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8
1.
시우와의 문제가 단순히 남녀 간의 감정 문제가 아닌 모종의 승부로 들어서는 순간, 르뤼에는 투지를 다졌다.
진정한 군주란 어떠한 투쟁에서도 물러서지 않으며, 또한 패배하지 않는 법.
전력으로 그를 유혹해 열렬한 구애를 받아낼 수밖에 없지 않은가?
하지만 여기엔 규칙이 있다.
아무렇지 않은 척 결투를 걸어온 시우를 보고 르뤼에에게도 자연히 강제된 일종의 암묵룰이었다.
그것은 절대 먼저 티를 내지 않을 것.
여기서 르뤼에가 갑자기 알몸으로 시우에게 들이댄다거나 끈적끈적한 목소리로 교태를 부린다면 그것은 ‘소녀가 졌사옵니다. 천첩(賤妾)을 날름 잡아 잡수시와요’ 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어디까지나 알 듯 말 듯한 유혹, 소위 여우 짓을 통해 시우 쪽에서 덮쳐오게 해야 하는 것이다.
전에는 경험이 없어 무작정 당했지만 이것이 두 번째인 만큼 쉽사리 당해주진 않을 것이다.
또한 감히 내무대신 주제에 괘씸한 수작을 부린 여죄를 물어 눈물 콧물을 흘리며 한 번만 안게 해달라고 애원할 때까지 속을 노릇노릇 태워줄 것이다.
남정네를 홀딱 빠지게 하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무엇인가?
그것은 젖빛보다 뽀얗고 진주보다 매끄러운 살결을 보이는 것이다.
실제로 시우 앞에서 가슴을 보였을 때 그의 반응은 극적이었다.
‘그것이야말로 천박한 추파가 아닌가?’ 혹자는 물을 수 있겠다.
허나 그것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무지몽매한 자의 우문이다.
똑같이 속살을 보인다고 해도 어떤 장소, 어떤 상황이냐에 따라 전혀 느낌이 달라지는 것이다.
가령 맨살을 보이는 장소가 사우나라면?
“사우나요?”
“그렇도다. 벌써 잊었느냐? 아쿨라의 욕실에는 훌륭한 건식 사우나도 딸려있다는 것을 보여 주었느니라.”
“어, 음….”
예상대로 난처해 보이는 그의 표정에 르뤼에는 만연의 미소를 숨겼다.
당혹스럽겠지.
르뤼에의 매력에 홀딱 빠진 주제에 주도권을 쥐려 드는 신시우.
그는 뼈를 깎는 인내심으로 르뤼에와 내외하며 버티지 못한 그녀가 먼저 부탁을 해오는 걸 기다리고 있을 터다.
하지만 여기서 아무것도 모르는 척 동반 혼성 사우나 제안.
그에겐 거절한 명분이 없으면서도 한계에 치달은 인내심에도 막대한 과부하를 거는 행위겠지.
예상대로 그는 쓴웃음을 지으며 물어왔다.
“저는 상관없습니다만…. 폐하는 괜찮으신가요?”
“무엇이 말이냐? 건식 사우나의 본 고장인 필란드에선 친한 남녀 간 사우나를 즐기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니라.”
“정말요?”
“새삼 알몸을 보이는 것이 부끄럽기라도 하다는 말이더냐?”
“…네, 뭐, 조금 남사스럽긴 합니다.”
실은 누구보다 눈이 번쩍 뜨였을 거면서 진실을 알지 못했다면 속아 넘어갈 정도의 어수룩한 연기를 선보이는 신시우.
지금 하는 행동을 보아서는 딱히 내키지는 않지만 르뤼에에게 어울려준다는 식으로 보인다.
“하긴, 그대는 동양인이고 동양인들은 유교 문화를 전통으로 삼는다지? 남녀칠세부동석인가 뭔가 하는.”
“유교도 아시나요?”
“견습마녀 시절 예기(禮記)를 읽었던 적이 있느니라. 허나 로마에 가면 로마의 법을 따라야 하지 않겠느냐? 아쿨라에 왔다면 누켈라비 왕국의 문화를 따라야 하니라.”
여전히 떨떠름해하는 시우.
