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2
1.
아침 식사 이후 르뤼에는 온종일 시우를 피해 다녔다.
그녀의 심정을 한 문장으로 표현하자면 다음과 같을 것이다
‘나는 너랑 노는 게 제일 소중하고 좋은데 너는 왜 나 말고 다른 사람이 있어?’
실로 유아적이고 유치한 감정이며 그녀 역시 알고 있다.
크라켄을 죽인 그를 멋대로 끌고 온 것이며 연락도 안 되니 시우의 지인 혹은 연인들이 걱정하겠구나.
설명을 들은 이상 여기까지 고려하지 못할 리 없다.
그렇기에 아예 대화를 시작하지 않으려 드는 것이다.
본격적으로 그의 설명을 듣게 된다면 억지를 부려야만 할 테니까.
그에게서 느끼는 배신감을 또 곱씹게 될 뿐이니까.
어쩌면 그를 떠나보내야 할지도 모르니까.
그 상황 자체에 직면하지 않는 것을 최선으로 여겼다.
“앞으로도 쭉 함께일 줄 알았거늘….”
그렇게 푹 빠졌다고 했으면서, 함께 있을 때 즐거워 보였으면서.
같이 영화를 볼 때도 이것저것 재미난 일을 할 때도 마음 한구석에서는 다른 사람을 생각하고 있었다는 말 아닌가?
언젠가 떠날 생각을 하고 있던 것이 아닌가?
질투심과 배신감이 마구마구 치솟았다.
당장 가서 따지고 화내고 싶지만 그것이 부조리한 폭거임을 알기에 그럴 수 없다.
반대로 이대로 혼자 있는 것도 답답해 미칠 것 같다. 뭐든 대화를 나누고 싶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양가감정 속에 르뤼에는 바에 앉아 오랜만에 홀로 술잔을 기울였다.
“…….”
더욱 크게 다가오는 쓸쓸함에 울적해진다.
최근에는 술을 마셔도 신시우와 함께였다.
그가 주저리주저리 늘어놓는 현세의 이야기는 극상의 안주였다.
혼자 궁상을 떨게 된 지금은 그가 사라지고 다가올 미래를 베타버전으로 체험하는 것 같다.
한 잔 두 잔.
거의 물을 마시는 속도로 도수 높은 위스키를 들이마시던 르뤼에는 술잔을 쾅 내려놓았다.
얼큰하게 취한 목소리와 반쯤 꼬인 혀로 들릴 리 없는 투정을 주절댄다.
“불경하도다! 무려 누켈라비 왕국의 여왕인 짐과 관계를 맺어놓고 다른 사람을 잊지 못하다니!”
반쯤 울먹이는 목소리였다.
이렇게까지 잘 해주는데 당연히 영원히 왕국에 봉사해야 하는 거 아닌가?
결국 어깨를 힘없이 늘어뜨린 르뤼에는 입술을 꾹 물고 고개를 숙였다.
“욱…우욱….”
소리가 되지 못한 흐느낌을 따라 허벅지 위로 불끈 쥔 주먹에 눈물이 방울방울 떨어진다.
여왕이 되어서, 실로 꼴사나운 투정이다.
이래서야 남자 하나에 목매는 멍청한 여자와 다를 게 없다.
아니, 애초에 이런 상황이 온 것은 신시우 때문이다.
자책과 책망, 배신감과 실망감 속에서 허우적거리던 르뤼에가 조용히 고개를 들었다.
“어...?”
술기운과 비탄으로 찌뿌둥해졌던 뇌리에 영감이 스친다.
혼란한 상황 속 언제나 정답을 가르쳐주었던 르뤼에 인스피레이션이다.
그러고보니 아직 신시우와 르뤼에는 첨예한 투쟁을 벌이고 있었다.
고함과 욕설과 폭력이 오가는 야만적인 투쟁이 아니라 ‘누가 먼저 유혹할 것이냐?’라는 고아한 투쟁을.
르뤼에는 술이 확 깨는 것을 느꼈다.
‘만약 그의 선언이 투쟁의 연장선이었다면?’라는 생각에 퍼득 꽂힌 것이다.
애초에 신시우는 침소에서 능숙하게 유혹하는 르뤼에를 퍼질러 자 버린다 라는 술책으로 따돌렸다.
사랑의 전쟁에 일가견이 있는 신시우라면 한방을 받았으면 더욱 강력한 한방으로 되갚으려 들 것이 분명하다.
즉, 일련의 사건과 발언은 모두 르뤼에가 ‘아쉬운 쪽’에 놓이기를 바라며 강행한 초강수.
이른바 질투심 유발 작전일 가능성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반대로 말해, 그는 절대로 르뤼에를 떠나고자 하는 마음이 없다는 말.
