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녀의도시-550화 (550/917)

#550

1.

-꿀꺽 꿀꺽 꿀꺽

“쿠하아아…!”

병에 담긴 차가운 멸균 우유를 벌컥벌컥 마신 르뤼에는 몸을 부르르 떨며 환희를 표했다.

어찌나 맛깔나게 먹는지 옆에서 같이 우유를 마시는 시우조차 우유가 배는 맛있어지는 착각이 드는 듯했다.

“시원하도다! 음하하하!”

호쾌하게 병을 내려놓고 웃는 르뤼에.

비키니 위로 커다란 가운을 두른 그녀는 현기증을 느끼며 비틀거렸던 흔적 없이 기운 차 보였다.

하긴 그 뒤로 한 시간이나 찬물이 가득 담긴 욕조와 후끈후끈한 사우나를 오가며 몸을 지져댔으니 몸에 이상이 생긴 건 아닐 것이다.

애초에 영체가 그 정도로 연약하지도 않고 말이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수건으로 그녀의 입가에 흐르는 우유를 슬쩍 닦아주며 물었다.

“지금은 괜찮으세요?”

“짐이 고작 사우나 때문에 쓰러질 것 같더냐! 조금 전에는 살짝 다리를 헛디뎠던 것뿐이니라!”

다리를 헛디딜 여지가 없는 자세와 상황이었지만 민망해하는 듯하니 대충 넘어가 주었다.

“역시 함께하니 즐겁구나. 그대는 어땠느냐?”

확실히 사우나가 피부에 좋기는 한 것인지 뽀송뽀송해진 르뤼에.

뭔가 귀여워서 머리를 쓰다듬으려다 간신히 참았다.

“저도 좋았습니다. 나른하고 노곤한 것이 좋네요.”

“사우나와 냉탕을 번갈아 오가는 것이야말로 사우나를 A부터 Z까지 즐길 수 있는 짐의 비법이니라. 몸이 열감으로 가득하고 땀으로 찝찝할 때! 더없이 상쾌한 입수! 이것이 지상낙원 아니겠느냐?”

“고향으로 돌아가면 사람들에게도 널리 전파하도록 하겠습니다.”

아니, 쓰다듬는 것 정도는 상관없으려나?

슬그머니 손을 내밀어 르뤼에의 정수리 위에 얹어보았다.

왜 귀여운 고양이를 보면 괜스레 만져보고 싶지 않은가?

비슷한 부류의 충동이다.

“덕분에 좋은 경험을 참 많이 해보는 것 같습니다.”

이렇게 말하며 예쁜 청흑발에 손을 얹었다.

기분이 좋을 대로 좋아진 르뤼에가 이런 걸로 화낼 것 같지도 않고, 만일 화낸다면 솔직히 그건 나름대로 구경하는 재미가 있을 것 같다.

“…음?”

눈동자만 슬쩍 올려 제 머리 위에 얹힌 손을 보는 르뤼에.

순박하게 끔뻑거리는 커다란 눈망울은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바로 알아차리지 못한 듯했다.

-사락 사락

기왕 한 김에 좌우로 슬며시 쓸어 보았다.

전에도 느끼긴 했지만 르뤼에는 머릿결이 굉장히 좋다.

평소 찰랑거리는 상태로 돌아다닐 때는 거의 한 필의 비단처럼 느껴질 만큼 말이다.

“어…. 머… 무….”

르뤼에는 입을 뻐끔거리고 동시에 펭귄처럼 양옆으로 부자연스럽게 뻗은 손이 움찔댔다.

이제 펄펄 날뛰면서….

‘감히 짐의 옥체에 허락도 없이 손을 대다니! 괘씸하도다!’

‘폐하의 고운 머릿결을 보다 보니 저도 모르게 손이 움직였사옵니다! 죽여주시옵소서!’

‘그렇단 말이냐! 별수 없지! 하루 한 번은 짐의 머릿결을 음미할 수 있게 해주겠도다! 짐의 넓은 아량에 탄복하도록 하여라!’

라는 짧은 꽁트가 진행되어야 하는데….

“…….”

시우가 흠칫할 정도로 르뤼에가 조용했다.

심지어 손을 쳐내거나 못하게 하지도 않는다.

너무 치근덕댔나?

기이한 반응에 쫄린 나머지 슬그머니 손을 내렸다.

그동안 숨이라도 참고 있던 건지 그제야 ‘아’하고 탄식인지 한숨인지 모를 이상한 소리를 내는 르뤼에.

사실 살짝 오바한다는 감은 있었는데 르뤼에의 반응이 예상 밖일 줄이야.

“…….”

