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1
1.
르뤼에는 충격에 잠겨 드르렁드르렁 코를 고는 시우를 놔둔 채 멍하니 앉아 있었다.
불과 한 두 시간 전까지 느꼈던 긴장과 기대는 간데없고, 뻥 구멍이 뚫린 자리를 패배감에 가까운 안도가 채운다.
솔직히 이게 말이 되는가 싶다.
뜨겁고 달콤한 말로 고백했던 그가 친히 동침을 제안했음에도 신경도 쓰지 않는다니.
머리를 눕힌 지 1분 만에 코를 골면서 잠을 자다니.
게다가 사우나에서 그렇게 맨살을 보였는데도 아무렇지 않다는 말인가?
유혹 전략이 조금도 먹히지 않은 것인가?
고자일…리는 없고.
“발정기 짐승처럼 씩씩거리며 덮쳐와야 하는 게…. 아니, 하다못해 조금 치근덕거리기라도 하는 게 정상이도다.”
황망해하는 르뤼에의 귓가를 파고든 입맛 다시는 소리는 일련의 사건이 현실임을 일깨워주었다.
설레발이란 설레발은 잔뜩 쳐놓고 방치되어 버렸으니 기운이 쭈욱 빠지는 것을 느낀 르뤼에.
꾸물꾸물 침대 위를 기어 괜스레 그의 옆으로 다가갔다.
“…….”
세상 태평하게 잠이 든 그의 볼을 쿡쿡 찔러본다.
반쯤은 화풀이하는 기분으로 살짝 꼬집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잠깐 몸을 뒤척이기나 할 뿐 르뤼에는 신경도 쓰지 않은 채 꿈나라에서 헤매고 있었다.
혹시 그는 생각만큼 르뤼에에게 관심이 없는 것이 아닐까?
왜 이탈리아 남자들도 여자만 보면 번지르르한 말을 늘어놓지 않던가?
어쩌면 뜨거웠던 사랑 고백도 면피성, 혹은 일회성 아부는 아니었을지….
아주 잠깐이지만 낙담했던 르뤼에.
“그럴 리 없다. 짐처럼 아름다운 여인에게 매혹되지 않는 사내는 없느니라.”
그러나 자존감 높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운 르뤼에는 순식간에 실패의 쓰라림을 털어냈다.
“헉!”
그렇게 별생각 없이 시우의 자는 얼굴을 관찰하던 르뤼에의 등 뒤로 찌리릿 전류가 흘렀다.
깨달음의 전류였다.
“설마…!”
르뤼에는 한가지 가설을 세워 상황을 되짚어 보았다.
‘만약 시우가 르뤼에의 의도를 간파하고 있었더라면?’이라는 가설이다.
만약 르뤼에의 동침 제안이 진심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함정에 빠뜨리기 위한 수단이었음을 간파했다면 이와 같은 일도 설명이 된다.
초인적인 인내심을 발휘해 은근한 유혹 앞에서 자는 척을 한다.
이로써 함정을 피해 감과 동시에 ‘난 별로 아쉬울 것이 없으니 네가 매달려라’라고 어필하는 것이다.
르뤼에의 몸이 성인용품 세트를 발견했을 때처럼 떨렸다.
“실로 무서운 사내도다…. 그 짧은 순간에 짐의 책략을 꿰뚫어보다니. 게다가 그만한 자제력이라니.”
그러고 보니 그는 지상에 연인이 있다고 했다.
그것도 하나가 아니라고 말했다.
르뤼에에게 이런 ‘밀당’은 처음이지만 그에게는 일상과도 같은 행위였던 것이다.
“짐이 아무리 특출나다 해도 경험이 없으니 당할 수밖에 없도다…!”
마침내 이번 교전의 패배 이유까지 깨닫게 된 르뤼에.
명쾌한 해답을 찾게 되자 차라리 마음이 편했다.
물론 패자로 남을 생각은 없다.
다시 계획을 짜서 조금 더 과감하게 나설 것이다.
무슨 방법이 좋을지 고민하던 르뤼에.
“그러고 보니….”
일전 그가 마구잡이로 덮쳐왔을 때를 회상해보니 문득 짚이는 것이 있었다.
머리에서 나는 향기를 맡으면 흥분한다나 뭐라나, 되지도 않는 거짓말을 했던 적이 있는 것이다.
그게 사실이라면 그의 코밑에 정수리를 가져다 대는 것으로 끝나는 것 아닌가?