왜냐하면 외부와 연락을 하고 싶다는 신시우의 발언 자체가 르뤼에의 초조함과 동요를 유발하는 기만 작전의 하나일 테니 말이다.
애써 긍정적인 상황 판단으로 불안을 마무리 지은 르뤼에.
가슴 한쪽에 ‘그가 그렇게까지 잔인하게 나올 리는 없다’라는 불안감은 억지로 밀어 넣었다.
신시우는 분명 르뤼에에게 푹 빠졌고, 주도권을 잡기 위해 블러핑을 던진 것이 분명하며, 만약 르뤼에가 못 이긴 척 그의 부탁을 들어준다면 떠나지 않으리라고.
굳게 믿기로 했다.
2.
“망했구나.”
오늘 몇 번인지 모를 깊은 한숨을 쉬며 머리를 벅벅 긁었다.
어느 정도는 예상했던 문제이긴 했다.
르뤼에는 깜짝 놀랄 만큼 시우에게 호의적이었으며 권위적으로 굴기는 했어도 친구처럼 친근하게 대해주었다.
아니, 친구처럼이라는 말도 부적절하다.
긴 세월을 외톨이로 지내 왔고, 또 시련을 완수하기 전까지 지낼 예정이던 르뤼에에게 갑자기 나타난 시우의 존재는 소중한 친구 그 자체였을 것이다.
입장을 확실히 자각하고 있는바, 돌아가고 싶다는 기색을 내비치면 경직된 저항이 뒤따를 수 있다고 일찍이 염려하고 있었다.
하지만 고작 ‘연락’ 선언에, 그것도 충분히 사정을 설명했음에도 이 정도의 저항에 부닥칠 줄은 몰랐다.
아무리 넓다 해도 폐쇄된 잠수정에서 구석구석에 숨어 있는 르뤼에를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문제는 시우를 만난 르뤼에가 꽁지 빠지게 도망가며 대화의 단초조차 내주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도 종일 내내.
아예 말도 꺼내지 말라는 듯한 그녀의 태도에 시우도 일단 포기한 채 혼자 방에 틀어박혀 있다.
“바로 떠나겠다는 말도 아닌데 말이지.”
이해는 간다.
마녀 사회에서 ‘추방’은 굉장히 큰 페널티고, 위계에 비해 낮은 전투 능력을 지닌 어린 마녀는 군침 도는 먹잇감이다.
아무리 23 위계 대마녀라 한들 작당한 공적 여럿이 달라붙으면 답이 없다.
그 때문인지 그녀의 스승이던 샬리트 누켈라비는 르뤼에에게 경계심을 주입했다.
왕성한 호기심과는 달리 르뤼에의 행동 양상 자체는 지극히 폐쇄적이다.
현세에 대해 그토록 궁금해하면서도 정작 육지로 한 번도 발을 들이밀지 않았다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따라서 르뤼에에게 ‘외부’는 극도로 불안한 장소이며 어떤 방식이든 외부와 연결점이 생기는 것을 기피하려 드는 것이다.
물론 그것만은 아닐 것이다.
아마 그녀가 보인 반응을 볼 때 정말 외부와의 불안 때문이라기보다는 시우가 떠나게 될지 모르는 것 자체를 염려하는 듯했으니.
시우도 르뤼에와 정이 많이 들었다.
그녀를 두고 인사도 없이 훌쩍 떠날 생각 따윈 없다.
연락으로 무사함을 알리고 난 뒤엔, 르뤼에가 시련을 극복하고 돌아다닐 수 있도록 전폭 협조할 예정이었다.
겸사겸사 시련으로 파워업도 하고 말이다.
“당사자가 저러니…. 이거 말을 꺼내볼 수도 없고….”
우선 르뤼에가 진정하기를 기다리는 수밖엔 방법이 없어 보였다.
3.
“음….”
잠결에 뒤척이는 제 목소리가 들려 눈을 떴다.
지금 몇 시지?
반쯤 감은 눈으로 더듬더듬 책상 위의 알람시계를 보기 위해 팔을 뻗으려는데.
“응?”
뭔가 이상하다.
시우가 혼자 머무는 객실 침대는 꽤 협소한 편인지라 누운 채로 팔을 쭉 뻗으면 침대 밖으로 팔이 떨어지기 마련이다.
그런데 아무리 힘껏 팔을 뻗어도 팔꿈치가 푹신하다.
아주 안정적으로 침대 위에 놓여있다.
그제야 눈을 뜬 시우는 이곳이 르뤼에의 침대 위임을 알아차렸다.
바다의 정경을 한눈에 담을 수 있는 반투명 천장이 시우를 굽어보고 있었으니 말이다.
“…뭐야.”
