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8
1.
“하아….”
길게 한숨을 쉬는 데네브 제머나이.
특이하게도 쌍둥이가 하나의 낙인을 물려받는 제머나이 백작가의 작은 당주.
평소 현세의 사업 절차를 처리하는 집무실 테이블엔 펜과 계약서 대신 술잔과 빈 술병이 나뒹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빤히 바라보며 근심 어린 표정을 짓는 이는 알비레오 제머나이.
제머나이 백작가의 큰 당주이자 데네브의 언니이다.
“흑, 흑흑….”
멍하니 하늘을 보며 한숨 한 번 짓고, 술 한 번 마시고를 반복하던 데네브가 이번엔 석 장째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찍어 바른다.
“데네브.”
“응, 언니…. 언제 왔어?”
“무슨 말이야. 여기 계속 있었잖아.”
한 시간 전부터 있었다.
“아, 그랬었지…. 그랬었지. 위로도 해주고 했었구나. 미안.”
상심과 취기의 조화는 어떤 면모에선 언니 이상으로 똑 부러지는 데네브를 주정뱅이처럼 만들어 버렸다.
알비레오는 걱정스레 술을 추가로 따르는 데네브의 손목을 붙잡았다.
“그만 마셔.”
벌써 몇 병째인지 모르겠다.
사실 영체가 급성 알코올 중독으로 후유증이 남을 만큼 나약하진 않지만 어쨌거나 술은 정신을 갉아 먹는다.
술을 먹는다고 세상 근심 전부 잊을 수 있었다면 세상은 몇 배나 행복했을 것이다.
“딱 한 병만…. 더 마실게.”
“너 그 얘기만 몇 번째인 줄 아니?”
더는 두고 볼 수 없던 알비레오는 여동생에게서 술병을 압수했다.
반항하지도 않고 흐느적거리며 술병을 빼앗기는 데네브.
신시우가 심해의 마녀에게 납치되어 소식이 끊긴 지도 6주가 훌쩍 지났다.
사실 다들 입에 담지 않을 뿐이지 납치되었다는 것마저 희망 사항이었다.
만약 심해의 마녀가 그를 죽일 예정이었다면 몇 번이고 죽이고도 남을 시간이니 말이다.
따라서 언제나 활기찬 백작가엔 장례식장 같은 무거운 기류가 흘렀다.
그도 그럴 것이 신시우는 쌍둥이의 사윗감이다.
실종 소식이 알려진 이후 쌍둥이가 얼마나 울고불고했는지….
현세 수색에 따라나서겠다고 난동을 부리는 걸 뜯어말리자 또 그놈의 단수면 투쟁을 하며 버팅기는 통에 혼자 쌍둥이를 어르고 달래야 했던 알비레오는 한동안 골머리를 앓아야 했다.
“언니…. 미안해, 나 때문에…. 어떡하지…?”
“그게 왜 너 때문이야.”
“하지만…. 쌍둥이들 볼 면목도 없고….”
거의 몇 주째 반복되는 투정을 들어주며 데네브의 등을 토닥여주는 알비레오.
보다시피 시간이 흘러 알비레오는 다소 평정을 유지하게 되었다.
어차피 전전긍긍해봐야 나아지는 것도 없다.
그저 수색에 나선 마녀들을 물심양면 지원해주며 온 힘을 기울일 뿐.
다만 데네브의 경우는 쉽게 죄책감을 잊지 못하고 있었다.
심해의 마녀에게서 데네브가 빠져나올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대신 남는 것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현재 데네브에겐 티 내지 않는 가설을 곱씹자면….
마력 충전을 위해서라고는 하나 몇 번이나 살을 섞었으니 순진한 여동생이 신시우를 사위가 아닌 남자로 보기 시작했던 것은 아닌가…. 라고 조금은 생각하고 있었다.
단순히 사위가 사라지는 것과 마음을 준 남자가 행방불명 되는 것은 그 심려의 차이가 클 테니 말이다.
그리고 부정하고 싶지만 알비레오가 보기에 여동생의 상심은 후자의 것에 가까워 보였다.
“언니…. 이제 괜찮아. 일 보러 가.”
“괜찮겠어? 나 보내고 또 술 마시려고?”
“아니, 자려고. 낮잠이나 자야겠어. 계속 나 때문에 매여 있는 것도 미안하고….”
설마, 아니겠지.
알비레오는 제 한심한 망상을 고개를 젓는 것으로 끊어냈다.