“아무리 그래도…. 수영복 같은 거라도 없나요? 그걸 입는 편이 서로 편할 듯싶습니다.”
심지어 한 발 빼기까지 한다.
과연 이 몸의 알몸을 보고 자제하기는 힘들겠다 이건가?
르뤼에는 피식 웃으며 관대히 윤허했다.
비키니 정도의 천쪼가리가 이 몸의 매력을 전부 가리지 못할 것이라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좋다. 짐의 것은 사우나 안에 있으니 그대는 갑판장에게 가서 남성용 수영복을 받아오도록 하여라.”
“지금요?”
“그래, 지금이니라.”
마지막까지 다행이라는 듯 안도의 숨을 쉬는 그의 뒤통수를 지켜보던 르뤼에.
시우가 밖에 나서자마자 르뤼에는 즉각 객실 수색을 시작했다.
적어도 수영복이라도 입게 해달라는 속 보이는 부탁을 들어준 것도 계략의 하나였다.
상대의 정보를 수집하는 정보전 역시 전쟁에서 중대한 일환.
마치 능청스럽게 적의 주의를 돌리는 007 요원처럼 시우를 따돌린 것이다.
르뤼에는 곧장 그의 몇 안 되는 소지품을 뒤적였다.
우선 르뤼에가 지급한 담배와 라이터, 재떨이, 만년필, 잉크, 종이, 도서관에서 가져온 몇 권의 마법서, 여벌의 옷과 속옷.
사실 거의 빈손으로 아쿨라에 잡혀 온 그에게 달리 소지품이 있을 리 없지만, 르뤼에는 영화 속 주인공에 빙의해 치밀한 작전을 수행하는 것만으로 즐거움과 흥분을 느꼈다.
“빠바 빠밤, 빠바밤 빠라바라밤….”
제임스 본드 테마 음악의 멜로디를 흥얼거리며 그의 베개에 놓인 머리카락 한 올을 들어 올리는 르뤼에.
“흐음, 수상한 머리카락이도다. 응…?”
연이어 선반과 붙박이 옷장을 뒤적이던 르뤼에는 영 생뚱맞은 물건을 발견했다.
어쩐지 공구 상자처럼 가방이 옷장 안에서 튀어나온 것이다.
“이런 건 준 기억이 없거늘….”
시우는 뭔가 필요한 물품을 가져갈 때면 항상 허가를 받았다.
창고지기라면 어렵지 않게 빼돌릴 수 있음에도 굳이 굳이 허락을 받아가는 행실은 르뤼에가 좋게 평가하던 부분 중 하나였다.
“이것은…! 횡령 및 배임의 증거이도다!”
레이저 포인트의 불빛만 봐도 지구 끝까지 쫓아가는 새끼고양이 같은 르뤼에.
예상치 못한 또 다른 흥밋거리에 곧장 깊은 관심을 보이며 눈빛을 빛낸다.
동시에 도대체 무슨 물건이길래 그가 허가도 받지 않고 숨겨두었는지 깊은 관심이 갔다.
-딸깍
어렵지 않게 잠금장치를 풀고 그 내용물을 확인하는 르뤼에.
“응?”
포르노라는 문명의 이기를 통해 학습이 완료된 르뤼에는 약 1분의 숙고 끝에 13종 성인용품 세트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분명 포르노에 등장하는 소품과 같은 부류의 물건이었다.
그럼에도 즉시 그 내용품을 알아보지 못한 것은, 르뤼에가 보기에 그 형태나 종류가 고문 기구라고 해도 믿을 만큼 매니악했기 때문이다.
-턱!
“…….”
르뤼에는 떨리는 눈으로 즉시 가방을 닫고 놀란 가슴을 진정시켰다.
“여, 역시 짐의 예상이 맞았도다….”
지금까지 이런 물건을 본 적이 없으니 아마 이번에 새로 획득한 노획품에서 빼돌린 것.
이런 흉악한 물품을 그가 굳이 방에 보관하고 있던 이유는 뻔하다.
신시우는 유들유들하고 일견 얼빠져 보이는 모습과 달리 맹수의 야성을 간직한 남자.