뭔가 잘못 기억하고 있나? 싶어 기억을 되감아 보았다.
르뤼에가 꿍해 있는데 혼자 시련에 가기는 좀 그랬다.
결국 그녀가 찾아오길 기다리며 객실에서 마법연구를 하다 잠들었을 것이다.
몽유병 환자가 아닌 이상 잠결에 여기까지 왔을 것 같지는 않으니….
이건 아마도….
“깨어났느냐.”
고개를 돌아보자 해당 사건의 용의자로 보이는 르뤼에가 침대 위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엥?”
시우는 괴상한 소리를 내며 매우 놀랐다.
지금 르뤼에에게는 놀랄 포인트가 두 개 있었다.
그러니까 멀쩡히 자던 시우를 제 침대 위로 올려놓았다는 점을 제외하고도 말이다.
첫째.
딱히 인정해주는 사람은 없을지라도 르뤼에에게는 자신이 여왕이라는 강한 자부심이 있다.
따라서 그녀는 절대 무릎 꿇지 않는다.
그것도 저렇게 무릎을 가지런히 모으고, 허벅지를 딱 붙일 정도로 정갈하게라면 더더욱 하지 않을 자세다.
둘째는 조금 더 직관적인데.
바로 르뤼에의 복장이었다.
평소 그녀는 하늘하늘한 반소매 원피스를 입고 잠자리에 든다.
하지만 지금은 속옷 차림, 의외로 풍만한 가슴골은 물론이오 유륜마저 슬쩍 비쳐 보이는 검은 레이스 재질의 란제리였다.
너무도 파격적이니 전개에 사고가 쫓아가지 못하는 느낌.
“일어났느냐?”
“네, 보시다시피….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이죠?”
“…….”
르뤼에는 즉시 대답하지 못했다.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로 부끄러웠기 때문이다.
지금부터 하려는 행동은 결국 그에게 패배했기에 벌어진 일.
아무리 리허설을 하고 한껏 준비했다고 한들 부끄러움이 가시는 것은 아니다.
그에게 교태를 부리며 아양을 떨어야 한다는 건 변함이 없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잠깐 체면치레를 하는 것보다 그를 잡는 것이 더욱 중요한 일이다.
그렇게 다시 한 번 마음을 굳힌 르뤼에는 입을 열었다.
“그대가 이겼도다.”
“...네?”
“시치미 뗄 것 없다. 그대의 책략대로 되었다. 짐의 패배다.”
“아니, 진짜 이해 못 했는데요?”
르뤼에는 울컥했다.
이 몸이 모처럼 순순히 패배를 자인하고 있는데 아직까지 모르쇠라니.
항복 협상에 더욱 많은 것을 뜯어내기 위해 이러는 게 뻔히 보인다.
어디까지 욕심이 많은 남자란 말인가?
“이미 말했지 않느냐! 그대가 이겼다! 아주 잘났다! 대단하도다!”
“연락하게 해주신다는 의미죠?”
“…그런 뻔히 보이는 연기는 그만두라는 것이다.”
르뤼에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여전히 얼빵한 연기를 보이는 그의 앞에 툭 무언가를 던진다.
“이, 이걸... 어디서?”
그가 언젠가 르뤼에에게 사용하려고 방에 숨겨두었던 종합성인장난감 세트가 담긴 검은 가방이었다.
“그대의 취미는 아주 자알 알았도다. 짐의 육체를 넘본 것도 모자라 머리 위에 군림하길 원한다니 본래라면 절대 용납 못 할 수작이니라.”
화들짝 놀라는 척까지 하는 신시우.
“내무대신에서 국서로 임명해주겠다. 그대의 추잡한 욕망도 전부 허락하도록 하겠노라.”
르뤼에는 심호흡을 하고 손바닥에 너무 꽉 쥐고 있어서 미지근해진 스위치까지 던져주었다.
그라면 이것이 어디에 사용하는 물건인지, 이 물건과 페어가 되는 장난감이 지금 어디에 들어가 있는지 짐작하고도 남을 터.
이는 단순히 패배 선언이 아니었다.
패배를 선언하고 배를 까뒤집으며 아양을 부리는 행위였다.
하지만 어중간하게 할 생각은 없었다.
만에 하나라도 그의 입에서 그냥 떠난다는 말이 나오면 정말 견디기 힘들 것 같았으니 말이다.
“기뻐해도 좋다. 짐을 무릎 꿇린 남자는 그대가 처음이니라.”
창녀처럼 천박한 제 행동에 환멸이 나면서 얼굴이 화끈화끈하게 달아오른다.
그래서 르뤼에는 일부로 퉁명스러운 목소리를 툭 던졌다.
“그러니 명한다. 아무 데도 가지 말고, 짐의 옆에만 있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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