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9
1.
“워….”
문을 열자 마주한 것은 뜨겁고 건조한 공기였다.
일상적인 생활에서는 마주할 수 없는 고온.
들이켠 숨을 따라 뜨거운 공기가 폐를 그윽하게 채우며 단숨에 두피에 땀이 솟았다.
그도 그렇겠지.
안쪽에 걸려있는 온도계가 가리키는 실내온도는 어느덧 90도에 육박했다.
좀 규모가 큰 찜질방에 하나씩 딸려있는 불가마 한증막과 비슷한 온도였다.
밖에서 봤던 것처럼 내부는 조금 어둑했다.
열이 빠져나가는 것을 막기 위해 뚫린 자그마한 창문으로 흘러들어오는 빛이 전부니 당연한 일이다.
또 꽤 오래 사용해서 그런 것인지 습도 조절용 돌 난로를 중심으로 목재가 그라데이션을 그리며 그을려 있었다.
그런데 의자 한 부분이 유독 그을리지 않고 하얗다.
고개를 갸우뚱하고 있자니 금방 의문이 해소되었고 시우는 웃음을 꾹 참아야 했다.
“놀라지 말고 앉거라.”
“…네.”
방금 르뤼에가 앉은 자리가 그녀의 지정석인 모양이다.
크게 그을리지 않고 남아있던 자국은 그녀의 엉덩이와 허벅지가 의자와 맞닿던 부분에 꼭 들어맞았으니 말이다.
시우는 별말 않고 르뤼에의 맞은 편에 앉았다.
그녀는 능숙하게 나무 양동이에서 물을 퍼올리더니 돌무덤 위에 휘적휘적 뿌렸다.
그러자 치이익 뽀얀 수증기가 일어나며 후끈한 증기가 안을 채웠다.
“사우나 좋아하시나 봐요?”
“짐은 원래 매일 사우나를 즐기는 도다. 그대가 온 뒤로는 간만이라 두 배로 좋구나. 뜨허어어….”
르뤼에는 아저씨 같은 한숨을 쉬며 기분 좋은 듯이 이상한 신음을 내었다.
몸이 노곤노곤 녹아내리면 인종국가를 불문하고 다 비슷한 소리를 내는 모양이다.
허벅지 양옆 의자를 잡고 가슴을 쭉 펴는 르뤼에.
아무리 구닥다리 비키니라지만 수영복은 수영복이다.
허리가 늘씬하고 유연하게 젖혀지며 자연스럽게 도드라진 가슴골은 흠칫 시우를 긴장하게 했다.
저 옷 같지도 않은 옷감 안에 어떤 야들야들한 속살이 있는지, 아마 평생 잊지 못할 테니 말이다.
뭐, 르뤼에 본인이 전혀 그럴 마음이 없어 보이니 어디까지나 만약의 이야기지만, 다시 관계를 요구할 생각은 없었다.
설령 요구 받는다고 해도 정중히 거절할 생각이다.
우선 르뤼에에게도 귀책사유가 있다고는 해도 억지에 가깝게 그녀를 취했던 것은 후회된다.
또 다른 연인들이 고생하고 있을 것이 뻔한데 혼자 팔자 좋게 시간을 보내는 것도 마땅치 않았다.
따라서 사우나에 들어온 시점부터 호흡에도 꽤 신경을 쓰고 있다.
사우나란 자연스럽게도 땀이 뻘뻘 나는 공간.
이렇게 비좁은 곳에서 섣불리 냄새를 맡았다간 어떤 사달이 날지 모른다.
이제껏 경험으로 미루어봤을 때 체취에 반응하는 것은 ‘후각’에 한정되는 듯하니 조금만 잘 조절해도 괜찮을 것이다.
“그나저나, 생각보다 잘 버티는구나. 3분도 버티지 못하고 뛰쳐나갈 줄 알았건만.”
르뤼에는 슬슬 흐르는 땀을 수건으로 톡톡 두들기며 말했다.
아닌 게 아니라 영체가 되면서 압도적으로 기능이 향상된 것인지 뜨겁다고 느끼는 와중에도 체력이 멀쩡히 버텨준다.
“네, 저희 고향에도 사우나도 많거든요. 황토 토굴이나 숯가마를 덥혀서 들어가곤 합니다.”
“호오, 그것 또한 묘미도다. 더 자세히 이야기해 보거라.”