만약 오늘밤 르뤼에가 아쉬운 소리를 하며 부탁해 왔다면 즉시 이 무서운 기구로 유린하려 들었을 것이다.
먼저 고개를 숙인 쪽에선 암묵적인 양보를 해야 한다는 외교적 테크닉마저 자유자재로 구사하며 자신의 욕망을 채우려 드는 그의 모습에 르뤼에는 오싹 오한이 돋는 것을 느꼈다.
2.
르뤼에에게 일전에 소개받은 적은 있지만 욕실을 직접 와 보는 것은 이것으로 두 번째였다.
아쿨라 욕실에 있는 사우나는 전통 건식 사우나였다.
사시나무 장작을 때운 열기로 더워지는 실내 온도는 무려 80도.
그런 고온인 만큼 화상을 방지하기 위해 사우나 바닥과 의자는 열전도율이 낮은 나무 재질이다.
잠수함 내부의 사우나인 만큼 넓이는 그닥 넓지 않았다.
4명이 들어앉으면 가득 차는 사우나 한가운데는 달궈진 돌이 석탄 난로처럼 쌓여있는데 이 위에 물을 뿌려가며 내부 습도를 조절할 수 있는 형식이었다.
“그나저나 무슨 일이래….”
아닌 밤중의 홍두깨라고 갑작스러운 르뤼에의 제안에 살짝 당황한 시우.
잠깐동안 무슨 꿍꿍이가 있는가 싶었다.
예를 들자면 자연스럽게 노출도 높은 복장으로 함께하면서 은근슬쩍 유혹하려 드는 것은 아닐까? 하는 망상이라든지.
“주책이다, 주책이야.”
이내 의심을 털어냈다.
요새 좀 잘나간다고 도끼 병이라도 걸린 모양이다.
르뤼에는 지난밤 이후 관계에 대해 일절 언급이 없었으며 신경 쓰는 기색도 보이지 않았다.
예상대로이긴 했다.
첫경험을 난폭하게 좋지 못한 기억으로 마무리한 이상 그녀에게 성교는 불유쾌한 경험이었을 것이며, 시우는 그에 대해 약간의 미안함마저 지니고 있었다.
그뿐 아니라 르뤼에는 워낙에 관심사가 휙휙 바뀌는 타입이 아니던가?
이제 와서 르뤼에가 관계를 원하거나 한다니….
만에 하나 그랬더라도 당당하게 수청을 들라고 명령을 하면 했지 이런 완곡한 제안 따위는 하지 않을 것이다.
“여왕의 행차이다!”
어쨌거나 뜬금없는 제안을 받고 환복, 미리 사우나를 훑어보고 있자니 마찬가지로 옷을 갈아입은 르뤼에가 들어왔다.
잘록한 허리와 의외로 볼륨감 있는 몸매.
그것을 여실히 드러내는 짙은 녹색 비키니 차림이었다.
객관적인 맵시 자체만 말하자면 꽤 구닥다리 같은 비키니였다.
한눈에 봐도 꽤 오래된 물건임을 알아차릴 수 있달까.
하지만 패션의 완성은 외모와 몸매라고 르뤼에는 매력적으로 비키니를 소화하고 있었다.
“그건 뭔가요?”
시우는 그녀의 품에 있는 나무 양동이와 안에 한가득 담긴 파릇파릇한 잎 다발을 보며 물었다.
저렇게 들고 있는 모양새가 꼭 화분 같다.
“이건 바스타(Vasta)다. 자작나무인데 사우나 중에 이렇게 이렇게 몸을 두드리는 것이니라.”
찰싹 찰싹 자작나무 가지 묶음으로 제 몸을 두들기며 친히 시범을 보이는 르뤼에.
추가로 설명을 듣자하니 고온 속에서 흐물흐물해진 나뭇잎에서 좋은 성분과 향이 묻어나오며 한결 상쾌한 기분이 든다고 한다.
“들어오거라. 이야기는 안에서도 할 수 있으니.”
바구니와 물이 든 양동이를 챙겨 든 시우는 르뤼에를 따라 사우나 안으로 들어섰다.
그렇게 두 사람의 혼성 사우나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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