을 과시하는 것만으로 기반이 확고해지는 것이다.
더불어 그 여우들에게 확실한 선전포고를 하고 싶다는 마음도 있었다.
질투를 전혀 느끼지 않았다하면 거짓말이니 이런 식으로라도 갚아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르뤼에는 그렇게 자신의 함정을 합리화했다.
객관적으로 봤을 때 르뤼에가 설치하려는 함정은 시우의 동의 없이 진행한다는 점에서 비윤리적인 IED였으니 말이다.
“그래서, 많이 바쁜 것이냐?”
“마침 끝나가던 참입니다. 저녁 식사는 하셨나요?”
“아직이니라.”
“그럼, 식당으로 이동할까요?”
그 정체는 바로 시우와 르뤼에의 뜨거운 애정행각이 녹음된 테이프.
그가 연인들에게 보낼 물품에 몰래 끼워서 보낼 예정이다.
“아니, 금일 만찬은 준비하지 않았느니라.”
“오늘은 거르는 건가요?”
“그렇다.”
이미 모든 소리가 실시간으로 녹화되는 중.
허나 여기서 주의해야 할 부분이 있었다.
하나는 결코 르뤼에가 매달리는 듯한, 혹은 먼저 관계를 요구하는 듯한 기색이 보이면 안 된다는 것이다.
기왕 억장을 뒤집어 놓기로 했으니 효과적인 염장질을 위해선 르뤼에가 아니라 시우가 먼저 매달리는 그림이 나와야 한다.
“잠깐 이리 와보거라.”
“네.”
별 생각 없다는 듯 태연하게 의자에서 일어나 다가오는 신시우.
콩닥콩닥 뛰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르뤼에는 그의 귓가에 녹음기에 들리지 않을만한 성량으로 속삭였다.
“짐은 시련을 끝내고 왔느니라.”
“오늘요?”
“쉿쉿…!”
르뤼에는 황급하게 소리를 낮추라는 손짓을 했다.
자세한 사유도 묻지 않고 잠자코 고개를 끄덕이는 신시우.
하여간 장단을 맞춰주는 것에는 일가견 있는 사내다.
“내일도 도전할 것이니라.”
“아….”
그제야 이해했는지 고개를 끄덕이는 그의 모습에 르뤼에는 조용히 셔츠의 단추를 풀렀다.
전혀 짐작 못 했다는 듯 휘둥그레지는 시우의 눈.
역시 맨살을 보이는 것이 여전히 부끄럽긴 하지만, 지금은 거사를 도모해야 할 때다.
한낱 수줍음에 잡혀먹혀선 안됐다.
르뤼에는 눈을 질끈 감고 가슴을 내보였다.
브래지어는 착용하지 않은바, 의외의 풍만함을 자랑하는 젖가슴이 삐쭉 모습을 드러낸다.
“이렇게 갑자기….”
“무엇이 갑자기냐…! 오늘 같이 씻으면서 약조하지 않았더냐…!”
“그건 그랬지만요….”
당혹감과는 별개로 그의 면바지 중앙이 천천히 부풀어 오르는 것을 발견한 르뤼에.
더욱 빨라진 심장 박동을 느끼면서도 재차 다짐한다.
중요한 것은 시우가 먼저 덮치는 그림을 그리는 것뿐만이 아니다.
르뤼에가 여유롭게 그를 데리고 논다는 뉘앙스를 주는 것 역시 중요했다.
이전처럼 ‘졌느니라! 그만하거라!’ 따위의 우는 소리가 나온다면 ‘풉 이 녀석, 침대 위에서는 허접이로군’하며 비웃음이나 살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어젯밤 즐겼던 것처럼 느릿하고 푹신푹신한 섹스를 한다면 충분히 조절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눕거라, ‘오늘’은 짐이 특별히 위에서 움직여 주도록하겠노라….”
주섬주섬 서로의 옷을 벗기는 와중 두 사람은 입술을 살포시 포갰다.
2.
-그래, 거기…. 거기니라…. 하아…. 하아….
어렵게 구한 라디오 카세트 데크에서 흘러나오는 야릇한 소리.
신시우와 몇 마디 대화를 주고받은 심해의 마녀가 내뱉는 뜨거운 한숨이었다.
-쮸윱…. 쮸웁….
이윽고 달콤하게 입술이 맞부딪치며 침대가 가볍게 삐걱거린다.
옷이 헝클어지는 것과 찌걱거리는 물소리가 점차 커지기 시작했다.
엘로아도 샤론도 아멜리아도.
그 안에서 흘러나오는 비음이 어떤 경위를 거쳐 나오는 것인지 이해하고 있다.
실로 이 호텔에 걸맞은 행위 중에, 즉 남녀의 성관계 시 의지와 상관없이 나오는 격한 호흡이다.
아무리 억누르려 해도 도저히 억누를 수 없는 목구멍이 간질간질해지는 신음 말이다.
-하앙… 흐항…. 지, 짐의 허리 놀림은 어떠하느냐? 포르노를 보고 연습했느니라….
정황상 신시우는 녹음 중인 것을 모르는 상황.
그리고 혼자만 동떨어진 포장 상태를 봤을 때 이 녹음 본은 심해의 마녀가 독단으로 배송한 것으로 보인다.
사실 처음 대화가 오갈 때까지만 해도 세 사람은 이런저런 추론을 늘어놓았지만, 후끈한 음성 포르노가 진행된 시점부터는 다들 황망한 표정이 되었다.
“어….”
샤론은 입을 벌린 채 다물 줄을 몰랐고.
“흠….”
엘로아는 깊은 침음을 삼키며 눈가를 어루만졌으며.
“…….”
아멜리아는 어떻게 반응하면 좋을지 갈피를 잡지 못한 채 안절부절못했다.
-앙! 앙! 하앙! 어떻게…! 이런 자세로…! 하라는 것이냐…!
-찌봅! 찌봅! 찌봅!
-가슴 괴롭히지 말거라…! 그렇게 아기처럼… 흐으응…!
점점 격렬해져 가는 시우와 심해의 마녀의 성관계 녹음테이프에 샤론은 눈치를 살피다 간신히 입을 열었다.
“끌까요...?”
“그대로 두게. 이유도 없이 이런 테이프를 보낸 것은 아닐 게야.”
“…그래도 잠시만 멈추죠. 아직 마음의 준비가….”
-히으으읏…! 항… 아무리 그대라 해도…. 이런 요상…
-딸칵!
샤론이 정지 버튼을 누르자 뚝 끊긴 신음.
대신 객실엔 무거운 침묵만이 감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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