“음…. 일반적으로는 공중 욕탕에 사우나가 함께 딸려있는데 안에 편의 시설과 간단한 취침 시설이 갖춰져 있습니다. 일반적으로는 건식 사우나보다는 습식 쪽이 더 많아요. 개미굴처럼 온도별로 방이 나뉘는데 보통 가장 뜨거운 방은 건식이죠.”
“취침시설까지?”
“안에서 잘 수 있다~ 정도지 여건이 썩 훌륭하진 않습니다. 객실이 따로 나뉜 것도 아니고 눈감을 장소만 제공하는 느낌이라서요.”
“과거 여관 같이 말이냐?”
“비슷합니다.”
뭔가 구구절절하지만, 이것이 르뤼에와 시우의 일상적인 대화다.
현세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겐 지극히 당연한 정보도 사실상 태어나 한번도 바다 밖을 자유롭게 돌아다닌 적 없는 르뤼에에게는 판타지 이야기일 테니 말이다.
물론 현세를 향한 왕성한 호기심으로 무장한 르뤼에는 한 가지 설명으로 만족하는 일이 없었다.
“남녀가 함께 즐기는 것이냐? 그렇다면 의복은? 남녀가 유별하다고 하지 않았더냐? 인구당 몇 개 정도씩 지어져 있느냐? 로마의 목욕탕처럼 사교의 공간도 겸하는 것이냐?”
한가지 주제로 대화가 시작되면 보통 십수 가지의 곁다리가 딸려오는데 시우는 한 번도 귀찮아하지 않고 성심성의껏 대답해 주었다.
처음엔 그녀의 환심을 사겠다는 속물적인 계산도 있었지만, 르뤼에의 리액션이 실로 만점이었기 때문이다.
또 갑갑하게 지내다가 바깥세상을 궁금해하는 그녀에게 묘한 연민도 느꼈고 말이다.
“그렇다면 안에서 음식도 판다는 말이냐?”
“네, 보통 마실 거리로는 음료수도 많이 먹지만 곡물가루를 갈아서 설탕과 함께 물에 탄 미숫가루와 전통 발효 음료인 식혜를 차게 식혀 마셔요.”
“호오, 짐도 사우나를 끝내면 차가운 우유를 먹곤 하니라. 짐의 쭉쭉빵빵한 몸매도 견습마녀 시절부터 열심히 우유를 마신 결과물이 아니겠느냐.”
“실로 현명하십니다.”
설명하다보면 여지없이 소소한 자랑을 해오는데 여기서 적당히 칭찬해주면 두 배로 좋아한다.
“먹을거리로는 무엇을 먹느냐?”
“일반적으로는 계란, 김밥 같은 것을 먹습니다. 아! 라면도 팔아요.”
“여기서도?! 한국에서 라면은 팔지 않는 곳이 없구나. 그렇게 별미라면 짐도 한 번 먹어보고 싶도다.”
그렇게 한참을 시우와 수다 떨던 르뤼에.
두 사람의 몸은 어느덧 땀으로 흠뻑 젖은 수준이 되어 있었다.
온도가 온도이다 보니 순식간에 증발되는 와중에도 르뤼에의 하얀 살갗이 오일을 듬뿍 바른 것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남자로 태어난 이상 실로 침 넘어가는 장면이 아닐 수 없다.
“오! 딱 적당히 좋게 되었도다.”
시우가 필사적으로 시선관리를 하는 사이.
르뤼에는 잠깐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바구니에서 자작나무를 적당히 뭉쳐 만든 비스타를 꺼냈다.
“자, 이리 와보거라. 짐이 친히 그대에게 사용법을 알려주겠노라.”
“황송합니다.”
나뭇가지를 들고 뽈뽈뽈 시우의 옆에 붙은 르뤼에.
-찰싹찰싹
시원하게 피부를 때리는 자작나무.
특유의 향이 기분 좋게 콧끝을 간질이는 사이.
“…….”
시우의 맨살을 토닥토닥 잎사귀로 두드려주던 그녀가 이상하리만치 조용해졌다.
어딘가 반쯤 넋이 나간 것처럼 같은 동작을 반복할 뿐이다.
거기엔 이유가 있었다.
시우를 유혹해 보이겠다는 다짐을 했던 르뤼에.