당장 생사도 모르는 사위에게 이런 망측한 가설을 세우며 찝찌름한 감정을 품는 것부터가 도리에 맞지 않는다.
또 데네브가 아무리 철없는 구석이 있어도, 만에 하나 신시우에게 정말 마음이 생겼어도, 잘 대응하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알비레오가 잠시 벗어두었던 장갑을 끼고 자리에서 일어선 순간, 집무실 문이 벌컥 열렸다.
“스스스승님! 스승님!”
“스승님! 스승님! 스승님! 스승님! 스승님!”
거의 문을 박살 낼 기세로 짜잔 뛰쳐 들어온 똑 닮은 인형 한 쌍.
아니, 인형이 아니라 인형처럼 귀여운 오딜 제머나이와 오데트 제머나이였다.
여느때 같았으면 경망스럽게 굴지 말고 다시 조용히 들어오라고 했을 알비레오지만, 이번만큼은 그러지 못했다.
신시우의 실종 이후 마른 이끼처럼 누렇게 변해가던 쌍둥이가 생생한 화초처럼 활기를 되찾는 경우는 단 하나밖에 떠올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
“언니…. 머리가 울려…. 쌍둥이 좀 조용히 시켜줘….”
폴짝폴짝 뛰며 달려오는 쌍둥이와 테이블에 엎드려 머리를 감싸는 데네브.
“스승님! 전보에요! 전보! 조수님이 무사히 잘 지내고 있대요!”
“그럴 줄 알았다니까요! 조수님이 어디 가서 죽을 위인이냐구요!”
동시에 폴짝 알비레오에게 안기는 쌍둥이.
두 눈에 그렁그렁 맺혀있는 눈물은 그간 마음고생을 짐작게 했다.
“뭣…!”
숙취와 술기운조차 단숨에 떨쳐내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는 데네브.
입술을 꾹 깨문 채 부들부들 떨더니 쌍둥이를 와락 끌어안고 기쁨을 나누었다.
2.
시간을 조금 앞당겨 뉴질랜드 최대 도시이자 옛 수도인 오클랜드.
얼마전 오클랜드 근해에 특이한 물건이 발견되었다.
외관상으로 보면 많고 많은 바다 쓰레기 중 하나이나 주기적으로 마력 파장을 퍼뜨리는 물건이었기에 오클랜드 지부장이 즉각 회수에 나섰다.
거기서 발견된 것은 편지 다수와 서류 봉투 안에 담긴 사진, 그리고 카세트테이프 여럿.
처음엔 정체를 알 수 없던 물건이었으나 지부장은 머지않아 그 정체를 알아차렸다.
티페레트 공작의 특명에 의해 각국 위치포인트에 뿌려진 남자 마녀의 사진과 상자 안에 동봉된 사진 속 인물이 정확히 일치했기 때문이다.
지부장은 즉각 티페레트 공작과의 핫라인을 통해 연락을 취했고 연락한 지 하루도 지나지 않아 아멜리아와 엘로아 그리고 샤론은 메시지가 담긴 상자를 수령했다.
즉시 호텔방을 잡고 머리를 맞댄 세 사람.
떨리는 손으로 상자를 개방했다.
안에는 시우의 필체로 적힌 편지가 여럿 적혀 있었다.
아멜리아, 쌍둥이, 샤론, 엘로아는 물론이고 걱정하고 있을 여러 사람에게 자신의 무탈과 연락하지 못했던 사정을 알리는 편지였다.
한 사람당 10장, 빼곡히 적어진 편지의 내용을 얼추 추리자면 다음과 같다.
심해의 마녀에게 납치당했으나 좋은 관계를 구축해 편안한 생활을 보내고 있다.
외부와 연락을 극도로 꺼리는 르뤼에 탓에 연락하지 못했었다.
시련을 극복한 이후에 돌아갈 수 있으니 너무 걱정하지 말아달라.
걱정 시켜 드려서 죄송하다.
사실 이것만으론 세 사람의 의심을 거두지 못했다.
편지 내용을 곧이곧대로 믿고 마음 편히 넘어갈 만큼 걱정이 가볍지 않았다.
“협박에 의해 쓰였을 수도 있어요.”
“나 역시 같은 생각일세. 애초에 심해의 마녀의 검열 아래 쓰인 편지일 테니. 혹은 수색을 저지하려는 기만 작전일 수도 있지.”
“게다가 언제 찍은 사진인지도 알 수 없잖아요.”
이런저런 불안함 속에도 세 사람은 얼굴에 화색이 도는 것을 숨기지 못했다.