여전히 침묵을 지킨 채 세수하는 다람쥐처럼 제 머리 위로 손을 올린 르뤼에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입술을 꽉 깨문 채 입꼬리를 씰룩거릴 수 있다니 대단한 기술이다.

“지므 므리의 흠브르 슨드즈 므르.”

어찌나 꽉 물었는지 뭐라 하는지 알아듣기 힘들었으나 눈치껏 번역하자면 ‘짐의 머리에 함부로 손대지 마라’ 쯤이 되겠지.

“정말 죄송합니다!”

이 정도로 싫어할 줄은 몰랐기에 연신 사과를 하며 그녀의 기분을 풀어 주었다.

2.

영체는 딱히 배가 고프지 않지만, 세상엔 정신적 배고픔이라는 게 있다.

땀을 쫙 빼고 나면 입이 심심해지기 마련이다.

수영복에서 잠옷으로 갈아입고 식당에서 가볍게 야식을 먹자 시계는 어느덧 오전 4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사실 잠수함은 시간의 흐름을 가늠하는 것 자체가 쉽지 않다.

르뤼에의 침실을 제외하면 창문이랄 것도 없고 그 창문으로 보이는 것도 어두컴컴한 바다가 전부니 말이다.

하지만 시우도 르뤼에도 규칙적인 수면 습관을 지닌 마녀인바 서너 시간이라도 잠자리에 들 시각이었다.

“설거지도 끝났으니 들어가 보겠습니다.”

아무렇지 않게 고개를 숙이고 인사해 보이는 시우.

그런 그를 보며 르뤼에는 모종의 분함을 느끼고 있었다.

바로 사우나 이후 머리를 쓰다듬었던 건에 대해서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그의 두툼한 손이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는 순간 르뤼에는 아찔한 현기증을 느꼈다.

더 자세히 말하자면 그의 유혹에 홀라당 넘어가 멍청한 미소를 지으며 어떤 부탁이든지 들어줄 뻔했다.

조금 전에는 경황이 없어서 바로 항의하지 못했지만 멍한 상태로 야식을 먹다 보니 ‘반칙이다 반칙!’ 이라고 외치고 싶은 심정이 된 것이다.

더 자세한 이유를 풀어보자면 시우 쪽에서 대뜸 신체 접촉을 해왔기 때문.

지금 두 사람은 암투를 벌이는 상태다.

그는 감히 르뤼에가 먼저 무릎을 꿇고 복종하기를 원하고 있으며, 르뤼에는 날뛰는 망아지 같은 신시우를 길들이려 하고 있다.

하지만 대뜸 머리를 쓰다듬는다니 완전 반칙이다.

‘암투’라는 카테고리 안에 넣어놓기엔 너무도 정공법이었으며, ‘상대를 유혹하고자 하는 기색을 내비치지 않는다’라는 암묵룰에도 위반되는 것이었다.

애초에 그가 했던 것처럼 신체 접촉이 공공연하게 용납된다면 더 빠르게 시우를 함락할 자신이 있었단 말이다.

“내무대신.”

“예, 폐하.”

그가 그렇게 나온다면 이쪽도 수위를 높여 매콤한 한 수로 응수하지 않을 수 없다.

한 방 맞았으면 두 방으로 돌려주는 것이 르뤼에 누켈라비의 신조다.

“오늘은 짐의 침대에서 자거라.”

“네?”

“짐의 옆에서 자라는 뜻이니라.”

“…네?”

동침을 요구하는, 그야말로 초강수.

남녀가 동침할 경우 성교를 할 확률이 매우 올라간다.

애초에 동침 자체가 성관계를 암시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지금쯤 신시우는 머릿속으로 자축 파티를 열며 겉으로는 환호성을 참고 있을 것이다.

“어차피 침대도 넓지 않으냐? 매일 딱딱한 침대에서 자지 말고 편히 쉬도록 하거라.”

허나 언뜻 천박한 교태로 밖에 들리지 않는 이 제안엔 실로 교묘한 함정이 있다.

바로 동침이 반드시 성교를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는 르뤼에가 먼저 백기를 든 것으로 여기고 발정 난 원숭이처럼 달려들 것이 분명하다.

거기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짐은 단단한 침상에서 눈을 감는 그대를 긍휼히 여겨 침소 한구석까지 내어주었다! 그러나 그대는 욕정에 눈이 멀어 옥체를 간음하려 드는 구나! 이 금수 같은 놈!’

함정에 걸려든 신시우는 단단히 약점을 잡히고 주도권을 르뤼에에게 완전히 넘어갈 것이다.

그렇게 되면 아주 당당하게, 욕망의 미친 신하에게조차 자비를 보이는 모습을 보이며 그를 완벽히 지배하는 것이 가능하다.