고개를 갸우뚱하며 그에게 냄새를 맡게 하려다 이내 그만 두었다.
“에이, 그런 놈이 세상에 어디 있겠느냐.”
아무래도 작전 실패의 상심이 컸던 모양이다.
그런 말도 안 되는 거짓말에까지 혹할 정도니.
“엇…!”
그러던 중 또 하나의 깨달음이 르뤼에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간다.
그가 유독 칭찬해주던 머릿결이나 오늘 손을 뻗어 르뤼에를 쓰다듬었던 행동.
그리고 머리 냄새를 맡았기에 흥분했다는 그의 거짓말.
일련의 사건에서 연결고리를 발견했다.
아무런 이유 없이 나오는 거짓말은 없다.
비록 그것이 궁여지책으로 들이민 거짓말이라고 해도 어느 정도는 진실을 포함하고 있으리란 말이다.
세상에는 성기나 가슴뿐 아니라 신체 특정 부위에 흥분을 느끼는 이상한 성벽이 존재하는데 그것을 패티시라고 칭한다 하더라.
가령 손, 겨드랑이, 발 등에서도 말이다.
정리 및 종합해보자면 신시우는 머리카락 패티시인 것이다.
“찾았다…!”
이번 승부의 열쇠이자 그의 약점.
이로써 신시우는 르뤼에의 손아귀에 들어온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2.
다음 날 아침.
모처럼 편안한 침대에서 잠이 들었기 때문이겠지.
수면의 질이 전에 없이 고급지다는 것을 느끼며 눈을 떴다.
“일어났느냐?”
바로 옆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흠칫했다.
졸음이 채 가시지 않는 눈을 들어 옆을 보자 안락의자에 앉아 독서 중인 르뤼에가 보였다.
어쩐지 한껏 뻐기는 표정이다.
“기침하셨습니까?”
“오냐.”
제복 같은 옷차림이나 발목까지 내려오는 어두운 톤의 원피스를 즐겨 입던 르뤼에.
하지만 책을 덮으며 보란 듯이 일어난 그녀는 굉장히 화사해 보였다.
어두컴컴한 계통의 드레스인 것은 똑같았으나 원단엔 은실이 섞여 있었고, 첨단은 작고 푸른 보석을 뿌려 놓아 치장되어 있다.
달빛도 없는 검은 바다에 식물성 플랑크톤이 발광하는 것 같은 드레스다.
머리에 얹혀진 조그마한 티아라와 곱디곱게 빗어진 청흑발까지.
심해의 마녀라는 이명을 처음 들었을 때 ‘당연히 저런 복장이겠지’ 싶은 옷차림이다.
“엄청…. 꾸미셨네요?”
“그렇게 느끼느냐? 평소와 크게 다를 것도 없도다. 짐에게는 평범한 일상복 수준이도다.”
촤르륵 머리카락을 멋지게 휘날리며 답하는 르뤼에.
칭찬에 대한 반응이 실로 그녀다워 웃음이 나왔다.
“그래서 그게 끝이냐?”
“아닙니다, 폐하의 아름다움에 눈이 멀어 잠시 말을 잊었을 뿐입니다.”
“그럼 짐의 아름다움을 더 칭송하도록 하여라.”
아침 식사를 위해 식당에 가기까지 가벼운 칭찬 릴레이를 선보였다.
3.
르뤼에는 만족스러웠다.
그의 반응은 실로 사랑에 빠진 남정네 자체였다.
하긴 이 옷은 특별한 날에만 있는 르뤼에의 필살 코스튬이다.
통상적인 방법으로는 세탁도 할 수 없어 한 번 입고 버려야 하는 최고급 능라 드레스인 것이다.
거기에 그가 자는 틈을 타 욕실로 가서 몇 번이나 머리를 빗고 깨끗이 감았으니, 갓 지은 밥보다 좌르륵 윤기 흐르는 머리카락에 환장하지 않을 수 없다.
“폐하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다.”
“편히 하거라.”
그렇다면 오늘은 어떤 작전으로 그와의 전쟁을 이어가 볼까?
즐거운 고민에 잠겨있던 르뤼에의 귓가에 청천벽력 같은 소리가 들려 왔다.
“지금 뭐라 하였느냐?”
그 목소리는 스스로 들어도 알 수 있을 정도로 경직되어 있었다.
“외부에 연락을…. 취하고 싶다고 하였사옵니다.”