생사조차 불분명하던 연인이다.
그가 살아있다는 실마리라도 찾은 것은 희망을 잃어가던 단비 같은 희보였다.
-다들 잘 지내고 계신가요?
눈물을 글썽거리며 편지 한 글자 한 글자를 어루만지듯 읽던 세 사람은 구형 카세트 플레이어를 통해 시우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기어이 참았던 눈물을 흘렸다.
“주의 깊게 들어주게. 만에 하나 이상한 점이 있으면 즉시 말해주겠나?”
한편 엘로아는 그 와중에도 시우의 목소리에 귀 기울였다.
혹시 협박으로 작성된 메시지라고 해도 함께한 시간이 있다.
위기 상황을 알리는 코드, 시우를 아는 사람만이 이해할 수 있는 긴급 사인이 숨겨져 있을지도 모르는 노릇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거의 한 시간 가까이 되는 녹음 본을 쭉 듣고 있자 어느 정도는 마음이 놓이는 것을 느꼈다.
우선 녹음 본의 길이가 아주 길다.
만일 심해의 마녀가 인질의 안전을 확인시킴으로써 방심을 유도하고 수색에 교란을 주기 위한 것이라면 그 길이는 짧을수록 좋고, 정보는 적을수록 좋다.
하지만 신시우는 아주 편안하게 잠수함 속 생활을 상세히 늘어놓았으며 제가 생각해도 멋쩍은지 미안함이 가득한 목소리는 평안하기 그지 없었다.
엘로아가 했던 생각을 심해의 마녀가 하지 못했으리라곤 상상하기 어렵다.
즉, 어떠한 허위와 거짓 없이 안전이 보장된 상태로 녹음되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너무 걱정 말고 기다려 주세요. 시련만 완수하고 나면 곧 돌아가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또 말씀드릴 것이 있는데…. 아 이건, 돌아가서 말씀드리는 편이 좋겠네요. 다시 한번 걱정 끼쳐드려 죄송합니다. 잘 지내세요.
녹음 테이프가 뚝 끊기며 음성 메시지가 끝나자 세 사람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이네요…. 진짜 다행이에요.”
“시우라면 어딜 가서든 잘 지내고 있을 것 같았어요.”
“그럼, 누구의 제자인데.”
그가 상상 이상의 안락한 생활을 보내는 동안 마음고생 했던 것조차 조금도 아쉽게 느껴지지 않았다.
생사도 불분명하던 사랑하는 연인이 탈 없이 잘 지내는 것만큼 희소식이 어디 있단 말인가?
“수색은 계속되어야 할 걸세.”
“당연하죠.”
“오클랜드 인근의 해안으로 수색기지를 옮기도록 해요.”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가 돌아오기까지 손가락 빨며 기다릴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만에 하나라는 상황이 얼마든지 존재할 수 있고, 어쩌면 정신 계통의 마법을 통해 현혹당한 것일지도 모른다.
주변 해류를 분석하는 것으로 수색 범위를 좁힐 수 있을 테니 즉각 움직이려던 세 사람.
“이건 뭐지?”
수색을 재개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엘로아와 샤론은 상자의 완충재 한쪽에 처박혀 있는 카세트 테이프 하나를 추가로 발견했다.
편지나 사진, 그리고 지금 들었던 녹음 본이 다소 정갈하게 포장되어 있다면 누군가 급하게 쑤셔 놓은 듯한 모양새였다.
“테이프가 남아있었나 보군. 확인해 보세.”
다시 머리를 맞대고 모인 연인들.
-딸칵!
되감기로 테이프를 끝까지 돌린 이후 재생했다.
-부스럭 부스럭
이후 들리는 소리는 시우의 녹음본과는 어딘가 달랐다.
마이크를 바로 입 앞에 대고 녹음했기에 조악한 음질이나마 선명한 소리가 들렸던 일전 녹음 본과 달리 이쪽은 몰래 녹음하기라도 한 것처럼 소리가 멀게 느껴진다.
-아직도 편지를 쓰고 있는 게냐?
거기서는 쌍둥이에 버금갈 정도로 높은 톤의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낯설기 짝이 없는 그 목소리는 아마도 심해의 마녀의 것.
-네, 전해야 할 편지가 많아서요.
시우의 목소리가 조금 더 멀리 들리는 것을 보니, 이것을 녹음한 것이 심해의 마녀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세 사람은 심상치 않음을 감지하고 조용히 눈을 마주쳤다.
그리고 안에서 흘러나오는 소리에 귀 기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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