언제나 관심사가 바뀌는 그녀답게 막상 함께 사우나에 들자 소기 목적도 잊어버린 채 그와 신나게 수다를 떨고 있을 따름이었다.
하지만 그에게 마사지를 해주기 위해 옆에 붙는 순간, 숨이 턱 막힐 정도의 열기를 느꼈다.
사우나의 열기가 아니다.
르뤼에의 가슴에서 불쑥 솟아오른 그보다 더 뜨거운 열기다.
그 원인을 짚어보자면 한 가지 생각 때문이었다.
바로 ‘원래 신시우의 몸이 이렇게나 좋았었나?’라는 생각.
영체답게 미형이면서도 단련의 흔적이 느껴지는 몸.
영화에서 보는 것처럼 우락부락한 몸이 아니라 잔 근육이 빼곡하고 실전성이 느껴지는 근육질의 신체.
전신이 부드러운 여성의 것과는 완연하게 다른 사내의 몸이다.
또한 그 위로 구슬처럼 흐르는 땀과 거기서 흐르는 체취는 르뤼에에게 한가지 기억을 떠올리게끔 하고 있었다.
그의 몸은 피부도 훨씬 두껍고, 어디를 찔러도 돌처럼 단단하며, 도저히 뿌리칠 수 없는 완력을 낸다는 것을.
등과 어깨를 위주로 토닥토닥 두들겨주던 르뤼에의 시선이 슬그머니 하반신을 향한다.
사실 저 팬티 같은 수영복만 벗겨 낸다면 그는 알몸이나 다름없다.
그 실감이 르뤼에의 머리를 핑핑 어지럽게 만들고 있었다.
잘 갈라진 복근과 르뤼에가 발버둥치지 못하게 고정하던 기둥 같은 허벅지, 그리고 수영복 위로도 존재감을 드러내는 그의 거대한 물건.
본래는 시우를 유혹할 생각이었던 르뤼에지만 예상외의 박력을 자랑하는 그의 몸을 넋이 나간 채 바라보고 말았다.
“폐하도 해드릴까요?”
다행히도 홀린 듯 그의 몸에 손을 뻗기 직전.
시우가 먼저 말을 걸어와 정신을 잡은 르뤼에.
“유, 윤허한다.”
르뤼에는 황급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제 추태에 얼굴을 붉혔다.
이게 무슨 짓이란 말인가?
그를 해롱해롱하게 하는 것에 주력해도 모자랄 판국에 요상한 생각이나 하고 있다니.
이래서야 마치 그에게 안겨서 아양 떨고 싶어하는 한심한 여인 같지 않은가?
르뤼에는 간신히 동요를 숨기며 시우에게 비스타를 건넸다.
일단 그에게 등을 보이고 돌아선다.
지금 자신이 어떤 한심한 표정을 하고 있을지 염려되었기 때문이다.
-찰싹찰싹
“읏…!”
그리고 까칠 따끔하게 피부 위를 두드리는 자작나무.
르뤼에는 그와 있었던 또 다른 한 가지 일을 떠올리게 되었다.
그가 깃털로 전신 곳곳을 간질였던 것처럼, 말초신경이 잔뜩 활성화된 살갗이 살살 긁어지는 느낌.
본디 시원하고 상쾌하게 느껴져야 했을 두드림이 지금은 어째서인지 아랫배를 찌릿찌릿하게 만든다.
처음에는 등을 위주로 두드리던 잎사귀가 허리로 내려오고 르뤼에의 어깨는 단단히 굳었다.
설마 이대로 엉덩이까지 두드릴 생각인 걸까?
그다음에는 전신이 노곤노곤해진 르뤼에에게 더한 짓도 해올지도 모른다.
그렇게 된다면 과연 자신은 거절할 수 있을 것인가?
르뤼에는 핑 머리를 울리는 현기증을 느꼈다.
사우나를 본격적으로 만끽하기 위해 자율방어를 해제하고 있던 것.
지나친 흥분과 기이할 정도로 높게 치솟은 심박, 그리고 대화를 나누는 통에 예상보다 길어졌던 찜질 시간이 시너지를 낸 것이다.
이제 막 이성에 눈을 뜨게 된 르뤼에에게는 너무도 자극적인 이벤트의 연속이었다.
“어으어으으….”
르뤼에는 어지러움을 느끼며 털썩 쓰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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