“외부에? 연락을? 대체 왜?”
“폐하의 은덕으로 감사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잘 지내고 있다는 걸 모르는 제 친구와 연인들은 밖에서 걱정하고 있을 거에요.”
망치로 머리를 두들겨 맞은 상황에서 통증만 쏙 뺀다면 이런 느낌일 것 같다.
르뤼에는 더듬거리며 시우에게 반문했다.
“…그게 그리 중요한 일이냐?”
외부와 연락.
르뤼에에게는 극도로 피하고 싶은 이벤트였다.
일찍이 스승께서 경고한 일도 있지 않았던가? 계승한 지 얼마 안 된 르뤼에의 존재와 거처가 외부에 드러나는 일이다.
진조의 마녀를 만났던 것도 ‘맹약’이 걸려있기에 나선 것이지 그게 아니라면 절대 물밖으로 나가지 않았을 것이다.
“제게는 중요한 일입니다.”
하지만 사실 이런 일은 아무래도 좋다.
르뤼에가 가장 큰 충격을 받은 것은 그가 외부와 연락을 하고 싶다고 한 부탁 자체였으니까.
“외부의 연락을 취해 뭘 어쩌려는 것이냐?”
“우선 잘 지내고 있다고 안심이라도 시키고 싶습니다.”
“...우선?”
이게 무슨 말인가.
연락이 우선이면 다음은 어쩌겠다는 말인가.
그리고 지금까지 달리 주의 깊게 생각하지 않았던 일에 대해 떠올린다.
르뤼에는 시우가 전부다.
거의 전부인 친구나 다름 없다.
그러나 그에겐 르뤼에 말고도 다른 사람이 있다.
물감처럼 번지는 불안감 속, 르뤼에는 입 밖으로 꺼내는 것만으로 등골이 얼어붙을 것 같은 불길한 질문을 던졌다.
“그대는…. 날 떠날 셈인가?”
막연한 의문을 뱉는 순간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감정을 느꼈다.
최근 그녀는 인생에서 가장 즐거운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고작 한 사람이 아쿨라에 더 머무는 것만으로 이런 기쁨이 생기는 게 놀라울 정도로, 하루하루가 충실했으며 하루하루가 새로운 즐거움의 파도였다.
그렇다면 그는 그렇지 않다는 말인가?
그러기에 ‘연인’을 입에 담으며 언젠가 떠난다는 식의 망발을 입에 담을 수 있는 것인가?
“아니요, 당장 떠나겠다는 건 아닙니다.”
“언젠가는 떠나겠다는 의미렸다.”
설마 이런 대답이 돌아올 줄은 몰랐다는 듯 침묵하는 시우.
“…….”
그런 그를 보며 드는 감정은….
배신감.
실망감.
싫은 일에 대한 격렬한 거부감.
핑크빛으로 물들던 방심(芳心)이 거뭇한 감정의 배합 속에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이 뭉개진다.
“불허한다.”
“폐하….”
“불허한다 하지 않았더냐!”
르뤼에의 고함이 쨍하고 식당에 퍼졌다.
예기치 못했던 동요는 거기서 그치지 않았고, 이어 분노로 화했다.
“지금까지 잘도 짐을 농락해 왔겠다? 짐이 속을 줄 알았더냐?”
그렇기에 의도적으로 비아냥거렸다.
반쯤은 격렬한 배신감 때문이었으나, 반쯤은 그의 부탁 자체를 원천 봉쇄하기 위함이었다.
“그동안 수상하다 생각하였다. 그러고보니 게헨나 출신이더랬지? 그 안에서 지내는 마녀들이 얼마나 가증스러운지는 스승께서도 누누이 말씀하였다.”
“폐하….”
“외부와 연락을 취하는 식으로 짐을 물 밖으로 끌어낼 심산이었구나!”
사실은 알고 있다.
그가 그런 짓을 할 사람이 절대 아니라는 것을.
하지만 그의 부탁을 들어주는 순간 그가 사라지는 것이 무섭고 싫었다.
그가 가르쳐 준 것은 함께 있을 때의 즐거움뿐만이 아니라, 혼자 남았을 때의 외로움까지였으니까.
더더욱 용납할 수 없었다.
“듣고 싶지 않다! 썩 꺼져라! 이 자리에서 목을 치지 않을 것을 감사히 여겨야 할 것이니라!”
르뤼에는 물잔을 힘껏 던지며 시우에게 등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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