더군다나 침실로 장소를 옮기며 그의 방에 있는 흉악한 비밀병기까지 봉쇄할 수 있으니 지난밤의 굴욕을 완전히 타파하게 되는 것이다.

제갈공명도 울고 갈 희대의 책략임을 자신했다.

“음…. 좋습니다.”

멍청한 놈.

걸려들었다.

하지만 르뤼에의 예상과 달리 시우가 이토록 순순히 제안을 받아들인 것은 성적인 의도가 있어서가 아니었다.

애초에 르뤼에가 그쪽으로는 관심을 완전히 잃었다고 여겼다.

간만에 땀을 쭉 빼서인지 편안한 침대가 끌리기도 했고, 무엇보다 엄청 오랬동안 홀로 잠들었어야 할 르뤼에가 외로움을 타고 있겠거니 여긴 점이 가장 큰 요인이었다.

동상이몽 속 르뤼에는 만연의 미소를 숨겼다.

3.

르뤼에의 침대는 굉장히 넓다.

너비만 따져도 9평은 되니 말이다.

이 침대를 굴러다니며 보는 심해뷰는 어찌나 장관인지 온종일 침대 위를 뒹굴뒹굴거리며 바다를 구경한 적도 있을 정도다.

하지만 막상 작전에 돌입한 르뤼에는 봐도 봐도 질리지 않던 정경이 조금도 눈에 들어오지 않음을 깨달았다.

“후욱! 후욱! 아무것도 아니니라. 진정해야 하느니라….”

시우가 잠시 객실을 정리하러 자리를 비운 사이 홀로 침대에 남겨진 르뤼에.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

어리광마저 받아주는 관대한 여왕의 위신을 보이기로 한 이상, 그의 욕망을 해소해주기 전까지 시차를 보이는 것이 효과적이다.

따라서 오늘은 어떤 요구도 단호하게 거절하고 아무것도 해주지 않을 심산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뇌까려도 긴장으로 몸이 떨려온다.

정신 없던 초야 때보다 오히려 훨씬 긴장됐다.

“짐은 단단한 침상에서 눈을 감는 그대를 긍휼히 여겨 침소 한 구석까지 내어주었다. 그러나 그대는 욕정에 눈이 멀어 옥체를 간음하려 드는구나. 이 괘씸한 놈. 금수같은 놈.”

중얼중얼 미리 대사까지 연습해 보았지만 요란한 고동은 진정될 낌새가 보이지 않는 와중, 그가 들어오는 기척에 르뤼에는 흠칫 떨었다.

설마 그 무시무시한 도구를 들고 온 것은 아니겠지? 라는 생각에 고개를 들었지만 다행히 그건 아니다.

르뤼에에겐 너무 커서 땅바닥에 질질 끌리는 가운을 모델처럼 소화한 신시우가 터벅터벅  걸어왔다.

그때마다 르뤼에의 호흡도 가빠진다.

“웃차.”

실내화를 벗고 침대에 눕는 시우.

같은 침대에 누워있다고 해도 가로 길이만 3M가 넘기에 두 사람 사이엔 꽤 널찍한 거리감이 생겼다.

“좋은 경험 시켜주셔서 감사합니다.”

“오, 오냐.”

“항상 느끼지만 이 침실 정말 멋지네요.”

“오, 오냐….”

“안녕히 주무세요.”

“오, 오냐….”

그제야 르뤼에는 후회했다.

전략이 실패했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설마 이 정도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고작 3M 옆에 누운 것만으로  머리가 어지럽고 이성이 마비된다.

그의 맨몸을 보았을 때도 어질어질했는데 그보다 정도가 심하다.

어떤 짓을 당해도 저항하지 못할 것 같은 심신미약 상태가 되어버린 것이다.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리자 르뤼에는 이불을 턱 끝까지 끌어올린 채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이제 키스해 오려나?

아니면 ‘후후, 아닌 척하시지만 밝히시네요’ 같은 음란한 웃음을 흘리며 다가오려나?

또…. 그 난폭한 짓을 당해야 하는 건가?

근육질 몸에 깔려 계집아이처럼 울부짖어야 하는 건가?

마냥 싫지 않은 불안함이 연신 가슴을 울리기 시작했다.

“응…?”

르뤼에는 너무 꾹 감아서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있는 눈을 번쩍 떴다.

1분이 지나도, 10분이 지나도 아무런 일도 벌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침대에 앉아 옆을 보았다.

그녀가 열심히 삽질하는 동안 누켈라비 왕국의 내무대신 신시우는 드르렁드르렁 팔자 좋게 코를 골며 꿈나라에서 헤매고 있었다.

“이게 무슨….”

그렇게 잔잔한 황망의 호수 위로 평온한 밤이 돗단배처럼 흘러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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